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성격
A. W. 핑크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이 엄숙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를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얻어야만 하며, 이것이 결핍된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회개의 성격에 관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한다. 이 주제에 관한 서로 모순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당황한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실망하기보다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도록 고무해 주어야 한다. 이 주제에 관한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회개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해 지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듣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사실 크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를 듣고도 무감동한 상태에 있으며 저주받은 자의 고통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아무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깊이 자극받고 놀람으로 가득차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나 여전히 지옥에 갈 자들이 많이 있다.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듣고 완고한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도 그 다음 날이 되면 이 말씀의 효과가 사라지는 것을 나는 종종 보아왔다. 벨릭스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떨었다”(행 24:25).
‘거의 설득되어지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아그립바(행 26:28)가 그 좋은 예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의 메시지에 완전히 동의하고 복음을 찬미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말씀을 기쁘게 받으나 결국에는 돌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청중이 될 수도 있다(마 13:20,21). 그럴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악행을 의식하고 그것을 인정할지도 모른다. 바로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 득죄하였다”(출 10:16)라고 인정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에 자신을 굴복시키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설득되어지는’ 그 이상은 결코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사람들은 깊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고 집에 가서 자신의 생활을 개혁시키리라고 결심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의 무더기로 다시 돌아온다. 이 경우의 엄숙한 본보기는 아합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몹시 탐을 내어 그것을 얻기로 작정하고 그를 죽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종이 그를 만나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말하자 “그는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행보도 천천히 하였다”(왕하 21:27-29).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장에 보면 그는 다시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독자여, 당신은 하나님 앞에 한동안은 자신을 겸손히 낮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탐욕의 노예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죄짓기는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한다면 많은 교인들의 회개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가올 진노를 두려워한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와 공포라고 혼동하지 말라.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제단’이나 ‘참회좌석’에 나아가 자신의 죄악을 길게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피조물이었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와 불꽃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전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독자여,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당신이 꿈꾸었던 회개는 단지 속임수, 즉 꾸미기만 하는 그림물감일 뿐 금으로 변형시키는 은혜는 아닌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어떤 죄인은 자신의 행악의 길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아서서 자신이 끼쳤던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멀리까지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멸망해버리고 만다. 이 경우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의 돈을 돌려주고 나서(마 27:3-5), 그 사악한 자들의 면전에서 물러나왔다. 그는 구원되었는가? 아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목매어 자살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각자를 떨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살피게 하는 일인가!
헬라어 메타노에오(metanoeo)는 ‘회개’를 표현하는 말로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단어인데, 그 말은 다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21:29절은 그 정의를 예증하고 확증해 준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견해의 단순한 변화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변화된 마음이며 그 마음은 행동을 유발한다. 이제 이 변화된 마음은 어떤 지적인 과정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해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게다가 그 양심은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갈아엎으신다. 이것의 결과로 자아에 대한 심판이나 정죄가 있으며 자아를 배척하고 하나님과 한 편이 된다. 타락한 인간은 지금 심판을 받지는 않지만 이미 선고를 받은 범죄자이다(요 3:1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것이 바로 우리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장이다. 탄원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어떤 변명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당면한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에 굴복할 것인가, 즉 그의 마음을 다해 따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를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그것은 이미 잃어버린바 되고 ‘경건치 아니하고’, ‘아무 힘도 없으며’,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인 자로서의 우리에게 온다. 복음이 맨 처음 죄인에게 닿게 되면, 그는 자신이 최고의 통치자이며 최상의 선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변절된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또 그를 영화롭게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만족을 찾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행 20:21). 하나님을 향한 참된 회개는 이 두 특성 아래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성과 감성의 이런 불만족을 제거한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면, 전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나는 충실하지 못하고 반역적인 피조물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높은 권위와 지극히 의로운 법을 멸시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나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나의 유일한 주님으로서 섬기고 순종하기를 바라고 결심합니다. 나는 당신께 나 자신을 복종시키고 당신 뜻에 따르렵니다.”
