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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독론

그리스도 만족론과 그 효력에 대한 칼빈의 입장: ‘제한속죄’ 문제

그리스도 만족론과 그 효력에 대한 칼빈의 입장: ‘제한속죄’ 문제
Richard A. Muller(Calvin Theological Seminary, USA)
제 목: "Calvin on Christ's Satisfaction and its Efficacy"
강 사: Richard A. Muller, Calvin Theological Seminary, USA
1. 서론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칼빈의 입장, 특별히 그리스도 죽음과 그것의 구원적인 효용에 대한 칼빈의 논의는 광범위한 탐구가 이루어진 주제이다. 하지만 어떠한 탐구도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칼빈의 교리에 대한 여러 전통적 개혁주의 견해들은 ‘제한적인 속죄(limited atonement)’ 혹은 ‘제한적인 구속(limited redemption)’을 옹호해 왔다. 이 문제에 대한 현대의 단행본급 연구자들 중에 많은 학자들이 칼빈의 사상에 보편적인, 혹은 가정적인우주적 속죄 개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문헌들이 보여주는 다소 광범위한 견해의 차이들을 고려할 때, 구속의 신적인 도성과 그리스도 사역의 범위 혹은 제한성에 관한 칼빈의 입장 문제를 다루는 또 다른 탐구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
칼빈과 스콜라적 신학 사이의 관계성도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는 칼빈의 선행자에 관한 단순한 질문 뿐만 아니라 특별히 충분성과 유효성 개념에 있어서 기존의 자료에 대한 칼빈의 독특한 수용도 물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히 많은 학문적 논의들이 ‘제한적인 속죄’ 및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었는가’ 등의 질문들을 탐구할 때에 기본적인 용어설정 문제조차 무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17세기에 제이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리차드 벡스터(Richard Baxter), 존 오웬(John Owen)과 같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인지된 것이었다. 요약하면, ‘제한적인 속죄’라는 시대 착오적인 용어와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는 오래되었지만 막연한 그런 용어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이 주제의 모든 부분에서 불합리한 논증으로 이어졌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혼돈은 칼빈에 대한 탐구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이 이룩한 그리스도 희생과 그것의 신자들에 대한 적용 교리의 대안적인 교리적 체계화에 대한 탐구에도 나타났다. 이 혼돈은 가정적 보편론의 다양한 형태에 관한 것이든 그 교리의 보다 선별적인 구속적 이해의 경우이든 상관없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제한속죄’ 교리의 문제점은 16세기와 17세기 초반의 논쟁이 논쟁의 양측 모두가 동의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죄값으로 드려진 ‘속죄(atonement or expiatio)’ 혹은 만족(satisfactio)의 무한한 가치, 분량, 공로, 힘 또는 충분성(sufficiency)을 의미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객관적인 희생적 죽음에 대한 것도 아니며, 논쟁의 양측이 모두 보편적 구원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제한적인 ‘효력(efficacia)’ 혹은 ‘적용(applicatio)’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가정적 보편주의 논쟁은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 안에 혹은 배후에 신적인 의도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소수의 개혁주의 학자들이 그리스도 충분성,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원의 성취(impetratio)를 제한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칼빈의 시대 및 도르트 총회가 이루어진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논쟁과 관련된 실재적인 내용들은 1)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과 관련된 신적인 의도, 특별히 ‘모든 사람들이 믿는다면’과 같은 가정적 조건과 그리스도 죽음의 무한한 가치 혹은 공로, 즉 모든 죄를 위한 충분성 사이의 관계성, 2) 개개인에 대한 구원의 유효한 적용과 관련된 신적인 의도, 특별히 그리스도 사역의 효율성 혹은 유효성을 제한하는 근거들, 3) 그리스도 만족의 가치 혹은 충분성 및 효율성과 복음의 우주적 혹은 무차별한 선포 및 부르심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가정적인 보편 구속적 유효성에 대한 논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논쟁의 주체들이 ‘충분성’ 단어가 암시하는 무한한 효력 혹은 잠재적인 우주적 효력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아미로와 같은 가정적 보편론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그리스도 사역의 유효성 혹은 적용은 신적인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 자체가 현대의 다양한 혼돈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가 언급해야 할 여러 사안들이 어떤 것인지가 나타난다. 근대 초기의 개혁주의 학자들이 사용했던 용어들과 구분들의 문맥, 즉 그리스도 만족(satisfactio Christi)의 충분성 및 유효성과 관련해서, 그것의 가치(valor) 혹은 힘(virtus)과 효력(efficacia)과 관련해서, 혹은 그것의 성취 및 적용과 관련해서 이해된 그리스도 만족(satisfactio Christi)이란 문맥 속으로 논의를 설정하면 어느 정도의 명료성이 확보될 수 있다. 도르트 총회에서 그리고 아미랄드 문제가 지속되는 동안에 있었던 개혁주의 논쟁들은 두 가지의 이슈와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 만족의 효력을 제한하는 이유 혹은 근거에 관한 이슈이고, 둘째는 죄에 대해 온전히 충분한 만족을 이루심에 있어서 궁극적인 신적인 의도의 본질에 관한 이슈이다.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교리적 체계화는 이러한 실재적인 이슈들을 고려할 때에 비로소 탐구가 가능하다. 칼빈의 교리적 체계화가 스콜라적 표준 구분들에 해당되는 용어를 드물게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구분들의 한계들을 반영하고 있음도 인지해야 하겠다. 칼빈이 그리스도 만족을 이해하되 죄값을 충분히 지불한 것으로 즉 무한한 혹은 우주적인 가치 혹은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로 이해를 했다면 그는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 만족의 제한적인 적용(혹은 효력)의 근거들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또한 특별히 하나님이 모든 죄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화해를 ‘모든 사람이 믿으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의도한 것인지의 문제와 관련하여, 칼빈은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 배후에 있는 신적인 의도에 대해 어떠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가?
