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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개혁주의 구원론 1

개혁주의 구원론 1 


제 1 강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1~11)

 
김성수 교수 


1. 도입 
본 강의안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도리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강론 될 내용의 첫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성격을 띠고 나타납니다. 바로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신학적 명제 때문에 흔히 세인(世人)들로부터 '복음의 독선' 내지는 '기독교의 독선' 문제가 심심치않게 제기되곤 합니다. 이 때에 기독교를 독선(獨善)적인 종교로 혹평하거나 폄하(貶下)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구원론과 관련해 지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타종교와 비교해 유독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타종교에는 상대적으로 참 된 구원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돼 심한 빈축과 반발을 사기가 일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갖는 보편적인 특징은 구원론입니다. 종말론적 구원을 보증할 수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일 수 없습니다. 이때 구원은 다름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을 우선적으로 가리킵니다. 따라서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와 관련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론 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여타의 제반 종교는 선행을 유일한 조건과 수단으로 강조합니다. 지속적인 선행을 통해 마침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 말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종교가 비록 수행(修行)의 방식에 있어서 상호간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구원의 정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일지라도 동일한 정상에서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자력(自力)구원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수행의 연마를 통해 마침내 선의 경지 곧 저들이 말하는 구원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점에서 본질적으로 견해를 달리 합니다. 결코 선행과 노력 등 제반 인간적 행위를 구원의 필수 조건이나 방편으로 전제하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그렇게 노력하고 수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罪性)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구원의 본질은 일체의 죄로부터 용서를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 일이지(사59:2, 롬5:10) 결코 자력(自力)수행을 통해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득도(得道)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용서함을 받는 기독교적 구원의 도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선행(善行)으로 말미암는 자력(自力)구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행의 대가로 지불되는 보상의 개념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사실을 전제하는 데서 오는 타력(他力)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해 주는 대속(代贖)의 방식 말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치로서 말입니다. 여기 한 사람의 노예가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상 결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한 한 주인이 이 노예를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 노예는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그 노예에게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노예와 관련된 일체의 모든 노예 문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순간 이 노예는 더 이상 노예의 신분이 아닙니다. 자유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노예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상태에서 그 주인의 은혜로운 대속적인 구속(救贖, atonement)의 방식에 힘입어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어느 누구도 이 노예를 더 이상 노예로 대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법적으로 명실상부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력(他力)구원의 진상이 이렇습니다. 독선적인 종교로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의 당위성이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타종교의 창시자가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함이 없이는 결코 남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속물의 자격은 죄와는 무관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 죄와 무관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 가운데 오신(요3:16) 유일한 대속물(막10:45)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대속주가 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고 자증(自證)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행4:12). 이상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기독교의 복음만이 유일하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명제 하에서 그 독선적 종교로서의 당위성이 정당화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위해 요구되어지는 대전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심정으로서 우리 각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입니다(롬3:23, 5:12). 이는 마치 시장기를 느끼지 못할 때 음식을 요구할 수 없으며, 자신이 사경(死境)에 처해있지 않으면 결코 절박한 심정으로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이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될 때, 본능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의 공의적인 심판을 의식해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어떻게 해야 죄 문제를 해결 받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지를 심각하게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0-31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지적하는 대로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인 심판으로서 형벌에 해당합니다(롬6:23). 예비적 형벌 말입니다. 죽음을 예비적인 형벌로 설명함은 죽음 후에 종말론적 심판으로서 최후의 선고인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마25:46). 모든 불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인생의 종말이란 사실보다 그 후에 심판이 있으며 영벌(永罰)로서의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본능과 본성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불신자들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데서 나와진 법정적인 효력이 성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일체의 정죄로부터 이미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롬8:1-2), 의롭게 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롬3:22-24, 요1:12). 
