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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분명한 회심의 7가지 표지

분명한 회심의 표지

참된 회심이 분명히 일어났다고 하는,인식될 수 있는 표지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셨는지에 대해서 구도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혹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구도자들이나 질문자들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분별하거나 세례지원자와 교회구성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영적 위치를 ‘점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우리들의 신앙선조들이 ‘은혜의 표지’라고 불렀던, 여러 가지 분명한 회심의 표지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일서에서는 이런 표지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성경주석가들은 이 서신의 주요 요점들을 ‘생명의 점검들’이라고 기술해 왔습니다. 요한은 강조해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는 지를 확실한 증거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2장3절). 로마서8장 또한 회심의 여러 가지 분명한 표지들과 표식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표지들을 암기하고, 실제적인 목회상황 속에 사용하기 위해서 사도행전2장이 가장 분명하고 따르기 쉬운 목록을 제공해 줍니다. 

이런 표지들을 고려하기 전에 우리는 오늘날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절박한 필요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현대적인 ‘복음전도’들이 죄와 회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면서 단지 복음이 제공해 주게 될 혜택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서의 헌신’으로 이끌어졌다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주 그렇게 ‘헌신’을 하게 된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들의 죄에 직면하지도, 그래서 회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분명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심’하고 나서는 즉각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되도록 설복되는 경우들을 봅니다. 참으로 그들이 회심한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심’을 하게 된 그 사람이 회심을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여전히 (자신만이 알고 있는) 죄를 움켜쥐고는 참된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의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의로우심에 대해서 참되이 깨닫는 마음으로 의지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진정으로 죄인됨을 깨닫고 주님께 전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모든 가능성들이 오늘날 많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들에 의해서 간과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회심에 있어서 이러한 본질적 요소들이 그들이 시행하고 있는 피상적인 종류의 복음전도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복음전도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의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들에 대해서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기독교 사역자들에 있어서 회심에 대한 이러한 표지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더 언급하겠습니다. 곧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회심의 표지들을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개의 표지들

사도행전2장37-38절과 41-46절에서 누가는 오순절날 회심하게 된 수천의 사람들의 생활과 태도 속에 생긴 엄청난 변화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사도행전2장37-38, 41-42, 46절).

은혜의 표지들, 참된 회심의 주된 표적들 중에서 여섯 개가 이 구절에서 발견됩니다. 이들 남녀들의 마음 속에 깊은, 개인적인 경험들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 없습니다. 마음(mind and heart)에 있어서 전적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혁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은 은혜의 역사가 분별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들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을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 속에 역사하신 것에 대한 이런 표지들이 있는가? 이런 표지들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 속에 주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셨는 지에 대하여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런 표지들을 잘 알고 있어서 그들에게 주저없이 이 표지들을 환기시켜주어야 합니다. 


