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경의 예정론에 관련한 이해
(김병훈, 합신,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2.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
3.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
4. 예정과 관련한 도르트 총회의 결정
5.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개혁파의 견해
6.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1618-19년에 있었던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가 알미니우스의 교훈을 따랐던 항론파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결정한 이후에,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패커(J. I. Packer)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어느 한 편에 서는 일을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대척을 이루는 별개의 신학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병훈, 합신,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2.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
3.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
4. 예정과 관련한 도르트 총회의 결정
5.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개혁파의 견해
6.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1618-19년에 있었던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가 알미니우스의 교훈을 따랐던 항론파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결정한 이후에,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패커(J. I. Packer)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어느 한 편에 서는 일을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대척을 이루는 별개의 신학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셀(Alan, P. F. Sell)은 알미니안 항론파(Arminian Remonstants)가 역사적으로 화란 개혁신학의 전통 안에서 파생되었음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칼빈주의 개혁신학에 대한 화란 개혁파의 주류 해석과는 구별이 되는 또 하나의 개혁신학에 대한 해석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실제로 알미니우스는 자신이 로마 교황에게 돈으로 회유를 받아 천주교회로 돌아갈 것이며, 또 학생들에게 예수회의 수아레츠(Franciscus Suάrez)의 책을 읽도록 추천하였다는 소문에 대해서 해명을 하는 글 가운데서 자신은 성경의 교훈과 화란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서(1561)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결코 가르친 적이 없다고 자신을 변호하였다.
만일 알미니우스의 말한 바대로 자신의 주장이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교훈과 일치된다면, 알미니안주의는 16세기 개혁파의 고백신학을 공유하면서, 16세기 후반부터 스콜라신학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분화된 개혁파의 한 부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가 판단한 대로, 알미니우스가 16세기 개혁파 신앙과 어긋난다면 그의 신학은 역사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서 태동이 되었으나 신학체계에 있어서 개혁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본 논고는 알미니안주의를 개혁파의 한 부류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일 전자가 옳다면 그것은 개혁신학이 칼빈을 비롯한 16세기 초기 개혁주의자들의 신학과 16세기 중반 이후의 개혁주의 스콜라 정통신학 사이에 신학적 불연속성이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 되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초기 개혁주의 신학과 후기 개혁주의 스콜라신학이 단지 방법론의 차이를 가질 뿐이며, 교리 상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이 멀러(Richard A. Muller)에 의하여 주지의 사실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본 논고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항론파의 주장에 담겨 있는 알미니안의 신학이 16세기 칼빈의 신학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후의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에 따라서 도르트 신경의 분석을 통하여 규명하는 것이다.
도르트 신경을 통해서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차이점을 잘 분별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교리사적 논쟁을 살피는 것을 넘어서 21세기 초의 지금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우선 두 신학은 여전히 배타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관계로써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실제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 칼빈주의는 오늘날 현대 서구사회의 문화에 있어서 단지 과거에 속한 신학적 전통일 뿐, 더 이상 가치가 있는 신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칼빈주의자들의 탄식이 있다. 그 까닭은 칼빈주의의 주요 교리들, 예를 들어, 원죄와 전적 부패, 자신의 구원과 관련한 인간의 무능력 및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대적 의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예정과 통치 등의 교리들이 정치적 민주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와 같은 현대 세속 사회의 가치와 충돌이 되기 때문이며,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에서 조차도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에 따라서 인간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는 공로의 개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난 20세기에 웨슬레의 알미니안 신학과 오순절 신학이 지배적으로 활동하였던 미국 복음주의 영역에서 신학의 경쟁에서 패배를 하고 사라진 듯한 칼빈주의가 최근에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회복하며 다시 출판문화와 교육의 현장에 재등장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경계의 소리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그 까닭이 미국 복음주의가 구도자 중심의 피상적인 신학에 머물렀으며, 그 결과가 하나님이 더 이상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교인들의 요구를 충족하여 주는 “우주의 멋진 사환(cosmic bell boy)”으로 전락되었고, 또 성경은 한낱 자기 실현을 위한 조언의 책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복음주의의 세속화의 영향에 있다고 분석한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복음주의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인하여 영적인 메마름에서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해방감을 칼빈주의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분석한다.
최근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에서는 칼빈주의만이 그 영향력을 다시 높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주의의 부흥과는 정반대로 칼빈주의는 물론 알미니안주의의 신학과도 어긋나는 소위 말하는 개방신론(open theism) 혹은 자유의지신론(freewill theism)이라는 신학 사조가 상당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개방신론자들은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시간의 역사를 작정, 또는 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발생에 따라서 시간 안의 모든 일을 경험하시므로 어떤 미래의 일도 하나님께 미확정적으로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유라는 개념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을 한다.
개방신론의 논의가 활발히 나타나는 가운데, 개방신론과는 달리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전통적인 신관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적 예정과 인간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논의들을 환기시키는 움직임들도 주목을 끌만큼 충분히 개진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에도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 토론은 여러 가지 형식과 필요를 따라서 계속되고 있으며, 또 개방신론이 16-17세기의 소시니안주의와 유사한 주장으로 알미니안주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개혁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 도르트 신경에 나타난 개혁주의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이해를 도모하고, 이로써 개혁주의의 신학의 이유들을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한 본 논고의 연구범위는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과 도르트 총회의 반박 결정문을 살피는 것으로 제한할 것이며, 논의를 위하여 필요할 경우 항론파의 다른 주장들과 이에 대한 도르트 총회의 결정문들을 참고로 하도록 한다.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
소위 “튤립(TULIP)”으로 알려진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
소위 “튤립(TULIP)”으로 알려진 칼빈주의 5대 강령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죽은 후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설명하기 위하여 1610년 정부의 지시에 따라 제출한 5대 신앙 강령에 대응하여 만들어졌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5대 신앙강령은 ‘항론서’(Articuli Remonstrantia)로 불리웠고, 이에 따라서 그들은 ‘항론파’로 불리웠다. 도르트 총회는 그들의 ‘항론서’가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회기 중에 그들에게 ‘항론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보충적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1618년 12월에 31차와 34차 회기에 항론파들은 ‘항론파들의 견해들’(Sententia Remonstrantium)이라는 해명서를 제출하였다.
항론파들은 당시에 널리 주장되고 있던 개혁신학에 대해 자신들의 신앙을 해명하기 위하여 정리하여 제출한 다섯 가지 신앙 항목들은 이와 같다.
첫째 항목은 예정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인간의 믿음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이것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조건적 선택설’을 주장한다. 둘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와 각각의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할 의도로 죽으셨던 것이며, 몇몇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 아니라는 ‘보편 속죄설’을 주장한다. 셋째 항목은 구원받는 신앙과 관련한 것으로,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서는 복음에 대하여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첫째 항목은 예정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인간의 믿음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이것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조건적 선택설’을 주장한다. 둘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와 각각의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할 의도로 죽으셨던 것이며, 몇몇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 아니라는 ‘보편 속죄설’을 주장한다. 셋째 항목은 구원받는 신앙과 관련한 것으로,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서는 복음에 대하여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넷째 항목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으로, 앞의 셋째 항목에서 말한 거듭남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먼저 선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는 ‘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한다. 끝으로 다섯째 항목은 성도의 견인과 관련한 것으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신앙으로 합당한 반응을 한 자들이 계속하여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바라고 합당히 반응을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조건적 견인설’을 주장한다.
이상의 다섯 가지 신앙 항목들 가운데 본 논고의 중심 주제인 첫째 항목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소리를 직접 옮기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있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 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리라”는 말씀과 또 이와 일치하는 다른 몇 구절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변치 않는 작정에 따라,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타락하여 죄에 빠진 인류들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의 이 아들을 믿으며, 동일한 은혜를 통해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지속해 나아가는 자들을, 그 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 반대 로 완악하며 믿지 않는 자들을 죄와 진노 아래에 남아 있도록 하시고, 그리스도에 게서 소외된 그런 자로 정죄하기로 정하셨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있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 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리라”는 말씀과 또 이와 일치하는 다른 몇 구절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변치 않는 작정에 따라,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타락하여 죄에 빠진 인류들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의 이 아들을 믿으며, 동일한 은혜를 통해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지속해 나아가는 자들을, 그 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 반대 로 완악하며 믿지 않는 자들을 죄와 진노 아래에 남아 있도록 하시고, 그리스도에 게서 소외된 그런 자로 정죄하기로 정하셨다.
항론파의 ‘예정’에 대한 진술은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기로 작정하셨다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대상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견지하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반면에 유기의 예정 또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대상은 믿음을 거부한 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항론파가 이러한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하여 거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이나 유기의 예정을 하실 때에 그 대상을 죄인들 가운데서 결정하시는 것이지, 타락전 선택설이 말하는 바처럼 ‘창조되어질 가능적(creabilis) 존재자이며 타락할 가능적(labilis)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론파는 예정에 대한 진술 가운데 “타락하여 죄에 빠진 인류들 가운데”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항론파들의 주장은 개혁파의 또 다른 견해인 ‘타락후 선택설’과는 일치하는 것인가? 개혁파의 ‘타락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은 하나님께서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먼저 창조하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타락을 하도록 허용을 하심으로써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는 작정을 하셨다고 믿는다. 곧 ‘타락후 선택설’에서의 선택의 대상은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이다.
그렇다면 항론파들의 주장은 개혁파의 또 다른 견해인 ‘타락후 선택설’과는 일치하는 것인가? 개혁파의 ‘타락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은 하나님께서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먼저 창조하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타락을 하도록 허용을 하심으로써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는 작정을 하셨다고 믿는다. 곧 ‘타락후 선택설’에서의 선택의 대상은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이다.
선택의 대상에 관련하여서 항론파들은 개혁파의 ‘타락후 선택설’과 견해를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론파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은 물론이거니와 ‘타락후 선택설’도 또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1618년에 제출한 해명서(Sententia Remonstrantium)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어떤 이는 영원 한 생명을 주지 않으시기로 거부하시는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이들을 창조하고자 하시는 작정보다 앞서서 하신 것이 아니며, 자신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 또는 자신 의 절대적 능력과 통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서,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어떤 이는 영원 한 생명을 주지 않으시기로 거부하시는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이들을 창조하고자 하시는 작정보다 앞서서 하신 것이 아니며, 자신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 또는 자신 의 절대적 능력과 통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서,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1항)
항론파는 그들의 해명서에서 자신들이 개혁파 견해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은, ‘타락전 선택설’과는 달리, 창조의 작정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며,
항론파는 그들의 해명서에서 자신들이 개혁파 견해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은, ‘타락전 선택설’과는 달리, 창조의 작정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타락전 선택설’은 물론 ‘타락후 선택설’과 달리,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만’ 예정하신 것이 아니며, 시간 영역 안에서의 인간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예정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서 그 근거를 자신의 작정의 영원성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시간성에 두고 있다는 것이 항론파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의 핵심이며, 개혁파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초점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항론파는 ‘항론서’ 제 1항에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의 이 아들을 믿으며, 동일한 은혜를 통해,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지속해 나아가는 자들을 ....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죄인의 순종 여부에 대한 고려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기 위하여 항론파 해명서는 선택과 유기에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의 구원과 멸망에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으로 의도되어진 결과의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받은 자들과 유기된 자들이 자신들의 최종적인 결과에 유효적이며 필연적으로 처하도록 이끄는 그와 같은 수단들이 바로 그 작정[결과의 작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죄인의 순종 여부에 대한 고려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기 위하여 항론파 해명서는 선택과 유기에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의 구원과 멸망에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으로 의도되어진 결과의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받은 자들과 유기된 자들이 자신들의 최종적인 결과에 유효적이며 필연적으로 처하도록 이끄는 그와 같은 수단들이 바로 그 작정[결과의 작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2항)
항론파가 말하는 바는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이 각 사람의 운명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결정짓는 데에 관련한 구원의 수단들도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차이가 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순종 여부를 보시고 작정을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작정이 개혁파들의 예정론처럼 각 사람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의미에서의 결과의 작정이지 않으며, 또한 구원의 수단도 이와 같은 결과의 작정에 따라서 종속되어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서도 살핀 바와 같이 항론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하나님의 작정과 대비하여 이러한 주장을 확장하여 나간다.