2. 구원 제시의 보편성과 구원의 제한성: 해석학적 이슈
칼빈은 해석학의 어거스틴 전통을 계승한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 전통에 따르면, 온 세상에 대한 구원의 수여를 언급하고 또는 그리스도 죽음의 구원적인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그런 성경 구절들은 택자만을 구원하는 신적인 의도와의 조화 속에서 해석된다. 그러한 구절들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그만의 고유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죽음의 풍성한 가치 혹은 공로에 대해서 구원의 수여는 우주적인 혹은 무차별한 것이지만 구원의 효력은 제한적인 것이라는 이해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게다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관점에 대한 그의 근원적인 확신으로 보건대, 그는 또한 구원의 제한성이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거스틴 전통을 따르는 다른 주석가들 같이 칼빈도 이러한 용어들과 문구들을 이해하되 요한이든 바울이든 반드시 사도들이 달리 선포하려 했던 문맥 및 특별한 성경 구절들이 가진 직접적인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본문의 고유한 주제에 의존하여 그 의미가 다양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세상’ ‘온 세상’ ‘모두’ ‘모든 사람들’의 의미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의 요소가 있다. 즉 1) 그 단어 혹은 문구가 어떤 특정한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2) 신적인 약속의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 표현은 특정한 본문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칼빈의 입장이 ‘보편적 속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중에, 켄달은 특별히 이러한 해석학적 전통을 오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슈 자체도 오해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모두’ 혹은 ‘세상’의 의미가 ‘모든 종류와 계층’의 세상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해석학적 제한이 인간을 ‘모두’나 ‘세상’으로 표현하는 일반화된 언급이 들어있는 모든 성경 구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모든’과 ‘세상’을 가리키는 어떤 언급들은 ‘인류’ 혹은 가장 일반화된 의미에서 ‘창조된 질서’를 가리키며, 어떤 언급들은 복음확산 및 구원수여 범위를 가리키며, 다른 어떤 것들은 때때로 제한적인 조건이 가미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만족, 구속, 화목 등을 가리키며, 어떤 경우에는 죄의 범위를 가리키며, 몇몇 경우에는 인류의 구원에 대한 신적인 의지의 범위로 간주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든’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을 무조건 ‘모든 종류와 계층’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제한적인 해석이며, 그런 해석은 마지막 경우의 범주에 들어가는 소수의 텍스트에 대한 것이다. 게다가 그런 경우에는 켄달 및 케네디의 입장과는 반대로 칼빈은 해석의 어거스틴 전통을 따라 특별히 디모데전서 2장 4-6절과 디도서 2장 11절 문맥에서 ‘세상’과 ‘모든’이 모든 믿는 자들, 모든 택자들, 혹은 세상의 모든 종류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이 해석의 이런 유형을 철저하게 바꿨다는 것 혹은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이 없었다는 켄달과 케네디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요한의 저작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요한복음 및 그것의 신학에 관한 칼빈의 전제들에 의존한 신학적 관점의 통일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개별 본문들에 해당되는 특정한 주제와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도 보여준다. 성경 텍스트에 대한 칼빈의 독법에 있어서, 요한복음 1:29, 3:16, 6:33, 51의 보편적인 구속을 가리키는 언어들과 요한복음 6:37, 39, 44, 17:9, 20에서 약속들 자체에 내재된 한계에서 비롯되는 제한적인 구속의 주장들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이나 모순이 없다. 요한복음 1장 29절 주석에서, 칼빈은 본문에 나오는 ‘세상’이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킨 모든 종류의 불의가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제거되고 말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칼빈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핵심은 구원의 제한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있지 않고 죄 문제가 우주적인 것이라는 ‘세상’과 관련된 언급들을 통해 구원의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과 구원의 약속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 대해서도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본문은 칼빈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약속의 확장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 자체의 주제는 그리스도 사역의 개개인에 대한 적용의 명확한 언급은 배제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서, 칼빈은 ‘세상’의 의미에 대해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 구절의 주석에서 그 용어의 우주적인 성격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사역의 유효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신적으로 부과된 제한이 있음을 주장한다. 본문에서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약속된다.’ 그러나 ‘믿음은 모든 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선택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드러난 바 되었으나 하나님은 오직 택자들의 눈을 열어서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밀미암아 그를 추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믿음이 그리스도 죽음의 유익을 유효하게 얻는 수단임을 증거하는 동일한 구절에서,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취하되 그의 죽으심의 유효성과 부활의 열매와 더불어 취하기 때문에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 생명을 얻는 것을 놀라워 할 필요는 없다’고 칼빈은 밝힌다.
