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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위’(位)와 ‘체’(體)의 관계가 주는 교훈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위’(位)와 ‘체’(體)의 관계가 주는 교훈
손성은목사(삼일교회, 부산)
1. 삼일교회 이름의 역사적 뿌리
‘삼일교회’는 ‘초량삼일교회’의 이름을 잇고 있습니다. ‘초량삼일교회’는 ‘초량교회’ 이전에 있던 이름임은 이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기철목사 당시의 교회이름이 바로 ‘초량삼일교회’였음은 그 당시 남아있던 ‘직원회의록’으로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경남노회의 회의록에서 분명한 증거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1931년 1월7일부터 8일까지 모였던 경남노회29회기의 회집장소를 분명히 ‘초량삼일예배당’으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이 29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는 이가 바로 그 ‘초량삼일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주기철목사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상동목사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전도사로 부임하게 된 곳이 ‘초량교회’가 아니라, ‘초량삼일교회’라는 것과 함께, 왜1951년 10월14일 ‘초량교회’에서 쫓겨나서 교회를 세우게 될 때, 그 교회의 이름을 ‘삼일교회’라고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최소한 잃어버린 이름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삼일교회‘라는 이름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에 대해서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의의와 그 중요성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저는 여러번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거니와 이번 글을 통해서는 “삼위일체”신앙에 있어서 흔히 간과되어 온 “위”와 “체”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삼”과 “일”, 그리고 “위”와 “체”
삼위일체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위’와 ‘체’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과 그 ‘위’와 ‘체’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trinity'라는 말을 보면, 결국 ‘삼’(三, tri-)과 ‘일’(一,-nity)만 있습니다. ‘위’와 ‘체’라는 말을 가르키리라 여겨지는 글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trinity'라는 영어를 ‘삼일’로 번역해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따라서 저희 교회이름이 ‘삼위일체교회’가 아니라, ‘삼일교회’인 셈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삼일’이라는 말보다도 그 ‘삼’과 ‘일’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위’와 ‘체’, 그리고 이 ‘위’와 ‘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서양교회의 역사를 보면, 바로 이 논의가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용어가 하도 복잡해서,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혼동을 주어서,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교회의 일반회중들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 주제와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에까지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삼위일체신앙은, 헬라어로 treis hypostaseis mia ousia (라틴어:tres personae una essentia, 영어:three persons one essence)라는 용어로 통일되어졌습니다. 이런 통일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는 수많은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3. “위”(位, person)의 개념
그 중의 하나가 바로 “person”의 개념(헬:hypostaseis, 라:persona)에 대한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person”을 지금까지 “위”(位)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단어를 “인격”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위” 혹은 “위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영어의 “person”을 번역한 “위”라는 단어는 도대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언듯 보아 “위치”나 “자리” 등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만약 그런 뜻만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person”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의 “체”(體)라는 단어를 “몸 체”라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몸이 하나인 존재로 보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몸에 머리는 세 개쯤 되는 이상한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괴물에게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몸 체”가 아니고 “본질 체”로 이해해야 합니다. 세 person이 되시면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위”(位, person)의 개념입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이 “위”라는 단어는 상대방을 존중해서 부르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 말의 “여러분”이란 말의 “분”이라는 용어에 해당되고, 인격을 가진 존재를 헤아릴 때, 한 분, 두 분...이라고 하는 바로 그 “분”에 해당됩니다. 그러니, “삼위일체하나님”을 순전히 우리 말로 풀어 보자면, “세 분이시면서 한 본질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도 "person"의 이해에 있어서 이런 혼동이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에 들어와서 심리학이 발달되면서 이 “person"이라는 단어를 한 개인의 독특한 정체성이나 개별적인 존재됨을 나타내는데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신앙은, 잘못 왜곡되어서 삼신론을 믿고 섬기는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person"을 개별적인 독립적 존재로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person"에 대한 이런 현대적 개념이 정착되기 훨씬 이전에는 이 “person”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보다 더 복합적인 의미를 지녀왔습니다. 다른 존재와는 독립되고 분리된 개별적인 어떤 존재를 나타내는 것보다는.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를 나타낼 때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person”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가 없으면 “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나”가 없으면 “너”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가진 존재가 바로 “person"인 것입니다. 성부가 없으면 성자가 없고, 성자가 없으면 성부도 없으며, 성부가 없으면 성령도 없고 성령도 없으면 성부도 없고, 성자가 없으면 성령도 없고 성령이 없으면 성자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위”(位,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원전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이 계셨다고 할 때,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존재했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래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순간에는 사랑이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1요4:12). 
