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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개혁파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1491-1551)의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개혁파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1491-1551)의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최윤배
1. 서론 
일반 사전이나 신학 사전 속에 아직도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이유, 즉 신학적 배경과 이 논문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신학적 배경과 관련해서 삼위일체론은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출발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의 용어와 관련해서, 성령론이 일차적으로 삼위일체론의 틀 속에서 파악됨을 의미한다. 성령의 위(인)격과 사역은 삼위일체적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성령론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방법론과 관련해서, 우리는 본고에서 원칙적으로 성령론을 삼위일체론의 틀 속에서 다루고자 한다. 내용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삼위일체론의 틀 속에서 성령론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과 삼위일체론 자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사이를 예리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를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 Butzer, 1491-1551)의 삼위일체(론)적 성령론과 관련해서 우리는 성령의 본질과 사역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성령의 본질과 관련하여, 우리는 '위격과 힘'으로서 성령에 관심을 기울이고, 성령의 사역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서 (고전)철학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2. 삼위일체론 
일반적으로 말하면, 부처는 삼위일체론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논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더 강조한다. 부처는 삼위일체론의 근거를 성서와 교회의 전통적 양식, '한 본질, 세 위격'(una substantia, tres personae)에서 찾는다. 부처의 경우,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는 구속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신 성령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할 수 없다." 부처는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단순성, simplicitas)과 하나님의 위(인)격들의 삼위성을 성서가 증언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에 신적 본질 속에서 어떤 분리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서 속에서 선포되었듯이, 우리는 위(인)격 속에서 오직 구별이 계시되고 있는 가장 높은 일체성의 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듯이, 성서는 하나님의 능력처럼 말씀을 설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고, 질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호흡으로서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자신과 다르다고 주장하겠는가? 그들의 본질에 관한 한, 하나님과 말씀과 영,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의 관점에서 하나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서가 다른 위(인)격들을 가리킴으로써,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말씀하실 때,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할 것인가?" 부처는 하나님의 사역을 삼위일체적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는 항상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능력(potentia)이시다. 이 말씀과 능력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다; 성령도 하나님의 능력(virtus)이시며, 만물의 완성자(perfectrix et consummatrix)이시다; 그리고 이 둘은 말씀하시고 호흡하시는 분과 함께 하나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세 위(인)격들은 명령과 규정 속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부처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반삼위일체적 종속론과 반삼위일체적 양태론을 거부함으로써, 위(인)격들의 삼위성과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성령의 위(인)격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교회의 전통적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단지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부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본질상의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을 '존재와 능력과 행위 속에 존재하는 일치'로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처에 의하면, 일체성은 삼위성과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삼위성을 부인하는 유대주의적 주석가들에 반대하여, 부처는 그의 《시편 주석》(1529)에서 성서는 세 위(인)격들로서 아버지, 아들, 성령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했다. 비록 부처는 성령에 대해서 언급할 때, 삼위일체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할 지라도, 삼위일체론이 그에 의해서 무시당하거나 잊혀진 것은 아니다. 
부처는 1523년에 첫 신학 작품, 《Das ym selbs》(1523)을 출판했다. 이 작품의 서문은 축복문으로 시작하여 감사기도문으로 마쳐진다. 이 축복문과 기도문 속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발견되지 않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은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에서 화해하시고, 구속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 몇몇 삼중적(triadische) 표현들과 삼위일체적 형식을 띤 구절도 발견된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 창조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일체성과 위(인)격들의 삼위성이 눈에 띈다. 