1. 죄의 확신


이 구절에 나타나는 은혜의 첫 번째 표지는 죄인됨에 확신의 경험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37-38절). 침(세)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찔림을 받았음’(혹은 헬라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음에 사무침’)을 보여줄 때에만 실행되어질 수 있겠습니다. 그런 마음은 이전의 죄된 생활에 대해서 진정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죄용서함을 받고자하는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 진보를 분간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51편)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단지 죄에 대해서 차갑게 지적으로 승인(혹은 감정의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거나)하면서 아주 형식적으로, 제한적으로 회개를 한다고 느껴지면 회심이 참으로 일어났는 지에 대해서 의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배고픈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성경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회개는 강한 감정을 동반합니다. 그런 감정은 죄에 대해서 깊이 염려하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간절히 바랄 때에만 주어집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은혜의 참된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 희망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간증들’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팝스타들이 (간혹 입심좋고 조크가 섞인 말투로) 회심이란 별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리게 이야기하는 회심의 간증들은 이런 은혜의 본질적인 표지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힘들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게 되어서' 예수님께 자기 인생을 맡아달라고 기도했다고 하는 말들을 듣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지금 간증하고 있는 무대에서조차도 말입니다), 더욱 그들의 (변화가 되지 않은, 세속적인) 생활을 더욱 더 성공적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그 무엇인가가 되시기 전에 우선 구원자가 되셔야 합니다. 무언가 자기 안에 텅빈 것 같은 느낌 때문만으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비극적인 망상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과는 전혀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참으로 죄인됨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죄용서함과 새로운 생명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슬픔으로 무릎을 꿇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어떤 표지들을 찾아 보아야 합니다. 신앙위인들의 전기나 부흥의 역사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그런 깊은 수치감과 영혼을 뒤흔드는 슬픔을 모든 구도자들이 느끼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에는 적절한 만큼의 슬픔과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 그리고 주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가지는 녹아드는 느낌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mind)의 변화요 전환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에 대한 태도요 둘째는 주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죄인됨을 확신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단지 우리가 지었던 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만 아니라, 죄에 대해서 즐거워하던 기질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 기질을 없애기 원하고 전혀 달라지기를 소원합니다. 게다가, 주님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바꿉니다. 그 분을 유일하신 구원자로 찾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 절대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요즘의 많은 사람들은 회심에 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희석시켜 버렸습니다. 이전의 죄된 세속적인 삶의 스타일을 전적으로 끊어버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변화를 단지 언급할 뿐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우리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단계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합니다.[1] 다른 말로 하면, 회개라는 것을 아무 의미없는 말로 전락시켜버린 것입니다. ‘회심자’라고 하면서도 세속적인 생활과 취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어쩜 당연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회심은 회심이 니다. 오직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 회심은 회심이 아니다. 세상과 분리되는 것 없는 회심은 회심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것 없는 회심은 회심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구도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인됨에 대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곤궁함 속에서 깊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가? 오직 유일하신 구원자로 주되신 예수의 대속적인 죽으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소망을 견지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이며 동시에 주님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 분에게 삶을 일임하였는가? 

물론, 우리는 그렇게 구도자들이 회개한 것에 대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참으로 겸비해져서 주님과 세상을 향해서 가졌던 관계들이 전적으로 바뀌어진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런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어하는가? 그들이 거룩을 추구하고 있는가? 회심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증거들을 드러내어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명히 참된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회심을 했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친구들을 봅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어서 그들의 인생에 이미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곧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회개의 골짜기를 지나서, 주님의 성산, 하나님의 왕국을 향해서 그 언덕을 올라서려고 하는 그 과정 속에 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2. 성경을 이해함


은혜의 두 번째 표지는 사도행전 2장42절에 보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헬라원어는 그들이 계속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에 강하게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이 마음 속에 확정되면 그것은 분명한 은혜의 표지입니다. 참된 회심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성경을 붙들며 그것에 단단히 집중하고 견고하게 그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표지입니다. 고린도전서2장14절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변함이니라’ 고 강력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이 복잡하고 애매하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회심하게 되면, 갑자기 성경구절이 빛과 의미로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들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께서만 이런 식으로 성경을 열어주십니다. 새로운 회심자라고 해서 물론 에스겔서나 요한계시록같이 난해한 책들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에 대해서 전혀 깜깜했는데, 회심하게 되면 새로운 눈을 가지고 그런 구절들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맹맹했던 구절들이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을 이해하는데 전혀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종류의 고백을 했다고 하더라도 참된 회심자일 가능성이 아주 희박합니다. 