4. 춤추시는 하나님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정초하는데 공헌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이런 삼위간의 관계를 “위”와 “체”의 관계로 표현할 때, “위가 체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가 “존재”하고 나서 그 다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분화되어진 것이 아니고, “위”(位, person), 곧 성부의 person과 성자의 person, 그리고 성령의 person이 먼저 존재하고 그 존재와 동시에 그 “위”(person)들의 하나님되심, 곧 “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순서를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만큼 “위”(位, person)라는 것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강조되는 삼 “위”(person)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바로 “페리코러시스”(perichoresis)입니다. “상호내재성” 혹은 “상호침투성”이라고 번역되는데, 직역하자면, “원형을 만들어 춤을 춤”, 혹은 “윤무”(輪舞)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강강술래와 같은 형태로 둥글게 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둥글게 돌면서 춤을 추듯이 완전히 하나되어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은 바로 춤추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세 분이시면서도 완전하고 완벽하게 하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5. 삼일교회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지각을 뛰어넘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모든 것이 이해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법칙일 뿐입니다. 이해하고 활용하면 됩니다. 경배와 찬양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person"이라는 것 자체가 완전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erson도 신비라고 한다면, 하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person은 무엇을 더하여 강조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 전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광과 존귀를 세세토록 받으실 분이 우리 삼일교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를 신비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계시된 말씀에 근거해서 묵상하고 사색하는 것은 너무나도 건전하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 일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의 의무인 것처럼 수행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 삼위일체신앙을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였습니다. 신비하기 때문에 무관심해진 것이 아니라, 신비하기 때문에, 그 신비를 이해하고 체험하며 또한 경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삼일교회 성도들은,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교회이름을 가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그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만큼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또한 제대로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상호간에 완전하게 내재하시는 하나님, 상호간 마주하시면서 춤을 추신다고 해야 조금은 이해될 듯 싶은 그런 완전한 하나되신 본질(체, essence)로 거하시는 위(위, person)이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도 또한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인격(person)들인 것입니다. 
(미주)
1)경남노회록에 표기된 회집장소에 대한 표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것은, 분명히 1931년(29회) 회집장소를 “초량삼일예배당”이라고 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1923년(15회)과 1924년(17회)에는 “초량예배당”, 1935년(36회)에는 “초량교회”라고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이름에 대하여 지금과 같은 엄밀한 주의가 요구되지 않았던 세태(참고, 송상석목사의 ‘마산문창교회’를 ‘마산교회’라고 표기하고 있는 1949년 8월12일자의 『민주중보』의 반민특위활동에 대한 기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당시 “삼일교회”를 “초량에 있는 교회”라는 뜻의 “초량교회”라고 표기해도 “삼일교회”를 연상시키는 표기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2)이상규, 상게서, p.22.
3)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계통의 ‘지방교회’에서는 이 trinity를 ‘삼일신’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신론이 ‘양태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 삼일교회의 ‘삼일’은 결코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강조해야 할 것이다. 
4)‘위’(位)는, 헬라어 hypostasis나 prosopon, 라틴어 substantia나 persona, 그리고 영어 person의 번역어이다.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던 헬라교부들의 신학이 로마제국을 배경하는 전개된 라틴신학과 주고받는 과정에서, 수많은 혼동이 야기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이다. 헬라어의 hypostasis 를 라틴어로 직역하면 substantia가 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라틴어 substantia(~아래에 존재하다)가 주는 뜻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헬라어 hypostasis(~아래에 존재하다)에서 받게 되는 인상이 문자적인 뜻과는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최소한 헬라어 hypostasis는 능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반면(~아래에 두다), 라틴어 substantia라는 단어는 자동사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아래에 있다). 그런데, 이런 용어들이 ‘위’(位)를 가르키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런 용어들이 ‘체’(體)를 가르키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혼동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셈이다. 
5)이 전통은 trinity 를 “삼위일체”로 번역한 마태오 리치(1552~1610년)의 『천주실의』(1595년)에 의해서 시작된다. 하지만, 리치신부가 이 용어를 ‘삼위일체’로 번역하여 소개하였지만, 왜 ‘위’(位)와 ‘체’(體)라는 단어를 택하였는지, 그리고 그 ‘삼’(三)과 ‘일’(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