헨드리꾸스 베르꼬프(Hendrikus Berkhof)에 의하면,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이래로 서방 교회에서는 '한 본질, 세 위격'(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이라는 양식이 삼위일체론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처도 위의 전통 속에 서 있다. 이레나 바쿠스(Irena Backus)에 의하면, 부처는 헬라어 단어 '우시아'( )를 위해서 라틴어 단어 '숩스탄티아'(substantia)를 사용한다. 브렌즈(Brenz)의 《요한복음주석》과 부처의 《요한 복음 주석》을 비교해보면,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의 주석에서 부처는 헬라어 단어 '우시아'를 위해서 라틴어 단어 '숩스탄티아'를 사용하는 반면, 브렌즈는 헬라어 단어 '우시아'를 위해서 라틴어 단어 '에쎈티아'(essentia)를 사용한다. 바쿠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세 위(인)격들을 희생시키면서도 삼위일체성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트라페준티우스(Trapezuntius)는 놀랄만한 방법으로 부처의 재세례파 한스 뎅크(Hans Denck)에 대한 반대와 부처의 반삼위일체론자 세레베투스(Servetus)에 대한 반대를 지지함으로써, 부처편에 섰다. 부처는 그의 《요한복음주석》(1528)에서 한스 뎅크를 비판하고, 그의 《반박서》(Confutatio, 1531) 속에서 세르베투스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뎅크와 세르베투스는 다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함으로써 반삼위일체론적 종속론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부처 당대에 특히 브렌즈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헬라어 단어 '우시아'를 위해서 라틴어 단어 '에쎈티아'를 선호했지만, 부처는 트라페준티우스의 영향으로 헬라어 단어 '우시아'를 위해서 라틴어 단어 '숩스탄티아'를 선호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처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성령 사이에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도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위(인)격들의 삼위성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의 삼위일체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세르베투스를 부처는 비판했다. 그렇게 될 경우 사람들은 시작 또는 끝으로서 성령 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삼위일체론적 종속론에 반대하여 부처는 하나님의 일체성과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을 주장했다. 부처의 삼위일체론은 반삼위일체주의자 세르베투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삼위성을 부인하는 유대주의적 주석가들에 반대해서, 부처는 그의 《시편주석》(1529)에서 성서는 세 위격들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했다. 유대주의적 유일신론를 비판하면서 부처는 위(인)격들의 삼위성을 옹호했다. 부처는 1530년판 그의 《복음서 주석》에서 성령의 위격과 사역을 구분했다. 특별히 부처는 그의 작품 《소요리문답》(Der k rtzer Catechismus, 1534)에서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삼위일체론을 가르쳐주고 있다: "세 위(인)격들,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이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유일한 한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비록 아버지, 아들, 성령의 관점에서 역할상의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한 한 신앙만이 있다. 아버지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만물의 근원과 목적이시며,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아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만물이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듯이, 역시 그를 통해서 만물이 회복되고,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질 속에 있는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머리와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아들은 인간이 되셨다. 성령에 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영혼과 육체 속에서, 우리의 사고와 의지와 행동 속에서 새롭게 되고 치유되었다." 
부처의 《올바른 목회학》(Von der waren Seelsorge, 1538)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그렇게 하듯이 축복인사로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인 구조를 가진 사도신경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부처의 이 작품 속에서 교회론과 관련해서 삼위일체론적 표현들을 발견한다. 이 작품 속에서 특이한 것은 치리와 회개는 삼위일체론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부처의 입장은 그의 후기 작품들 속에서도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있다. 그의 유명한 책 《그리스도의 왕국론》(De regno Christi, 1550)도 축원기도로 시작하여, 축원기도로 마쳐진다. 이 책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조직적인 기술은 나타나지 않지만, 삼위일체론적 표현들이 몇 군데서 발견된다. 가령, 하나님의 나라의 삼위일체론적 성격, 삼위일체론적 세례양식,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의 기독교적 삶 등이다. 부처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사역과 재창조 사역 속에서 그리고 성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부처는 그의 《에베소서 주석》서문(1551)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위(인)격들 사이의 구별이 배제되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의 성화는 생명의 호흡으로서 성령에게 돌려진다. 우리는 확실한 신적인 능력에 의해서 거듭 태어나고, 하늘의 빛으로 가득 채워진다. 성령께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우리 속에 심으신다. 우리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되지는 않을 지라도, 이를 통해서 성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인(위)격들 사이의 구별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부처의 경우 성령의 사역과 고유성은 '성화'로 지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성령: 하나님 자신, 위(인)격과 힘(능력) 
부처는 성령을 어떻게 부르는가? 일반적으로 부처는 성령을 '영', '성령', '하나님의 영',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부를 때, 이 이름들을 상호 차별하지 않고 부른다. 이 모든 용어들은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부처의 첫 신학 작품《Das ym selbs》(1523) 속에는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양자됨의 영 등이 나타나는데, 부처는 이 이름들을 서로 간에 전혀 차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 같은 사실은 그의 중기의 작품 《올바른 목회학》(Von der waren Seelsorge, 1538)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영국에서 보낸 그의 말기의 작품 속에서도 이 같은 용어들의 사용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랑(A. Lang)에 의하면, 부처의 경우 성령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 템멜(L. Temmel)은 부처의 경우 성령은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여 스테펀스(W.P. Stephens)는 위의 두 신학자들은 부처의 성령 개념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했으며, 부처가 성령을 삼위일체의 제 3의 인격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쳐버렸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어떤 학자들이 부처가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에너지로 지칭하는 것을 근거로 부처는 성령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처의 경우 성령은 살아계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기도드릴 뿐만 아니라, 성령께도 기도드린다. 
