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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개혁주의 구원론 2

개혁주의 구원론 2 


죽음 후에는 ....(히9:27, 계20:11-15, 살후1:7-9, 마25:31-33) 
김성수 교수
1. 도입
우리는 지난 1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란 사실을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살펴봤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재판하는 자리에서 주님은 무리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십니다(요8:7). 예수님의 돌발적이고 도전적인 이 질문에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힌 채 차분히 이성적으로 자신의 실존(實存)을 돌아보며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나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 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실존에 대한 정체성을 묻는 예수님의 본질적인 질문에 아무도 감히 의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저들을 송사한 나머지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경우는 동시에 우리의 경우를 대변합니다. 저들이 죄인이라면 우리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롬3:10) 모든 사람이 한 사람 아담의 원죄 안에서 한결 같이 죄인이 되었다고 진술합니다(롬5:12). 
그렇다면 이들이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범죄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무슨 숨겨진 죄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질문에 그토록 주눅이 들어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저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사실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보편적인 죄의식은 자칫 양심상의 문제 이상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양심 곧 심증(心證)으로는 가책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서 구체적인 범죄행위와 관련해서는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 평생을 철저한 준법정신에 입각해 살아가는 것을 통해 실정법을 위반한 경우가 전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상대적으로 선행과 공적을 쌓은 것으로 인해 현행법상 범죄와는 무관할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포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에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 법의 구속력(拘束力)은 불가피하게 구체적인 범죄행위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고백하지 않는 한 양심의 문제까지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요8:1-11의 사건 속에서 무리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떠나갔다는 의미는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일 수도 있고,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원죄사상에 근거한 보편적인 죄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들의 죄의식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죄의식으로 느껴지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죄의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저들이 단지 자리를 떠남으로 주님을 회피한 채 죄의식을 무마시키려했듯이 그런 식으로 자기 안에서 죄책(罪責)의 문제를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강의에서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죄의 항목들을 거론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 말미암는 원죄사상(창3:6)과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마음에 품은 악한 생각과 제반 욕심들(창6:5, 마5:21-22, 27-28), 그리고 마음의 생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제반 자범죄(갈5:19-21, 골3:5-9, 계21:8, 엡4:23),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죄(요16:9, 살후1:8, 막16:16, 요3:18-19), 마지막으로 성령훼방죄(마12:31-32, 히6:4-6, 10:26-27) 곧 참람(僭濫)죄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이상의 죄목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면 그는 의로운 자로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율법 앞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죄인 된 신분으로 정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롬3:20, 5:20상).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롬3:28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나아가 죄의 본질이 어원적으로나 성격상 하나님의 표적 곧 말씀에 대한 "절대순종"으로부터 이탈된 것을 의미하기에 일체의 범죄행위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심판을 받아 형벌에 처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당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진술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그 법정적 성격상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이 불가피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이런 이유로 열 가지 율법 중 아홉을 지키고 나머지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면 아홉을 지켰다는 이유로 정상을 참작해 나머지 한 가지 범죄사실이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의 원칙에 따라서 말입니다. 이로 인해 정당하게 처리되지 않은 죄는 끝까지 우리를 추적해 마침내 죄값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민32:23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 알라." 이는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이스라엘이 율법의 명령을 좇아 가나안 족속들을 전쟁의 방식으로 몰아내고 그 땅을 정복하지 않는다면 불순종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값은 법적 성격상 반드시 지불돼야 합니다. 죄는 죄책(罪責)이 따르는 바 마땅히 형벌을 수반합니다. 이때 죄의 형벌과 관련해 성경은 죄 값으로 죽음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뒤따를 것임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나아가 종말론적 심판은 인류를 종말론적 영생과 영벌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을 명백히 증언합니다. 이런 성경의 지적은 죽음이 비록 지상적 삶의 마감일 수는 있어도 본질에서 생의 최종적 종말이 아님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 후에 사후(死後)세계가 엄연히 실존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 2강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인 사실로 인해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형벌로서 죽음과 그 후에 다가올 종말론적 심판 등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사후세계의 몇몇 실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전개
모든 인류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유하는 인생살이에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라는 사건입니다. 이는 사람이란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히9:27) 지상적 삶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세 이래로 모든 사람 앞에 죽음은 절대 강자의 권세로 찾아옵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거절하거나 대항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단지 죽음의 권세 앞에 속수무책의 패배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은 가히 온 인류를 향해 불문율(不文律)로 역사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떻게 인류에게 숙명적(?)으로 찾아온 것일까요. 죽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나아가 죽음은 과연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 곧 내세로서의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없다면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면류관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창1:26-27)의 생명적 가치와 미물(微物)의 그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만일 내세가 있다면 그 세계는 과연 어떤 세상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죽음의 필연성과 관련해 줄기차게 제기된 의문사항들입니다. 세상 철학자들과 여러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이론과 교리를 통해 자기들 방식으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옳은 것이 없습니다. 각양각색입니다. 반면 이런 문제와 관련해 오직 기독교만이 명확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을 창조하시고(창1:1) 그 중의 인간을 유독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창1:27)만이 사람과 세상만사의 시작과 결국을 아시는 유일한 분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벌로서 죽음
