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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이란 무엇인가?


노승수 목사(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졸업)


20세기는 해석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해석은 우리 생활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누군가 삶에 고통을 받고 점술가를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해석을 청하는 것이다. 불교에 윤회 역시 자신의 삶에 일어난 여러 가지 고통들과 짐들에 대해서 해석을 통해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시도이다. 과학 역시 일종의 해석이다. 자연이나 물리 현상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해석이 일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사가 우리 몸의 사진을 찍고 그것을 판독하는 것도 해석이다. 외국어를 읽고 그것을 번역하는 것만이 해석이 아니라 해석은 이처럼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학문은 단 한가지의 해석을 찾았다. 그것을 흔히 모더니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치되는 해석을 찾지 못하고 삶의 다양한 문제와 문화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 소박하게 말해서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해석은 이처럼 우리의 삶과 밀접하다.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 밖의 무언가에 대해서 혹은 우리 의식에서 일어난 무언가에 대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해석은 객관적 사실과 우리의 인식이라는 두 가지 카테고리 속에서 일어난다. 객관적 사태를 우리의 인식의 구조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바로 해석인 것이다. 그래서 해석은 어떤 점에서 우리 삶의 보다 폭넓은 전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이 해석의 차이 때문이다. 


관찰의 해석 의존성


그런데, 보통 해석을 하려면, 객관적이고 주의 깊은 관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하는 관찰은 ‘어느 정도의 해석을 함의’하고 있다. 이것을 흔히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옮기면 우리의 관찰이 이미 우리가 하는 어떤 종류의 해석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 기간 동안 천동설은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해석의 틀이었다. 그 시기의 천문과학자들이 관찰을 게을리 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의 관찰이 그들이 가진 이론 다시 말해서 그들의 해석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이다. 천동설의 붕괴는 점증하는 증거들과 새로운 관찰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지동설이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붕괴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긴 시간동안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기까진 시간이 필요로 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관찰이 완전히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문화나 환경을 떠난 해석을 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는 ‘선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해석에서 ‘선 이해’는 필요불가결하다. 그러나 이 ‘선 이해’가 ‘성경이라는 배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갖는 문화’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런 종류의 해석을 흔히 포스터모더니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의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독자가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 느낀다면 그것으로 유의미하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사실상, 그가 성경을 가졌든지 불경을 가졌든지 코란을 가졌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기준이라는 것이 자신 자신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출발점, 교리


앞서 언급했듯이, 해석은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주관한다. 특히나 성경의 해석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이해가 불가피하다면, 우리의 선 이해는 성경과 그 해석의 역사인 교리이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성경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선행연구’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과학도가 자신은 이전의 모든 연구를 다 무시하고 혼자 독창적인 새로운 연구를 하겠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마 그 친구의 철없음과 치기어림에 실소를 자아낼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해석이란 이전의 해석들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해석의 발전이란 곧 교리의 발전이다. 교리는 다르게 말해서 ‘성경 해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해석에 있어서 우리가 곧잘 오해하는 것 중 한 가지는 ‘오직 성경’이란 표현이다. 이 말은 성경만 있으면 우리의 해석은 온전하다는 의미로 이해서는 안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치기어린 과학도의 모습과 흡사하다. ‘오직 성경’이란 성경만 있으면 된다가 아니라 ‘성경이 해석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라는 뜻이다. 그러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일반 학문에서처럼 ‘선행 연구’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교리’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이 진보하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경험이라는 ‘선이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권위’에 의존하려면, 응당 우리의 출발점은 ‘해석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교리이어야 한다. 


해석의 종착역, 삶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 곧 해석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이단은 교리 곧 성경 해석에서만 문제를 분출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이단인 ㅅㅊㅈ를 생각해보자,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기성 교인들에게 거짓을 일삼는다. ‘산 옮기기 전략’은 교회 안에 들어와 거짓 교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천역덕스런 이런 행동들은 모두 그들의 교리 곧 ‘성경 해석’으로부터 나온다. 


대체로 이단들은 교리 외에도 삶의 특징들을 보인다. 예컨대, 비장함, 과도한 헌신, 기성 교회에 대한 불신, 정서적 결핍과 그에 따른 착취와 지배구조 등의 삶의 특징들을 드러낸다. 점쟁이를 찾아가서 삶에 대한 문제를 방액하는 신앙은 그들의 삶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드러내고 그 해석은 곧바로 그들의 삶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해석은 단순히 성경이나 기타 경전 자체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우리 ‘삶의 양식(Mode)’이 된다. 


그러니 ‘성경에 내 경험과 문화를 투영하는 해석’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역사’를 통해서 성경이 ‘우리 삶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해석되지 않은 삶을 혼란을 가중시키고 우리를 낙심케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의 원칙을 ‘Regular fidei’라고 한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기대할 수 없고 바른 해석이 아니고서는 삶이란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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