새로 회심했다고 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언제나 성경이 그들에게 이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갑자기 그들에게 다가와 감동을 시켰는 지를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활에 성경이 새로운 그러면서 지배적인 권위로 행사하고 있습니까? 참된 회심자들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행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제기되는 모든 잇슈들마다 경박하게 반박하려 하기보다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서 기꺼이 도전을 받고 지도를 받습니다(이것에 대해서는 다섯 번째 표지에서 한 번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민감성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느냐를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심자들이 갑자기 뜨거워졌다가 단숨에 식어버리고 있습니까? 몇 주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어느 날 슬그머니 나타나곤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영적인 감정을 마치 전기 스위치처럼 켰다 껐다 마음대로 할 수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말씀에 깊히 인상을 받아서 분명히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인상은 그렇게 순식간에 왔던 꼭 그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회심하게 된 사람의 생애에 새로운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의 놀라운 표지는 바로 이 지속성입니다. 새로운 본성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3. 가족적 유대


사도행전 2장42절에 나오는 은혜의 세 번째 표지는, 교제라는 말 속에 나옵니다. “그들은 교제하기를....전혀 힘쓰니라.” 오순절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갑자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견고하게 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이 이상하면서도 깊어지는 욕구, 이 신비적인 유대감이나 가족의식은 요한일서3장14절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참된 회심의 확실한 표지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룻기1장16절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구절을 첨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구절에서 룻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만일 어떤 사람이 예배 후에도 신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교제의 초청을 받고 싶어한다면 은혜가 참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또 다른 표지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동료에 대한 깊은 욕구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당신의 영적 가족 속에 편입시켜 주셨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하늘왕족의 피가 모든 참된 신자들의 혈관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2장19절). 

하지만 회심자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 친구들과의 교제를 선호하고 있다면, 참으로 회심했는 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밀접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교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심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자 한 명을 다른 신자와 연결해 주는 독특한 유대감은 회심시에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평가하고 있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서 이런 유대감과 소속감을 볼 수 있습니까? 참된 회심자들은 자신들과 불신 친구들과의 사이에 있는 골을 느끼게 됩니다. 때론 이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은혜가 마음 속에 있으면 불가피한 것입니다. 참된 회심자는 다르게 느낍니다. 다른 원리들과 욕구들에 이제는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친구였던 사람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들과의 유대는 그의 회심 때문에 굉장히 영향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간에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친화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젊은이들 간에 갖는 교제형태의 환경 때문에 거짓된 회심이 올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 젊은이들의 활동이 지혜롭지 못하고 영적이지 못한 리크레이션 같은 것에 강조하게 되면 거짓된 회심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회심하지 않은 젊은이는 단순히 그들의 동료친구들이 좋다는 것 때문에 그 교제의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회심자들이 그들의 그룹 안에 있는 더욱 영적인 친구들이나 더욱 나이든 신자들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관계되고 있는 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기도의 발견


     사도행전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또 다른 은혜의 분명한 표지는, 기도의 실행입니다. 그들 유대인 회심자들은 이전에는 참되고 개인적인 기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의식적이고 직접적으로(물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아가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그들의 이전 기도들은 회당의 ‘기계적인’ 기도문들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올려졌습니다. 개인적인 기도란 단지 냉냉하고 이교도들의 반복적인 기도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참으로 회심하게 되자, 기도모임을 멀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동적이며 효력적인 기도의 포근함, 경이로움, 특권, 그리고 그 능력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그리고 그들의 대제사장 되신 이가 하늘에서 그들의 모든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분명한 응답들을 받았습니다. 


     기도의 발견이 은혜의 경이로운 표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각이 하나님의 현존 앞에 들어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과 더불어서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오게 됩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4장6절). 기도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는 회심자라면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발견했는 지’를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해 주셨는 지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경험해 보려고 하는 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종류으의 것들을 구하고 있는 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구하는 순전히 이기적이고 사소한 것들을 위한 기도를 떠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것, 죄를 정복하는 능력, 그리고 복음전도를 위한 축복같은 영적 축복들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배웠습니까? 


     참된 회심자들은 곧 그들이 영적인 기도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보다도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이나 친척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만일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시험들이 닥치게 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낙담하게 되면, 이 값지고 본질적인 은혜의 표지가 도대체 경험된 적이 있는 지 의심스럽습니다. 


