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은 거짓말쟁이에 거짓 목사다. 능동순종으로 어떻게 안 되니 논쟁 중 내가 사용한 propagation이란 용어를 두고 나를 무슨 피가름 유사 교리 전파자로 누명을 씌어 합동 총회에 제소를 했다.
이 단어의 최초 사용자는 어거스틴이며 벌콥의 조직신학과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에 같은 개념 및 직접 용어를 사용한다.
내가 쓴 단어는 벌콥의 용어다. 어거스틴은 죄가 생육법을 통해 유전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의 의화 교리와 관련이 있다. 육신을 하등한 것으로 생각했고 이는 아퀴나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의화란 이 하등한 육신에 의라는 실제가 주입되는 개념이다. 이 교리는 그 자체로 문제라기보다 주입받은 죄인이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현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죄를 지은 죄인의 육신에 의라는 실제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죄를 의의 부재로 설명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 개념이다. ..
문제는 다시 죄를 지은 죄인이 고해와 보속을 통해 의를 얻는 과정이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것과 같다는 데서 발생한다. 즉 다시 의를 얻는 과정이 마치 보속의 행위로 얻는 보상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인죄와 의화 교리에 수정을 가한다. 죄를 법적 책임과 실제적 세력으로 구분했다. 이 법적 책임은 칭의에 의해 제거되며 법, 곧 언약에 의해 아담으로부터 후손이라는 생물학적 매개없이 직접 전가된다. 이때 사용하는 용어가 imputation, 전가다.
그에 비해 죄의 세력은 실제로 여전히 거듭난 자에게도 상존하며 성경이 이를 주로 육체나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은 실제 우리 육신에 상당한 기원을 두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화되기 이전의 어거스틴의 인죄 개념이가도 하다. 이는 아담으로부터 직접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부모라는 매개를 통해 전달된다. 이때 사용한 벌콥의 용어가 propagation, 즉 생육법을 통한 전달이다. 이는 다윗의 시편 51편에 모태에서 죄 중에 잉태되었나이다는 표현에 성경적 기원이 있기도 하다. 이는 생육법이란 용어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및 소요리 문답에 표현되어 있다.
이런 인죄의 구분의 목적은 칭의와 성화로 의화라고 뭉둥거려진 교리를 정교하게 표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즉 법적 책임으로서 사망의 형벌은 칭의를 이루신 순종에 의해 칭의로, 우리 안에 요전히 남은 죄의 세력은 성화를 이루신 효력의 주입, 곧 은혜의 주입으로 제거되는데 이때 은혜는 구원의 공로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공로다. 이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고 마침내 우리가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 것이다.
이 은혜로 우리는 순종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는 여전히 부족하고 부적절하나 이를 온전케 허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다.
이렇게 칭의와 성화 교리를 구분하면서 인죄에서 법적 책임과 죄가 여가한 결과에 대한 실제적 보상으로서 책임을 구분했다.
이런 걸 몰랐다는 건 미쿡 살면서 벌콥의 조직신학을 원서로 한 번도 제대로 드려다 본 적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미쿡 여러 학교들을 타이틀로 걸어놨던데 제대로 수학은 했는지 그냥 자리만 채웠는지 그마저도 가라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