부처의 경우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힘이시다. 부처에 의하면, 성령의 활동은 특히 성령을 지칭하는 이름들 속에 나타난다. 이 이름들은 하나님의 힘과 에너지를 나타낸다. 이 능력과 에너지를 통해서 우리의 영은 새로워지고, 조명된다. 그러므로, 부처에게서 성령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능력으로 이해되지는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린다. 이 능력을 행사하는 자는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이시며, 이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자를 돕는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부처의 성령에 대한 개념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오해했다. 어떤 신학자들은 부처를 열광주의자와 신비주의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쾰러(W. K hler)는 부처를 종교개혁자들 중에 가장 열광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자이며, 신비주의자라고 오해했다. 보름캄(H. Bornkamm)은 부처의 경우 그리스도는 단지 '우주적(보편적), 신적 영'에 대한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부처의 경우 성령의 활동은 자율적 현실성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처의 경우 성령은 그리스도의 광채이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를 증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칭의하시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선택된 자들 속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활동하신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그들 속에 살아 계신다. 만약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실 때, 그리스도는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신다. 왜냐하면, 이 성령은 항상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 속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계시된다. 부처는 그의 성령론을 삼위일체론 속에 정초시킨다. 부처의 경우,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성령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단순성 또는 일체성은 성령의 사역의 신적인 성격을 보장한다. 그러나, 이 신적 능력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냄 받고 또한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 
4. 창조와 재창조 속에서 '필리오케'(filioque) 
우리는 지금 창조와 재창조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필리오케'를 다룬다. 우리는 '필리오케' 문제와 관련된 몇몇 교리사적 문제들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부처에게서 창조자와 재창조자로서 그리스도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처에게서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이중지식'(duplex notitia Dei)에 대해서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령의 일반사역의 하나로서 (고전)철학에 대한 부처의 이해를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4.1. '필리오케' 
'필리오케'(filioque)는 성령과 삼위일체 속에 있는 다른 위(인)격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 필리오케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서방교회에 의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 첨가된 단어 '필리오케'(filioque)를 중심한 갈등은 중세에 성령의 출원문제를 중심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갈등은 결국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를 초래했다. 비록 많은 동방 교회신학자들과 서방교회 신학자들이 지금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지라도, 지금도 이 갈등은 변화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논쟁 자체에 깊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몇몇 교리사적 소여들과 필리오케에 대한 부처의 입장만을 취급할 것이다. 
제2차 에큐메니칼 회의, 즉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 성령의 신성이 인정되었다. 이 회의의 신앙고백의 성령에 관한 조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고,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에 의해서 말씀해진 성령을 믿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신'(qui ex Patre procedit)이라는 신조의 문장은 서방교회에 의해서 '필리오케'가 첨가되어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필리오케' 문제를 중심한 몇 가지 역사적 과정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필리오케는 서방교회의 신학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과 연관되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신학과 연관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많은 교회의 회의들 속에서 필리오케가 받아들여졌다. 필리오케는 스페인의 제2차 톨레도(Toledo) 회의(447)에서 고백되었고, ?카레드(Rekkared)왕의 주도하에 개최된 제3차 톨레도 회의(589)는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삽입되었다. 필리오케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신조》속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 수도승들이 808년 성탄절 때,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필리오케'가 첨부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찬양했다. 그들은 필리오케가 첨부된 신조를 그들의 신앙고백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기에 참석했던 동방교회로부터 온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많은 모욕을 당했다. 이 사실은 프랑스 까롤 대제(768-814)를 분개케 했다. 까롤 대제는 필리오케 사용을 강력하게 권장했고, 아헨(Achen)회의(809)는 필리오케는 신앙고백에 속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교황 레오 III세(795-816)는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있는 베드로 무덤 입구에 필리오케가 없는 신조와 함께 두 개의 은 방패를 걸어놓았다. 
