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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6. 참된 회개를 방해하는 것들

6. 참된 회개를 방해하는 것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1장15절).“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사도행전20장21절).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복음을 듣는 그 첫 순간에 죄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어서 곧바로 회개하고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랄 만한 생활의 변화를 겪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겪게 되는 회심들은 물론 너무나 완벽하게 성경적인 새출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볼 때, 백 명의 목회자 중 두 세명 정도가 순간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되고, 대부분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 전, 여러 번의 회개의 과정을 반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기 전에 그들은 여러 달에 걸친 여러 번의 좌절들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발견하기 전에, 대부분의 참된 그리고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회심자의 경우, 몇 날 동안, 때로는 몇 주 몇 달 동안을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면서 기도해야 했었던 것 같습니다. 씨름하고 열망하는 기간을 통과하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나 있을까 하고 거의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유명한 현대의 전도기법들이 회심이란 거의 대부분 드라마틱하고 급작스럽다는 가정 하에서 개발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현대의 결심주의(decisionism)이 보여주는 간단한 전도책자들은 구원의 좁은 문을 통하여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그들의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씨름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는 바가 없습니다. 길을 찾는 이들에게는 방향설정이 필요한데도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신실하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나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들을 강조하면서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는 곧장 올바른 태도로 회개하거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지도를 해주고 권유와 권면이 필요로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이 용납할 수 있는 영으로 주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참된 것을 찾고 있는 자들의 회개를 망쳐 놓을 수도 있는, 그래서 타협된 믿음만을 표현하게 될, 잘못된 태도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들이 주님께로 올바른 때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흠들을 방지할 수 있는 조언들을 복음전도설교에 담아야 합니다. 또한 본인들이 이미 회개했다고 말하는 (그렇지만 아직 참으로 회개하지 못하여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참된 것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 부드럽게 이런 점들이 전달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회개했다고 할 때 남겨 놓았을 수도 있는 특별한 죄들이 무엇인 지를 아직 번민하고 있는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약간 덜 직접적인 접근방식이 필요합니다. 참된 것을 찾는 자들이 간혹 실수할 수도 있는 점들을 아주 일반적인 용어로 그들에게 요약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듣는 중에 그들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몇가지 점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도와주어야 하지, 비밀을 캐내어서는 안됩니다. 
회개시에 남겨놓았을 수도 있는 특별한 죄악들(이나 우상들)을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 될 주된 이유는, 그것들을 우리에게 말해 줌으로써 그들이 일종의 ‘고백’을 했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어서(카타르시스의 과정을 통해서) 죄인됨의 확신에 이르는 고통스러움을 피하고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영적 부담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자세하게 말하려고 하면,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대신 주님에게 나아가 직접,그리고 은밀하게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도록 강권해야 합니다. 절대로 어떤 참된 것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의 특별한 죄들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입니다. 참된 것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은 유일하신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 가야 합니다. 복음사역자들은 절대로 예수님 대신 자신들이 제사장노릇을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실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에게 이야기하기에 부끄러운 일들을 털어놓는다는 사실에서 영적인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에게 해야 될 회개가 손상이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을 결국은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죄들을 설교자 혹은 상담자에게 다 털어버린 사람들은 그렇게 한 것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부끄럽게 여겨서 교회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맙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역자가 어떤 사람에게서 아주 민감한 개인적 고백을 허용하는 바람에 영적 광야에서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음에 제시되는, 회개한다고 할 때에 가능한 결점들의 목록은 회개를 상당히 복잡하게(더 심하게는 공로적인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회개는 결코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십자가의 우편에서 죽어가는 강도의 것처럼 아주 간단한 기도 속에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의사로서 우리는 간단하나마 영혼의 ‘해부도’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이런 관점은 우리들의 설교에 상당할 정도의 현실성과 예각을 더해 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상담을 위해서 우리들을 무장시켜줄 것입니다. 먼저 문제점들을 요약하고 다음에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1)죄에 대한 추상적인 견해
(가)회개가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임
(나)‘외부적’인 죄에만 집중함
(다)한 두 개의 잘못만 인식함
(라)잘한 점들에 대해는 여전히 자부심을 가짐
(마)죄를 질병으로 여김
(바)죄에 대해서 변명함
(사)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 유일한 죄일 뿐이라고 여김
(아)현재 의식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음
(2)수치심이 없음
(가)용서함이 아니라 반대급부를 구함
(나)부끄러움을 느끼기 보다는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함
(다)부끄러움 대신에 한 때의 자책감을 느낌
(3)하나님 중심이 아닌 회개
(가)하나님을 향해서 죄송함이 없음
(나)그리스도의 고통당하심에 대해서 충분하게 감동되지 않음
(4)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반역적 욕구
(가)얼마간의 죄를 계속 은밀히 행하기를 원함
(나)새로운 생활을 그렇게 열망하지 않음
(다)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음
일반적인 문제점1: 죄에 대한 추상적인 견해
(가)회개가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임
참된 것을 찾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죄의 흉악함과 심각성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설교자들이 죄를 일반적인 용어로만 설명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들인지를 자각하는데 별로 도움을 못줍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모든 죄악들의 세목들을 고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란 것이 기만적이고 사악하다는 것을 슬픔 가운데서 인식하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죄들을 진지하게 회개하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냉냉한 마음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단지 승인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다윗의 회개기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죄에 있어서의 세 가지 분명한 측면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편1-4절).