     더 오래되고, 참된 회심자들조차도 기도의 실행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고 손실이 큰 일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발견은, 사도행전 2장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볼 수 있는 은혜의 아주 현저한 표지가 됩니다. 참된 회심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들을 기도 가운데서 주님께 아뢰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이 할 때, 참으로 그들이 그 분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5. 새로운 마음(heart)


     은혜의 또 다른 근본적인 표지는 사도행전2장46-47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오순절날의 회심자들은 참되고 타협하지 않는 헌신과 충성된 마음의 특징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순전한 마음’(singleness of heart or sincerity of heart)이란 말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회심한 사람들의 가장 깊은 내밀한 생각과 감정 속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활짝 열려지게 되고, 그 분을 위한 일들에 헌신하게 되며, 또한 참된 동기로 그렇게 하게 됩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의 스타일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편으로 영적인 축복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적인 명예와 행운,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장17절). 참된 회심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바가 성취됩니다 - “내가.....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에스겔11장19절). 


     이전의 완고하고 냉냉하던 것은 제거되어서 회심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쉽게 감동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영적으로 민감하게 되며, 그들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되어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새로운 동기와 취향, 그리고 새로운 이상들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행동에 대한 새로운 기준들이 마음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일들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너희 보물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누가복음12장34절)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구도자의 영적 상태를 분별해 보고자 하면서, 우리들은 이런 변화된 성격과 면모들이 명명백백하게 있는 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참되이 회심한 사람들은 주목할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침을 잘 받고 순응적이 됩니다. 이전에는 교만하고 건방지던 사람들이 갑자기 영적인 진로를 위해서 도움과 조언을 원합니다. 간혹 이렇게 사람들을 휘어잡는 변화를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전적으로 변화가 되어서 옳은 일들을 행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아마도 어떤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는 고집스러움과 완고함이 남아있을 수 있지만 가르침과 권면을 받아들이는 아주 현저한 민감성을 보여줍니다. 


     무언가 거리를 두면서 거만했던 사람이 갑자기 온화하고 겸손하며 가르침을 잘 받게 되면 아주 강력한 은혜의 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회심입니다! 반면에, 소위 ‘회심자’라 하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소유물, 야망, 유행과 록음악에 집착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지한 조언들이 주어질 때에도 전혀 감동을 받지 않고 있다면, 새로운 마음이 주어졌는 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이 새로운 마음은 주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물론 깊히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말입니다. 사도행전 2장43절에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존경하는 두려움, 외경심을 말합니다. 새로운 마음은 주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대단히 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의 현존과 거룩, 그리고 능력을 상당히 의식하게 됩니다. 상당히 우발적이고 오히려 건방지기까지 한 ‘회심자’는 새로운 마음을 전혀 받지 않은 것입니다(어떤 형태의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인도하고 있는 사람들, 전혀 경외심도 보여주지 않고 있는 비형식성의 예배스타일을 채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쇼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자들은 그들의 첫사랑을 잃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냉냉함과 불복종의 시기를 지나게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심각한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 초기에서, 그 온화하고 개방적이며, 반응적이고, 복종적인 마음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의 최상의 표지로 취급되어져야 합니다. 


6. 확신의 시작


     사도행전2장41-47절은 그리스도인됨의 경험의 초기에 상당한 정도의 확신을 분명히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46절)과 그들의 ‘하나님을 찬미함’(47절)이 그들의 사랑과 헌신과 더불어 이것을 지적합니다. 모든 회심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확신을 회심할 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사탄의 공략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의심 때문에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회심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확신의 인침에 대해서 말합니다. 에베소서1장13절은 말합니다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와 똑같은 확신의 축복이 고린도후서1장22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아이가 엄청난 확실성을 갖고 구원에 대해서 완전한 확신을 갖게 되리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침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침이란 참되게 거듭나게 되었다는 입증과 진정성에 대한 인침입니다.   인장반지로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귀족들이 그들의 서류와 편지들에 자기들이 썼다거나 그 내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도장을 찍었던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소유하신다는 표지를 찍으시는 것입니다. 참된 회심이면 모두 성령님께서 당신 자신의 사역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도장을 찍어 인치십니다. 


