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는 세 종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첫 이미지는 자신에 대한 것인데 자신을 괜찮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경우도 존재해요. 이것은 조금 이따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반대로 "나는 안 될 거 같고" "환영받지 못할 거 같고" "성공하지 못할 거 같고" "사람들이 싫어할 거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 자기 이미지는 둘째 이미지인 타인의 이미지와 연결된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그것을 인정해주거나 사랑해주거나 하는 타인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데 그런 여러 차례의 성공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에 있는 타인의 이미지는 나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공적인 경험을 해도 계속 나를 별로라고 생각할 것 같다는 "정서"가 내 "사고"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타인의 이미지는 한국인에게는 "눈치"라는 형태로 모든 타인에게 모든 경우 사용가능한 모델이 내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고"와 연결된 거 같지만 사실 눈치 있는 행동들은 "느낌"이나 "정서"에 기대어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이미지는 비교적 나중에 출현해서 이성이나 사고라는 고등 기능에 의해 운용이 되지만 그 베이스는 역시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미지는 이런 범용의 타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이 경우는 마태복음 18장의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은 탕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첫 이미지 때문에 이런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데 아무리 배워도 "내가 별로 일 거 같고" "날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이런 자기 이미지 때문에 그것과 결을 달리하는 하나님의 탕감이 그의 정서를 바꿔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회개를 하고 죄를 고백하고 공동체 안에서 이런 활동을 하더라도 그때는 이것이 성공적이라고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은 타인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나를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진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배우지만 이 문제가 극복되지 않게 되고 이 때 사람들은 자의적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일 수 있고 그것이 반율법주의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타인 이미지와 자기 이미지를 동화해서 평가자나 판단자의 입장에 서는 방식을 의미하고 반율법주의는 맨 앞에 설명했던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발생하는데요.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 이미지는 주요 양육자와 스트로크를 통해서 건강한 자기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타인과 관계를 발달시켜야 할 나이가 되면 범용인 타인이미지가 발달하게 되는데 이 이미지는 자기 이미지를 닮아 있어서 환상과 상상등으로 버무려진 이미지입니다. 타인 이미지는 그렇게 쉽게 이상화되는데 현실적 감각이 없는 유아의 자기 이미지가 환상과 상상 등에 의해서 전능적 자기 감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자기 이미지를 형성하다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아이는 대상과 관계맺는 경험을 포기하고 자기 상상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런 경우 아이들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거나 양육에서 돌봄의 시간이 거의 없는 경우가 생기고 어린 시절 그나마 효과적이었던 상상과 환상에 몰입하는 것이죠. 아이들이 하는 인형놀이 블럭놀이 로봇 놀이 등은 이런 관계를 발달시키는 상상과 환상이 동원된 놀이들입니다. 이것은 범용적인 이웃 관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실패한 아이들이 자기애로 후퇴를 하게 될 때 비교적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도 문제가 됩니다.
이런 성인들은 타인과 소통이 어렵고 자기를 강요하거나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무엇을 들어도 자기 위주로 자기를 높이는 방식으로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그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상황을 해석하고 거기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반율법주의와 관련이 있는 이유는 이렇게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율법의 자리에 율법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에 기대어서 타인을 평가 판단하는 자기 이미지와 타인 이미지를 동일시 하는 방식이라면 반율법주의는 아예 타인과 하나님 이미지의 자리에 자기를 둠으로 자신이 율법의 기능을 하는 자리에 앉아 버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이죠.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자기 이미지가 부정적이든지 혹은 지나치게 긍정적이든지 어떤 사람이라도 복음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정서적 세력이 변화되는 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신앙감정론에서 "참된 믿음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것입니다. 인지나 신념은 착각에 불과할 수 있고 자기 합리화나 정당화의 체계로 작동할 수는 있고 상황에 잘 적응할 수는 있어도 우리 존재를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정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정서적 세력의 변화가 그 이미지에 투사되어 우리 의식 표면에 집중되는 총체적 이미지를 교정합니다. 이 총체적 이미지가 자기 이미지이며 타인 이미지이며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이 구조 자체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질서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인격이란 그렇게 상호 돌봄과 이해의 소통적 특징을 지녀야 합니다. 프로이트가 자아를 설명할 때도 이 이미지는 적어도 내면의 욕동과 내재화된 외부의 규범과 규율을 갈등을 중재하는 중재적 기능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내부적 체계이기만 한 까닭에 자아는 폐쇄적이고 단절적 체계로 이해되고 실제로 그렇게 단절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맨 앞에서 설명했던 "나는 안 될 거 같고" "환영받지 못할 거 같고" "성공하지 못할 거 같고" "사람들이 싫어할 거 같은" 이미지는 타인의 어떤 긍정적인 스트로크에도 계속 단절적으로 자기를 그렇게 평가하고 위축되는 데서 이런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한 건강한 성인은 이 세 이미지 간의 상호 교류를 통해서 이미지들을 수정하고 실제 세상의 여러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을 성경과 어머니인 교회를 통해서 배우면서 수정하고 성장해 갑니다.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것은 아직 내면에 주입된 감정적 세력으로서 "믿음"이 생기기 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믿음을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주입된 습관"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습관은 일종의 감정적 세력이며 초자연적인 은혜의 주입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외적 방편인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상호작용하면서 우리 안에 비슷한 종류의 건덕인 소망과 사랑을 형성하게 됩니다. 주입된 믿음의 최종적 목표는 바로 이 사랑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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