‘세상’에 대한 언급은 요한복음 6장에도 나타난다. 먼저, 33절에서 칼빈은 요한적인 용법을 죄의 보편성 및 약속의 넓이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자신의 이전 독법처럼 ‘세상’을 모든 사람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생명이 유일하게 그 안에서만 발견되는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을 소생케 하신 것 이외의 온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주신다는 요한복음 6장 51절에 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 사역의 범위에 대해 유의미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본문에서 칼빈은 우주적인 규모로 타락한 세상의 구속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물로 주어지신 것이 ‘아버지의 의논’에 속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그 의논에서 ‘복음이 항상 택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모든 자들은 유기된 자’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의 의미를 죄 아래 한결같이 갇혀 있고 아무런 차별이 없이 구원의 약속을 알게 되는 우주적인 인류라고 해석한 어떤 곳에서도, 칼빈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신적인 의도 혹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는 신적인 의도를 주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한결 같이 구원의 택자들에 대한 제한성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한결 같이 복음의 무차별한 선포를 주장하며 그리스도 죽음이 세상의 죄를 사하기에 충분한 갚으심이 된다고 이해했다.
칼빈이 그리스도 죽음의 범위 문제에 대해 보다 자세한 논의를 제공하는 바울의 본문은 디모데전서 2장 4-6절이다. 명백하게 구원의 보편설적 성격을 보여주는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 문맥은 성도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바울의 명령인데, 칼빈은 이것이 두 가지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2절) 그런 기도는 사회 속에서의 평화롭고 경건한 삶에 유익을 주고, 둘째 (3절)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기도라는 것이다. 칼빈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4절은 사도가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작정에 종속되어 있어야 함’을 가르친 ‘두번째 주장의 확증’을 의미한다. 보다 분명하게 사도는 더 나아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며 진리 아는 것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런 신적인 의도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칼빈은 진술한다.
하나님은 그가 모든 사람으로 진리를 아는 것으로 초청을 하셨기에 모든 자들의 구원을 마음에 품고 계신다. 논지는 후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복음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다면 복음이 전파된 모든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소망으로 초청받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칼빈은 복음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차원에서 복음의 우주적 성격을 지적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즉시 선택 문제를 거론하며 ‘이 텍스트(locus)를 예정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환각에 빠진 자들’이라 하였고 이 본문은 모든 사람들 개개인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 편에서의 무차별적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했다. 오웬을 포함한 이후의 다양한 개혁주의 인물들이 따랐던 것처럼, 칼빈은 본문의 ‘모든’이란 용어가 인간의 부류들(hominum generibus)을 가리키는 것이지 인간 개개인(non singulis personis)’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맥락에서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populum) 어떠한 계층도(ordinem)’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예외 없이 모든 자들에게 전파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든 자들을 동일하게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청을 하셨기 때문이란 기본적인 어거스틴 견해를 계속해서 언급한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설교에서, 칼빈은 이 본문이 모든 개개인을 구원하는 신적인 의지 혹은 의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에 대한 이해도 없고 하나님의 선택을 ‘무효하게’ 만드려는 ‘짐승들’과 같다고 표현한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한다.
사도가 여기에서 의도한 것은 하나님이 복음을 모두에게 예외 없이 증거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세상에는 구원에서 배제될 어떠한 사람이나 지위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및 디모데전서 2장 4절 설교에서 칼빈은 이후에 베자가 동일하게 반복하게 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개진하며 본문의 핵심에 대해 한걸음 더 내딛는다. 즉 하나님이 진실로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그의 의지는 창세 이후로 변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는 개별적인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변경함이 없이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진리를 알도록 하신다는 것일까? 무엇보다 사도는 두 문구 ‘구원에 이르며’와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는’을 같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다른 질문을 가지고 그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가 모든 자들에게 알려질 것을 의도했다 한다면 왜 그는 그의 계명을 이방인들에게는 선포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생명의 빛을 유대라는 비좁은 범주 속에 제한하신 것일까?
‘복음의 영원한 가르침에 나타난 것 외에 다른 어떠한 하나님의 뜻도 없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의 의미를 ‘하나님은 그가 자비를 따라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초청하신 모든 자들의 구원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복음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며, 또한 과거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 즉 그리스도 성육신 이전의 모든 이방인들 및 그리스도 성육신 이후에도 복음이 미치지 못한 헤아릴 수 없는 다수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즉 칼빈은 보편설적 은총을 부정했다.
칼빈은 주석에서 ‘모든 종류와 계층’에 대한 어거스틴 입장을 다시 거론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는다.