     참된 회심자들을 이전과는 아주 다른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어느 정도 맛보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그들이 용서함을 받았다는 참된 느낌을 포함합니다. 성경은 그 인침이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받게 될 기업에 대한 보증금, 담보물, 저당물이며 그것을 미리 맛봄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참된 회심자는 자신이 하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또한 받게 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치심을 회심에 찍으시기 때문에, 회심자는 무언가 놀라운 일이 자기에게 발생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욕구가 변했고, 죄를 혐오하게 되며, 죄를 이기기 위한 새로운 능력이 자기들에게 주어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입증하시는 인치심은 그러므로 회심자의 마음 안에서 느껴집니다. 또한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보여집니다. 영적인 상담자들은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이런 것을 경험했는 지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확신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당신이 회심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느껴 본적이 없습니까? 당신이 용서함을 받았다든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든가 하는 것을 어느 때라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 그래요, 한번인가, 처음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신뢰했을 때 그때 그랬어요” 하면, 그는 회심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확신이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대단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회심한 많은 사람들 중에 강한 확신이 결핍된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가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자가 강한 확신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들과 싸우게 됩니다.”


     영적 조언자들은 혼란을 겪고 있는 참된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이미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 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심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이런 은혜의 표지들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 속에 이루신 분명한 증거들을 통해서 위로와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7. 사단의 공격


     사도행전2장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회심자에게 사단이 대항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또 다른 본질적인 표지입니다. 그 대적자는 언제나 참된 회심자의 마음 속에 의심과 두려움의 불화살을 쏘아댑니다. 구도자가 하나님의 진리와 그들 자신의 영적 진보에 대한 의심으로 끊임없는 공격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자비의 역사를 행하고 계신다는 긍정적인 표지일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영혼은, 여전히 영적으로 속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적인 의심과 두려움으로 그렇게 심하게 고뇌하지를 않습니다. 주되신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누가복음11장21절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여기서 강한 자는 무장하고 있는 강한 자는 사단입니다. 사단이, 그가 포로로 잡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성채 안에 있는 중에는 안전하다고 생각되어서 그 노예들을 괴롭히지도 상처를 입히지도 않는 폭군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회심자들은, 이제 더 이상 사단의 요새 안에 있지를 않습니다. 이제 해방되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엄청난 전투가 시작된 셈입니다. 그들은 이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해서”, “씨름”하게 됩니다(에베소서6장12).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 속의 소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도 증오하는 의심들, 간혹 느끼게 되는 불확실함이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구원하셨다는, 그래서 이제는 그들이 전투장에 들어서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젊은 회심자들에게 공격을 개시하게 될 때 어떤 의미에서 도를 지나쳐서 그는 실패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자기의 존재가 확실하고 그들을 그렇게 공격할 이유가 있다고 증명하려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회심하기 이전에는 별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라온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회심하기 이전에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들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의심해 보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진지하게 돌아서는 순간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때에야 사단은 자신의 ‘눈에 띄지 않는’ 태도를 버리고 그들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젊은 회심자들이 도움을 받아서 사단이 악의와 보복심으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불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사단은 그들의 구원을 뺏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서 믿음으로 오는 그들의 기쁨과 평화를 깨뜨려 버리려고 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다양할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하기도 하고,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서 공격하곤 합니다. 이렇게도 말할 것입니다. “그래, 그것들 모두가 사실이야. 성경이 사실인게 확실하다고. 믿음도 사실이고, 구원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회심한 것은 아니야. 너는 지금 속고 있는 거야!” 신자들이 다소 죄에 빠져들어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사단은 고소를 해댑니다 - ‘이런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단 말이니?’


     자신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젊은 신자들이 걱정한다는 그 사실이 회심의 증거가 됩니다. 만일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영혼의 상태는 그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들의 영적 형편이 그들에게는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염려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형편에 대해서 깊히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청교도들이 표현했던 것처럼, “거룩한 근심”은 어떤 사람의 보물이 이제는 하나님의 왕국에 있다는 좋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약


     1. 참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자비와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한 소속감과 유대감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게 됩니다.       

