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의 가장 대중적 경전이다. 성경으로 치면 베다는 오경에 해당하고 바가바드기타는 선지서에 해당한다. 일종의 베다의 주석서 같은 개념이다.
기타의 14장은 구원의 3가지 길로써 요가를 설명한다. 요가(yoga)는 카르마(karma), 지식( jñana), 박티(bhakti)로 나뉘며 행위의 길, 지식의 길, 사랑의 길로 불린다.
행위의 길, 곧 카르마의 대표적인 것이 시중에 나도는 요가 학원들에서 하는 하타 요가다. 단지 운동인 것 같지만 구도자의 구도 행위와 연관 있다. 물론 태권도를 사람들이 낭도나 호연지기와 연관시키지 않는 이유와 같다. 화랑도는 원래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하며 경상도 지역의 방언으로 무당을 화랭이라 부른다. 물론 현대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그리고 중국 무술에서 일부 차용했지만 그 정신이 낭도에 있다고 해서 태권도를 우리가 샤머니즘으로 대하지 않는 것처럼 현대 요가는 스포츠에 가깝다.
그럼에도 요가란 힌두교도들의 구원의 길의 추구다. 바가바드기타 14장은 이 세 가지 길을 소개하면서 이것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전능하신 주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타는 비슈누의 성육신인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왕자가 마부와 왕자로 나누는 대화로 구도 문제를 다룬다. 크리슈나는 그리스 신화로는 헤라클레스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지점은 헬라클레스의 아버지 제우스의 스토리와 크리슈나의 스토리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스토리는 예수님의 스토리와도 닮아 있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힌 형제들과 달리 엄마 레아의 도움으로 잡아 먹히지 않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되어 아버지의 배를 가르고 형제들을 구해낸다.
크리슈나의 출생 이야기는 이렇다. 캄사라는 수라세나 왕국의 수도, 마투라에서 우그라세나를 비롯한 야다바 일족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 이후 왕위에 올라 군림하고 있던 폭정을 펼치고 있었다. 캄사라는 어느 날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야다바의 일족 브리슈니족의 수장인 바수데바 아난카둔두히와 데바키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째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후 그들 사이의 아들이 태어나는 족족 모조리 죽였지만 여덟번째 아들은 죽이지 못했는데 이들이 바로 비슈누의 8번째 화신인 크리슈나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헤롯이 예수를 태어남을 알고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과 유사하며 크로노스의 아들이 크로노스를 죽일 것이라는 가이아의 신탁을 들은 크로노스의 행동과도 유사점이 있다. 인도에서는 예수도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이해하는힌두교도들이 많다.
원래 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대전에 수록되어 있었다가 후에 독립되어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는 힌두교 경전이다. 14장의 요가의 길에 대한 설명 중 재미 있는 점은 카르마(karma), 지식( jñana), 박티(bhakti)의 길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구원은 전능하신 주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카르마(karma)는 기독교 개념으로 번역하자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 말로 옮기면 "업"에 해당하며 선업과 악업, 죄업이 있고 그 업이 다 지워질 때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불교에서도 설명하듯이 이것은 억겁의 윤회로도 풀지 못한다. 불교와 힌두교 관념에서 일겁은 우주에 지구만한 네모진 돌이 있는데 500년에 한 번 천사가 나풀거리는 옷깃으로 그것을 스쳐서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이 억 번을 반복해서 씻어야 하는 카르마를 인간의 힘으로 씻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지식( jñana)은 이를 테면, 개신교 계통의 이신칭의와 비슷하다. 바른 지식이 있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을 설명할 때, 믿음은 도구에 불과하고 이 역시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지식의 길은 이런 종류의 도구의 길을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박티(bhakti)는 사랑의 길이다. 사회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주요한 목적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선업을 쌓으면 그것이 그를 구원한다고 요기들은 믿은 것이다.
그 마지막이 은혜라야 가능하다고 말하는 지점은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은혜의 은혜 됨은 율법의 개입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은혜였겠으나 완악한 인간은 깨닫지 못하니 인식의 깊이를 더하시는 방편이 율법의 개입인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접촉점은 여전히 세계 문화와 신화들 곳곳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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