거짓 선지자 발람의 교훈
노승수 목사
민수기 22-25장의 발람은 참 독특하다. 겉으론 매우 거룩해 보인다. "이르시는 대로" 답하겠다고 한다(22:8). 그러나 발락이 사람을 더 보내 왔을 때,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본다(22:19). 이미 답변을 듣고도 더할 것을 찾는다.
아마 이때 이미 발람은 본심이 정해졌던 듯하다. "함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라기보다 발람의 의중에 대한 허용에 가깝다. 어디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냐면 여호와의 사자가 "네 길이 사악하므로"라고 말하는 데서 확인 할 수 있다(22:32). 게다가 발람은 눈이 어두워 당나귀도 보는 사자를 보지 못한다. 나귀가 보다는 동사가 3번이나 반복된다(23, 25, 27). 나귀가 말하는 것조차 낯설지 않으며(28) 전에 없던 나귀의 습관도 알아채지 못한다(30). 나귀는 3번 돌이켜 피하였으나 채찍질하며(25) 지팡이로 때리며(27) 죽이려는 의도를 가졌다(29). 그것도 전에 없던 한 번의 거스름 때문에 그의 성정이 교만과 분노로 어두웠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신약은 이러한 발람의 범죄를 돈에 대한 욕심과 관련한 거짓 예언으로 규정한다. 그 특징은 분명하게 계시된 뜻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뜻을 확인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런 그의 특징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2:15-16) 여호와의 사자가 막아서는 것을 당나귀는 보나 발람은 보지 못하며 채찍질에 지팡이로 때리며 살의를 드러내는데 이 모든 것이 불의의 삯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는 발람의 이런 행동에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발람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신령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원래 신령함 속에 교만이 깃드는 법이다. 가난하고 배운 거 없는 자가 교만해지기보다 배운 것 많은 자가 교만해지기 쉽고 체험이 적은 자보다 체험이 많은 자가 교만해지기 쉽다.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점술을 행하던(24:1), 바알의 제사장이다(22:41). 유다는 3가지 유형을 지적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1:11) 첫째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길, 둘째, 발람과 같은 삯군의 길, 셋째, 고라 같은 패역의 길이다. 이 셋은 원래 하나에서 나온다. 당나귀를 향한 살의는 가인의 길을 보여주며 돈에 눈이 멀어 여호와의 사자를 막으심을 보지 못하며,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고라 당처럼 아론과 그 제사장 직분에 도전하여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곧잘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22:34). 그러나 그는 바알 선지자다(22:41). 그는 이스라엘을 음행에 빠지게 한다(민 25장). 민수기 31:16에 의하면 이것이 명백하게 발람의 꾀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호와를 부르며 여호와께 들으며 심지어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점술을 행할 필요가 없었으나(24:1-2) 그가 부르는 신은 바알이며 음란히 섬긴다. 이 교묘함이란 오늘 교회가 배도하여 음녀가 든 배도의 포도주 잔에 취한 것과 흡사하다. 그의 이런 거짓 선지자로서의 모습을 요한 사도는 계시록을 통해서 정죄한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사도 요한의 지적처럼, 바알 신앙과 그 신자는 여호와 신앙과 그 신자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교회 안에 존재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종종 바알 숭배자에게도 일반 은총의 빛을 특별하게 비추신다는 것이다.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에도 재차 삼차 묻는 것은 욕망으로 경도되었음을 보여주며 들끓는 욕망은 분노의 매질을 부르며 눈을 어둡게 하며 짐승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22장에 여호와의 사자가가 3번을 막아섬(23, 25, 27, 결정적으로 28절)으로 거짓 선지자의 교만과 물욕과 패역에서 비롯된 저주의 시도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심으로 3번의 축복으로 바뀐다(24:10). 22-15장의 발람의 기사는 발람의 축복은 발람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사자의 축복에서 기원하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 안의 거짓 선지자들도 이렇게 활용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여호와의 사자와 왕벌을 보내시어 그들의 저주를 막으시고 축복으로 변하게 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깨어 있지 않으면 이들의 미혹을 받아 음행에 빠지고 물욕을 신으로 섬김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참 언약의 백성은 보호를 받을 것이며 배도의 백성은 미혹을 받을 것이다. 그 미혹이 우리 욕망을 드러낼 것이다. 발람의 경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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