우선적으로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선언함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비롯됐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롬5:12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런 사실로 인해 롬6:23에서는 이르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단정적으로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사망이라는 죽음의 불청객이 찾아왔고, 이 사망의 원인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창2:17, 3:6, 17-19)를 통해 전 인류에게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법에 불순종 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을 때, 그는 이후 출생할 후손들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모든 인류에게 동시적으로 원죄의 죄성을 전가시킨 셈입니다. 아담의 범죄행위가 모든 인류에게 원죄로 기능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원(起原)합니다. 이 원죄사상은 죄의 뿌리로서 이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유형의 죄의 근원이 된다는 사안(事案)의 중요성 때문에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 당신의 유일한 교제의 대상으로 사람을 지으실 것을 내정하시고(창1:26-27) 이들을 창조의 면류관으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피조물에 대한 모든 창조자의 통치권을 사람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창1:28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복의 내용이 신학적으로 소위 문화명령의 약속입니다. 인류의 조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적극 순종함으로 마침내 세상 가운데 신정국가로서 명실상부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특징적 성격은 하나님의 통치가 권세있게 시행되는 것으로 다른 무엇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권이 막힘 없이 시행돼야 함을 상징적 표상과 실제적 사건으로 이미지화 해서 보여주신 계시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의 하사(下賜)입니다. 창2:16-17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선악과에 첨가된 하나님의 조건적 금지명령은 본질에서 하나님의 문화명령이 정상적으로 수행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주신 복된 약속이지 결코 이들을 실족케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놓은 함정이나 고의적으로 설치한 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상 그런 의도는 절대 불가능한 처사입니다. 그 분의 사역의 성격은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롬8:28).
이때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이 하와를 미혹함으로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뱀은 죽지 않음을 전제하면서 오히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은 동일한 지존자와 심판자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함으로 하와의 욕심을 자극합니다(창3:5). 그렇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입니다(약1:14). 마침내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담에게도 권합니다. 아담도 하와의 권유에 함께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동시적으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선악과 금령법에 조건적으로 부여된 죽음이 형벌로 저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원죄의 기원입니다. 이후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이 원죄의 죄성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생적으로 전가되는 것을 통해(시51:5)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원죄사상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롬6:19상, 롬3:23 5:12).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타락을 정죄하셔서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적 형벌로 선포하셨던 죽음을 마침내 집행하신 것입니다(창3:8, 5:3-5). 이 죽음의 선고는 처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의미하는 영적 죽음으로 시작됩니다(창3:8). 그리고 이런 결과로 말미암는 육체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창5:3-5, 롬5:12, 6:23).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즉각적인 전인적 죽음이 주어졌다면 처음부터 인간의 생육과 번성 및 땅에 충만해지는 역사는 불가능했을 테니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적 방식을 통해 마침내 죽음이라는 형벌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한 이치로 작용하는 이유는 이처럼 당초 선악과 금령법에 조건적으로 주어진 형벌로서 죽음이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로 마침내 집행된 것입니다(창2:17). 우리가 이 점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이런 저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어떻게 죽느냐의 방식의 문제일 뿐입니다. 죽음의 근본 원인은 바로 죄 때문이라는 지적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 이는 결국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첨단 의학과 유전자 생명 공학이 제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수명은 결코 무한정 연장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죽음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당위(當爲)로 여전히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어떤 노력도 결코 죽음을 정복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의 총체적 비극은 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인 이런 불가항력적 죽음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필연적 죽음 후에 본격적으로 집행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5:10, 계20:11-15). 특별히 히9:27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죽음은 곧 이어 시행될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예비적 성격을 띠고 주어질 뿐입니다. 이 부분을 후에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기고만장한 사람이라도 이 죽음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일순간에 기가 꺾이기 마련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죽음의 문제 앞에서 담대할 수가 있겠는지요.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지 본성적으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한편 이처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공포의식은 단지 죽음 그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죽음과 최종 심판은 본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죽음 후의 중간상태(Intermediate State)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육체는 분명히 무덤에 묻힐 텐데 그 후에도 계속되는 어떤 의식적 활동현상이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관해서도 온갖 분분한 얘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신빙성이 없음으로 해서 신앙생활 현장에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조직신학적으로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지상의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 육체는 땅에 묻히지만 영혼은 육체를 떠나 여전히 살아서 의식활동을 전개한다는 지적입니다. 특별히 성도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성경은 도처에서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빌1:23입니다. "내가 그 두 사이(生과 死)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 고후5:8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 두 구절은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으로 우리가 육체의 장막 곧 몸을 떠나게 될 때(죽음), 그것은 곧 영혼이 주님과 함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 존재의 멸절(滅絶)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력의 특징상(창2:7) 인간의 존재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죽음으로 외부적 형체는 일시적으로 부패해져 흙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창3:19).