복음의 선포는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일하게 초청을 하셨다는 올바른 결론을 (사도는) 내린다. 그러나 지금의 대화는 사람들의 종류에 대한 것이지 인간 개개인과 관계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이 (‘모든’이라는) 수효에 정사들과 이방 나라들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칼빈은 디도서 2장 11절 주석에서 보다 간결하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라는 말은 바울이 그가 앞에서 말했던 노예들 때문에 일부러 표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그는 인간 개개인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개별 종류들 혹은 삶의 다양한 계층들을 묘사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모든’은 모든 개인들 혹은 개개인 모두를 의미하지 않으며, 복음의 우주적인 선포는 복음의 무차별적 제시(offer)로 이해될 수 있으나 개개인 모두에게 알려진 혹은 알려질 제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3. 칼빈과 전통적인 스콜라적 구분: 무한한 충분성과 제한적 유효성
칼빈이 사용한 특정 용어들은 문맥에 따라 결정되는 유연성의 정도를 반영한다. 즉 칼빈은 대체로 희생(sacrificium), 속죄(expiatio), 헌납(oblatio), 대가(pretium), 만족(satisfactio)이란 그리스도 사역의 객관적인 본질과 관계된 일련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이나 주관적인 수용 혹은 적용을 가리키는 용어들, 즉 화해(reconciliatio), 구속(redemptio), 구원(salutus) 등을 사용한다. 나아가 다양하게 그리스도 희생의 가치(valor), 힘(virtus), 및 제한적인 유효성(efficacia) 용어들도 언급한다. 이처럼 다양한 용어들에 대한 탐구는 그리스도 사역의 충분성 혹은 보편성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성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개혁주의 내의 가정적 보편설 옹호자들 및 그들의 대적들에 의해 제공되는 그것의 다채로운 후기적 형태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규명해 주지는 못한다. 또한 칼빈의 가르침에 대한 현대적 논쟁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문제를 고려할 때 그 용어들은 무제한적 혹은 제한적 속죄 용어로는 담아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칼빈은 약간의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죄를 위한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과 택자만을 위한 그것의 ‘효용성’에 관한 중세적 구분을 알고도 있었고 참작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학자들이 이 구분과 이것에 대해 칼빈이 주장하는 함의를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켄달은 칼빈이 이 도식을 ‘거부했고’ 제한적인 의미에서 택자들만 구원적인 믿음을 가진다는 뜻에서 그것의 옳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반면 벨은 ‘칼빈이 그 구분의 진상은 인정을 했지만 문제의 핵심이 그리스도 죽음의 능력이 아니라 그 죽음의 목적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진 않았다’는 올바른 주장을 했으나 칼빈의 본질적인 요지는 간과하고 말았다. 실제로 칼빈은 그 도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켄달의 주장은 충분성-유효성 구분이 ‘제한적인 속죄’를 뜻한다는 잘못된 가정과 선택이 ‘무제한적 속죄’를 옹호하는 그리스도 사역의 범위 문제와는 다소 분리될 수 있다는 주장에 기초한 것이며, 이는 ‘atonement’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비롯된 혼돈과 ‘유효성(efficacy)’의 의미에 대한 결과적인 혼돈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켄달에 따르면, 칼빈은 그리스도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그 자체 안에 있는 유효성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주어 누리도록 한 대상과 관계된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체의 유효성’은 전통적인 구분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만족의 효력이 그것의 적용에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터무니 없는 표현이다. 켄달이 생각하는 ‘그 자체의 유효성’은 사실 충분성 개념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는 요한일서 2장 1-2절 주석에서, 칼빈은 그리스도 자신만이 죄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적 ‘직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유일한 대언자’라 하였다.
칼빈은 또한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는 2절이 그리스도 만족의 보편주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인지한다. 또한 이러한 구절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드리신 화목제가 믿음으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믿음의 사람들이 확증하기 위하여’ 1절을 부연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보편설을 옹호하는 듯한 이 구절의 함의는 그리스도 사역의 적용이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복음을 믿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어느 때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한성을 인지하게 되면, 그 본문의 보편설적 언어와 관련된 의문이 제기된다. 즉 ‘모든 혹은 온(all or whole)’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뜻하는가?’ ‘온 세상의 죄는 어떻게 사해지는 것인가?’ 이제 칼빈은 본문을 ‘구원이 모든 유기자들 및 사탄 자신에게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할 ‘빌미’로 활용하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여러 ‘광신주의 인물들’의 ‘헛소리’로 화제를 전환한다. 본문은 희생의 무한한 가치에 기초한 보편적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사역의 적용은 믿음의 사람에게 제한되며, 객관적인 속죄 혹은 희생은 믿음으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모든 자들의 구원과 관련해서 범우주적 규모를 가진다는 것이다.