다윗이 회개한 죄(sin)의 세 가지 측면은, 죄과(transgression), 죄악(iniquity), 그리고 죄(sin)입니다. 죄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 현대교회의 복음전도에 있어서 가장 공통적인 잘못이기 때문에 이 점들을 약간만 더 다루겠습니다. 죄과에 대한 히브리말( )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행위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일축해 버리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분의 권위를 내뱉아 버리고 그 율법들을 범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무엇을 추구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무엇을 원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모든 것들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중에 좌절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의적인 반역의 정도를 깨닫기나 하였습니까? 
죄의 두 번째 ‘얼굴’은 죄악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히브리말( )로는 구부러졌음(crookedness)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아주 악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비뚤어지고 ‘굽어졌습니다’(bent). 그래서, 예를 들자면, 지속적으로 신실하거나 비이기적일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죄과들이 말갛게 씻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씻어달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 단순히 몸을 씻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옷을 씻는데 특별히 사용되는 말로서, 아주 심하게 더럽혀져 있는 옷들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서 아주 강하게 반복적으로 내려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과는 아주 깊히 자리잡고 있는 흉한 몰골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중에 좌절되어 있는 자들이 자기 안에 이런 비뚤어진 것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바르게 해달라고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까? 
죄의 세 번째 ‘얼굴’은,간단하게, 죄입니다. 히브리말( )로 이것은 표적을 맞추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생각, 말 혹은 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을 말하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거나 지나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이런 행위들이 악한 줄을 깨달았습니다. 이 악하다는 말은 히브리말( )로 파괴적이다, 혹은 손해를 끼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그 분의 우주를 더럽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상하게 하며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행위들로부터 깨끗해 지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죄책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행위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말입니다. 참된 것을 찾고 있는 자들이 죄로 인하여 야기된 그 해로운 파괴와 상처들의 정도에 대해서 어느 만큼 느끼고 있는 것입니까?
(나)‘외부적’인 죄에만 집중함
사람들은 자주 자기들의 마음에 있는 죄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부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곤 합니다. 구도자가 자신의 내적 죄들, 곧 교만, 이기심, 자기만을 추구하는 것, 기만, 탐욕, 증오, 경멸, 그리고 괴팍한 성품들에 대해서 깨닫고 있습니까? 그가 자신의 깊은 내적 부패를 두고 탄식하며, 이것을 자신의 힘으로 개선시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통찰하시고 그 내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얼마나 추악한 지를 그가 인식하고 있습니까? 
(다)한 두 개의 잘못만 인식함
구도자가 특별한 어떤 죄에 대해서 특별히 의식하고 부끄러워하겠지만,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놀란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참되고 의미 있는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용서받고 새로워지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두 개의 죄에 전념하고 있는 것은, 나머지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한 가지 죄, 곧 주님을 배신했다는 것 때문에 자책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가책하면서 죄인됨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용납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복음27장3-5절). 
(라)잘한 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부심을 가짐
아마도 구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중 어떤 부분이나 어떤 행위들에 대해서는 기뻐하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나쁜 기질이나 교만에 대해서는 용서받아야 해. 하지만, 나의 친절성이나 인내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야.” 구도자가 자신에 대해서 여전히 기쁘게 여기는 부분이 있으면 욧점을 놓친 것이며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체 인생이 하나님께 범죄해서 축복이 천국에 이를 소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버린 바 된 죄인으로서 값없이 주시는 완전한 용서를 구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현재의 상태에서는 그의 모습이 마치 대량 학살을 한 어느 확신범이 언제나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정중했었노라고 청원하는 꼴입니다. 상상해 볼 만한 어떤 선한 요소도 죄인이 저지른,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그리고 수많은 범죄들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사소한 것들일 뿐입니다.