이상의 사실과 관련해 오늘 본문은 구원의 절대 필요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죄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실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한결 같이 종말론적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정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신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구원에로 인도하는 첩경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2. 전개 
본문의 배경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적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판정을 빌미로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하려는 데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첫째, 본 사건의 개요 
일단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 성전에서 일단의 무리들에게 늘 그러셨듯이 '천국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고 계셨습니다(마4:23). 종교 지도자들은 여인을 무리들 중앙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이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고 예수님께 고발합니다. 계속해서 저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치라'고 돼 있다고 강경한 어조로 송사(訟事)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겠느냐는 저들의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질문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저희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라'는 기술을 통해 저들의 속내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여인에 대한 정당한 판결을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은 진실 된 마음의 발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책잡고자 하는 저의(底意)가 담긴 사건이란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이 예수님에게 악의적인 시험이며 고소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으로 작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저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에게 기대하고 있는 답변이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고소거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의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이는 극한 사랑의 정신에 근거해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원수까지도 용서하라는 주님 자신의 말씀과 교훈과 사역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발언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 말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해 주라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 또한 유대인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상 모세의 법을 적극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인해 율법에 불순종하는 위법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예수님은 진퇴양난에 처한 셈입니다. 저들이 고의적으로 쳐놓은 덫에 영락없이 걸려든 셈입니다. 이는 본 사건과 관련해 처음부터 저들이 노렸던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저들은 처음부터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정당한 판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책잡아 완벽하게 고소하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속으로 일말의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줄로 확신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셨습니다. 돌로 치라든가 아니면 용서하라는 등의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대신 땅에다 무엇인가 쓰시려는 듯 몸을 굽히신 채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전혀 예상 밖의 일입니다. 저들의 마음이 점차 조급해져 갑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채근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주님이 몸을 일으키시며 돌연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히셔서 땅에 무언가 쓰십니다. 전혀 뜻밖의 말씀입니다. 둘 중 하나의 답변을 기대했었던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역습(逆襲)을 당한 셈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듣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는 수세의 입장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절묘한 답변인 동시에 모든 인간 실존을 향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으로서 양면성을 띤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잠간의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예수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차선의 관점입니다. 결과론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너희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숨겨진 죄인으로서, 그 분 앞에서 숨겨진 죄인이나 드러난 죄인이 일반일진대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어찌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 있단 말이냐'는 식의 무언의 책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관점은 저희를 향해 던지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인을 치라"는 예수님의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잠시 후 예수님께서 몸을 펴신 후 "다들 어디 있느냐"고 여인에게 질문하십니다. "없다"고 여인이 대답합니다. 이때 저자인 사도 요한은 종교지도자들과 일단의 무리들이 그 자리를 소리 없이 떠나게 된 원인을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실에서 찾습니다. 적어도 당시 상황에서 간음한 여인에 비교한다면 저들은 의인의 자리에 서 있는 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재판관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여인과 예수님을 정죄 할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던 차에 전혀 예상치 않던 질문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양심으로 하여금 저들의 숨겨진 죄성을 여지없이 폭로시켜 버림으로 저들을 정죄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비록 우리의 전 인격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았음을 입증해 주는 최소한의 흔적으로 남아 기능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입니다. 
둘째, 본 사건이 주는 신학적 명제들 
(1)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본 사건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어른에서 젊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그 자리를 떠났다고 저자는 기술합니다. 이는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심한 정죄 의식을 갖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지라도 각인의 심령 속에 숨겨진 범죄의 요소와 내용들이 있었음을 주관적이고 동시에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저들의 정죄 의식은 당시 저들에게만 특별히 해당되고 적용되는 예외적인 경우일까요. 이렇게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그 때 그 상황에서 현장에 저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들 각자도 예수님의 질문을 동일하게 듣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음성을 말입니다. 어떻게 처신했을 것 같습니까. 어떤 반응이 나왔을 것 같습니까. 우리라면 예수님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당당히 남아서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답변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지요. 아마도 우리라고 해도 그때 그 사람들처럼 한결 같이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런 행동은 동시에 우리 또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그 말씀 앞에 죄인인 사실을 인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리 모두가 아니 전 인류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결정적인 행동을 대변함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음의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정죄 의식을 일으키는 일차적 원인자를 양심으로 규정합니다. 8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그렇습니다. 본 사건을 통해 인간의 전인격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한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의존해 살았음을 증거해 주는 유일한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물론 오늘날 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면에서 유일하게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의 척도로 기능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때로 양심이 화인(火印) 맞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이런 기준을 적용시키기란 용이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적어도 본 사건의 경우 주님의 질문 앞에서 그 자리에 당당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문제와 관련해 아무도 예라고 답변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를 정죄하는 양심의 책망 앞에서 아무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증거 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음으로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 자체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정죄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인으로 판정하신다는 의미와 동질성을 띱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서(啓示書)이기 때문입니다. 롬3:10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5:12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59:2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창6:5-7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들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성경은 명백히 증언합니다. 