참으로 회개한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불쌍하고 버림받은 피조물이었고 나를 만족시키거나 참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은 헛된 세상에 매달렸으나 그것은 내 참된 필요를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때로 나를 기쁘게 하기도 하고 실망시키기도 했으나 결코 만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슬픔으로 내 맘을 찌를 뿐이었습니다. 나는 생명수의 원천을 버리고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부서진 물통으로 돌아섰습니다. 나는 내 이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몹시 슬퍼합니다. 나는 이 미친 짓 때문에 한없이 나 자신을 질책합니다. 지금 나는 나의 상급이 되시며 영원한 기업이 되시는 당신께 나아갑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는데 이것은 죄책을 느끼며 정죄 받은 죄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그 은혜는 죄인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에 진실로 굴복할 때에야 환영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로 회개와 믿음이 둘 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거부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2)라고 책망하셨다. 회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공정함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와 자비를 마음으로 기쁘게 받는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새 생활을 시작하고 나의 길을 수정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 힘도 없다”고 선포하실 때 하나님의 옳으심을 승인하는 것이다. 즉 내 자신 안에는, 그리고 내 처지는 무력하며 내가 세상을 창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좀 더 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믿어질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리스도께 참되이 돌아서서 나의 조력자가 아니라 구원자로서 주님을 환영하게 될 것이다.
회개는 죄의 확신, 또는 앞으로 올 진노에 대한 공포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37,38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베드로의 마음을 찌르는 설교에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어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음에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부르짖을 때, 베드로는 “회개하라”고 말하였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런 요구는 아무 필요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한 권고였다. 그들의 “마음이 찔린 것”은 율법적인 공포였고 반면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으로 자아에 대해 심판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선함이란 의미에서 죄를 슬퍼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37,38을 열심히 기도하며 주의 깊게 숙고해 봄으로써,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조 가운데에 나타나 있는 잘못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베드로의 청중은 자신의 두려운 범죄로 인하여 크게 놀랐고 영원한 진노를 두려워했으며, 마치 칼이 심장을 꿰뚫은 것처럼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번민 속에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부르짖었다. 사도는 “믿기만 하시오. 당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초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의 치명적인 타성을 두둔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오늘날의 ‘쓸모없는 많은 영혼의 의사들’의 충고와 같이 ‘당신들의 죄가 다 말소되어짐을 믿으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이와는 크게 달라,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받을 책망은 다 받으시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진리를 인정하시오. 속이려 하지 말고 당신의 두려운 사악함을 고백하시오. 당신의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겸손케 되도록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의 중보와 공로를 믿는다는 그 증거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그것이 당신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외적인 표시가 될 것이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경우에서 그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눈을 열어 하나님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법의 아름다움, 죄의 무한한 악, 무한한 속죄의 필요성,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함을 본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최고의 충만하신 선이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죄인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모두 회개하고 자신의 최고의 주이시며 최상의 선인 하나님께 돌아오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며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돌아온다. 좀 더 분명한 빛 속에서는 하나님의 품성과 율법의 영광이 보이고 마찬가지로 죄의 무한한 악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무한한 속죄와 완전한 의에 대한 필요성도 보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분리될 수 없게 관련되어지는 것이다. 정말 그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속에 함축되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 율법의 영광 그리고 속죄의 영광에 비추어 회개하는 사람은 그의 회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비의 자유로운 은혜만을 바랄 것이다. 또 하나님과 율법과 속죄의 영광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비의 자유로운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불평하였던 자신의 모든 책망을 받아들이고 율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타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심판과 정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돌아서는 자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행 3:19)라는 말씀과 똑같은(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믿음은 그 자체의 본질상 회개를 함축하고 그들의 회개는 그 본질상 믿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은 믿음만을, 또 때로는 회개만을, 또 때로는 둘 다를 함께 언급한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의 견지에서 회개와 믿음은 각각 속에 상호적으로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조셉 벨라미, 1750)
회개에 관하여 좀 더 완전하고 외형상의 정의를 내린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초자연적이고 내적인 계시인데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준다. 이 깨달음은 나 자신을 혐오하고 저주하도록 하며, 죄에 대하여 깊은 슬픔과 죄에 대한 거룩한 공포와 증오를 가져오며 죄로부터 돌아서거나 죄를 버리도록 한다. 그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높고 의로운 요구를 발견하고 일생동안 그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실패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함과 선함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도전적인 불순종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치하고 지배할 권리를 가지고 계시며 나는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거절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함과 친절함으로 대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하나님께 사악하게 보답하였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내와 내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순종을 하는 대신에 계속 자기 고집대로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의 인내를 오용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복음적인 회개는 죄의 지나친 죄성을 마음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점에서 내가 꾸중 받을 만한 주요한 일, 즉 하나님의 정당한 몫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데 비참하게 실패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 하나님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알려 주실 때에,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존귀한 탁월성을 깨달을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나는 하나님이 정당히 받으실 것, 즉 내 마음의 충성과 내 영혼의 무제한적 사랑, 그리고 내 전 존재를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을 지각하기 시작한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나의 선만을 찾으셨다는 것과 나에게 존재를 주신 이께서 끊임없이 피조물로서 나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 보답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즐거운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풍부한 자비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나의 가장 악한 적보다도 더 야비하게 하나님을 대접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분노와 공포에 압도당한다.