따라서 인간이 죽음의 과정을 겪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대가로 형벌에 처해지는 과정일 뿐이지,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란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곳에서 죽음이 인간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는다고 해서 존재성 자체가 상실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잠시 동안 땅 위에서의 장막을 벗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고후5:4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비록 인간의 육체는 죽음으로 인해 한시적으로 무덤에 갇힌 셈이 되지만 이것도 잠시동안입니다. 곧 위로부터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덧입혀질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될 몸을 일컬어 "신령한 몸" 곧 부활체라고 부릅니다(고전15:52-54). 누누이 강조하지만 인간은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하여 각자가 가야할 최종적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런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날에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한 영생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지옥을 향한 영벌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요5:28-29). 
그렇다면 부활의 날까지 인간의 영혼은 죽음 후에 어떤 상태로 어디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성경은 이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을 육체적 부활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의 합일(合一)로서의 전인격적 부활 말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 육체의 부활로서의 전인적(全人的) 부활을 가리키면서 "피조물 또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2-23)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몸의 구속이란 육체의 부활로 말미암는 전인적 부활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서 기자는 이를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신령한 몸"이라고 묘사합니다(고전15:44). 그렇다고 성경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곧 소위 말하는 중간상태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중간상태가 어떤 곳인가를 시사하는 말씀들은 더러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할 때까지 인간이 잠정적으로 거처하는 곳이 통상 "스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올은 히브리어로서 헬라어로는 "하데스"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는 음부라고 표기합니다. 그러므로 스올 혹은 하데스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가 하면, 시신을 묻은 무덤을 가리키기도 하고, 의인이나 악인이나 상관없이 사후에 가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왜 이런 다양한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는가 하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를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16:19-31에 소개된 소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기록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을 통해 아브라함과의 혈통적 관계에 근거해 자신들의 구원을 확증하면서도 여전히 돈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이고 왜곡된 신앙태도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눅16:14-15).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느냐고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부활신앙은 확실히 본받을 만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결정적인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6:19-24, 눅16:13-14).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돈을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미화시키면서 계속해서 부를 쌓아 나갔습니다. 그들의 부(富)는 온갖 불의한 재물들로 치부한 것이었으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신앙에 위험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각별히 주의시켜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딤전6:9-10) 바리새인들은 이를 경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눅16:14).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런 배경 하에서 베푸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과연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인가를 밝히 드러내려는 것이 본 비유의 핵심 의도입니다. 이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은 사후(死後)에 천국에 들어가는 데서 구원의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임을 본 비유는 시사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의 종말론적 생명은 마침내 천국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지옥의 엄중한 형벌의 고통 속에 처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핵심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비유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성경을 자의적이고 편향적이며 이기적인 목적으로 해석하는 나머지, 이 비유의 핵심을 비켜가 사후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교리적 사례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천국과 지옥의 실상에 관한 세부적인 교리적 근거로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 사상은, 첫째 인간의 생명은 사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이고, 둘째 지상에서 영위했던 삶의 태도는 사후세계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되는 근거로 작용할 것이며, 셋째 사후의 운명은 절대 바뀔 수 없으며, 넷째 의인은 영원히 위로를 받는 반면에, 다섯 째 악인은 영원한 고통에 처해짐을 강력히 시사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사후세계, 곧 중간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선포하는 동시에(부자의 5형제는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음으로 인해) 부활체로 들어가게 될 천국과 지옥의 실제성을 가르쳐주는 증거 본문으로 기능하기에 족합니다. 