     4.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놀랍게도 나타납니다. 찬양과 영적 탄원을 하게 되고, 기도들이 응답됩니다. 

     5. 새로운 기쁨, 성격, 기질과 욕구와 더불어서 새로운 마음을 받게 됩니다. 이제 신자라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일들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마음으로 성화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복종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해주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첫 느낌(확신)이 성령님에 의해서 마음에 자리잡게 됩니다.

     7. 사단의 공격들이 이제 새로운 유혹들, 의심들, 두려움 가운데서 느껴지게 됩니다. 영적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회심의 표지들이 동시에 나타나는가?


     성경에 나타는 수많은 예들을 통해서 볼 때,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회심은 간혹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경험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질질 끌기도 하는 과정입니다. 죄인이 죄인됨의 확신을 조금씩 가지면서 조금씩 이해의 빛이 비춰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반역을 포기하면서 주님 앞에 겸비하게 되기 전,   마음 속에 위기가 오래 지속됩니다. 그러므로 구도자의 첫 번째 회개의 기도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영 만족스럽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계속 죄인됨의   확신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을 찾는 기간이 이제 의식적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어떤 은혜의 표지들은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초기의 단계 동안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완전히 빛으로 바뀌고, 죄책이 용서로, 죽음에서 사망으로 옮기게 될 때 모든 표지들이 분명하게 비춰지게 될 것입니다(처음 단계에서는 회심의 표지들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다가 결국은 모두 다 한꺼번에 나타난다는 뜻입니다:역자).


     은혜의 표지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회심의 표지들은 구도자들에게 너무 성급하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게 되는 것을 방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현대의 ‘결심주의’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폐해입니다. 복음전도대회에서 너무나 자주 사람들이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복음에 대해서 지적으로라도 동의하라고 재촉을 받습니다. 그들의 약간 반응만 해도 직각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어떻게 느끼든지 관계없이 말입니다. 은혜의 실제 표지들이 없는데도 어떤 설교자나 사역자들이 구도의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강력하게 해 준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리고 또한 이 구도자가 상당히 진지한 사람이긴 하지만,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새로운 거듭남의 의식적인 축복을 주시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의 회개가 너무 피상적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정하신 때를 따라서 이 구도자가 더욱 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하고 더욱 의미심장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사역자들이 부적절하게 확신을 시켜주는 것은 그 구도자의 영적 진보에 있어서 방해거리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구도자는 자기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설교자나 영적 조언자들은 그 사람이 이미 회심했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사람이 회심을 하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이 없다고 단적으로 말해 버립니다. 거듭나는 것은 어떻게 느끼느냐와는 상관없이 이미 일어났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결과 그 구도자는 깊은 혼란을 느끼고 그의 영적 조언자에게 두었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아마도 언젠가는 복음에 대한 신뢰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구도자들을 우리가 도와줄 때, 언제나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대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4장29절). 여기서 결정적이고 효험이 있는 단어는 ‘만일’과 ‘다하고’라는 말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에 설교자나 사역자가 구도자에게 권면하여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 이것이 ‘마음을 다하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면 아무런 혼동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 구도자가 분명히 구원받았다고 지금 확신을 시켜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해서 그 구도자를 도와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구도자가 여태 자신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주님에 대한 자신의 접근태도를 다시 검사해 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설교자나 사역자에게 되돌아서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도자가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면서 했을 수도 있을 실수들을 가르쳐 줄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만을 신뢰하는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지를 물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가르침과 권위에 온전히 굴복시켰는 지, 자신의 야망과 자기의지를 포기하였는 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가 했다고 하는 회개가 참된 것이었는 지를, 어떤 죄악된 습관을 감추어 두지는 않았는지, 그런 것들을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 지도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명한 상담자라면, 죄인들의 구체적인 죄들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그 구도자로 하여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악된 행위들과 우상들에서 돌아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권면할 것입니다(죄를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은 제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죄책을 느끼는 그 사람의 양심이 상담자에게 ‘고백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어서 더 이상 그 죄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고백해야 할 짐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사람이 후에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깊히 후회하고는 부끄러움을 느껴서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일들이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죄들을 듣는 어리석은 상담자들 때문에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혜로운 영적 조언자라고 하면 이 구도자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나님의 도구로 계속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회심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주님의 종들은 구도자들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서두른 것 때문에 그 분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정반대의 실수를 하는 잘못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죄인됨의 확신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서 주님께로 전심을 다해서 나아온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 사람은 회심을 하면서 가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실된 체험을 하게 된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간 이 참된 회심자가 구원의 확신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목사나 경륜이 있는 신자들에게 다가가서 다소 자신의 의심과 문제들을 드러냅니다. 만일 이 회심자가 비기독교가정에서 양육받아왔다면, 자신의 영적 문제들을 약간 서투르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적 조언자가 그 사람을 아직 회심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하고는 갈보리로 다시 나아가서는 모든 것을 다시 회개하라고 조언하게 됩니다.