(2) 죄의 기원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양심의 가책'으로나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정죄'에 근거해 우리 모두가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될 때, 정작 우리 안에서 정죄 의식을 유발시키는 구체적인 범죄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죄인으로 정죄 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가 말입니다. 성경은 다섯 가지 측면에서 죄인으로서 우리가 소유한 부인할 수 없는 범죄의 유형을 지적합니다. 
첫째가 원죄사상입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기인된 최초의 죄가 그의 후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와의 연합을 통해 태생적으로 전가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 후에 특별히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셔서 에덴동산에 두시고 만물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위임해 주셨습니다(창1:28). 이를 신학적으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만물의 영장이요 창조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저들에게 부여된 이런 특권적인 사실에 근거해서입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만물을 통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확장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가시적인 표상으로 보여주는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함께 두셨습니다(창2:9).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계를 시키셨습니다(창2:16-17). 이는 태초부터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돼 있음(벧전1:23)과 순종이야말로 창조의 은혜를 입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향한 최선의 경외와 경배행위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의 순종력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여기서부터 현재적으로 적극 받아 누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그의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객관적인 척도로 작용합니다(약2:17, 26). 
그런데 이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사단이 뱀을 통해 먼저 하와를 미혹한 것입니다(창3:1-5).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은 지존자와 선악을 분별하는 심판자가 이 될 것임을 유혹하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시험했습니다. 이 일에 하와가 먼저 미혹 당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담에게도 줍니다. 아담도 이를 거절하지 못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뱀의 미혹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창3:6).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기원입니다. 소위 원죄(原罪)사상 말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후 아담의 후손들은 한결 같이 원죄의 영향을 받게 돼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득적으로 죄인의 신분으로 출생하기에 이릅니다. 시51:5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아가 성경은 인류의 본성 속에 내재된 보편적인 원죄사상과 관련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롬5:12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본 절에서 '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인류의 조상으로서 아담을 가리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란 지적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표현은 아담의 범죄행위가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병처럼 태생적으로 전가되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아담의 후손들로서 온 인류는 아담이 범한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사망으로서의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은 다름 아닌 죄가 근원적인 원인이 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사망의 문제 또한 극복될 수 있다는 신학적 명제를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원죄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면제될 수 있는 길은 전무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이런 사실로부터 강력히 요구됩니다. 
둘째는 마음에 품은 죄입니다. 이는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류의 본성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죄성이 인간의 마음에 온갖 악한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실정법에서는 마음의 품은 죄를 구체적인 죄목을 적용해 형벌로 다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에 품은 죄란 어떤 한 범죄행위가 외견상 구체적으로 행동화되기 이전의 마음의 상태까지를 범법행위로 간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의 법 적용은 현행법상으로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사실상 구체적인 범죄행위는 이미 마음에서 품은 악한 생각이 외적으로 반영된 것이기에 말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에 품은 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마5:27-28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본문은 소위 산상수훈의 강론 중 율법을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을 통해 스스로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율법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강론하신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간음이라는 구체적인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면 간음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현행법의 성격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님은 율법에 명시된 간음죄의 본질을 근본에서 재해석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 간음죄란 특정한 여인을 향해 이미 마음에서부터 품은 음욕이 자제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결국 외부적으로 표출된 구체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간음죄의 본질은 사실상 그런 행동을 유발시킨 마음에 품은 음욕에서부터 근본 원인을 찾아야 된다는 지적입니다. 마음에 품은 죄의 실상이 이렇습니다. 