필리오케 반대 투쟁자인 콘스탄티노플 주교 포티우스(Photius)는 860년대에 프랑스와 스페인 교회에 반대했다. 교황 베네딕투스 VIII세는 1014년에 로마에서도 필리오케를 신조에 삽입시켰다. 이 같은 문제가 결국 1054에 동서방교회의 분리의 요인으로 크게 작용했다. 이 때부터 지금까지 성서의 소여들과 회의의 결정들과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주장들을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변증적(polemische) 양식들 또는 타협적-에큐메니칼적 양식들이 존재한다.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를 고수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여기다가 '필리오케'를 첨가했다. 여기에 반대하여 동방교회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라는 변증적 주장을 했다(소위 monopatrisme). 서방교회에도 신조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가 형식적으로 유지되었지만, 교회의 실천 속에서는 다양한 형식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직 아들로부터 나오신다'(소위 monofilioquisme)이다. 이 같은 변증적 양식들 외에 많은 타협적-에쿠메니칼적 양식들이 그 때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per filium),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등.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뒤를 따라서 필리오케를 받아들인다. 부처의 경우,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 필리오케는 부처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영원한 말씀으로서 성령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람들을 위해서 이 능력을 획득하셨다. 성령의 사역 속에 신적 능력이 계시된다. 그러므로, 성령론은 일차적으로 삼위일체의 표징 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론의 표징 속에 서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열매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부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를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는 기초이다. 하나님은 시간들의 연속성을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타락 때부터 십자가는 그 의미와 능력을 가졌다. 성령은 십자가에서 획득된 것이지만, 성령은 그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고양(승귀, 현양)을 통해서 비로소 보여준다. 믿었던 모든 자들은 처음부터 성령을 가졌다. 그러나, 이 성령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고양을 통해서 그의 능력 속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은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은사이다. 
4.2. 예수 그리스도: 창조자와 구속자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는 창조중보자가 아니라,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하신 말씀, 중보자, 구속주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이시다. 로고스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과 관계된 모든 것이 일치와 비교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할지라도, 전 세계 속에 있는 만물은 역시 특정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되고 있다. 우리는 뮐러(J. M ller)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부처에 의하면, 세계의 창조와 이 창조 속에 주어진 계시에 참여하셨던 로고스가 모든 계시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그는 모든 사람들을 비추시는 세상의 빛이시다.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시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가끔 몇몇 사람들에게는 높은 정도로 그의 빛을 분배하신다. 모든 계시는 이 로고스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고전)철학 속에서 표현된 계시뿐만 아니라, 구약 속에서 나타난 계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이 로고스는 항상 야훼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바로 이 로고스를 통해서 하나님은 구약의 족장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는 위와 같은 동일한 사상을 이미 부처의 첫 신학 작품 (《Das ym selbs》, 1523)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만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처음에 창조된 첫 질서 속으로 돌아가고,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시피, 부처는 《소요리문답》(Der k rtzer Catechismus, 1534) 속에서 창조주와 구속주(재창조주)로서 아들에 관하여 고백한다: "아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만물이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듯이, 만물이 또한 그를 통해서 회복되고, 완성될 것이다." 부처의 이 같은 입장은 그의 말기의 작품 속에서도 변화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론》(De regno Christi, 1550)에서 부처는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과 재창조 사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오늘날 교회가 왕이신 그리스도께 보여드리는 순종이 그렇게도 완전한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재창조하셨고, 그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그의 사람들에게 오늘의 구원과 영원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상으로 어느 누가 있겠는가?" 