... 중보자 그리스도는 단지 선택을 실행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또한 선택의 작정의 근거이다. 어떤 이들이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며 믿음 안에서 견인 을 받아 영화롭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받았기 때문 이 아니다. 다른 어떤 이들이 타락한 상태에 남게 되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주어 지지 않으며, 그들이 부르심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유효적으로 받지 못하게 되고, 강퍅하여지며, 저주를 받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유기를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항론파가 말하는 바는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이 각 사람의 운명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결정짓는 데에 관련한 구원의 수단들도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차이가 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순종 여부를 보시고 작정을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작정이 개혁파들의 예정론처럼 각 사람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의미에서의 결과의 작정이지 않으며, 또한 구원의 수단도 이와 같은 결과의 작정에 따라서 종속되어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서도 살핀 바와 같이 항론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하나님의 작정과 대비하여 이러한 주장을 확장하여 나간다.
... 중보자 그리스도는 단지 선택을 실행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또한 선택의 작정의 근거이다. 어떤 이들이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며 믿음 안에서 견인 을 받아 영화롭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받았기 때문 이 아니다. 다른 어떤 이들이 타락한 상태에 남게 되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주어 지지 않으며, 그들이 부르심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유효적으로 받지 못하게 되고, 강퍅하여지며, 저주를 받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유기를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3항)
그리스도가 선택의 실행뿐만 아니라 선택의 작정의 근거라는 주장을 통해 항론파는 마치 ‘항론서’ 1항에서 하나님의 작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 바와 같이,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이 선택의 근거와 원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두고 있다고 비판하는 항론파들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선택’을 연결시킴으로써, 항론파들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의 예정론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 있는 작정에 둘 뿐이라는 비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선택의 실행뿐만 아니라 선택의 작정의 근거라는 주장을 통해 항론파는 마치 ‘항론서’ 1항에서 하나님의 작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 바와 같이,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이 선택의 근거와 원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두고 있다고 비판하는 항론파들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선택’을 연결시킴으로써, 항론파들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의 예정론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 있는 작정에 둘 뿐이라는 비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이가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일이 영원한 절대적 선택의 작정을 받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어떤 이가 타락한 상태로 남아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영원한 절대적 유기의 작정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도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지 못하도록 이미 영원히 작정이 되었다는 이유로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유기되는 것인가? 항론파는 각 개인들의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인 죄들의 개입과 관련이 없이, 대부분에 이르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모든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배제된 채 타락의 상태에 있도록 작정하시 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유기되는 것인가? 항론파는 각 개인들의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인 죄들의 개입과 관련이 없이, 대부분에 이르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모든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배제된 채 타락의 상태에 있도록 작정하시 지 않았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4항)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소망에서 끊어진 채 멸망의 상태에 있도록 예정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실제적인 죄들의 개입과 관련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항론파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대상은 하나님의 의지라는 영원성 안에서 ‘창조될 것이며 타락할 가능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창조되었으며 타락한 존재자’들임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택 또는 유기의 근거가 인간의 순종 또는 불순종에 있음을 명백히 한다.
결국 항론파가 하나님의 예정의 근거는 인간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 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이루어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항론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모든 죄인들에게 열려져 있는 보편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도록 작정을 하셨다. 이 작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 시고, 사람들에게 믿음에 이르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수단들을 하나님 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에 알맞은 것으로 생각하시는 방식대로 실행하여 주기로 작 정을 하셨다. 그렇지만 어떤 절대적인 작정에 따라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오직 선 택한 자들에게만 주시고,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그들에게만 믿음을 부여 하시고, 이들만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 안에서 견인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적은 어떤 식으로도 결코 없으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소망에서 끊어진 채 멸망의 상태에 있도록 예정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실제적인 죄들의 개입과 관련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항론파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대상은 하나님의 의지라는 영원성 안에서 ‘창조될 것이며 타락할 가능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창조되었으며 타락한 존재자’들임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택 또는 유기의 근거가 인간의 순종 또는 불순종에 있음을 명백히 한다.
결국 항론파가 하나님의 예정의 근거는 인간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 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이루어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항론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모든 죄인들에게 열려져 있는 보편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도록 작정을 하셨다. 이 작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 시고, 사람들에게 믿음에 이르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수단들을 하나님 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에 알맞은 것으로 생각하시는 방식대로 실행하여 주기로 작 정을 하셨다. 그렇지만 어떤 절대적인 작정에 따라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오직 선 택한 자들에게만 주시고,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그들에게만 믿음을 부여 하시고, 이들만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 안에서 견인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적은 어떤 식으로도 결코 없으시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5항)
항론파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이란 먼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상을 죄인인 모든 보편적 인류를 대상으로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기로 하는 작정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반응을 하기에 필요로 하는 모든 수단들을 제공하기로 작정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자들을 미리 정하여 이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중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이들에게만 믿음의 은사를 주고 견인하여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개혁파의 하나님의 작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항론파는 생각한다.
결국 항론파는 하나님의 작정의 이해에 있어서 단순히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작정의 내용에 있어서도 개혁파와 분명한 이견을 주장한다. 따라서 항론파는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작정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히 한다.
어떤 누구도 어떤 선행하는 절대적 작정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거 부를 당하거나 또는 이를 위해 충분한 수단을 받지 못하도록 거부를 당하지 않는 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부르심과 성령님의 모든 은사들은 모든 이들을 구 원에 이르도록 하기에 유익하며, 또 그들이 이러한 은사들을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를 멸망으로 돌리지 않는 한, 이것들은 그들에게 참으로 유익이 된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저주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나 원인인 불신앙, 불경건, 그리고 죄들을 범하 도록 예정이 되지 않았다.
항론파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이란 먼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상을 죄인인 모든 보편적 인류를 대상으로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기로 하는 작정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반응을 하기에 필요로 하는 모든 수단들을 제공하기로 작정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자들을 미리 정하여 이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중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이들에게만 믿음의 은사를 주고 견인하여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개혁파의 하나님의 작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항론파는 생각한다.
결국 항론파는 하나님의 작정의 이해에 있어서 단순히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작정의 내용에 있어서도 개혁파와 분명한 이견을 주장한다. 따라서 항론파는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작정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히 한다.
어떤 누구도 어떤 선행하는 절대적 작정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거 부를 당하거나 또는 이를 위해 충분한 수단을 받지 못하도록 거부를 당하지 않는 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부르심과 성령님의 모든 은사들은 모든 이들을 구 원에 이르도록 하기에 유익하며, 또 그들이 이러한 은사들을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를 멸망으로 돌리지 않는 한, 이것들은 그들에게 참으로 유익이 된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저주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나 원인인 불신앙, 불경건, 그리고 죄들을 범하 도록 예정이 되지 않았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6항)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 안에서, 미리 절대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기로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필요하며 충분한 은사를 부여하시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항론파는 인간이 이러한 은사를 소홀히하거나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따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후에, 이어서 항론파는 ‘항론서’ 1항에 대한 첫 번째 해명 항목에서 이미 언급하였던 것, 곧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는 표현을 통해 의도하였던 바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힌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은, 선택에 있어서 미리 요구되는 전제 조건으로서, 예 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견인에 대한 고려를 통해 결정이 되는 것이지, 믿음에 대한 고려와 또 참된 믿음의 견인에 대한 고려도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 안에서, 미리 절대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기로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필요하며 충분한 은사를 부여하시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항론파는 인간이 이러한 은사를 소홀히하거나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따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후에, 이어서 항론파는 ‘항론서’ 1항에 대한 첫 번째 해명 항목에서 이미 언급하였던 것, 곧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는 표현을 통해 의도하였던 바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힌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은, 선택에 있어서 미리 요구되는 전제 조건으로서, 예 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견인에 대한 고려를 통해 결정이 되는 것이지, 믿음에 대한 고려와 또 참된 믿음의 견인에 대한 고려도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7항)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거부당하는 것은 어떤 선행하는 불신앙과 또 불신앙 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고려함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선행하는 불신 앙과 또 불신앙에 계속 머무르는 것에 대한 고려도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거부당하는 것은 어떤 선행하는 불신앙과 또 불신앙 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고려함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선행하는 불신 앙과 또 불신앙에 계속 머무르는 것에 대한 고려도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항 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8항)
항론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인간의 믿음과 불신앙의 반응이 하나님의 작정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서 그 개개인의 선택 또는 유기의 작정을 하신다고 말함으로써 개혁파의 예정에 대한 비판을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예정론에 대한 항론파의 비판의 초점은 단지 작정의 대상이 죄인이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에 의해 조건화 된다거나,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보다 후행적이라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신론 상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항론서’의 제 1항인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는 마지막으로 예정에 대한 논의를 유아의 경우에 관련하여 전개함으로 끝을 맺는다. 항론파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인간의 믿음의 반응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신자들은 아직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유아의 상태에 있는 그들의 자식이 구원의 예정을 받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항론파의 이해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지만, 항론파는 유아의 구원을 오히려 인정한다.
신자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이므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도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 세상을 떠날 경우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자신들 의 인격 안에서 실제적인 죄를 범하기 이전 유아기에 이 세상을 떠나는 신자의 어 떤 특정한 자녀들이, 거룩한 세례의 씻음과 그들을 위한 교회의 기도가 그들의 구 원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정도로, 유기된 자들의 수에 결코 포함이 되지 않 는다.
항론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인간의 믿음과 불신앙의 반응이 하나님의 작정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서 그 개개인의 선택 또는 유기의 작정을 하신다고 말함으로써 개혁파의 예정에 대한 비판을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예정론에 대한 항론파의 비판의 초점은 단지 작정의 대상이 죄인이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에 의해 조건화 된다거나,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보다 후행적이라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신론 상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항론서’의 제 1항인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는 마지막으로 예정에 대한 논의를 유아의 경우에 관련하여 전개함으로 끝을 맺는다. 항론파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인간의 믿음의 반응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신자들은 아직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유아의 상태에 있는 그들의 자식이 구원의 예정을 받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항론파의 이해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지만, 항론파는 유아의 구원을 오히려 인정한다.
신자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이므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도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 세상을 떠날 경우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자신들 의 인격 안에서 실제적인 죄를 범하기 이전 유아기에 이 세상을 떠나는 신자의 어 떤 특정한 자녀들이, 거룩한 세례의 씻음과 그들을 위한 교회의 기도가 그들의 구 원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정도로, 유기된 자들의 수에 결코 포함이 되지 않 는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9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의 어떤 자녀도, 유아의 상태로 살고 있을 때에, 절대적인 작정에 의하여 유기된 자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 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의 어떤 자녀도, 유아의 상태로 살고 있을 때에, 절대적인 작정에 의하여 유기된 자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 지 않는다.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10항)
항론파는 자신들은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는 물론, 유아의 상태에 있는 신자의 자녀가 아직은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의 상태이므로, 어떤 선택과 유기의 예정의 조건을 갖추기 전이지만, 교회의 거룩한 세례와 기도가 그들의 구원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게 될 정도로, 신자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유기된 자들의 수에 포함된다고 생각지 않음을 주장한다. 예정론의 논의의 끝에 유아에 관련한 논의를 덧붙임으로써, 항론파는 만일 개혁파의 주장대로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이라면, 신자의 자녀들 가운데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어떤 자녀들은 유기의 작정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자극한다.