이런 동일한 원리의 해석과 적용으로 인해 이웃을 향해 분노하거나 욕을 한다면 이미 살인죄가 성립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죄를 다루는 성경의 관점입니다(마5:21-22). 따라서 비록 우리가 구체적으로 특정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마음으로부터 시기 질투 미움 등의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들을 품은 경험들이 있다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정죄로 판정돼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하나님의 관점은 원죄사상에 근거해 마음에 품은 악한 생각까지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의 기준이 준엄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마음에 품은 악한 생각까지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정 앞에서 당신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겠는지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시며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셋째는 자범죄(自犯罪)입니다. 이는 마음의 품은 악한 생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면화되는 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던 일체의 옛사람의 행실을 포괄적으로 망라하는 죄목들입니다(엡4:23). 다시 말해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들이 구체적인 행실로 표출되는 죄목들 말입니다(갈5:19-21, 골3:5-8). 자범죄에는 구분상 고범죄(故犯罪, 시19:13)와 과실죄(過失罪)까지도 포함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인 죄목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자범죄는 죄의 성격상 그 기원을 원죄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원죄에서 비롯된 마음의 악한 생각들이 일생에 걸쳐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죄와 마음의 품은 죄까지를 정죄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자범죄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범죄행위로 인해 가장 확실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하겠습니다(눅12:47). 이와 관련해 계시록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대에서 자범죄의 죄목들이 엄중하게 심판에 처해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계21:8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서 둘째 사망이란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지 못한 모든 불신자들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넷째는 불신(不信)죄입니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인류 앞에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지 않는 죄를 일컫습니다. 성령께서 이런 불신의 행동을 책망하실 것에 대해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요16:8-9, 살후1:8-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고 밝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기보다 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요3:17, 1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죄인 된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게 될 때 곧 불신죄가 적용됩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만이 저들 위에 내려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신은 그 자체로서 심판을 수반한다고 성경은 진술합니다. 요3:18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왜냐하면 불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거부하는 배역행위로 곧 죄로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은혜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당신의 구원을 그토록 소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수납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성령 훼방죄 곧 참람죄가 있습니다(마12:31-32). 이 죄의 특징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모든 유형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개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음에 반해 성령 훼방죄는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심판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죄는 죄인을 회개시키는 당사자로서 성령(요16:8, 고전12:3)자체에 대한 거절이므로 스스로 사죄의 기회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죄는 하나님께서 유독 이 죄만을 차별해서 용서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통로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방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외면한 것이기에 더 이상 용서의 길이 보장될 수 없다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범죄행위에 해당될까요.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성령 훼방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마12:31-32은 문맥상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24절)을 향해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당시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하시는 축사(逐邪)사역을 바알세불(사단)을 힘입어 거짓 행한다고 시기와 질투 어린 감정을 갖고 악의적으로 비난했던 것입니다. 명백한 성령의 사역을 마귀의 사역으로 폄하(貶下)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이런 저들의 소행을 가리켜 성령 훼방죄에 해당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의 내용을 통해 성령 훼방죄에 해당되는 대상이 전혀 불신자가 아닌 나름대로 신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저들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신앙관을 십분 감안할지라도 분명히 유대교인들로서 하나님을 믿었으며 구약성경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소유한 자들이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히6:4-6과 10:26-27을 통해 동일한 관점에서 동질의 범죄에 대한 사면(赦免)의 불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들 또한 문맥상 추정해 볼 때 외형적으로 신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교리적 측면이 아닌 현상적 측면이 암시적으로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따라서 택자들인 경우 반드시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에 접촉될 것이기에 결코 중도에서 구원을 잃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령 훼방죄에 해당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 훼방죄의 현대적 적용이란 관점에서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외적(外的) 소명을 받아서 자의(自意)든 고의(故意)든 마치 신자인양 살고있는 사람들에게서 제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특별한 유형의 범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상 다섯 가지 유형의 죄의 구분을 통해 죄인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죄의 실상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분별해야 할 줄 압니다. 막연히 죄의식을 느껴서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희생을 통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의 절대적 진정성과 가치성을 자칫 폄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본문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율법의 법정적 성격상 범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곧 형벌에 처해져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인을 돌로 치라는 형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죄질에 따라 때로는 죽음일 수도, 구금(拘禁)일 수도, 변상일 수도, 일정 기간 노역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다양한 조치가 취해 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죄는 마땅히 응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로 죄의 일차적 형벌은 사망입니다(롬6:23). 죄형법정주의는 신앙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범죄한 인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형벌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왕노릇하게 됐다고 증거합니다. 죄의 값으로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롬5:12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본문에서 저자는 죄와 사망의 기원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사건에서 찾고 있습니다. 당시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결과로 원죄가 성립됐으며 원죄의 결과 죽음이 형벌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법인 창2:17은 이런 사실의 조건적인 단서조항을 분명히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행위가 그의 후손 모두에게 원죄(原罪)라는 죄성을 태생적으로 전가시켜 한 순간에 인류를 죄인으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그와 연합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신분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선악과 금령법의 조건에 따라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로 죽음이 형벌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예외 없이 죽는다(man is mortal)는 당위적 명제를 통해 성경이 진술하는 바 모든 사람이 죄인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죄의 종말론적 형벌은 사후의 심판과 둘째 사망입니다(히9:27, 계20:15, 21:8, 살후1:8-9). 우리는 죄에 대한 일차적 형벌이 죽음이란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 말하기를 죽음이 죄에 대한 최종적인 형벌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죽음 후에 최종적인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나아가 그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과 불가피하게 연계돼 있음을 기술합니다. 따라서 재림의 성격은 불신자들에게는 종말론적 심판을 성도들에게는 전인적 구원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띠고 다가옵니다. 히9:27-28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모든 불신자들이 이 심판에 해당됩니다. 자기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20:12, 살후1:8-9). 그리고 심판의 판정에 따라 불못과 영영한 불(마25:41)로 표상되는 지옥의 영벌에 처해집니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설명합니다(계20:14, 21:8). 이런 의미에서 육으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 셈이지만 육과 영으로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게 된다는 신앙적 논리가 성립됩니다. 