칼빈은 해석학적 전통이 ‘이러한 불합리를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 고난이 온 세상을 위해서 충분하되 택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한 것’이라는 긴 시간동안 존중되어 온 스콜라적 구분을 때때로 도입해 왔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해법이 학교에 널리 보급된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칼빈은 아마도 자신이 이러한 해법을 오래된 전통에서 발견되는 그 본문의 표준적인 해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이 스콜라적 구분을 거론하며 비록 그 구분의 신학적 정확성을 지적하긴 했지만 이 특정한 본문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언급된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이 이 본문에 적합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이는 요한이 (속죄의) 이러한 혜택이 온 교회에 공통적인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은 표준적인 스콜라적 구분을 인정하고 있지만 본문 자체는 일반적인 신학적 견지에서 모든 죄에 대한 그리스도 희생의 충분성 혹은 충분한 희생의 유효적 적용이 택자에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구속적인 그리스도 사역의 교회에 대한 적용 문제를 직접 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텍스트의 해석과 칼빈의 해석 모두에 있어서의 핵심은 성도들을 향해 구원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엄격하게 해석하되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로 죄를 짓지 않도록 혹은 ‘죄를 피하도록’ 하려는 사도의 바램이란 특별한 문맥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이 메시지를 통한 사도의 주된 의도는 ‘사람들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완전히 의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이후에 등장한 가정적 보편주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비록 구원이 유기자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칼빈의 주장이 이 텍스트에 대한 칼빈의 해석에 가정적 보편설의 경향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반박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이 복음의 우주적 선포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믿을지도 모른다는 모든 사람의 가정적 구원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칼빈은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적인 메시지의 문맥은 텍스트의 의미를 좌우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과 그것의 유효성 사이를 구분하는 보다 도식적인 신학화 작업 감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 구분의 수용을 주장하며 다만 ‘유기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배제된다고 하였다. 칼빈은 전통적인 구분을 사용하며 ‘요한복음 본문이 그리스도 만족의 효력을 택자에게 제한했다’ 식으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할지라도 그냥 사도가 유기자를 확실히 배제하려 했다고 주장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런 특별한 언급에서, 칼빈은 이후에 도르트 신조에서 사용될 그 구분의 신학적 정밀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다소 단호하게 하나님이 유기자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칼빈의 주장에서 아미랄드식의 가정적 보편설의 혐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충분성-유효성 구분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단서는 영원한 예정에 대해 피기우스(Albertus Pighius)와 게오르기우스(Georgius the Sicilian)를 반박하는 그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칼빈은 그 구분을 영원한 예정 문제 푸는 ‘보편적인 해법’으로 간주하되, 그 구분이 게오르기우스 주장의 부당함, 즉 실제로 성경이 증언하듯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가 되셨다고 한다면 그리스도 속죄에서 유기자를 배제하는 것은 ‘그들을 세상 밖에 두는’ 셈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일서 2장 1-2절 주석과 유사하게 『영원한 예정』 논문에서 칼빈은 충분성과 유효성 사이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어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그것의 적용 가능성 혹은 유용성은 부정한다. 즉 실제로 그 구분은 그리스도 속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충분하며 그것의 효력은 택자에게 제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해명해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구분은 죄에 대한 댓가 지불 충분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보이듯이 그 구분은 우주적인 속죄가 유기자를 포함한 모든 자들을 지목하는 것이냐의 문제에 답하지는 않는다. 이후의 논증에서 명백해질 것이지만 바로 이것이 칼빈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시는 구속’을 위해 그리고 유지자와 더불어 섞여 있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택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 속죄는 믿음의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때 칼빈은 자신의 언어로 그 문제를 다시 말한다. 즉 여기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죽음의 능력(virtus) 혹은 그것의 객관적인 값어치(valor)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내어주신 그 수혜자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 사역은 ‘온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속죄’이다. 그러므로 화목은 ‘모든 사람들 앞에 놓여 있으나’ 그 유익은 그리스도 사역의 우주적인 잠재력이 실제로 일부만을 위해 유효하기 때문에 ‘택자에게 고유한 것’이다. 여기서 [구원의] 우주적인 제시는 택자와 유기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며 모든 죄를 위해 이루어진 (그 자체로) 충분한 구속이기 때문에 정당한 제시이다. 그러나 적용의 특별한 성격은 그것이 신적인 선택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다른 요점을 개진한다. 즉 창조 이후로 복음의 선포 밖에 있었던 중다한 사람들을 고려할 때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개개인에 대한 구원의 의지를 가지신 분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의 특별한 적용과 대비되는 복음의 우주적 선포,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복음의 무차별적 선포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은 수정되어 아마도 알미니우스 및 항론파 학자들에 대한 논쟁 이후에 일부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선호했던 성취(impertratio)와 적용(applicatio)이란 대안적인 구분을 지향하는 충분성-유효성 구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주장은 그리스도 속죄의 충분성 속에 유기자의 죄까지 포함하는 것이 유기자들 각 개인에게 그리스도 안으로의 연합까지 허용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환상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반박되어 왔다.
아마도 칼빈의 의도는 그리스도 속죄에서 유기자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세상’의 의미는 절대적인 우주적 성격을 가지지 않았으며 넓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이 특정한 (요한서신) 텍스트 안에 제한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칼빈이 자신의 답변에서 사용한 문구들은 이듬해인1553년부터 시작되는 요한일서 2장 1-2절을 포함한 요한의 텍스트 해석에 사용된 문구들 안에서 반복된다. 즉 구원적인 의미에서 사용될 때 ‘세상’ 혹은 ‘온 세상’은 모든시대와 온 세상의 모든 장소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 즉 택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용될 때의 의미는 유기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다. 이러한 두 논의들 사이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텍스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이 준비되기 위해 요청되는 시간의 길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칼빈이 피기우스 및 게오르기우스 반박에 관여할 바로 그때에 요한복음 주석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칼빈이 무한한 충분성과 제한적인 적용 사이의 구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 구속의 무한한 충분성을 부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요한일서 2장 1-2절과 같은) 성경의 특별한 본문에서 그리스도 구속의 무한한 충분성과 적용상의 제한적인 효력 사이의 대립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칼빈의 답신에서 언급된 문제도 그리스도 구속의 무한한 충분성 개념과 결부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의 요지는 ‘온 세상(whole world)’이란 용어가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온 세상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용어는 구원이 유기자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만족이 모든 죄를 위해 충분한 것이냐는 논쟁의 핵심이 아니었다.