항론파는 자신들은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는 물론, 유아의 상태에 있는 신자의 자녀가 아직은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의 상태이므로, 어떤 선택과 유기의 예정의 조건을 갖추기 전이지만, 교회의 거룩한 세례와 기도가 그들의 구원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게 될 정도로, 신자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유기된 자들의 수에 포함된다고 생각지 않음을 주장한다. 예정론의 논의의 끝에 유아에 관련한 논의를 덧붙임으로써, 항론파는 만일 개혁파의 주장대로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이라면, 신자의 자녀들 가운데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어떤 자녀들은 유기의 작정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자극한다.
항론파의 주장도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믿음의 반응이라는 조건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항론파의 논리에서도 유아의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신자의 자녀의 구원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가 유기가 될 근거가 되는 불신앙이라는 조건이 없는 반면에, 개혁파의 경우는 하나님의 작정에 유기의 근거가 있으므로 유기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는 논리로 항론파는 개혁파의 예정론에 대해 반감을 도모한다.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
지금까지 살펴본 항론파의 예정에 관한 견해, 곧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에 의해 조건화 된다거나, 또는 인간의 반응보다 후행적이라는 항론파의 이해는 알미니우스의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알미니우스는 ‘타락전 선택설’과 같은 개혁파의 교리는 16세기 개혁파 교회의 주요 신앙고백들과 어긋나며, 오히려 자신의 신학이 이것들과 일치한다고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알미니우스는, 1608년에 제출한 “견해의 선언”(Declaratio sententiae)에서, 벨직 신앙고백서(1561) ‘인간의 창조와 타락’에 관한 14항의 한 대목과 ‘선택’에 관한 16항의 한 대목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
지금까지 살펴본 항론파의 예정에 관한 견해, 곧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에 의해 조건화 된다거나, 또는 인간의 반응보다 후행적이라는 항론파의 이해는 알미니우스의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알미니우스는 ‘타락전 선택설’과 같은 개혁파의 교리는 16세기 개혁파 교회의 주요 신앙고백들과 어긋나며, 오히려 자신의 신학이 이것들과 일치한다고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알미니우스는, 1608년에 제출한 “견해의 선언”(Declaratio sententiae)에서, 벨직 신앙고백서(1561) ‘인간의 창조와 타락’에 관한 14항의 한 대목과 ‘선택’에 관한 16항의 한 대목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속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므로써, 스스로 의지적으로 죄에 빠졌으며, 그 결과 사망과 저주에 놓이게 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 14항 가운 데)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며 불변하는 계획 안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어떤 고려가 없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순전한 선하심에 따라서, 선택 하신 자들을 저주로부터 끌어내시어 구원하심으로써 긍휼하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외의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빠져버린 타락과 파 멸 가운데 내버려 두심으로써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 (벨직 신앙고백 서, 16항 가운데)
알미니우스는 해석하기를 벨직 신앙고백서가 14항에서 인간의 범죄가 ‘의지적으로’(volontairement) 행하여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선행한 어떤 예정이라는 작정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었음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타락전 선택설’과는 어긋난다고 하였다. 또한 알미니우스는 16항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며, 그 외의 사람들을 파멸 가운데 내버려 두신다’는 고백이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지를 않는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우스 생각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 안에서 선택의 대상과 관련한 아무런 내용도 없이 선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선택하였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인용하여 이렇게 논증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아담 안에서 멸망을 당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 이 아니라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그의 은사를 받은 자들 에게만 주어진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문답)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아담 안에서 멸망을 당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 이 아니라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그의 은사를 받은 자들 에게만 주어진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문답)
누가 구원을 받는가?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가 아닌가? 알미니우스는 여기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구원에 이르도록 절대적 의미에서 예정하셨음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나오는 자를 그의 작정 안에서 구원받는 신자로 간주하셨음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4문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의 시작 날부터 끝 날까지 온 인류 가운데서 자신의 영과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을 받은, 참된 신앙 안에서 함께 일치하는, 한 무리[교회]를 자신에게로 거두고 모으는 것을 믿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4 문답)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의 시작 날부터 끝 날까지 온 인류 가운데서 자신의 영과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을 받은, 참된 신앙 안에서 함께 일치하는, 한 무리[교회]를 자신에게로 거두고 모으는 것을 믿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4 문답)
알미니우스는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을 받은”과 “참된 신앙 안에서 일치하는”의 두 수식은 서로 병행하는 구절이며, 뒤의 구절이 앞의 구절에 종속되는 것으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한다. 따라서 개혁파의 주장과는 달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영원한 작정에 의해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옳다고 알미니우스는 주장을 한다. 만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개혁파의 주장과 같은 취지를 말하고자 했으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의 말씀과 영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선택을 받은 한 무리로 하여금 참된 신앙을 믿고 함께 그 신앙에 일치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로 불러 모으신다”고 고백했을 것이라고 알미니우스는 풀이한다.
이처럼 자신의 신학이 초기 개혁파 신앙고백과 결코 어긋남이 없으며, 오히려 ‘타락전 선택설’과 같은 주장이 개혁파 신앙고백과 어긋난다고 주장을 한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반응을 미리 고려하시고 이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신론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예지예정’이라는 자신의 예정론 이해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이를 근거로 ‘타락전 선택설’은 물론 ‘타락후 선택설’도 또한 비판한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견해의 선언”(Declaratio sententiae)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예정론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작정을 넷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죄인의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중보자로, 구속자로, 구주로, 제사장으로, 또 왕으로 임명하시는 작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심으로서 죄를 멸하시고, 친히 순종하심으로써 잃었던 구원을 획득하시며, 자신의 공로로 그것을 전달하신다.
죄인의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중보자로, 구속자로, 구주로, 제사장으로, 또 왕으로 임명하시는 작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심으로서 죄를 멸하시고, 친히 순종하심으로써 잃었던 구원을 획득하시며, 자신의 공로로 그것을 전달하신다.
예정과 관련한 하나님의 첫 번째 작정으로 알미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을 언급한다. 즉 예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의 근거로 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일정한 수의 특정한 개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작정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정확하며 절대적인 작정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 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호의로 받아들이기로 한 작정이며, 끝 까지 견디며 인내한 참회자들과 신자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한 작정이다. 그러 나 모든 회개치 않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죄 가운데 그리고 진노 아래 내버려 두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소외된 자로 저주하기로 한 작정이다.
알미니우스가 생각하는 예정에 관련한 하나님의 두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작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을 구원할 것인가와 관련한 작정이다. 말하자면 첫 번째 작정은 그리스도와 관련한 복음 자체의 작정이고, 두 번째 작정은 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작정이다. 이 약속 또한 모든 죄인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이 되는 일반적인 작정이다.
하나님의 세 번째 작정은 회개와 믿음에 필요한 수단들을 충분하며 유효적인 방식 으로 실행하시는 작정이며, (1) 그의 긍휼함과 엄격함에 모두 잘 적합하며 어울리 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일치하며, 또 (2) 그의 지혜가 정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채택하고 그것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일치하도록 집 행하시는 작정이다.
알미니우스에게 있어서 세 번째 작정은, 앞선 두 작정들과 함께, 인간의 반응에 앞서서 그 반응의 결과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먼저 작정하시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에 의한 작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첫 번째 작정에 따른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여 졌을 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에 빠진 인간이 두 번째 작정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수단들을 실행하여 주기로 작정을 하신다. 여기서 알미니우스가 말하는 구원에 필요한 수단들이란 믿음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축복된 것들을 망라하여 말하지만, 가장 고유하고도 적절한 수단은 말씀과 성령을 말한다.
이제 네 번째 작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저주하시는 작정이다. 이 작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예지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행 은총 (preventing grace)을 통해, 회심과 믿음에 알맞으며 적합한, 앞서 언급한, 수단들 을 실행하는 것에 따라서, 믿을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후행 은총(subsequent grace)을 통해 끝까지 견딜 자가 누구인지를 자신의 예지로 영원부터 아셨다. 그리 고 같은 방식으로 누가 믿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지 않을 것인지를 자신의 예지로 아셨다.
알미니우스는 네 번째 작정에 이르러 특정한 개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의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설명한다. 결국 앞의 세 작정들은 모두 네 번째 작정을 위한 조건들을 위한 작정들인 셈이다. 그런데 알미니우스의 하나님은 이 네 번째 작정의 근거를 자신의 의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에 둔다. 곧 세 번째 작정에서 결정하였던 믿음의 수단들, 곧 은혜를 공급하였을 때에 개개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를 미리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떤 개인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의 수단을 공급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믿도록 자신의 의지 안에서 작정을 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의 수단을 공급하고 그 개인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를 자신의 예지로 알뿐이다. 그리고 그 지식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작정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신론에서 구원을 위한 조건을 먼저 작정하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와 그 조건에 따라 개개인의 예정을 작정하는 ‘후행적 의지’(voluntas Dei consequens), 또는 개개인의 반응에 상관이 없이 작정하는 ‘절대적 의지’(voluntas Dei absolutiva)와 개개인의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예지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작정하는 ‘각각의 의지’(voluntas Dei respectiva)의 구별을 한다. 즉 알미니우스가 개혁파의 예정론을 거부한 것은 그가 인간의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에 대해서 개혁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중세 스콜라 신학과 개혁파 스콜라 신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표준적인 두 구별을 인정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일이나 상황에 대해 아는 가능태(potentia)의 지식으로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 또는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 또는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 또는 ‘불확정된 지식’(scientia in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진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신론에서 구원을 위한 조건을 먼저 작정하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와 그 조건에 따라 개개인의 예정을 작정하는 ‘후행적 의지’(voluntas Dei consequens), 또는 개개인의 반응에 상관이 없이 작정하는 ‘절대적 의지’(voluntas Dei absolutiva)와 개개인의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예지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작정하는 ‘각각의 의지’(voluntas Dei respectiva)의 구별을 한다. 즉 알미니우스가 개혁파의 예정론을 거부한 것은 그가 인간의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에 대해서 개혁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중세 스콜라 신학과 개혁파 스콜라 신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표준적인 두 구별을 인정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일이나 상황에 대해 아는 가능태(potentia)의 지식으로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 또는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 또는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 또는 ‘불확정된 지식’(scientia in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진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나 상황에 대해 아는 현실태(actus)의 지식으로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 또는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 또는 ‘임의의 지식’(scientia voluntaria), 또는 ‘확정된 지식’(scientia 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진다.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발생하도록 함으로써 나타날 일이나 상황에 대한 지식으로써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한 지식이다.
개혁파는 이 두 종류의 지식이외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다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전자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한 일과 상황에 대해 아시며, 또 후자에 의하여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하시는 일과 상화에 대해 아시면, 모든 가능한 경우에 속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 어떤 일과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미니우스는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자인 수아레츠(Franciscus Suάrez)와 몰리나(Luis de Molina)의 영향을 입어 제 3의 범주로 ‘중간지식’(scientia media)을 설정한다.