     참된 회심을 했는데도 그것을 알아 채리지 못하는 이런 무감각한 상담 때문에 그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 확신을 가지지 못한 신자는 구속받은 자의 교제로부터 ‘내쫓김’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결핍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참된 회심의 증거가 있는 지 없는 지를 분간하는 것이 기독교 사역자의 몫이라고 했었습니다. 만약 그런 증거가 있다면 우리들의 과제는 그 증거들을 의심하는 영혼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도와서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이미 분명하게 이루어 놓으신 일들 속에서 위로와 확신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루신 은혜의 역사에 대한 모든 증거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주님께 찬양드리지 못하는 것은 잘못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능력있는 영적 조력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회심의 표지들을 아는 것이 아주 결정적입니다. 중생받은 사람들로 회원이 구성된 지역교회를 유지해야 하는 우리들의 영적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그렇습니다.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짐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입니다. 어떻게 현대주의의 재앙이 지난 백여년 동안 그렇게도 많은 서구의 개신교 교단들에게서 참된 복음을 휩쓸어 버리는데 성공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셀 수도 없는 복음주의교회들이 단지 60여년 전에 일어난 ‘세속적’인 기독교의 물결 앞에 파선되고 말았을까요? 교회들 내에 나무와 풀과 짚이 너무 많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히브리서12장15절에 나와 있는 의무가 우리들에게서 너무나 광범위하게 무시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참된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교회에 영입되면 이 사람은 곧 영적 불안정과 침체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정당한 절차 없이 회원들을 영입하는 지역교회는 마침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고 영적인 혼란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회원이 될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고 불가피하게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우리들의 ‘검사’는 너무 엄격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회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살펴야 하고, 교제의 손길이 오직 참된 회심을 경험한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만 뻗쳐질 수 있도록 확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은혜의 표지들에 대해서 철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회심을 보여주는 다른 여러 가지 표지들이 신약성경에 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그들 중에서 가장 쉽게 인지될 수 있는 것들에 제한시켰습니다. 사도행전2장에서조차도 또 다른 의미심장한 표지들이 있지만, 간편을 위해서 여기서는 생략했습니다. 누가는 오순절의 회심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합니다. 참된 회심자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몰아쳐지든가 설득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없이 예배 참석하는 것을 등한히 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들은 아마도 이것을 여덟 번째 표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절박한 필요가운데 놓여있는 영혼들을 도와주려고 하면서 지혜롭게 우리가 분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또한 회심이란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임을 계속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시기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결코 성령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침범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손성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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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주되심’을 구분하는 요즘의 경향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주되심을 인정하면 구원을 얻고,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헌신의 문제와 관계된다는 생각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구주되심의 인정은 거짓된 회심일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합니다(역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