우리는 충분성과 유효성 구분에 대한 칼빈의 망설임이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와 적용 문제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안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정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 죽음에 있어서 신적인 의도성의 좌소는 온 세상의 죄에 대한 무한한 충분성 개념과 택자들 혹은 신자들을 위한 제한적인 유효성 개념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스도 희생은 죄에 대한 대속이란 의미를 가지는데, 죄의 본성을 생각할 때 그 대속은 무한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희생은 택자들의 구원의 근원이란 의미도 가지는데 이런 면에서는 충분성 항목과는 달리 신적인 의도에 제한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4. 제한적인 구속적 의도, 제한적인 중보, 제한적인 연합: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분에 있어서의 연관된 측면들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장문의 기도 즉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기도가 칼빈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이 택자에게 제한적인 것이라는 주장의 성경적, 주석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러한 형태의 그리스도 사역의 제한성은 ‘제한적 속죄론(limited atonement)’을 칼빈에게 돌리는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켈달은 한발짝 더 나아가며 말하기를, 칼빈의 견해에서 그리스도는 택자만을 위해 중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를 따르는 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중보적 기도의 범위를 그리스도 죽음과 연결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칼빈은 켄달이 부정하는 그것을 정확하게 주장했다. 칼빈 자신의 직접적인 진술은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문제를 그리스도 사역의 제한성 문제와 분리하는 켄달의 시도가 실패임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그(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효력과 유익이 우리에게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는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 그의 간구를 통하여 우리는 은총을 입는다...그리스도 안에는 새롭고 특이한 상태가 있는데, 동일한 분이 제사장도 되시고 희생도 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의 전반적인 설명은 중보기도 및 희생적 죽음을 단일한 제사장적 사역의 다양한 측면들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 강요』에서 가져온 이 인용문이 그리스도 중보직의 범위와 그의 죽음을 충분히 명료하게 연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면,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기도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그런 연결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칼빈은 중보자적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인격 안에서(in sua persona quodammodo) 우리를 아버지께 드리셨기(obtulit) 때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거룩을 향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그리고 ‘이 성화(sanctificatio)는 비록 그리스도 예수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가장 탁월한 예증은 그리스도 죽음의 희생에서(insacrificio) 주어졌다’고 한다. 중보기도는 그리스도 사역의 적용을 제한하는 요소로서 하나님의 선택적인 의도를 없애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의 관점에서 말씀의 유효적 소명과 같이 그리스도의 중보는 신적인 의지 혹은 작정이 시간적인 질서 속에서 어떻게 실행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속한 것이다. 즉 ‘회개와 죄용서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 모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역의 유효성 제한은 비록 영원한 작정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그리스도 사역을 통하여 구원이 세상에 실현되는 것에 집적 관계된 제한이다. 칼빈의 이해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아버지와 더불어 자기 사람들을 택하시는 선택의 주체(electionis author)가 되신다.
나아가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 사역은 영원 전부터 그에게 정하여진 작정의 시간적 실현 혹은 확증이다. 다시 말하면, 선택과 그리스도 중보직에 대한 칼빈의 생각에는 서로 분명한 연관성이 있는데, 이는 복음의 선포에서 그리스도를 수여하는 것과 직접 관계된 것이며 또한 칼빈이 생각하는 구원적용 순서에서 그리스도 연합이 차지하는 근원적인 중요성과 직접 관계된 연관성을 의미한다. 이와는 반대로 켄달의 주장은 칼빈의 로마서 10장 16절 주석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거기에서 칼빈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는 복음의 우주적인 초대가 모든 사람들의 선택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켄달은 그 텍스트를 필두로 내세우며 마치 칼빈이 선택과 그리스도 죽음의 유효성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며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한 것처럼 해석했다. 칼빈의 주석을 ‘그리스도 예수는 누구를 위해서 죽었는가’ 라는 애매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케달은 유효성과 충분성 및 적용과 성취를 혼돈했고, 칼빈이 그리스도 사역의 효력 혹은 적용을 일관되게 택자에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 죽음의 공로 혹은 값어치를 훼손하는 것도 아니고 복음의 무차별적 선포를 제한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였다. 이상에서 논한 그 어떤 성경 분문에서도 칼빈은 그리스도 죽음의 충분성 혹은 무한한 공로와 관련해서 구원의 조건적 의도 혹은 의지에 대한 아미랄드 식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특별히 중보(mediation)와 중보기도(intercession) 사이의 관계성과 칼빈이 사도의 ‘모두’를 ‘모든 종류의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하는 의지 개념에 맞추려고 텍스트에 변경을 가한다면, 그 변경은 칼빈의 것이 아니라 ‘모두’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구절들에 대한 해석의 어거스틴 전통에 포함된 것이다. 제한적인 중보기도 문제에서 ‘나는 온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요한복음 17장 9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분명하다. 게다가 칼빈은 자신의 요한일서 2장 2절 주석에서 그리스도 수난이 모든 죄에 대하여 충분하나 오직 택자만을 위해 유효하다는 롬바르드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칼빈은 최소한 특정한 성경 본문들에 그 개념을 적용함에 있어서 그 시대의 교의학적 도식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어떤 이유 때문이든 그는 새로운 혹은 수정된 도식을 제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만족론 이론은 기독론과 관련해서 발전한 것이며 예정론 항목에서 주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론적 체계의 보다 넓은 구조 안에서는 구속론과 선택론이 서로 교류하며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 만족의 유효성과 선택은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병행적인 측면이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신적 의도의 이러한 제한성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길게 거론되지 않지만 그의 복음서 및 요한일서 주석에는 주목할 정도의 분량으로 논의되고 있다. 특별히 여러 구절들이 중보기도 제한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나의 이름을 밝히 보였으며...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되 세상을 위해 기도함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요17:6, 9).’ 칼빈은 이어서 말한다. 예수님이 위하여 기도한 소수의 무리들이 바로 그의 제자들 그룹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들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게 될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중보기도 확장은 그 자체가 명백한 제한성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구절들은 요한복음 6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적인 의지와 그것으로 말미암는 구원적 사역의 제한성에 대한 예수님의 초기 담화에서 발견되는 언급들과 상응한다. 즉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모든 자들은 나에게 나아올 것이며 나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나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요6:37)’와 보다 명시적인 것으로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면 누구도 나에게 나아올 수 없다(요6:44)’에서 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절대적인 대응이나 추상적인 논리적 일관성 문제가 아니라 관계성에 관한 문제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기도가 모두의 구원이 아니라 일부의 구원을 위한 기도라는 것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될 구원 사역의 대상들이 될 사람들 개개인도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작정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것의 시간적인 확증을 제공하는 주체도 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죽음의 제한적인 적용과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제한성에 대한 칼빈의 개념들 사이에는 통일적인 연관성이 있다.