스콜라 학자들은 덧붙여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하나는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지식이 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지식이며, 세 번째 지식은 중간[media]지식이라고 말한 다. (1)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며 가능한 모든 것을 아 는 지식이며, (2) 자유로운 지식은 다른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다. (3) 중간지식은 “만일 이 일이 일어나면, 저 일이 일어날 것이다”를 아는 지식이다.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로운 활동보다 선행하며, 두 번째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 로운 활동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마지막도 또한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로운 활동보 다 앞서지만, 그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가정적인 조건에 따라서(hypothetically) 이 활동으로부터 발생할 것임을 안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선택(arbitrium)의 자유에 따라 결정되는 일에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중간지식을 말한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일에 대해서는 그 일이 있을 것임을 단지 인간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서만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됨으로써 아는 지식, 곧 절대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이루어질 때에 이것으로 인하여 이루어질 일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비로소 아는 상대적 혹은 가정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아시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그 일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하여 현실화의 여부가 결정이 되는 것이므로, 모든 가능한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 다른 어떤 것, 곧 인간에 의하여 현실화되는 일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에게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일이나 상황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알미니우스가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중간지식의 범주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작정하심에 있어서 개개의 피조물의 원인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작정을 실현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자유선택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동주사역(concursus divinus)은] 행동을 낳는 데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개체를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 제 1 원인이며 중심 존재에 의하지 아니하면 어떤 개체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주사역은 하나님께서 제 2 원인 혹은 하부 원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피 조물의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그렇게 됨으로 써 하나의 동일한 완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결과가 하나님과 피조물에 의 하여 동시에 나타날 수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동주사역(concursus divinus)은] 행동을 낳는 데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개체를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 제 1 원인이며 중심 존재에 의하지 아니하면 어떤 개체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주사역은 하나님께서 제 2 원인 혹은 하부 원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피 조물의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그렇게 됨으로 써 하나의 동일한 완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결과가 하나님과 피조물에 의 하여 동시에 나타날 수가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섭리활동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활동을 낳는 원인자로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록 영향을 끼치실 뿐이라고 알미니우스는 생각한다. 결국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인간의 행동의 원인으로 작용을 하실 수는 없으며,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을 미리 아는 하나님의 중간지식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역사할 따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도록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결과를 낳는 인간의 선택의 완전한 자유로움에 어떠한 손상도 끼치지 않음으로써, 한 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으로서의 완전한 원인자이며, 하나님은 그 원인자인 인간의 행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그 결과에 대해서만 섭리의 역사를 할 따름이다.
이러한 이해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은, 알미니우스가 말하는 네 가지 작정들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작정을 제외한 다른 세 작정들이, 개개인에 대하여 어떤 이는 영생으로, 다른 어떤 이는 영벌로 나뉘게 되는 예정을 위한 전제이며 조건의 환경을 제공하는 의미에서의 일반 모두를 위한 선행적 작정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다. 적어도 알미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의 반응과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절대적 작정을 하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와, 하나님이 의도한 결과가 나오도록 섭리하되 결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도록 인간의 반응에 대한 중간지식을 기초로 조건적 또는 가정적으로 결정을 하는 후행적 의지(voluntas Dei consequens)로 구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별이 바로 예정론에 있어서 개혁파의 견해와 다를 수밖에 없는 알미니우스의 ‘예지예정’의 예정론의 핵심적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이해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은, 알미니우스가 말하는 네 가지 작정들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작정을 제외한 다른 세 작정들이, 개개인에 대하여 어떤 이는 영생으로, 다른 어떤 이는 영벌로 나뉘게 되는 예정을 위한 전제이며 조건의 환경을 제공하는 의미에서의 일반 모두를 위한 선행적 작정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다. 적어도 알미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의 반응과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절대적 작정을 하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와, 하나님이 의도한 결과가 나오도록 섭리하되 결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도록 인간의 반응에 대한 중간지식을 기초로 조건적 또는 가정적으로 결정을 하는 후행적 의지(voluntas Dei consequens)로 구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별이 바로 예정론에 있어서 개혁파의 견해와 다를 수밖에 없는 알미니우스의 ‘예지예정’의 예정론의 핵심적 이유가 된다.
예정과 관련한 도르트 총회의 결정
1618년 12월부터 그 다음 해 5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서 도르트 총회(1618-19)가 모인 목적은 칼빈주의 개혁파의 견해와 알미니안주의 항론파의 견해를 균형있게 청취하고 이에 대한 교리적 판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총회는 항론파들의 오류를 정죄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교리를 천명하고자 하였다. 총회는 개혁파 신학자와 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항론파에 속한 사람들의 주장은 단지 그들의 견해가 교회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음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증언으로만 언급이 되었다. 항론파 사람들은 총회의 회원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증거하도록 요구를 받아 참석한 것뿐이었다. 총회는 항론파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총회에서 항론파의 견해를 방어하였던 15명의 사람들과 약 200여명에 이르는 알미니안주의 목사들을 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면직을 시키고, 총회에서 제명을 하였다.
1618년 12월부터 그 다음 해 5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서 도르트 총회(1618-19)가 모인 목적은 칼빈주의 개혁파의 견해와 알미니안주의 항론파의 견해를 균형있게 청취하고 이에 대한 교리적 판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총회는 항론파들의 오류를 정죄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교리를 천명하고자 하였다. 총회는 개혁파 신학자와 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항론파에 속한 사람들의 주장은 단지 그들의 견해가 교회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음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증언으로만 언급이 되었다. 항론파 사람들은 총회의 회원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증거하도록 요구를 받아 참석한 것뿐이었다. 총회는 항론파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총회에서 항론파의 견해를 방어하였던 15명의 사람들과 약 200여명에 이르는 알미니안주의 목사들을 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면직을 시키고, 총회에서 제명을 하였다.
도르트 총회는 항론파의 신앙강령들에 대해 반론을 담고 이와 관련한 바른 신앙고백을 제시하기 위하여 항론파의 5개 신앙강령의 신학 주제에 대응하는 다섯 가지의 강령에 걸쳐서 고백하고 있다, 첫 번째 강령은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강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이를 통한 인간의 구원에 대한 것이며, 세 번째 강령과 네 번째 강령은, 총회에 항론파가 제출한 해명서에서도 함께 묶어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총회에서도 함께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에게로의 회개와 방법에 대한 것이다. 끝으로 다섯 번째 강령은 성도의 견인을 다루고 있다. 다섯 가지의 주제 강령은 서로 구별되어 있지만, 내용상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총회는 본 고에서 다룰 첫 번째 주제 강령을 18개의 세부항목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신앙고백 1조 1항은 다음과 같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19, 모든 사람이 죄 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 영원한 저주와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죄와 저주 아래 에 내버려 두시며 죄로 인하여 저주를 하시기로 원하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 혀 불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19, 모든 사람이 죄 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 영원한 저주와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죄와 저주 아래 에 내버려 두시며 죄로 인하여 저주를 하시기로 원하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 혀 불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총회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따라서 예정의 대상을 ‘죄인’으로 고백한다. 이것은 총회가 ‘타락후 선택설’의 흐름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이 죄인들을 향하여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지극히 공의롭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유기와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은 처음부터 공의와 관련한 문제제기의 대상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죄의 값은 사망이며,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은 공의롭다는 세 가지 사실을 상기할 때, 하나님의 유기의 예정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합당한 것이라는 점을 총회는 고백의 시작에 분명하게 천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 다. 요일 4:9; 요 3:16.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 다. 요일 4:9; 요 3:16.
(1조 2항)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유기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며, 오히려 선택의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임을 총회는 암시한다. 온 인류가 죄인인 까닭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주어진 소망임을 밝히고 있다. 총회가 여기서 지적하는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공의에 따라서 온 인류를 벌하지 않으시고, 죄인인 인류에게 사랑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라야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여기서 총회는 유기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를 때, 죄인에게 마땅한 것이며, 선택은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에로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자 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이 지극히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들을 보내시어, 이들 의 수고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에로 부르심을 받아 나오도록 긍휼을 베푸셨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 10:14, 15.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유기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며, 오히려 선택의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임을 총회는 암시한다. 온 인류가 죄인인 까닭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주어진 소망임을 밝히고 있다. 총회가 여기서 지적하는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공의에 따라서 온 인류를 벌하지 않으시고, 죄인인 인류에게 사랑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라야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여기서 총회는 유기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를 때, 죄인에게 마땅한 것이며, 선택은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에로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자 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이 지극히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들을 보내시어, 이들 의 수고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에로 부르심을 받아 나오도록 긍휼을 베푸셨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 10:14, 15.
(1조 3항)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이신 이 사랑은 전하는 자를 통하여 듣도록 하셨는데, 전할 대상에게 전할 자를 보내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긍휼 가운데 행하심을 총회는 고백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에로 나올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보내는 일과 전할 대상과 전할 때를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결정을 하신다고 고백함으로써, 총회는 믿음에 이르는 수단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제한이 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다. 그러나 참되고 살 아있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그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리고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 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이신 이 사랑은 전하는 자를 통하여 듣도록 하셨는데, 전할 대상에게 전할 자를 보내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긍휼 가운데 행하심을 총회는 고백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에로 나올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보내는 일과 전할 대상과 전할 때를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결정을 하신다고 고백함으로써, 총회는 믿음에 이르는 수단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제한이 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다. 그러나 참되고 살 아있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그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리고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 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1조 4항)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의 반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질 때 하나님께서 믿음에 나오도록 정하신 자들이 아닌 자들도 복음을 듣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1조 1항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 죄인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에게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총회는 1조 3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믿음에 나오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신 자들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것임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고도 불신앙의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믿음의 가능성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들에게 불신앙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불신앙의 원인 또는 책임은 다른 모든 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인간에게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 는 구원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이것은 성경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 님의 선물이라 (엡 2:8), 또 마찬가지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 을 뿐 아니라 (빌 1:29)고 이른 바와 같다.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의 반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질 때 하나님께서 믿음에 나오도록 정하신 자들이 아닌 자들도 복음을 듣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1조 1항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 죄인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에게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총회는 1조 3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믿음에 나오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신 자들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것임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고도 불신앙의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믿음의 가능성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들에게 불신앙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불신앙의 원인 또는 책임은 다른 모든 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인간에게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 는 구원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이것은 성경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 님의 선물이라 (엡 2:8), 또 마찬가지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 을 뿐 아니라 (빌 1:29)고 이른 바와 같다.
(1조 5항)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만 복음에 반응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불신앙은 하나님 탓이라는 항론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하나님을 믿는 일의 가능성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지만, 이 선물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선물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핑계하여 자신들의 불신앙을 변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의 선물을 주시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도록 영적이며 윤리적인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인이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만,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다. 여기에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듯이,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방해로 인한 것이라는 대칭적 관계가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인간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비대칭적 관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시간 안에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 신의 모든 일을 영원으로부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행 15:18; 엡 1:11). 이 작정 에 따라서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의 마음을, 그것이 제 아무리 굳어 있다하더라도, 자비로 부드럽게 하시어, 믿음을 향해 마음을 돌리시는 반면에, 자신의 공의로운 판단에 의하여 선택하지 않은 자들을 악의와 강퍅함 속에 내버려 두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심오한, 한편으로는 자비로우며 또 한편으로는 공의로운, 똑 같이 파멸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 차이를 두는, 구별이 특별히 우리에게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계시된 선택과 유기의 그 작정이 드러난다. 비록 타락한 자들과 순결 치 못한 자들, 그리고 견고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 작정 을 왜곡하지만, 거룩하며 경건한 영혼들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이 위로를 보장해 준다.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만 복음에 반응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불신앙은 하나님 탓이라는 항론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하나님을 믿는 일의 가능성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지만, 이 선물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선물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핑계하여 자신들의 불신앙을 변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의 선물을 주시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도록 영적이며 윤리적인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인이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만,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다. 여기에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듯이,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방해로 인한 것이라는 대칭적 관계가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인간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비대칭적 관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시간 안에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 신의 모든 일을 영원으로부터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행 15:18; 엡 1:11). 이 작정 에 따라서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의 마음을, 그것이 제 아무리 굳어 있다하더라도, 자비로 부드럽게 하시어, 믿음을 향해 마음을 돌리시는 반면에, 자신의 공의로운 판단에 의하여 선택하지 않은 자들을 악의와 강퍅함 속에 내버려 두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심오한, 한편으로는 자비로우며 또 한편으로는 공의로운, 똑 같이 파멸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 차이를 두는, 구별이 특별히 우리에게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계시된 선택과 유기의 그 작정이 드러난다. 비록 타락한 자들과 순결 치 못한 자들, 그리고 견고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 작정 을 왜곡하지만, 거룩하며 경건한 영혼들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이 위로를 보장해 준다.
(1조 6항)
여기서 총회는 1조 4항에 말한 바와 같은 복음에 대한 반응의 차이가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과 유기의 작정 때문이라는 고백을 한다. 항론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의 선택에 의하여 복음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 가운데 결정하신 것을 실행하시는 결과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자들의 경우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어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반면에, 완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악의와 강퍅함 속에 내버려 두신다. 총회는 신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작정에서 비롯된다는 예정론이야말로 형언할 길이 없이 커다란 위로를 준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예정론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불신앙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핑계로 삼지만 끝내는 멸망에 이르게 됨을 경고한다.