4.3. 그리스도의 영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우리가 부처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철학은 일반 학문으로서 철학 자체와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은사(혜) 및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된 소위 '자연신학'의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다음의 질문들이 중요하다: 부처의 사고 속에서 (고전)철학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부처의 신학에서 상호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부처의 (고전)철학에 대한 높은 가치 평가의 배경은 무엇인가? 계속적으로 중요한 부처의 사상 발전의 단계들을 우리는 부처의 생애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비텐베르커 콘코르디》(Wittenberger Konkordie, 1536)에서 균형을 이룬 신학 사상에 도달한다. 이 같은 사상은 특히 그의 《복음서 주석》(1536)과 《로마서 주석》(1536) 속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에 대한 부처의 사상 발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위의 두 주석서들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4.3.1.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 
즈바넌버르흐(L.G. Zwanenburg)에 의하면, 부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만물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아들은 창조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가 역시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자이시다. 부처는 성령의 보편적, 우주적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는 여기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잘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부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사역과 성육신하신 말씀으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사역 사이를 혼동했다. 이를 통해서 부처는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사이를 혼동했다. 이 점에서 부처는 인문주의 속에 머물렀고, 말씀과 성령에 대한 그의 개념 속에서도 열광주의적 특징들이 남았다. 여기서부터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높은 가치 평가와 그들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 있다." 
위의 즈바넌버르흐의 부처에 대한 평가로부터 우리는 부처는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사이를 날카롭게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여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들 중에 하나가 복된 철학에 대한 부처의 높은 가치 평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즈바넌버르흐는 부처의 《복음서 주석》(1536)만을 그의 연구자료로 선택하여 부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연구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어떤 신학자들은 '능력'과 '힘'으로서 성령에 대한 부처의 이해와 관련해서 부처를 열광주의자, 인문주의자, 신비주의자로 부당하게 평가했다. 이 같은 동일한 오해가 성령의 이중적 사역에 대한 부처의 사상에 대한 평가에도 적용된다. 
인문주의에 대한 부처의 높은 가치 평가는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편으로 부처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고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gymnasium)을 설립해야 했고, 다른 편으로 모든 학문들을 무시하는 재세례파들과의 논쟁을 해야 했다. 신학적 배경은 성령의 사역과 구속사에 대한 부처의 이해와 관계된다. 
만약 사람들이 왜 부처는 (고전)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이유는 교육에 대한 부처의 관심이다. 1530년대에 부처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모든 형태의 학문들을 거부하는 재세례파들과 논쟁 중에 있었다. 그 자신이 교육기관들을 설립하고, 유능한 교육가들이 스트라스부르에 오도록 독려했다. 교육을 실시할 한 교육가는 쉬투름 (Johannes Sturm)이었다. 칼빈도 역시 알고 있었던 프랑스 휴머니즘의 이상적 목표인 경건과 학문이 그의 교육 목표였다. 
1520년대 부처는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논쟁을 통해서 성령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부처는 신학과 철학 사이에 관계를 놓을 때, 이를 통해서 로마 카톨릭교회나 인문주의자들처럼 소위 '자연신학'을 도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부처는 결코 우주적(보편적) 이신론을 알지 못했다. 구속사의 발전 과정에서 구약의 율법과 함께 (고전) 철학은 여기에 대한 예비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부처는 주장한다. 이 예비적 기능은 그리스도께서 풍성하게 하시는 은사의 수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요청하는 부족함 속에 있다. 구속사 속에서의 발전은 부처에 의해서 비교급으로 표현되었다: 더 많은 빛, 더 큰 능력, 더 확실한, 더 큰 권위. 그러므로, 성서와 철학, 신학과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부처는 성령의 일반 사역과 성령의 특별 사역 사이를 예리하게 구별했다. 
4.3.2. 하나님의 이중지식('duplex notitia Dei')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부처의 개념에 대해 많은 문제가 제기 되었다. 랑(A. Lang)은 부처는 고대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통합하기를 원했다고 주장했다. 코흐(K. Koch)에 의하면, 부처의 계시개념은 그의 신학을 도덕-윤리신학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여 스테펀스는 우리는 부처의 모든 신학적 진술들을 부처의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라는 전체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정당하게 말했다. 