그러므로 켄달은 그리스도 만족론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과 그리스도 중보기도에 대한 칼빈의 견해 사이를 분리할 뿐만 아니라 칼빈이 ‘무제한적 속죄’를 가르치며 ‘제한적 중보기도’도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근본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칼빈은 자신이 그리스도 연합이 일부의 사람에게 제한적인 것이라고 가르친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한적인 중보기도 역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처럼) 켈달의 주장은 그가 사용하는 용어의 부정확함 속에서 이루어진 주장이며 여러 이유에서 칼빈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이 의도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첫째, 만족의 사역과 중보기도 행위는 그리스도 자신의 공적인 제사장적 직무의 동일한 기능에 속한 것들이다. 무엇보다 무제한적 속죄와 제한적 중보기도 개념을 이 주제의 고유한 칼빈주의 이해라고 주장하는 켄달의 입장은 그 당시에 논의된 사안들에 대한 켄달 자신의 잘못된 이해와 켄달 식의 ‘무제한적 속죄론’ 진술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다. 켄달의 입장에서, ‘무제한적 속죄’는 모든 죄를 위한 그리스도 죽음의 충만성 혹은 충분성을 가리키며, ‘제한적 중보기도’ 개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전적으로 충분한 희생을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지 않고) 일부에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충분한 성취와 무제한적 가치, 능력 혹은 충분성 같은 개념을 제한적인 적용 개념과 연관짓는 것은 정확하게 칼빈이든 도르트 신조이든 개혁주의 전통 전체가 주장했던 것이며 켄달이 ‘제한적 속죄’라며 거부했던 바로 그것이다.
둘째, 방델을 반박하며 제기된 것으로서 ‘선택은 그리스도 죽음으로 유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러므로 그리스도 죽음은 선택에 있어서의 신적인 의도와는 대응될 필요가 없다는 켄달의 주장은 명백히 핵심을 벗어난 주장이다.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경우처럼 칼빈에게 있어서도 논의의 핵심은 가치에 있어서 무한하고 전적으로 충분한 그리스도 죽음의 유효성 혹은 적용 가능성이 하나님의 택하시는 의지로 말미암아 혹은 신적인 선택적 의지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특정한 이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 죽음은 구원이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의 서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으로서 특별히 칼빈의 용어로 말하자면 ‘질료적 원인’이다. 어떤 교리적 체계화에 있어서 칼빈의 독특한 공헌이 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 사역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선택하는 의지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안에 증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 사상의 이러한 요소는 그리스도 사역의 제한적 유효성에 대한 후기 개혁주의 전통의 접근법에 뚜렷하게 수혈된다.
결론
칼빈이 그리스도 만족의 택자만을 위한 제한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것과 후대의 개혁주의 논쟁을 칼빈에게 투영해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올바른 지적이다.