선택은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목적이며, 이것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음의 일을 행하 셨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순전한 은혜로써, 값없는 선한 기쁘신 자신의 뜻에 따라 서, 처음의 순전한 상태로부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죄와 파멸에로 떨어져 버렸 던 전체 인류 가운데 일정한 수의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 서 선택하셨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선하지도 않으며 더 그렇 게 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그들과 더불어 공통의 비참함에 놓 여져 있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를 영원으로부터 중보자이시며, 모든 선택을 받은 사람들의 머리이며, 그들의 구 원의 반석으로 또한 임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도록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시고, 이들을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 도와의 교제에 참여하도록 이들을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이끄시기로 작정을 하셨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을 의 롭게 하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의 교제 안에서 그들 을 권능으로 보존하신 후, 마침내 그들을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을 하셨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의 긍휼을 나타내 보이시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토록 하기 위 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하셨다. 성경에서 이르듯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 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 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그리고 다른 곳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 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총회는 1조 4항에 말한 바와 같은 복음에 대한 반응의 차이가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과 유기의 작정 때문이라는 고백을 한다. 항론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의 선택에 의하여 복음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 가운데 결정하신 것을 실행하시는 결과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자들의 경우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어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반면에, 완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악의와 강퍅함 속에 내버려 두신다. 총회는 신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작정에서 비롯된다는 예정론이야말로 형언할 길이 없이 커다란 위로를 준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예정론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불신앙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핑계로 삼지만 끝내는 멸망에 이르게 됨을 경고한다.
선택은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목적이며, 이것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음의 일을 행하 셨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순전한 은혜로써, 값없는 선한 기쁘신 자신의 뜻에 따라 서, 처음의 순전한 상태로부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죄와 파멸에로 떨어져 버렸 던 전체 인류 가운데 일정한 수의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 서 선택하셨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선하지도 않으며 더 그렇 게 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그들과 더불어 공통의 비참함에 놓 여져 있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를 영원으로부터 중보자이시며, 모든 선택을 받은 사람들의 머리이며, 그들의 구 원의 반석으로 또한 임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도록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시고, 이들을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 도와의 교제에 참여하도록 이들을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이끄시기로 작정을 하셨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을 의 롭게 하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의 교제 안에서 그들 을 권능으로 보존하신 후, 마침내 그들을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을 하셨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의 긍휼을 나타내 보이시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토록 하기 위 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하셨다. 성경에서 이르듯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 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 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그리고 다른 곳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 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1조 7항)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태도를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선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한 것이라는 1조 6항의 증언은 이제 7항에서 더욱 강조가 되고 있다. 총회는 하나님께서 선택이라는 예정을 하실 때에 선택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거나 공로를 행하였기 때문에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선택의 대상은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죄악의 형벌과 비참함에 놓인 자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그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또 이들을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한 말씀의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을 하나님 홀로 담당하심으로써, 오직 자신의 긍휼로만 이들을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신 것이라고 총회는 고백을 한다. 즉 선택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의 실행을 위한 모든 수단 또한 은혜로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 선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을 받도 록 되어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동일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 나님의 의지에는 단 하나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말하며, 이것에 따라서 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영광으로, 그리고 구원에로, 또 우리로 하 여금 그 구원에로 나아가도록 미리 예비하셨던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영원으로 부터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태도를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선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한 것이라는 1조 6항의 증언은 이제 7항에서 더욱 강조가 되고 있다. 총회는 하나님께서 선택이라는 예정을 하실 때에 선택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거나 공로를 행하였기 때문에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선택의 대상은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죄악의 형벌과 비참함에 놓인 자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그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또 이들을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한 말씀의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을 하나님 홀로 담당하심으로써, 오직 자신의 긍휼로만 이들을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신 것이라고 총회는 고백을 한다. 즉 선택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의 실행을 위한 모든 수단 또한 은혜로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 선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을 받도 록 되어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동일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 나님의 의지에는 단 하나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말하며, 이것에 따라서 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영광으로, 그리고 구원에로, 또 우리로 하 여금 그 구원에로 나아가도록 미리 예비하셨던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영원으로 부터 선택하셨다.
(1조 8항)
선택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행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1조 8항의 강조는 그렇다면 구약에서도 신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은혜의 구원인가라는 질문 앞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는 구원의 복음은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동일함을 총회는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예정은 구약에 있어서도 은혜와 관련하여서는 신약과 실체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점을 명백히 함으로써 선택과 관련한 단 하나의 하나님의 예정이 있을 뿐임을 밝히고 있다. 즉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시고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개개인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신약에서도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일반적인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시고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개개인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로 개개인의 선택을 작정하시고, 이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예비한 구원의 방편으로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 선택은, 마치 선택이 선택을 받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전제 조건이나 원 인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미리 보신 믿음, 믿음의 복종, 거룩함, 또는 다른 어떤 선한 특성이나 경향을 근거로 하여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 믿음의 순종, 거룩함, 기타의 여러 일을 목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선택은 구원의 은택들 하나 하나의 근원이다. 믿음, 거룩함, 그리고 다른 구원의 은사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 그 자체가 선택의 열매이며 결과로서 선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도 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셨다 (엡 1:4).
선택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행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1조 8항의 강조는 그렇다면 구약에서도 신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은혜의 구원인가라는 질문 앞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는 구원의 복음은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동일함을 총회는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예정은 구약에 있어서도 은혜와 관련하여서는 신약과 실체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점을 명백히 함으로써 선택과 관련한 단 하나의 하나님의 예정이 있을 뿐임을 밝히고 있다. 즉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일반적으로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시고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개개인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신약에서도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일반적인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시고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개개인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로 개개인의 선택을 작정하시고, 이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예비한 구원의 방편으로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 선택은, 마치 선택이 선택을 받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전제 조건이나 원 인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미리 보신 믿음, 믿음의 복종, 거룩함, 또는 다른 어떤 선한 특성이나 경향을 근거로 하여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 믿음의 순종, 거룩함, 기타의 여러 일을 목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선택은 구원의 은택들 하나 하나의 근원이다. 믿음, 거룩함, 그리고 다른 구원의 은사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 그 자체가 선택의 열매이며 결과로서 선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도 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셨다 (엡 1:4).
(1조 9항)
여기서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이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은혜일뿐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항론파가 오해하고 있는 문제점을 적시하여 올바른 이해를 제시한다. 선택은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 등을 미리보고, 이것들을 어떤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인간에게서의 어떠한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이나 거룩함과 같은 은사들은 선택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며 열매이며, 그 결과와 열매를 낳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선택을 하신 것임을 명백히 한다. 즉 항론파는 선택의 목적을 선택의 이유로, 선택의 열매를 선택의 조건으로 잘못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자격도 없이 받는 이 선택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선한 기쁨일 따름이다. 여기에 는 모든 가능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인간의 특성들이나 행동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선택하는 일이란 있지 않으며, 단지 죄인이라는 공통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자신의 친 백성으로 받아들이시는 일이 있을 뿐이다. 성경에 이르는 바처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 그녀(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롬 9:11-13) 함과 같으니라. 또한 영 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여기서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이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은혜일뿐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항론파가 오해하고 있는 문제점을 적시하여 올바른 이해를 제시한다. 선택은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 등을 미리보고, 이것들을 어떤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인간에게서의 어떠한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이나 거룩함과 같은 은사들은 선택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며 열매이며, 그 결과와 열매를 낳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선택을 하신 것임을 명백히 한다. 즉 항론파는 선택의 목적을 선택의 이유로, 선택의 열매를 선택의 조건으로 잘못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자격도 없이 받는 이 선택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선한 기쁨일 따름이다. 여기에 는 모든 가능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인간의 특성들이나 행동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선택하는 일이란 있지 않으며, 단지 죄인이라는 공통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자신의 친 백성으로 받아들이시는 일이 있을 뿐이다. 성경에 이르는 바처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 그녀(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롬 9:11-13) 함과 같으니라. 또한 영 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1조 10항)
그렇다면 선택의 원인은 인간의 편이 아닌 오직 하나님 편에서 찾아져야만 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기쁨이라고 밝힌다. 모두가 다 죄인인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친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므로, 죄인들에게서 어떤 구원의 조건을 찾아보시고 이들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언한다.
마치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전 능하신 것처럼, 그에 의하여 행하여진 선택 또한 보류되거나, 변경되거나, 취소되거 나, 또는 소멸되거나 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버림을 받거나,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택의 원인은 인간의 편이 아닌 오직 하나님 편에서 찾아져야만 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기쁨이라고 밝힌다. 모두가 다 죄인인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친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므로, 죄인들에게서 어떤 구원의 조건을 찾아보시고 이들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언한다.
마치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전 능하신 것처럼, 그에 의하여 행하여진 선택 또한 보류되거나, 변경되거나, 취소되거 나, 또는 소멸되거나 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버림을 받거나,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1조 11항)
1조 10항에서 확정한 바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 편에서의 반응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인간의 반응의 변화에 따라서 선택이 취소되거나 선택자의 수가 증감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것이며, 그 의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영원하며 변치 않는 이러한 선택을 받았음에 대한 확신은, 비록 다양한 단계에 따라서 정도가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당한 때에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깊은 일들을 호 기심어린 탐구를 함으로써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적시되어 있는 선 택의 명명백백한 열매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하나님을 어린아이와 같 이 경외함, 자신들의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 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 등과 같은 것들을,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자기 자신들 안에서, 주목하여 볼 수 있 음으로 인해 나온다.
1조 10항에서 확정한 바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 편에서의 반응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인간의 반응의 변화에 따라서 선택이 취소되거나 선택자의 수가 증감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것이며, 그 의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영원하며 변치 않는 이러한 선택을 받았음에 대한 확신은, 비록 다양한 단계에 따라서 정도가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당한 때에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깊은 일들을 호 기심어린 탐구를 함으로써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적시되어 있는 선 택의 명명백백한 열매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하나님을 어린아이와 같 이 경외함, 자신들의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 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 등과 같은 것들을,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자기 자신들 안에서, 주목하여 볼 수 있 음으로 인해 나온다.
(1조 12항)
만일 구원의 선택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조건화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이 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의지를 알 수 없는 인간이 선택의 예정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총회는 먼저 선택의 확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 확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나타나는 경건의 열매들, 곧 1조 9항에서 언급한 선택의 열매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열매를 통하여 알게 되는 선택의 확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각각 적당한 때에 주어진다. 그러나 선택의 확신은 주어진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선택을 자신들이 받았음을 알고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님 앞에서 자신들을 더욱 겸손히 낮추며,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는 하나님의 긍휼 을 경배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자신들을 먼저 이처럼 너무도 사랑하셨던 하나 님께 열렬한 사랑을 돌려드려야 할 더 커다란 이유를 날마다 발견한다. 이것은 선 택에 대한 교훈과 그에 대한 묵상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방종하게 하며 정욕적인 자기 확신에 빠지게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 혀 다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이러한 일은 선택의 은혜를 원인적 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에 대해 나태하고 뻔뻔스러운 말을 하기에 급급 하면서 선택받은 자들의 길로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실로 종종 나타난 다.
만일 구원의 선택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조건화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이 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의지를 알 수 없는 인간이 선택의 예정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총회는 먼저 선택의 확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 확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나타나는 경건의 열매들, 곧 1조 9항에서 언급한 선택의 열매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열매를 통하여 알게 되는 선택의 확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각각 적당한 때에 주어진다. 그러나 선택의 확신은 주어진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선택을 자신들이 받았음을 알고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님 앞에서 자신들을 더욱 겸손히 낮추며,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는 하나님의 긍휼 을 경배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자신들을 먼저 이처럼 너무도 사랑하셨던 하나 님께 열렬한 사랑을 돌려드려야 할 더 커다란 이유를 날마다 발견한다. 이것은 선 택에 대한 교훈과 그에 대한 묵상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방종하게 하며 정욕적인 자기 확신에 빠지게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 혀 다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이러한 일은 선택의 은혜를 원인적 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에 대해 나태하고 뻔뻔스러운 말을 하기에 급급 하면서 선택받은 자들의 길로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실로 종종 나타난 다.
