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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종교개혁사

흑사병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

 

장로회신학대학교 박경수 교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 19)로 인해 대한민국을 비롯한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대면하게 되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도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여러 어려운 상황들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고 가슴 먹먹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의 손을 내밀어 주시어 이 고난의 때가 속히 지나가게 하시고,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회복되게 하시고,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고 겸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만을 빕니다.

 

오늘 제가 속한 교단의 한 목사님으로부터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의 전염병이었던 흑사병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묻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위협 앞에서 성도들에게 어떤 위로와 지침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연스레 종교개혁자들의 전염병에 대한 시각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계기로 종교개혁자와 흑사병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를 소개하면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정리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으로 인해 가장 비참하고 힘들었던 때는 아마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던 14~17세기였을 것입니다.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9세기에 와서야 붙여진 것인데, 이 전염병에 걸리면 피부가 검게 변하고 그 부분에 괴저가 발생하는 현상 때문에 흑사병이라 불렸습니다.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개혁자들에게도 흑사병으로 인한 고난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 츠빙글리, “지금이라도 내 영혼을 부르신다면”

 

츠빙글리가 1519년 1월 취리히의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사병이 도시를 덮쳤습니다. 이 흑사병으로 인해 취리히 인구의 적게는 1/4, 많게는 1/3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시 취리히 인구가 7,000명 정도였는데 2,000명가량 목숨을 잃었습니다.

 

츠빙글리는 흑사병으로 자녀를 잃는 슬픔도 겪었습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매일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1519년 9월 말경 자신도 병에 걸려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그는 11월 중순까지 거의 두 달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당시 그가 쓴 시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나의 힘, 나의 반석이시여
문밖에서는
죽음이 문 두드리는 소리
나를 위해 못 박히신
당신의 손을 높이 들어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당신의 음성이
내 생애의 한낮인 지금이라도
내 영혼을 부르신다면
나는 순종하겠나이다.
신앙과 소망 안에서
이 땅을 포기하고
천국을 얻고자 하나니
나는 당신의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츠빙글리는 회복되었고 이 경험은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츠빙글리가 1520년에 교황청에서 주는 성직록을 거부하고 온전히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로 돌아서는 결단을 내린 것도 이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츠빙글리의 이 절실한 신앙고백은 오늘날 스위스와 독일 개신교회 찬송가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2. 루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하라"


1527년 루터는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팸플릿을 출판했습니다. 이것은 루터가 브레스라우의 목사인 요한 헤스로부터 치명적인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해 대답한 글입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은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전염병조차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소서'라는 주기도문을 암송해서는 안 되는가? 만일 누군가가 불이나, 물이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이다."

 

실제로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덮쳤을 때 당시 작센의 영주였던 선제후 요한은 루터를 비롯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에게 즉시 인근도시인 예나로 피하라고 명했지만, 루터와 동료였던 요하네스 부겐하겐은 도시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서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양떼를 돌볼 다른 목회자가 있다면 굳이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위험지역을 떠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고 조언 하였습니다.

 

순교를 각오한 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전염병에 맞서 이웃을 돌보고 살피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강요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를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루터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죽음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이 심어준 자연적 성향이고, 성경과 역사에서도 그러한 경우를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루터는 너무나 경솔하고 분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죽음과 흑사병에 대처하는 모든 수단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약의 사용을 멸시하고, 흑사병에 걸린 사람이나 장소를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강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을 만드셨고 우리에게 주셔서 그 지식으로써 우리 몸을 지키고 보호하여 건강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과 약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마치 자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권면합니다.

 

"약을 먹어라.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라. 사람과 장소를 피하라."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악한 자가 독과 치명적인 병을 퍼트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하라고 권면합니다.

 

3. 칼뱅,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칼뱅은 어린 시절 아마도 흑사병으로 어머니를 여의었을 것입니다. 그가 청소년 시절에 파리의 학교에서 수학한 것도 고향 누아용에 들이닥친 흑사병을 피해서 간 것이기도 합니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후 1536년 스위스 제네바의 교회개혁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1538년 제네바로부터 쫓겨나 스트라스부르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칼뱅은 흑사병에 걸린 환자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칼뱅이 다시 제네바의 목회자로 돌아온 이듬해인 1542년 제네바에 흑사병이 발병하였습니다. 흑사병이 너무나도 치명적이었기에 병자들을 선뜻 자원해서 돌볼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피에르 블랑셰 목사가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겠다고 자원하며 나섰습니다. 사실상 이때 칼뱅도 환자들을 돌보겠다며 자원했지만, 제네바 시의회는 가장 중심역할을 하는 칼뱅이 그 일을 할 수는 없다며 거부하였습니다. 칼뱅은 이 소식을 로잔에 있는 동료 피에르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렸습니다.