이때 중간상태는 사후 영혼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중 구조적 성격을 띠고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영혼이 최종적으로 거처할 천국을 대변하는 아브라함의 품과, 불신자들의 영혼이 최후적으로 들어가게 될 지옥을 대변하는 음부가 그것입니다(눅16:22-23). 그러나 이때의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는 본질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리키는 동의어적 표현일 뿐이지 처음부터 별개의 서로 다른 각각의 두 장소를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품과 천국이 따로 있고, 음부와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후 영혼들의 존재방식과 관련해 중간상태란 장소적 측면이 아니라 상태적 측면에 강조점을 두고 설명하는 관점입니다. 즉 영혼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과 부활체로 존재하는 이중적 국면 말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들의 영혼은 천국과 지옥의 둘 중 어느 한 곳에서 육체의 부활 때까지 여전히 의식활동을 전개하며 존재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닌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다시 한번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중간상태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사후에 인간이 존재하는 양상에 있어서 최종적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사후 세계가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있어서 원리적 으로 모든 것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라도(the world to come already realized in principle in heaven), 현실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이 여전히 미래의 사건으로 유보돼 있기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그것으로 생명이 종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여전히 의식을 가진 채로 중간상태에 들어갑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간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간상태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일어나게 될 육체적 부활의 때까지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의식의 멸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 묻힐지라도 영혼은 살아서 의식활동을 지속합니다. 육체의 부활이 일어날 때, 그때까지 사람들의 육체를 가두었던 모든 무덤들은 열려질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죽은 자를 내어 줄 것입니다(계20:13). 이제 죽음에서 부활한 육체들은 이 날에 그 동안 중간상태에 머물던 영혼들과의 이별을 끝내고 다시금 신령한 몸, 곧 부활체로 재결합하게 될 것입니다(조직신학적 표현). 이때 부활한 신령한 몸의 성격은 생전의 몸과는 본질에서 구별돼 다시는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밝히 증거합니다(고전15:53-54). 
성경은 이렇게 죽음 이후의 존재방식에 대해 두 국면(局面)의 가르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의 존재방식인 중간상태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육체의 부활로 말미암는 신령한 몸의 상태입니다. 후자(後者)의 경우가 최종적인 상태입니다. 중간상태는 마치 이 세상이 나그네와 행인의 여정인 것처럼 여전히 거쳐가는 간이(簡易)역의 양상에 불과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후 성도는 영혼의 상태로 본질상 천국으로 표상되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은 것이지만,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으로 표상되는 음부에서 극한 고통에 처해질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재림, 육체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란 지적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하는 실례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성도들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압니다. 죽음으로 지상적 삶이 끝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 자살(自殺)을 문제해결을 위한 최후의 방편으로 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 세상의 질서 속에서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망하는 경우를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성과 역사의 주권성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어찌 이런 식으로 불공평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관점은 비단 불신자들만이 갖는 예외적인 심정만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믿는 성도도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심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불의한 자의 득세와 관련해 밝히 해명해 주십니다. 시37:9-11입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지 화평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난단 말인가요.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재림으로 집행될 하나님의 최종 심판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그때에 악인의 행사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최종적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억울함과 핍박과 고난 또한 그때에 정당한 판정과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전 인류의 부활과 부활에 뒤따르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시행될 것임을 밝히 증거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재림(再臨)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성경 도처에 기록돼 있습니다. 요14:2-3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행1:11입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히9:28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골3:4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마24:30입니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등등입니다. 이처럼 재림의 필연성은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예수님 안에서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면 하나님의 창세 전 구원계획은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관점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재림은 당신의 백성 된 전 성도들의 전인적 구원의 완성이란 의미를 안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성취를 현실화시키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하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의 부활(죽은 자의 부활, 산 자의 변화, 고전15:52)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를 포함한 일반부활을 동반합니다(살전4:16-17). 여기서 성도의 부활은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을 위함이며 불신자들의 부활은 심판을 위함입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본문에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유무와 직결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일은 동기와 목적에서 하나님의 영광추구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연관된 것으로 인해 선한 일로 간주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일은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로 나타나는 바 악행과 불복종으로 간주될 뿐입니다(롬10:23, 마7:22-23). 전자(前者)에게는 천국에서의 영생의 삶이 보장됩니다. 후자(後者)에게는 지옥에서의 영벌의 삶이 보장됩니다. 물론 이때의 부활은 영육을 포함한 전인적 부활을 가리킵니다. 이때의 부활체의 성격은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썩거나 죽을 수 없는 영생체를 의미합니다(고전15:51-54). 