(1조 13항)
만일 하나님께서 변치 않는 작정에 따라서 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방종하게 자기 정욕에 따라 살게 될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총회는 오히려 선택의 확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이유를 더욱 더 밝혀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선택에 안주하면서 나태와 방종의 삶을 사는 모습이 선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뻔뻔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선택을 바르게 이해한 자들의 태도일 수 없다고 말한다. 선택을 바르게 이해하면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려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에 의하여,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은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 선지자들,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되어 왔으 며, 따라서 성경 말씀들 안에 기록이 되어져 왔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또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도하였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이 가르침은, 분별의 영에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방식을 호기심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탐구를 거둔 채,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의 영 광을 위하여, 또한 그의 백성들의 생생한 위로를 위하여 개진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변치 않는 작정에 따라서 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방종하게 자기 정욕에 따라 살게 될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총회는 오히려 선택의 확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이유를 더욱 더 밝혀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선택에 안주하면서 나태와 방종의 삶을 사는 모습이 선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뻔뻔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선택을 바르게 이해한 자들의 태도일 수 없다고 말한다. 선택을 바르게 이해하면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려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에 의하여,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은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 선지자들,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되어 왔으 며, 따라서 성경 말씀들 안에 기록이 되어져 왔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또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도하였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이 가르침은, 분별의 영에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방식을 호기심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탐구를 거둔 채,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의 영 광을 위하여, 또한 그의 백성들의 생생한 위로를 위하여 개진되어야 한다.
(1조 14항)
그러므로 이 예정론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총회는 강조한다. 그 까닭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이 예정론을 한결같이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예정론의 가르침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알아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총회는 제한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이 예정론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총회는 강조한다. 그 까닭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이 예정론을 한결같이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예정론의 가르침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알아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총회는 제한하여 말한다.
게다가,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안에서 선택을 받지 못하였거나 간과되었다는 것을 더욱 더 증거를 함 으로써, 우리의 선택이 영원하며 받을 자격이 없이 받는 은혜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특별히 강조하며, 이것을 우리들에게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들과 관련하여 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우며, 지극히 공의로우며, 흠잡을 데가 없으며, 변 함이 없는 자신의 선한 기쁨에 근거하여,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스스로 를 던져 넣었던 [인류 모두에게] 공통된 비참함에 이들을 내버려 두시고, 이들에게 구원의 믿음과 회개의 은혜를 부여하지 않으시며, 그들 자신들의 방식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에 내버려 둠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 보이기 위 하여, 결국에는 이들의 불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죄들로 인해 이들을 저주하 고 영원한 형벌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유기의 작정이지만, 이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의 조성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며 (실로 불경한 생각이 아닌가!) 오히려 죄를 심판하시는, 두렵고도, 흠잡을 데가 없으며,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복수자이시다.
(1조 15항)
성경은 선택에 대해서 증거를 할 뿐만 아니라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예정도 아울러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의 영원성과 은혜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로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작정이 된 것이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성으로 인하여 유기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만큼, 선택을 입은 자들도 그 공의성에 비추어 생각하면, 유기의 작정을 입은 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회는 유기의 작정으로 인하여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공고히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불경한 것이며 사악한 자들이 죄의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며대는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기의 작정은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작정이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이나 심령의 확고한 확신, 양심의 평안, 어린 아이와 같은 순종의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등을 아직 활기 있게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 에 이러한 일들을 역사하기로 약속하셨던 그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 들은 유기라는 말을 들을 때에 놀라거나, 자신들을 유기된 자들의 수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수단들을 계속해서 부지런히 사용을 하며, 보다 풍성한 은 혜의 때를 열렬히 갈망하고, 경외와 겸손으로 그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른 한 편,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그만을 기쁘시게 하고, 사망의 몸에서 구함을 받기를 진 지하게 소망하지만, 경건과 믿음의 길에 있어서 아직 그들이 바라는 바의 그러한 진보를 이루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은, 긍휼의 하나님께서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 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유기에 관한 교훈 으로 인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더욱 더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 스도를 잊어버렸으며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쾌락에 몹시 빠져버린 그러한 사람들 은, 그들이 진지하게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한, 이 가르침을 두려워하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성경은 선택에 대해서 증거를 할 뿐만 아니라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예정도 아울러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의 영원성과 은혜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로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작정이 된 것이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성으로 인하여 유기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만큼, 선택을 입은 자들도 그 공의성에 비추어 생각하면, 유기의 작정을 입은 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회는 유기의 작정으로 인하여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공고히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불경한 것이며 사악한 자들이 죄의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며대는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기의 작정은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작정이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이나 심령의 확고한 확신, 양심의 평안, 어린 아이와 같은 순종의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등을 아직 활기 있게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 에 이러한 일들을 역사하기로 약속하셨던 그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 들은 유기라는 말을 들을 때에 놀라거나, 자신들을 유기된 자들의 수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수단들을 계속해서 부지런히 사용을 하며, 보다 풍성한 은 혜의 때를 열렬히 갈망하고, 경외와 겸손으로 그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른 한 편,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그만을 기쁘시게 하고, 사망의 몸에서 구함을 받기를 진 지하게 소망하지만, 경건과 믿음의 길에 있어서 아직 그들이 바라는 바의 그러한 진보를 이루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은, 긍휼의 하나님께서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 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유기에 관한 교훈 으로 인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더욱 더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 스도를 잊어버렸으며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쾌락에 몹시 빠져버린 그러한 사람들 은, 그들이 진지하게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한, 이 가르침을 두려워하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1조 16항)
예정론에 대한 고백을 마무리 하면서 총회는 목회적 배려를 표현한다. 만일 어떤 이가 아직 선택의 확신은 고사하고, 양심의 평안은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생생한 신앙조차도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이들은 유기된 자들인가? 총회는 이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수단들, 곧 예배에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꾸준히 한다면,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이 유기되었는가를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하물며 신자가 비록 강렬하게 사망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바라지만, 연약한 육체의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자신이 바라는 분량만큼의 믿음과 경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더욱 유기의 예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하게 복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육체의 정욕에 빠져 사는 자들의 경우에 유기의 가르침을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총회는 밝힌다. 즉 유기의 교리는 쓸데없는 호기심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에 낙심하여 자신은 유기된 자일 것이라고 미리 염려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더욱 은혜의 수단에 매달려야할 이유를 보여줄 따름이라는 점을 공고히 하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여야 하는데, 그 말씀의 증거에 따 르면, 신자들의 자녀들은 본성상으로는 거룩하지 않지만, 그들의 부모와 함께 그들 이 속해 있는 은혜의 언약으로 인하여 거룩하므로, 경건한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유 아 시절에 금생으로부터 불러간 자녀들의 선택과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예정론에 대한 고백을 마무리 하면서 총회는 목회적 배려를 표현한다. 만일 어떤 이가 아직 선택의 확신은 고사하고, 양심의 평안은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생생한 신앙조차도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이들은 유기된 자들인가? 총회는 이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수단들, 곧 예배에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꾸준히 한다면,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이 유기되었는가를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하물며 신자가 비록 강렬하게 사망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바라지만, 연약한 육체의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자신이 바라는 분량만큼의 믿음과 경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더욱 유기의 예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하게 복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육체의 정욕에 빠져 사는 자들의 경우에 유기의 가르침을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총회는 밝힌다. 즉 유기의 교리는 쓸데없는 호기심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에 낙심하여 자신은 유기된 자일 것이라고 미리 염려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더욱 은혜의 수단에 매달려야할 이유를 보여줄 따름이라는 점을 공고히 하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여야 하는데, 그 말씀의 증거에 따 르면, 신자들의 자녀들은 본성상으로는 거룩하지 않지만, 그들의 부모와 함께 그들 이 속해 있는 은혜의 언약으로 인하여 거룩하므로, 경건한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유 아 시절에 금생으로부터 불러간 자녀들의 선택과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1 조 17항)
그렇다면 유아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난 신자의 자녀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들은 아직 믿음의 이르는 은혜의 수단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를 못한 자들이므로, 비록 신자의 자녀라 할지라도 유기의 예정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조 1항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진노의 대상이므로, 신자의 자녀들도 본성상 부패한 죄인들이며 거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자녀들은 유아기에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서 선택을 받은 자들일 수가 있다. 그런데 신자의 자녀들은 부모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속한 자들 거룩한 백성의 무리 가운데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유아기에 금생을 떠났을 경우 이들의 선택과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총회는 고백한다.
자격이 없이 주어지는 선택이라는 이 은혜에 대해서 그리고 공의로운 유기의 엄격 함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자들에게, 사도의 말,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 나님을 힐문하느뇨? (롬 9:20), 그리고 우리 구주의 말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 로 할 것이 아니냐? (마 20:15)으로 응답을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비밀한 일들을 경건히 찬미하면서, 우리는 사도와 더불어 큰 소리로 외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 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 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 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 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3-36).
그렇다면 유아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난 신자의 자녀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들은 아직 믿음의 이르는 은혜의 수단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를 못한 자들이므로, 비록 신자의 자녀라 할지라도 유기의 예정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조 1항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진노의 대상이므로, 신자의 자녀들도 본성상 부패한 죄인들이며 거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자녀들은 유아기에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서 선택을 받은 자들일 수가 있다. 그런데 신자의 자녀들은 부모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속한 자들 거룩한 백성의 무리 가운데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유아기에 금생을 떠났을 경우 이들의 선택과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총회는 고백한다.
자격이 없이 주어지는 선택이라는 이 은혜에 대해서 그리고 공의로운 유기의 엄격 함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자들에게, 사도의 말,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 나님을 힐문하느뇨? (롬 9:20), 그리고 우리 구주의 말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 로 할 것이 아니냐? (마 20:15)으로 응답을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비밀한 일들을 경건히 찬미하면서, 우리는 사도와 더불어 큰 소리로 외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 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 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 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 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3-36).
(1조 18항)
예정론에 관련한 총회의 신앙고백은 마지막 항목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찬송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선택뿐만 아니라 유기 또한 작정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핑계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부정하면서 불만을 하는 모든 사악한 자들에게 총회는 지금까지의 모든 항목을 통한 설명에 덧붙여 이제 창조주의 주권 앞에서의 피조물의 존재를 환기시킴으로서 이들의 망령된 입을 막는다.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개혁파의 견해
도르트 총회의 결의에 나타난 개혁파의 예정에 관한 견해, 곧 하나님의 예정은 항론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반응에 의하여 조건화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이든 혹은 타락한 이후이든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영생을 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에로 작정한 것이라는 견해는 개혁파의 하나님의 작정과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이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작정이 다른 작정들에 비하여 앞서거나 혹은 뒤에 오는 것으로 말하여 질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작정들 자체가 선행하는 것과 후행하는 것으로 구별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하며(aeternum) 단일하며(unicum) 지극히 순일한(simplicissimum) 작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정의 선행성(prioritas)과 후행성(posterioritas)의 구별은 작정 자체와 관련하여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일들과 관련하여 어떤 일은 앞서고, 다른 어떤 일은 뒤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의미에 따른 선행적 작정 혹은 후행적 작정의 구별이 있을 수 있다. 즉 작정의 선행성과 후행성은 작정 자체와 관련한 구별이 아니라 시간 내에서 실행이 될 때 다른 것들에 비하여 앞서거나 뒤에 오는 등의 순서를 갖게 되는 작정된 일(res decreta)과 관련하여 구별이 되는 것일 뿐이다.