(마)죄를 질병으로 여김
구도자가 죄를 질병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책임과 죄책을 인식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오 하나님, 나의 인생을 망쳐 놓은 이 죄의 질병에서 나를 구하소서”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런 태도를 실제로는 조장하기조차 합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마치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린 슬프고도 비참한 희생자로 묘사합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손에 의뢰하기만 하면 그 비참하게 하는 세력으로부터 구제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서 가지는 아주 잘못된 견해으로서, 죄책이 있는 것을 느끼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매력적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죄책이 있는(guilty)[1] 죄인으로서 회개해야 합니다. 
(바)죄에 대해서 변명함
어떤 구도자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변명을 함으로 책임을 전적으로 지는 것을 피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을 잘못 만나서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은 거짓말을 안할 수가 없어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때린 것은, 거칠고 냉혹한 가정에서 자기들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술중독이 되고 육욕 가운데에 빠져든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파산하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사업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성질이 괴팍하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런 이유들이 수천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모든 변명거리들을 제쳐놓고 다윗처럼, “내가 주께만[2]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전적인 책임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오 주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부르짖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자신의 회개를 되돌아보면서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1장15절)라고 외쳤습니다. 참된 회개는 비난 받을 것을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그랬을 때 주님께서 그 죄책을 벗겨 주시는 것입니다. 
(사)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 유일한 죄일 뿐이라고 여김
회개에 있어서 진찌 중요한 유일한 죄는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던 것이라는 잘못된 개념 때문에 구도자가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각자가 이때껏 저질러 온 모든 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죄선고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죄는 예수님의 그 구속해 주심을 거절한 것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 왔던 구도자는, 회개할 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느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다른 죄들을 회개해야 할 부담은 안가질 수도 있습니다. 유일한 회개기도는 “주님, 내가 당신을 거절하는 죄를 범하였었나이다”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회개는 아주 간편합니다. 또한 가장 피상적이고 자신의 죄인됨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회개한다고 할 때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기도와 더불어서 모든 다른 개인적인 죄악됨에 대해서 가슴저리도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면 이것은 회개를 위한 참된 기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히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당신을 거절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3장16-20절). 예수님을 거절하기 때문에 유죄를 선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님을 거절하는 데 이르게 하는 모든 죄악들 때문에 선고를 받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가지 구절들 중에서, 회개는 죄인들의 전반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한 구절만 해도 충분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모든 범위의 죄를 거론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것들 때문에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노라고 분명하게 진술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 인내하심과 오래 참으심은 죄인들이 앞에서 나열된 그 특별한 행위들을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아)현재 의식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음
참된 회개는 현재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들조차도 포함합니다. 자신의 많은 죄들에 대해서 현재 의식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지금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들도 훨씬 많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추한 존재일까!” 이것만이 참된 회개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의식하고 있는 의도적인 죄들만 아니라 아직까지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결점들에 대해서도 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편12-13절).
구도자가 하나님의 그 엄청난 거룩하심에 대해서 압도된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불꽃으로 타는 눈을 가지고 계시고 불결한 그 어느 것도 그 분 앞에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습니까? 욥처럼,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40장4절)....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장5절하,6절).
일반적인 문제점2: 수치심이 없음
(가)용서함이 아니라 반대급부를 구함
회개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구도자가 혜택이나 축복을 일차적으로 구해서는 안됩니다. 설교가 간혹 구원의 혜택에 대해서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들이 회개와 거룩함을 이루는 새로운 삶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강조되어진다면 잘못된 인상이 심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인식하기만 해도 축복하신다는 것이지요. 에서는 용서를 구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축복을 구하는 자의 전형이 됩니다. 자기 가족의 족장이 되는 축복만을 구했을 때, 그는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히브리서12장17절) 던 것입니다. 그는 육신에 속한 삶의 방식을 결코 회개하지 않았었습니다. 
또 다른 고전적인 예로서, 축복만을 구했던 자가 사울왕입니다. 사무엘이 그를 하나님을 불순종했다고 책망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청하노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사무엘상15장24-30절).
사울은 단지 공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과 왕권을 잃는 것만 피하기를 원했습니다. 죄에 대한 이해는 아주 피상적이기만 했습니다. 