물론 이런 부활사건은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부활체를 신령한 몸이나 영생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저들의 부활은 최후의 심판을 통해 둘째 사망 곧 지옥의 형벌을 받기 위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계20:14-15, 21:8). 다음 항목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사건은 불신자들을 위한 최후의 심판을 위함입니다. 살후1;7-9입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집행되는 심판의 대상이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국한돼 있음을 봅니다. 이는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의 성격이 죄에 대한 궁극적 심판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부활한 성도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됩니다(요5:24).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영원히 도말돼 이미 죄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롬8:1-2, 히9:12, 10:12-18).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심판의 불가사의한 진면목을 계20:11-15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최후의 심판을 크고 흰 보좌의 심판 곧 백보좌의 심판으로 기술합니다. 이 최후의 심판에서 재판관은 예수님이십니다(요5:22, 12:48, 행10:42, 딤후4:1). 부활한 모든 인류가 피고인의 신분으로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를 내어준다라는 표현 속에서 이들이 부활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거기에는 두 종류의 책들이 펴져 있음을 봅니다. 곧 책들과 생명책입니다. 여기서 책들이란 불신자들에 관한 모든 행적이 기록된 내용입니다. 생명책에는 성도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돼 있습니다(눅10:20, 고후5:10). 불신자들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저들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들로서 모든 행적이 악행으로 정죄 당합니다(요5:29). 그래서 마침내 둘째 사망 곧 불못으로 표상되는 고통의 장소인 영벌에 처해집니다. 예수님은 이곳을 일컬어 몸과 영혼이 멸망당하는 지옥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마12:28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은 종말의 심판과 관련해 친히 지옥을 설명하시면서 슬피 우는 곳, 이를 가는 곳, 불이 꺼지지 않는 곳,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 불에 소금 튀듯 하는 곳, 등으로 묘사하십니다(마13:42, 50, 25:30, 막9:48-49). 이런 표상적 이미지는 한 마디로 지옥이 실제적인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원히 단절된 곳이며 동시에 고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친히 지옥을 영벌의 장소로 표현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마25:46상). 
반면 이 백보좌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부활한 인류가 백보좌의 심판대에 피고인의 신분으로 설지라도 심판관의 판정으로부터 제외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음을 본 사건은 분명히 시사합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본문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재림 시, 선한 행실로 인해 무덤으로부터 생명의 부활로 나온 자들입니다(요5:29).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이미 죄사함을 받고(롬8:1-2)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롬3:23-24). 이런 이유로 저들의 영적 신분은 이미 세상에서 살 때부터 예수님의 새언약 안에서(눅22:19-20)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벧전2: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과 자녀 된 신분으로 말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지상에서의 신앙적 삶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교정과 정화와 평가의 성격을 띠게 될 것입니다(고후5:9-10, 고전3:12-15, 롬14:10-12, 마25:14-30).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행4:12).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가운데 보내 주신 하나님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십니다(요3:16). 이들은 최후의 심판의 형벌에서 제외될 뿐 아니라(요5:24) 계21:1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후사들로서 말입니다(엡3:6). 그곳은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계21:4).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미하며 서로간에 사랑의 교통을 나누는 곳입니다(엡1:6). 이런 의미에서 천국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며 상급입니다. 주께서 친히 천국을 영생의 장소로 표현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마25:46하). 
3. 결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든 사람이 주님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합니다(요8:1-11). 나아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정죄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롬3:10, 3:23). 이 뿐만이 아닙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 곧 사망이 불청객으로 찾아오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죄의 결과로 죽음이 찾아 왔지만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님을 성경의 여러 증언에 근거해 구체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후에 받게 되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사망은 종말론적 영생과 영벌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죽음 후에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의 한시적 존재방식으로서 중간상태가 실존함을 시사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인류의 보편적 부활사건은 곧 이어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질 것임을 분명히 진술합니다. 백보좌의 심판의 결과는 부활한 모든 인류를 영생을 표상하는 천국과 영벌을 표상하는 지옥의 두 곳으로 갈라놓을 것입니다. 이때 사도 요한은 백보좌 앞에 놓인 책들과 생명책이라는 두 종류의 책들을 환상을 통해 보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 불못 곧 지옥의 영벌에 처해집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불못의 심판에서 제외됩니다. 대신 최후의 평가를 거쳐서 천국의 영생에 들어갑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이미지를 통해 이런 사실을 표상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심판에서 제외되며, 불못의 형벌로부터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이미지가 담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저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죄사함이 있습니다(요8:1).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영생이 보장됩니다. 심판에서도 제외됩니다. 롬10:9-10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엡2:8-9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요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고후6:1-2).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따라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에 처해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오직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신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를 향해 이미 믿을 만한 증거를 다 주셨습니다(요5:39, 20:31, 딤후3:15).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의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셔서 하나님께서 무상의 은혜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