예정론에 관련한 총회의 신앙고백은 마지막 항목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찬송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선택뿐만 아니라 유기 또한 작정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핑계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부정하면서 불만을 하는 모든 사악한 자들에게 총회는 지금까지의 모든 항목을 통한 설명에 덧붙여 이제 창조주의 주권 앞에서의 피조물의 존재를 환기시킴으로서 이들의 망령된 입을 막는다.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개혁파의 견해
도르트 총회의 결의에 나타난 개혁파의 예정에 관한 견해, 곧 하나님의 예정은 항론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반응에 의하여 조건화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이든 혹은 타락한 이후이든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영생을 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에로 작정한 것이라는 견해는 개혁파의 하나님의 작정과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이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작정이 다른 작정들에 비하여 앞서거나 혹은 뒤에 오는 것으로 말하여 질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작정들 자체가 선행하는 것과 후행하는 것으로 구별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하며(aeternum) 단일하며(unicum) 지극히 순일한(simplicissimum) 작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정의 선행성(prioritas)과 후행성(posterioritas)의 구별은 작정 자체와 관련하여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일들과 관련하여 어떤 일은 앞서고, 다른 어떤 일은 뒤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의미에 따른 선행적 작정 혹은 후행적 작정의 구별이 있을 수 있다. 즉 작정의 선행성과 후행성은 작정 자체와 관련한 구별이 아니라 시간 내에서 실행이 될 때 다른 것들에 비하여 앞서거나 뒤에 오는 등의 순서를 갖게 되는 작정된 일(res decreta)과 관련하여 구별이 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시간 안에서 자신의 경륜(dispensatio)을 선하거나 악한 방향으로 변화를 준다하더라도 작정 자체가 시간 안에서 변화하거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변화가 이미 영원부터 작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변화는 신인동정론(anthropopathos)에 따라 이해되어야만 하며,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 안에 변화가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파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이 상대적으로 결정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후행적 작정을 말하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한 개혁파들의 조건성의 이해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크게 다르다. 항론파들은 하나님의 작정이 조건적이어서 하나님의 선행 은총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이를 조건적 근거로 하여 작정하셨음을 주장하지만,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조건성은 작정 자체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작정되어진 일들이 조건성을 포괄하게끔 작정을 한 것으로 이해를 한다.
비록 믿음과 견인은 작정된 구원에 이르는 선결 조건으로 설명이 되지만 (그 결과 믿음과 견인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가 없도록 되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관련하여 강력한 조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조건 위에서 그 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구 원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였던 그 작정에 의해) 하나님은 또한 그들에게 믿음 과 견인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다른 여러 수단들을 주시기로 작정한 것이다. 작정 된 일이 조건적이라는 것과, 작정 자체가 조건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말이다 ...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회개라는 조건이 부가되도록 하셨지만,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에게 있는 의지의 활동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구원 하는 작정의 조건이나 원인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한 개혁파들의 조건성의 이해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크게 다르다. 항론파들은 하나님의 작정이 조건적이어서 하나님의 선행 은총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이를 조건적 근거로 하여 작정하셨음을 주장하지만,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조건성은 작정 자체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작정되어진 일들이 조건성을 포괄하게끔 작정을 한 것으로 이해를 한다.
비록 믿음과 견인은 작정된 구원에 이르는 선결 조건으로 설명이 되지만 (그 결과 믿음과 견인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가 없도록 되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관련하여 강력한 조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조건 위에서 그 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구 원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였던 그 작정에 의해) 하나님은 또한 그들에게 믿음 과 견인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다른 여러 수단들을 주시기로 작정한 것이다. 작정 된 일이 조건적이라는 것과, 작정 자체가 조건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말이다 ...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회개라는 조건이 부가되도록 하셨지만,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에게 있는 의지의 활동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구원 하는 작정의 조건이나 원인도 아니다.
만일 조건적 작정이라고 할 때의 ‘조건’이라는 말이 작정된 일이 조건적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작정 자체가 하나님 자신 이외의 어떤 사건이나 능력들에 의하여 조건화 된다는 의미를 말한다면, 개혁파는 단호히 ‘조건적 작정’을 거부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떤 확정된 조건에 근거하여 어떤 일이 있도록 작정을 하신다 하더라도, 즉 믿음이라는 조건에 근거하여 베드로를 구원하신다 하더라도, 작정 그 자체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작정된 일만이 조건적이라고 개혁파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실 때에, 그에게 또한 구원에 이르는 조건이 믿음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인내하도록 견인을 주시기로 이미 절대적으로 작정하시었으며, 이에 따라서 베드로는 구원의 조건을 충족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사무엘 상 2:30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내가 전에 ... 하였으나 이제 ...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작정이 엘리의 반응에 의하여 조건적으로 변화하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개혁파는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 말에 이어 나오는 말씀, 곧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는 조건에 따라서 엘리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말씀하시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지켜야 할 조건을 그의 작정 안에 이미 제시하시고, 불순종하는 엘리에게 이전에 약속하신 것을 취소하시는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엘리가 조건을 이행치 않았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엘리의 불순종도 이미 하나님의 절대적인 작정 안에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작정 안에서 수단과 방편들이 조건적으로 작정이 되어 있을 뿐이라면,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반응도 또한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작정은 필연적이지 않은가? 알미니우스와 항론파들은 하나님의 작정의 필연성은 결국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게 되므로, 인간의 범죄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고 주장을 한다. 이에 반하여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역설을 한다.
어떠한 일에 대하여 물리적 필연성(physical necessity)이나 강제적 필연성(a necessity of coaction)에 의한 결정을 주장하는 것은 자유(liberty)와 우유성 (contingency)을 빼앗는다. 그러나 가정적 필연성(hypothetical necessity)
어떠한 일에 대하여 물리적 필연성(physical necessity)이나 강제적 필연성(a necessity of coaction)에 의한 결정을 주장하는 것은 자유(liberty)와 우유성 (contingency)을 빼앗는다. 그러나 가정적 필연성(hypothetical necessity)
에 의 한 결정을 주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확실성(certainty)이 자유로우며 우유적인 제 2 원인들의 본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본질 이 변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들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것들은 필연 적으로 활동하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작정이라는 외래적 요소에 의하 여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1 원인과 관련하여서는 작정의 필연성과 불변 성이 우유성을 빼앗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나타나 는 법이며, 어느 것도 우유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2 원인과 관 련하여서는 우유성을 빼앗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리 결정한 그 작정이 또한 필연적 원인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우유적 원인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우 유적으로 나타나도록, 나타날 일들의 양식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 는 필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유적이라고 일컫는 것도 적절하다. 하지만 그것은 각 각 다른 관점에서 그렇게 말한다. 전자는 하나님 편에서 작정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일의 편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제 2 원인 또는 근인 (proximate causes)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따른 실행이 인간의 자유와 충돌을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1 원인이신 하나님은 그의 작정 안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실 때에 제 2 원인들의 성질에 따라서 혹은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유적으로 실행이 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모든 일을 결정하시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제 2 원인들의 본질에 따라서 작정의 대상들을 움직이시며, 그것들의 고유한 작용양식을 빼앗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개혁파는 이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작정은 물리적이거나 강제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가정적 필연성을 가질 따름이며, 따라서 제 2 원인들을 손상시키지 않고, 사람의 경우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성의 선택적 고려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행동을 하도록 하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님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담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죄를 범하였다.” 저자는 작정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며, 후자는 인간의 의지와 그 양식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작정의 필연성이 어떠하던지 간에,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아담은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지극히 자유롭게 범한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담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죄를 범하였다.” 저자는 작정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며, 후자는 인간의 의지와 그 양식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작정의 필연성이 어떠하던지 간에,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아담은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지극히 자유롭게 범한 것이 기 때문이다.
아담의 행동이 한 편으로는 “필연적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자유롭게”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개혁파의 관점에서는 영원에 속한 작정의 영역과 그 실행에 속한 시간의 영역이 서로 구별이 됨을 말하여 준다. 영원의 작정에 따라서는 필연적이지만, 실행의 시간 영역에서는 자유롭게 나타난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이치를 삼림 속에 들어갔다가 도적을 만나서 살해된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 사람이 삼림에 들어간 것은 그가 스스로 자유롭게 들어간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미리 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작정을 한 것임을 말한다. 칼빈은 이르기를 “하나님의 일반 섭리는 자연의 질서를 계속적으로 유지토록 하기 위하여 피조물 가운데 활동적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놀라운 계획에 의하여 확정적이며 적절한 목적에 부합이 된다.”고 교훈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은 분명 자연적 필연성(natural necessity)과는 차이가 난다.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자연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연속적인 원인들이 영속적으 로 연결되고 친밀하게 관련을 갖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성을 고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일들의 주권자이며 통치자로 삼는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그의 지혜를 따라서 지극히 깊은 영원의 심연으로부터 그가 하고자 하시는 것 을 작정하셨고, 이제는 그가 작정하신 것을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자연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연속적인 원인들이 영속적으 로 연결되고 친밀하게 관련을 갖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성을 고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일들의 주권자이며 통치자로 삼는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그의 지혜를 따라서 지극히 깊은 영원의 심연으로부터 그가 하고자 하시는 것 을 작정하셨고, 이제는 그가 작정하신 것을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칼빈과 개혁파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은 그 실행에 있어서 작정한 바를 결과하는 원인들을 그 결과와 관련한 자연의 영역 안의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적 필연성의 운명론과는 다르다. 결정론에 따르면 어떤 일의 결과는 내적이든지 외적이든지 그 결과에 선행하는 요소들이 결과를 낳도록 영향을 줌으로써 결과가 초래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에는 이러한 자연 안에 포괄되는 선행의 요소들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초시간적(supratemporal)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 자연 영역에 속한 요소라면 역시 자연 영역에 속한 제 2 원인으로서의 인간의 자유와 충돌이 되지 않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에 속한 것이며, 비시간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혁파는 알미니우스와 항론파들과 달리 하나님의 지식에 있어서 ‘중간지식’(scientia media)을 고려하지 않는다. 중간지식은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전제 하에 인간의 자유의 반응에 대한 예지를 기초로 이것이 일어나도록 작정하신다는 이해를 내포하는데, 전통적으로 개혁파는 인간의 자유선택의 반응이라 요소에 의하여 하나님의 지식이 특별히 구별이 되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개혁파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두 가지로 분류할 따름이다. 하나는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 또는 ‘불확정의 지식’(scientia in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 또는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 또는 ‘임의의 지식’(scientia voluntaria), 또는 ‘확정의 지식’(scientia 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지는 지식이다. 전자의 지식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일에 대한 지식이며, 하나님의 작정에 앞서는 지식인 반면에, 후자의 지식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모든 가능한 일들 가운데 미래에 나타나도록 정하신 바에 대한 지식이다. 중간지식과 관련한 논란은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그 지식의 대상이 가능한 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지식이면서, 또 미래에 있을 확실한 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미래에 있을 가정적 일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있는가와 관련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시며 그 모든 가능한 일을 아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작정하여 일어날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든지 아시는 예지가 있으며, 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으므로, 이 두 가지 지식 이외에는 다른 지식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개혁파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예지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확실한 지식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작정 밖에 있는 어떠한 가정적 지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하지 않고, 피조물의 자유에 근거하는 미래의 조건적인 사건(future conditional events)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혁파는 이것을 전제로 하는 중간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1) 만일 [지식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이미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의 대상이다. 만일 [지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이미 단 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중간 지식 이란 없다. (2)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미리 작정이 되어지며, 그의 의지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과 상관이 없 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이며 자유로우며, 조건 적인 원인들도 또한 자신의 섭리의 결과로 [실행이 되어 나타나도록] 작정을 하시 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생각에 하나님의 단순지성의 지식과 이상의 지식의 두 구분에 의한 지식의 대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현실화 되도록 작정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대상이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예지의 대상일 수가 없으므로 중간지식이라는 예지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중간지식이 가능하려면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지를 결정하는 선행적 원인이 된다는 것이 되므로 있을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결국 중간지식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의 논의는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 오류가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중간지식에 반대하여 개진하여 왔던 요점들을 볼 때, 지금의 논쟁의 모든 어려움이 바로 이 한 가지로 모아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미래에 있게 될 것인지 그 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본질 상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영원으로부터 자유로 운 우유사(偶有事, free conditioned things)들이 하나님의 작정이외의 다른 방식에 의하여 미래의 상태에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논의의 모든 무게가 달려있는 근본적인 것 중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도 우리의 반 대자들에게 양보할 수 없으며, 반대자들도 우리에게 증명할 수 없는 기본 원리이 다. 이것이 ... 하나님의 의지는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한낱 맹목적 가능성일 뿐이 며 미리 비추는 중간지식이라는 빛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 혼동스러우며 불합리 한 가설들이 이끌려 나오는 중심이다. 중간지식은, 그 자체의 성질에 따르면, 어떤 일의 결과를 내는 데에 유효적이며 적절한 작용을 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운 작정을 함에 있어서, 그의 작정들은 확정된 결과를 반드시 갖도록 되어 있음에도, 이것[중간지식]에 의존하여 기다리도록 강요를 받는다. 미래의 자유로운 우유사(偶 有事, future conditioned free ones)들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것은, 그것들의 원인들이나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실제적 발생 으로부터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지의 활동 이전에라도 본성상으 로는 아주 불확실한 사물에게서도 확실성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중간지식에 반대하여 개진하여 왔던 요점들을 볼 때, 지금의 논쟁의 모든 어려움이 바로 이 한 가지로 모아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미래에 있게 될 것인지 그 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본질 상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영원으로부터 자유로 운 우유사(偶有事, free conditioned things)들이 하나님의 작정이외의 다른 방식에 의하여 미래의 상태에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논의의 모든 무게가 달려있는 근본적인 것 중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도 우리의 반 대자들에게 양보할 수 없으며, 반대자들도 우리에게 증명할 수 없는 기본 원리이 다. 이것이 ... 하나님의 의지는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한낱 맹목적 가능성일 뿐이 며 미리 비추는 중간지식이라는 빛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 혼동스러우며 불합리 한 가설들이 이끌려 나오는 중심이다. 중간지식은, 그 자체의 성질에 따르면, 어떤 일의 결과를 내는 데에 유효적이며 적절한 작용을 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운 작정을 함에 있어서, 그의 작정들은 확정된 결과를 반드시 갖도록 되어 있음에도, 이것[중간지식]에 의존하여 기다리도록 강요를 받는다. 미래의 자유로운 우유사(偶 有事, future conditioned free ones)들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것은, 그것들의 원인들이나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실제적 발생 으로부터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지의 활동 이전에라도 본성상으 로는 아주 불확실한 사물에게서도 확실성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개혁파가 알미니안 항론파와 달리 하나님의 중간지식을 거부하는 것은 그 지식의 설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의 의지 안에서 어떤 일을 작정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일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작정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일에 대한 지식, 곧 중간지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 일이 있도록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후행적 의지(voluntas Dei consequens)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일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피조물의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므로 만물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신관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인간에게 베푸신 복음에 대하여 인간이 나타내 보이는 순종 혹은 불순종을 미리 보시고 이것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것이라는 항론파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개혁파는 이러한 항론파의 견해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 상관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적 반응에 의해 하나님의 예정의 의지가 조건화 되는 신학적 구조를 낳게 되는 것으로 판정을 내리고, 이를 거부하고 정죄하였다.