아주 정확한 정의보다 때로는 실례를 드는 일이 훨씬 좋다. 신약성경은, 그 용어 자체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조차도 꽤 많은 수의 구체적 실례를 제공한다. ‘세리’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했을 때, 우리는 회개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는 죄가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았던 두려운 도덕적 거리감을 깨달았다. 그는 거룩하신 분을 바라볼 수조차 없는 자신의 극심한 무가치함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용서 없이 자신을 심판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비에 있음을 깨달았다. 십자가상의 도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냉담한 동료에게 말하였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눅 23:40,41). 여기에는 자신의 죄를 가벼이 보는 태도는 없고 자신의 죄인 됨과 벌을 받기에 마땅함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본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참회의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는 자신의 ‘실패’, ‘실수’ 혹은 ‘약점’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그 대신에 “내 죄과”(1절), “나의 죄”(2절), “악”(4절), 즉 그의 “피 흘린 죄”(14절)를 분명히 언급한다. 참된 회개는 죄에 관대한 이름을 붙이기를 싫어하고 또한 사악함을 애써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유혹받고 있는 동안에는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후에) 참되게 회개할 때는, 가증스러운 것으로 인정된다. 범죄 하기 전의 죄는 때로 마음에 아주 작은 악으로 생각되지만, 은혜가 그것을 회개하도록 역사하면 그 거짓된 마력이 사라지고 그의 무서운 악의가 드러나게 되고 또한 그 죄악을 혐오하게 된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길을 버리려는 깊은 갈망과 진지한 결심을 수반한다. 하나님께 도전하기를 계속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에서 손 떼지 않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어떤 정직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반역자가 겸손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반역자가 되려 하는 것을 왕이 본다면, 그 어느 왕이 그 반역자를 용서하려 하겠는가? 사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적인 왕보다도 훨씬 무한히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표면적으로 자신의 자비를 선포하신 바로 그 구절 속에서 하나님은 즉시 “…형벌을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겠다”(출 34:5-7)라고 덧붙이셨다. 즉 죄를 향한 마음을 가진 자, 하나님을 향한 거짓되고 불충실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려 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를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면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다(고후 10:5).
이 말씀은 오늘날과 같은 불법의 시대, 즉 도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유 4) 시대에 특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 진리,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전에 먼저 죄를 버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마음의 변화를 겪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 주신다면, 하나님은 모욕을 받고 불명예스런 일을 당하시면서도 자비를 베푸신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희생하고서는 결코 행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 중의 어떤 하나를 불명예스럽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다른 속성을 결코 사용하시지 않는다. 도적이 계속하여 도적질을 하는데도 그를 동정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청교도인 굳윈(T. Goodwin)은 “알려진 모든 죄를 버리고 알려진 모든 의무를 따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와 친절을 찾기를 결코 기대하지 말 것을 결심하라”고 잘 말하였다.
예부터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즉 죄 위에 죄를 더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하는 자를 여호와는 사하지 않으신다”(신 29:19,20)라고 선포되어졌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6:26 참조)라고 선포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통치의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표준을 낮추시도록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예부터 요구하신 것들을 지금도 요구하신다.
따라서 회개는 회심의 부정적인 면이다. 회심은 모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론가부터의 돌아섬이 없이는 어느 곳으로의 돌아섬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거룩하신 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으려면 죄를 버려야만 한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위해 살며)”(살전 1:9)라고 쓰여진 것처럼 이렇게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비웃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즉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야말로 복스러운 진리이다. 하지만 어떤 죄인도 그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고는, 즉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가 자신의 (싸움) 무기를 내던지고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원의 은혜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또한 똑같은 사실이다. 주 예수께서 친히 이것을 누가복음 14장에서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은 특히 32절을 주의해서 읽으며 35절의 “이와 같이”라는 말씀을 주목하면서 28-33절의 말씀을 깊이 명상해 보라.
'영적인 구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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