구도자가 구원을 받음으로 누리게 될 축복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맞추기 위해서 회개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자기 애인이 신자이기 때문에 결혼하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질병이나 의기소침함에서 치료되기를 원하거나 어떤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회개하려고 하는 배후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혜택을 바라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만, 죄에 대한 관심이 훨씬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회개의 행위는 번영, 성공, 건강, 행복 그리고 천국 등과 같은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 지배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부끄러움을 느끼기 보다는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함
종교적인 집안에서 양육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루터가 어린 시절에 그랬습니다. 십대가 되면서 가공스러운 천둥소리에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준다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구도자가 영원토록 버림을 받을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실제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사망과 저주에 대해서 두려워 하되 그것이 그 저주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압도적인 공의에 대한 겸손함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의 회개는 참된 것이라기 보다는 절망감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움찔하려는 시도 그 이상입니다.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참된 슬픔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그래서 은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시130편1-4절은 올바른 회개에 대해서 잘 보여줍니다:
“주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 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참된 회개는 겸손과 부끄러움 가운데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또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요엘2장12-13절).
(다)부끄러움 대신에 한 때의 자책감을 느낌
자책과 후회가 거짓된 회개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 젊은 목회자가 감옥을 방문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아주 신실하게 회개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방면이 되자 이전에 보여주었던 행동들에 대해서 콧방귀를 끼고 말았습니다. 
사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의 격렬한 기질이 순간적으로 부드러운 감정과 강자신의 행동에 대한 렬한 수치심으로 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한 순간에는 다윗을 멸망시키고자 했고, 곧장 마음이 바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슬퍼함은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순전히 감정적인 것이었고 죄책에 대한 참된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죄를 범했다고 칩시다. 그것 때문에 스스로 멍텅구리가 되어 버렸고, 명예를 손상하고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며 교육의 기회고 승진의 기회들이 박탈되어 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깊히 고뇌하며 자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전적으로 세상적일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회개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정서적 분출구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에서 경험하게 되는 부끄러움은 비탄 그 이상의 것입니다. 또한 어떤 형의 차를 산 뒤에 그것을 후회하고는 더 좋은 다른 것을 사는 것과 똑같이 자기가 택한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 후회하고 새로운 진로를 택하게 될 때와 같은 ‘마음의 변화’ 그 이상의 것이기도 합니다.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구도자는 자기가 행한 것으로 말미암는 손상에 대해서보다는 그 행동들로 인한 비난을 받아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전이나 앞으로의 전망은 안중에 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단순히 이기적인 자책 때문에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면, 이것이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언급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지적한 것이 마침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바람직스럽게도 자신의 곤경보다도 그 죄책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7장10-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급하게 믿음을 고백하도록 사람들을 몰아부치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회개가 감성의 취약함으로 빚어진 것이지 죄인됨을 확신한 것이 아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구도자가 참으로 자신의 내부를 살펴 보았을까요? 참으로 회개하게 된다면,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할꼬” 부르짖게 됩니다. 
일반적인 문제점3: 하나님 중심이 아닌 회개
(가)하나님을 향해서 죄송함이 없음
수치심이 단지 이기적인 자책이고 지나가 버릴 감정인지 아니면 참된 죄의 가책을 통한 확신으로 인한 것인 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하나님을 향한 슬픔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고 하였을 때 그 차이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만드셨고, 또한 생명과 능력들을 주셨는데도, 자기들이 스스로 그것들 가진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해 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들이 범죄한 것을 봅니다. 그 분을 향해서 저지릇 죄악들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러실 수 있는 정당함을 가지고 계시며, 영원토록 자신들을 유죄판결을 내리셔야 한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분께서 모욕을 당하시고, 손상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영적으로 단지 안전했으면 하는 욕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잘못했고, 손상을 입혔다는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나)그리스도의 고통당하심에 대해서 충분하게 감동되지 않음
회개는 이상적으로 구세주의 고통을 야기시킨 것에 대한 비탄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참된 것이라면, 주님께서 지불하셔야 했던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고뇌와 책임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죄인은, “내가 죄를 범했습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죄악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분께선 신음하셨던가?
놀라우신 그 긍휼! 헤아릴 수 없는 그 자비!
무한하신 그 사랑이로다!