 

"흑사병이 여기서도 격렬한 기세로 시작되었고 감염된 사람들 가운데 단지 몇 사람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동료 가운데 피에르 블랑셰가 이들을 돌보겠다고 자원하였고 모두는 잠자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무언가 필요할 때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1542년 10월 칼뱅이 비레에게 보낸 편지)

 

칼뱅은 혹시 블랑셰가 병으로 인해 죽게 된다면 자신이 그 일을 맡아야 할지 모른다며 두려운 마음을 숨김없이 내보였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자가 목회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한, 감염의 두려움 때문에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4. 베자, 『흑사병에 대한 질문들』(1579)


베자는 젊은 시절 흑사병으로 추정되는 병을 앓으면서 비로소 하나님과 자신을 돌아보고 시인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교회개혁자로 거듭났습니다. 흑사병이 자신의 소명을 찾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베자는 1549년부터 로잔아카데미에서 신학 교수로 섬기던 중 1559년 제네바아카데미가 개원하자 그 학교의 초대학장을 맡아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흔히 베자를 칼뱅의 후계자 정도로 치부하지만, 실상 베자는 그 자체로 제네바 종교개혁과 개혁교회 유산의 확립자로 평가되어야 마땅합니다. 칼뱅이 제네바의 개혁자로 25년(1536~38, 1541~64) 일했다면, 베자는 칼뱅을 계승하여 무려 41년(1564~1605) 동안 제네바의 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프랑스와 유럽의 개혁교회가 따르는 신학과 실천의 원칙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568-71년 제네바에 흑사병이 다시 들이닥치면서 3,000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제네바 인구의 1/4 넘는 사람이 희생당한 것입니다. 이때 베자도 형제인 니콜라스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학장으로 섬기던 개혁교회 최초의 신학교이기도 했던 제네바아카데미가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질병에 걸린 환자를 돌볼 책임이 있는지, 제비뽑기로 한 사람을 택하여 이 일을 맡도록 해야 하는지? 목사회의 대표인 베자는 제비뽑기에서 제외되어야 하는지, 포함되어야 하는지? 처음에는 제네바 시의회의 명령으로 베자의 이름이 제비뽑기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1570년 3월 베자는 시의회를 설득하여 자신의 이름도 제비뽑기 명단에 추가하였습니다.

 

베자는 "가련한 병자들을 위로하는 사역을 포함하는 모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목회자의 당연한 책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목회자의 동등성이라는 개혁교회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며, 목사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된다며 시의회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자가 제비뽑기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볼목회자로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1571년 전염병이 다시 돌자 이제는 제비뽑기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목사가 자신의 교구에 있는 희생자를 직접 돌보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시의회는 제네바의 목사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목회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을 택하려고 했으나, 제네바목사회는 시의회의 제안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직접 양떼를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베자는 1579년 『흑사병에 대한 질문들』이라는 책을 출판합니다. 이 책은 크리스토프 뤼타르트의 주장, 즉 흑사병은 하나님의 형벌이기에 예방하거나 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논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베자가 이 책을 저술한 것은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서 목회자가 직무를 올바르게 감당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양심의 평화를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비록 흑사병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른 수단, 즉 약이나 의술과 같은 이차 수단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고 베자는 주장합니다. 또한, 경건과 사랑이라는 의무를 성취하는 한에서, 흑사병을 피해 도망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으며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조언합니다. 이성과 경험은 "빨리 [달아나고], 멀리 [달아나고], 늦게 [돌아오라]"가 질병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임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의무로 보자면 무조건 병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공적인 직무를 생각한다면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베자는 목회자들에게 병의 원인에 대해서 논쟁하기보다는 우리의 죄에 대한 벌로 이 병을 내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성도들을 어떻게 회개의 자리로 인도할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리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독려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5.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흑사병에 대처했던 츠빙글리, 루터, 칼뱅, 베자를 살펴보면서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맞이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되짚어 헤아려 봅니다.

 

첫째로, 편견을 가진 혐오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사태의 원인이 누구 때문이라며, 무엇 때문이라며 논쟁하거나 희생양을 만들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사태를 극복하고 아픔과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을 부둥켜안아 일으킬 수 있을지에 전념해야 합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에서 희생양을 찾기 위해 유대인 혐오와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린 아픈 역사로부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죄인입니다'라는 회개가 요청됩니다. 우리의 끝이 없는 욕심,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자연과 환경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착취하려는 그 욕심이 이 불행을 낳았고,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보다 더 큰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상황이 캄캄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의 말씀,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는 이 약속이 우리로 새 소망을 갖게 합니다.

 

셋째로, 일상의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껴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음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더불어 밥 먹을 수 있는 것이 또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상이 축제이며 감사입니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너무나 당연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지도 깨닫지도 못했는지 모릅니다. 범사 감사를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악한 자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심한 전염병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날개로 우리를 덮어 주시니 우리가 그 날개 아래로 피할 것입니다. 주님의 진실함이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와 갑옷입니다."(시 91:3-4)

 

6.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였습니다.


1. Luther, Martin. "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 Luther's Works, Vol. 43. Fortress Press, 1968.
2. Calvin, John. Letters of John Calvin. Vol. 1. ed. Jules Bonnet. Burt Franklin Reprints, 1972.
3. Manetsch, Scott M. 『칼빈의 제네바 목사회의 활동과 역사』. 신호섭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9.
4. 양신혜. 『베자』. 익투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