(4)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아담 안에서 범죄 한 인류는 예외 없이 사망에 갇혀 심판과 지옥의 영벌에 처해질 운명이라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진술임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8:11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실과 여인이 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여인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반면 죄용서 함을 받은 여인은 감사함으로 다시는 범죄 하지 말아야 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가 철저히 자기 부인과 포기를 통해 하나님께 절대 순종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란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일단의 무리들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조용히 자리를 떠남으로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도 종교 지도자들이나 무리들처럼 동일한 죄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십니다(빌2:6).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신 분입니다(요3:16, 1:14). 인류의 죄를 구속(救贖)하기 위한 대속물(代贖物)이 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막10:45. 그래서 예수님을 신학적으로 신인(神人, God-Man)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신성(神性)과 사람의 인성(人性)이 상호 충돌 없이 그 분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해 활동하시는 불가사의하신 분말입니다. 예수님의 본성이 이런 식으로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예수님을 향해 죄가 없는 분(히4:15, 요일3:5),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고후5:21), 그리고 죄를 범치 않은 분(벧전2:22)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적으로 소유하신 분으로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에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신 유일한 분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행4:12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만민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기독교 복음이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들도 인간인 이상 자신들의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함이 없이 추종자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속(代贖, substitution)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동일한 죄인의 신분에서가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대속의 구원자가 되셔서 여인의 사면(赦免)을 당신의 구속 안에서 선언하신 구속사적 계시행위입니다. 우리는 동질의 사건을 막2:1-12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赦)해주시는 가운데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고 선언하심으로 자신의 구세주로서의 신성을 강력히 피력하심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심은 그런 사실로 인해 여인의 죄가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이 사건 기록을 통해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독자들에게 강변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유일한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죄 없다하시고(롬8:1, 히9:12, 10:17), 구원을 선물로 주시며(엡2:8), 의롭다고 하셔서(롬3:24, 28절) 심판에서 면제해 주실 뿐만 아니라(요5:24), 당신의 자녀와 친(親)백성으로 삼아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요1:12, 벧전2:9).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롬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셋째, 본 사건이 주는 교훈 
이제 본 사건은 예수님의 역습(逆襲)적인 의외의 질문에 의해 사태가 진정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일단의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들이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죄인 된 신분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자성(自省)과 회개 없이 그 자리를 떠남으로 예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사면과 구원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여인은 그의 죄가 상대적으로 중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은혜로 베푸시는 죄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실을 저자는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복음에 접촉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미 복음에 접촉돼 구원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딤후4:2, 행1:8, 마28:19-20). 이때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을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음으로 정죄 받아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막16:15-16, 요3:18).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십자가의 도의 복음을 들어야 될 뿐 아니라, 듣게 될 때 믿음으로 수납해야 하는 필연적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렇게 복음에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있습니다. 믿으면 구원이요 거절하면 심판이 뒤따른다는 사실 말입니다. 
3. 결론 
본 사건(요8:1-11)은 구원의 도리에 관한 중요한 복음적 요소들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의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인 사실을 감안하면 본 사건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인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인류를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질문이며 동시에 우리의 영적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돌로 쳐 심판할 수 있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여인과도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오직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실존(實存)이 이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마음의 중심에서 공감하게 될 때 우리가 같은 심정으로 취해야 할 태도는 수치심으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이렇게 하나님께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라고 말입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긍휼에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