부처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율법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철학도 복음에 대한 예(준)비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부처는 그의 《에베소서 주석》(1527)에서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사이를 차별화시켰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정반대로 이방인들은 율법도, 계(언)약도, 약속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는 그의 《복음서 주석》(1536)에서 구속사 속에서 복음에 대한 예비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의 철학과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해서 말한다. 율법과 철학의 예비적 기능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는 구속과 참된 의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데 있다. 율법과 철학을 통해서 우리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학자들과 철학자들도 결함 속에 있다. 완전한 지혜와 의는 성령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선물로 주어진다. 
위와 같은 동일한 사상이 부처의 《로마서 주석》(1536)과 여기에 대한 《로마서주석 서문》 속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부처는 철학 자체와 철학을 추구하는 철학자들 사이를 구별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철학자는 죄를 짓고, 실수할 수 있다. 바울 사도와 철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있다. 철학은 성서와 그리스도의 진리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참 종교에 대한 판단과 일치할 때 진리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글들 속에서 부여하신 은사들을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내적 교리'(interna spiritus doctrina)에 문외한인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철학을 사용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을 가지고 자신을 맡기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이 같은 위험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철학의 권위를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실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놀랄만한 능력,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계시 속에서 그 비밀이 발견되는 놀랄만한 능력은 성서 속에 있다. 
부처는 그의 《로마서 주석》(1536) 속에서 철학과 성서의 관계를 '하나님의 이중지식'과 결부시킨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 지식과 관계되고, 성서는 하나님의 특별 지식과 관계된다. 율법과 철학 자체는 어떤 의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자비와 구원이 계시된다. 믿음을 통해서 의가 주어진다. 철학과 율법을 통해서 의가 주어지지 않는다. 부처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중지식'(duplex notitia Dei)은 '하나님의 자연 지식'(naturalis scientia Dei)과 '하나님의 구원 지식'(cognitio Dei salvifica)이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무신성에 대해서 증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원죄 때문에 충분하지 못하다. 후자는 완전하고도 참되다. 이것은 영생이며,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다. 
부처의 성령론에서 두 개의 선들이 서로 만난다. 다시 말하면, 섭리 속에서의 성령의 일반 사역과 선택 속에서의 성령의 특별 사역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성 (Alleinwirksamkeit)의 선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의 선. 부처의 성령론은 기독론적 전조(특징)를 통해서 그의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신비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따라서, 부처는 전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사고 속에 머물렀다. 특별히 그의 경우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중심으로,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성육신 이전에도 이미 세상의 빛이셨다. 이 빛은 그의 십자 상에서, 그의 고양 속에서, 그의 영의 보내심 속에서 완전히 상승되었다. 복음의 예비적 기능을 가진 율법과 철학이 결점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오신다. 참 경건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온다.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철학의 결점을 드러내지만,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 
5. 결론 
삼위일체론과 관련해서 부처는 항상 성서와 교회의 전통 양식, '한 본질, 세 위(인)격들'(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을 따르고자 한다. 그러나, 부처의 삼위일체론의 발전은 반삼위일체주의자 세르베투스와 유대주의적 주석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부처는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단순성)과 위(인)격들의 삼위성을 주장했다. 
부처의 성령론은 삼위일체론에 뿌리박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성의 제3위의 위(인)격이다. 부처가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 또는 에너지로 부르는 것은 성령이 독립적인 비인격적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고유성(proprietas)과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이다. 부처의 경우 성령의 사역은 '거룩성'이라는 단어와 관계 된다. 
부처는 내재적-경륜적 '필리오케'를 고백한다.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며,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고, 아들의 영이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 영원한 말씀으로서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영을 보내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말씀, 중보자로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획득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은 왕으로서 고양된 그리스도의 은사이다. 성령은 창조 속에서뿐만 아니라, 재창조(구속) 속에서도 역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구속(재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는 창조중보자가 아니라, 창조자이시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된 말씀, 중보자, 구속주가 되셨다. 
부처가 인문주의(철학)에 부여하는 가치는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일반 사역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부처는 그리스도의 영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