아마도 구도자는 회개할 때에 약간 ‘이기적이어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고, 우리에게 관한 한, 아주 간단한 것이긴 하지만, 주님께는 너무나 큰 값을 치루셔야만 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그 사망에 놓여지셨던 고뇌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일 뿐입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가 구세주로 말미암아 영원에 무게를 느끼게 하는 심판과 저주 아래 놓이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언제나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성경적인 회개는 갈보리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복받치는 감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문제점4: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반역적 욕구
(가)얼마간의 죄를 계속 은밀히 행하기를 원함
구도자는, 자신의 죄된 습관이나 이기적인 야심들 중의 얼마를 계속 가지고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여하한 어떤 반응을 얻는 것을 주저할 수 있습니다. 구도자들이 회개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들은 남겨두게 되는 것은 참된 회개를 이르는 중에 있게 되는 공통된 방해물입니다. 깨끗함을 입고 싶고 용서함을 얻고 싶은 참된 열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옛생활’의 어떤 측면들을 포기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 때문에 참된 회개가 망쳐 질 수 있습니다. 많은 구도자들이 한 두 가지 죄들을 옷깃에 감추어 두려고 하면서 여전히 힘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나눠진 마음만큼 회개의 기도를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1장7-8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과 솔직함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자세입니다. 구도자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 죄악된 모든 생활, 이기적인 모든 삶의 방식들을 버려야 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리라”(히브리서4장13절)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새로운 생활을 그렇게 열망하지 않음
구도자가 진정으로 새로운 생활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되는 변화의 과정으로 인하여 주어질 어떤 것들을 우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그가 영적인 생활과 새로운 본성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참된 회개시에, 구도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요한계시록3장17절)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옛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시작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음
앞의 항과 밀접하게 관련해서, 구도자는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대해서 완전히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반역의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복종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타락을 역전시켜 놓는 표시로서의 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구도자가 주님의 권위와 인도하심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짓는 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주된 특징은 이전의 자기 결정들을 끝장내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14장15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가복음9장23절).
좌절을 겪고 있는 구도자에게는 자신의 이전 생활 스타일과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야심들을 버렸는지, 그리고 자신의 뜻을 주님의 것에 꺾었는 지 질문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주님이 주신 약속은 그의 것일 될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4장29절). 
믿음의 실행
이렇게 회개의 국면과 그 가능한 결점들을 이렇게 확대해서 다루게 되면 구도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적극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긴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회개 없이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지하게 깨끗하기를 열망하는 것 없이는, 갈보리의 십자가, 그 구속적인 죽으심을 붙잡으려는 목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참된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렇게 깊히 갈망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강한 열망이 없으면 그리스도에게 기댈 것도 없습니다. 저주로부터 도망할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도망할 일도 없습니다. 
믿음이란 급박함을 갖고 그리스도를 나의 모든 것, 전적으로 충분함이 되는 소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죄악된 영혼을 씻기 위해서 그 분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소망을 위해서 그 분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 분이 없으면 저주 아래 놓여져 있고, 소망이 없으며, 잃어버린 바 된 자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필요로 하고 그 분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며 전인격적인 죄의 회개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무엇을 믿고 왜 믿는다는 것입니까? 믿음의 대상은 구속하시는 구주십니다. 실상, 죄의 확신 없이는 믿음을 가질 필요도 없고, 구원의 필요가 없으면 구주도 필요 없게 됩니다. 절망감이 없으면 의존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 구원자로 믿게 하는 주된 목적 때문에 개인적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참되고, 급박함으로 열망하게 되는, 그리고 믿음으로 집요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잡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구도자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선행이나 괜챦은 성격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다는 문제가 때때로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겠지만, 만약 일 퍼센트 정도만이라도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자신의 선행 때문이라고 어떤 사람이 생각하게 된다면, 하나님에게 그가 ‘신청’(‘application')한 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해서 구원의 은혜를 약간 더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라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신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라곤 없다고 생각합니다. 갈보리가 나의 구원을 전적으로 성취하고 또한 확보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드릴 것도 전혀 없어도
오직 당신의 십자가만 붙잡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당신께 나아갑니다
도움을 구할 때 없어 당신께 나아갑니다
너무나 더럽혀져 샘물로 달려갑니다
나를 씻어주소서, 구주시여, 내가 죽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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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uilty라는 단어를 ‘죄책을 느끼는’, ‘죄의식을 느끼는’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죄책이 있는’이라고 번역한 것은, guilty라는 말이 법정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죄책’이라는 말조차도 우리는 흔히들 주관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심리적 자책감’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들(guilty, 죄책)은 어떤 죄에 뒤따르게 되는 법정적 형벌이라는 객관적 의미를 일차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2]) ‘주께만’ 범죄하였다 하는 것은, 다윗이 밧세바나 우리야에게 대해서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밧세바, 우리야를 포함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저지르게 된 죄악들이 지금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변명이 결코 아닙니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