‘제한적인 속죄’라는 막연한 용어 하에 주로 다루어진 특정 주제들와 관련하여, 칼빈 신학의 문맥과 방법론을 고려해 보건대 그런 증거가 가진 특징은 어떤 깔끔한 교의학적 결론을 일찌감치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칼빈 사상의 특정한 측면들에 대한 관계성의 유형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물론 칼빈의 사상에서 베자, 우르시누스, 장키우스 및 도르트 신조에 이르는 (실제로는 교부들과 중세의 문헌에서 칼빈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을 거쳐 도르트 신조에 이르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논증의 연속성도 일면 발견된다. 반면 대체로 주석과 설교에서 칼빈에 의해 만들어진 진술들을 포함하여 특별히 다버넌트 및 드 물랑의 사상에서 발견되되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고 택자에게 유효한(sufficienter pro omnibus, efficienter pro electis)’ 구원의 전통적인 도식적 테두리 안에서 주장되는 것으로서 비록 어떤 가정적 보편주의 형태를 취하는 경향성을 보이지만 다양한 신적 작정들을 주장하는 아미랄드 모형에서 발견되는 가정적 보편주의 같이 보다 사색적인 형태까지 나가지는 않은 일군의 문헌들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칼빈은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고 너무도 분명하게 도식의 두번째 구절에 해당되는 ‘택자에게 유효한(efficienter pro electis)’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지했다. 이것을 그는 그리스도의 제한적인 중보기도 해석에 관해서든, 선포된 말씀의 의도 혹은 세대를 거쳐서 나타난 복음선포 범위의 제한성 해석과 관련해서 이해된 것이든 상관없이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무차별적 선포와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을 떠받치는 이해로서 그리스도 사역의 가치 혹은 능력이 모든 죄의 구속에 혹은 세상의 구속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하되, 첫번째 구절(sufficienter pro omnibus)의 애매함을 제거하려 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제한적’ 및 ‘무제한적 속죄’라는 미끄러운 문구들을 제껴놓을 때 우리는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다른 인물들과 관련해서 그리스도 사역의 범위와 제한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에 대해 보다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 사역의 가치, 능력, 혹은 충분성이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며, 믿는 모든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되 (그 결과로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신자는 ‘핑계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비록 신적인 의도성과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 혹은 충분성 사이의 관계에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베자, 도르트 신조, 다버넌트, 드 물랑, 아미로, 튜레틴 및 칼빈 이후 두 세기동안 등장했던 때때로 잊혀지고 때로는 구설수에 오른 개혁주의 인물들(그들 중 구원의 제한적인 적용 옹호자들 및 가정적 보편주의 옹호자들 모두)도 동일한 것을 가르쳤다.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 사역이 비록 세상의 죄를 충분히 대속하고 수천년의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보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자, 고마루스, 드 물랑, 다버넌트, 튜레틴 및 아미로도 주장했던 것처럼 신적인 의도로 말미암아 오직 택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함을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효력의 제한성을 그리스도의 제한적인 중보기도, 택자들만 구원하기 원하는 신적인 의도 및 유효적 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된 것으로서 복음 증거의 역사적인 제한성과 관련해서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여러 제한속죄 옹호자들 및 가정적 보편주의 옹호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논쟁와 교리적 체계화의 변화된 문맥에서 비롯되는 차이점이 있는 반면에 위의 주제에 대해서는 칼빈의 가르침과 다양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사이에는 연속성도 있다. 불연속성 혹은 차이점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속성 문제도 제한적 속죄와 무제한적 속죄 문제에 대한 표준적인 문헌들이 택하였던 방식처럼 단순한 일대일 대응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연속성을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주석적 전통, 전통적인 용어들과 도식들 및 논쟁과 대화 속에서 그러한 요소들에 가미된 미묘한 차이들 등의 수용과 채택과 변화라는 복잡한 형태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전통과 용어들과 도식들 등은 종교 개혁자들의 글들을 통하여 다른 종교개혁자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 모두에게 전하여진 것이지만, 칼빈 뿐만 아니라 그의 시대에 특별히 개혁주의 논증의 중요한 시발점을 제공하고 교리적 체계를 형성한 자들로서 칼빈과 비등한 영향력을 가진 다른 여러 인물들에 의해서도 전달된 것이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 만족론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죄값을 지불하고 온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속을 이루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은택들은 듣는 모든 자들 앞에 분명하게 펼쳐졌고 그들에게 제시된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리스도 죽음의 충분성이 제시된 은택들의 실질적인 효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보편 구원설적 의도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빈의 문헌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미랄드 접근법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하나님 안에 두 의지, 즉 가정적 의지와 절대적 의지가 있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유효한 혹은 효과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불충분한 혹은 다소 좌절될 수밖에 없는 신적 의지가 있다는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복음의 무차별적 선포에 있어서의 신적인 의도는 택자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을 구원하고 만다는 것이다. 복음의 무차별적 선포와 구원의 수여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하나님의 교훈적인 의지로 불리우는 전통적인 개념에 가까운 신적인 의지와 결부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교리적 형성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버넌트의 ‘정하여진 충분성(ordained sufficiency)’ 개념과 유사하다.
주의깊게 분석해 보면, 칼빈의 그리스도 사역론 안에 있는 구원의 보편적인 선포라는 차원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제한적인 효력이란 차원이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 속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후기 논쟁들에 가담한 당사자들 중에 전적으로 분명한 구분들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논쟁들은 대체로 도르트 신조가 설정한 개념의 경계선 내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리스도 희생의 보편적 충분성, 그것의 오직 택자만을 위한 제한적 효력 혹은 적용,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구원의 우주적 혹은 무차별적 선포, 그리고 비록 아미랄드 학자들은 예외지만 보편주의 구원적 은혜에 대한 부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논쟁들은 특별히 그리스도 죽음의 충분성 혹은 무한한 가치 및 복음의 우주적 무차별적 선포와 그것과의 관계성을 좌우하는 신적인 의도성과 연관되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 연구 방법론의 혼탁한 성격은16세기와 17세기에 사용되지 않았고 당연히 논쟁의 핵심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는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 및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와 같은 용어들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교묘한 시대 착오성을 보이는 용어들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적,’ ‘제한적’ 및 ‘무제한적 속죄’와 같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시대 착오적인 용어들도 역사적인 논의에
있어서는 거부해야 하고 실제로는 제거해야 하는 것들이다.
2011년 10월 27일 합신 채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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