나가는 말
도르트 신경과 항론파의 주장에 대한 관찰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주장이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이 타락 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 후에 있음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상당 수가 지지하였던 ‘타락전 선택설’에 대한 항론파의 비판의 중심점은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타락전 선택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창조되어질 가능적(creabilis) 존재자이며 타락할 가능적(labilis) 존재자’가 아니며,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라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항론파가 선택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죄인들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예정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구원하거나 형벌을 주는 결과의 작정에 따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의 수단도 선택과 유기의 예정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항론파의 주장은 알미니우스의 하나님의 작정과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교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작정은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을 미리 보시고 난 이후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작정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에 의하여 조건화 된다. 따라서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미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을 선택하기로 하고 세상 모든 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구원의 수단을 베풀기로 하는 일반적이며 절대적인 작정을 미리 하시며, 이러한 선행적인 작정들 안에서 인간의 반응을 보는 중간지식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들 가운데 순종하는 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을 특정하게 지목하여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한다고 알미니우스는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하여 도르트 총회는 ‘타락 후 선택설’을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의 대상을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로 고백하면서 이러한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고, 나머지 사람들을 유기하여 벌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확고히 하였다. 즉 이들의 선택과 유기의 근거는 이들이 보이는 복음에의 순종 또는 불순종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임을 밝혀두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형벌이라는 최종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도 오직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예정의 목적에 따라서 이들에게 차별적으로 자신의 은혜로 베푸신다고 총회는 고백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을 미리 보시고 이것들을 어떤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아 예정을 하시기는커녕,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며 열매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기의 예정을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님을 총회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유기의 작정은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작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반응을 미리 보는 일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선택과 유기가 예정된다는 도르트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작정보다 앞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소위 말하는 중간지식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개혁파의 신학의 이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개혁파는 중간지식을 기초로 일반적인 작정 안에서 특별한 선택과 유기라는 작정이 뒤따른다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조건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 이외의 어떤 사건이나 인간의 반응에 의하여 하나님의 작정이 조건화 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작정의 대상이 되는 일이나 사물 관계에 조건성을 부여하신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는 것이 개혁파의 생각이었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에 있어서 각각의 피조물의 본질, 곧 제 2원인들에 합당한 방식에 따라서 뜻하신 바를 작정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어떠한 행동이나 결과도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이므로, 중간지식에 의한 하나님의 후행적 작정이라는 것은 피조물을 하나님에게서 독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개혁파는 비판을 한다.
결국 개혁파의 도르트 총회의 신학과 알미니안 항론파의 예정에 관련한 이해의 차이는 단순히 예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작정에 관련한 신론적 이해의 차이이며, 그 결과로 예정, 은혜의 구원 등과 관련한 구원론적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알미니안 항론파는 이단인가? 도르트 총회는 항론파의 견해를 모두 잘못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총회가 끝난 즉시로 약 200 여명의 알미니안 목사들이 면직이 되었으며, 항론파의 지도자였던 반 올덴바르네벨트(Jan van Oldenbarnevelt)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수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처형과 수감의 배경에는 신학적 갈등을 넘어 정치적 이해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개혁파를 지지하는 정치적 배경이었던 모리스 공(Prince Maurice)이 총회 이후 6년이 지난 1625년에 죽고 난 이후에, 정치적 관용주의를 힘입어 항론파는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아 1630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1795년에는 항론파 교회(Remonstrant Church)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관용은 정치적 관용에 의한 종교적 자유의 허용에 따른 것이었지, 개혁파 교회에서 이를 인정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르트 신경은 개혁파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에큐메니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개혁파 신학의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신앙문서이다. 도르트 신경은 하나님 주권에 의한 전적인 은혜의 구원이라는 종교개혁의 신학의 핵심을 예정론의 맥락 안에서 매우 탁월한 개혁파 신학의 통찰을 수렴하고 있다. 반면에 알미니안 항론파의 신학은 비록 중세 말기의 유명론적 세미-펠라기우스 견해와는 약간의 상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기본적인 신학의 체계에서는 그 틀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알미니안 항론파 신학은 잘못된 신학이며 성경에 합당한 신학으로 인정될 수가 없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개방신론과 같이 비성경적이며 그릇된 신학이 거침없이 개진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17세기 초엽에 있었던 도르트 신경의 신학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음성으로 널리 들려져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신학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범 기독교적 연합이라는 틀에서 볼 때, 알미니안 항론파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와 필요 이상의 신학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항론파의 주장에 대하여 개혁주의 견해를 확고히 하였던 도르트 총회의 노력의 결과로 이제 후대의 개혁파 교회는 알미니안 항론파의 신학에 대한 분별을 할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이제 그들과의 신학의 논쟁은 매듭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영국 성공회에서 칼빈주의을 대표하였던 찰즈 시므온(Charles Simeon, 1759-1836)이 칼빈주의 예정론을 부정하고 비판하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나가는 말
도르트 신경과 항론파의 주장에 대한 관찰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주장이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이 타락 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 후에 있음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상당 수가 지지하였던 ‘타락전 선택설’에 대한 항론파의 비판의 중심점은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타락전 선택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창조되어질 가능적(creabilis) 존재자이며 타락할 가능적(labilis) 존재자’가 아니며,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라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항론파가 선택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죄인들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예정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구원하거나 형벌을 주는 결과의 작정에 따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의 수단도 선택과 유기의 예정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항론파의 주장은 알미니우스의 하나님의 작정과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교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작정은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을 미리 보시고 난 이후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작정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에 의하여 조건화 된다. 따라서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미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을 선택하기로 하고 세상 모든 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구원의 수단을 베풀기로 하는 일반적이며 절대적인 작정을 미리 하시며, 이러한 선행적인 작정들 안에서 인간의 반응을 보는 중간지식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들 가운데 순종하는 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을 특정하게 지목하여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한다고 알미니우스는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하여 도르트 총회는 ‘타락 후 선택설’을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의 대상을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로 고백하면서 이러한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고, 나머지 사람들을 유기하여 벌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확고히 하였다. 즉 이들의 선택과 유기의 근거는 이들이 보이는 복음에의 순종 또는 불순종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임을 밝혀두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형벌이라는 최종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도 오직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예정의 목적에 따라서 이들에게 차별적으로 자신의 은혜로 베푸신다고 총회는 고백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을 미리 보시고 이것들을 어떤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아 예정을 하시기는커녕,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나 믿음의 복종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며 열매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기의 예정을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님을 총회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유기의 작정은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작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반응을 미리 보는 일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선택과 유기가 예정된다는 도르트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작정보다 앞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소위 말하는 중간지식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개혁파의 신학의 이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개혁파는 중간지식을 기초로 일반적인 작정 안에서 특별한 선택과 유기라는 작정이 뒤따른다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조건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 이외의 어떤 사건이나 인간의 반응에 의하여 하나님의 작정이 조건화 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작정의 대상이 되는 일이나 사물 관계에 조건성을 부여하신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는 것이 개혁파의 생각이었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에 있어서 각각의 피조물의 본질, 곧 제 2원인들에 합당한 방식에 따라서 뜻하신 바를 작정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어떠한 행동이나 결과도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이므로, 중간지식에 의한 하나님의 후행적 작정이라는 것은 피조물을 하나님에게서 독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개혁파는 비판을 한다.
결국 개혁파의 도르트 총회의 신학과 알미니안 항론파의 예정에 관련한 이해의 차이는 단순히 예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작정에 관련한 신론적 이해의 차이이며, 그 결과로 예정, 은혜의 구원 등과 관련한 구원론적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알미니안 항론파는 이단인가? 도르트 총회는 항론파의 견해를 모두 잘못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총회가 끝난 즉시로 약 200 여명의 알미니안 목사들이 면직이 되었으며, 항론파의 지도자였던 반 올덴바르네벨트(Jan van Oldenbarnevelt)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수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처형과 수감의 배경에는 신학적 갈등을 넘어 정치적 이해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개혁파를 지지하는 정치적 배경이었던 모리스 공(Prince Maurice)이 총회 이후 6년이 지난 1625년에 죽고 난 이후에, 정치적 관용주의를 힘입어 항론파는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아 1630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1795년에는 항론파 교회(Remonstrant Church)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관용은 정치적 관용에 의한 종교적 자유의 허용에 따른 것이었지, 개혁파 교회에서 이를 인정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르트 신경은 개혁파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에큐메니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개혁파 신학의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신앙문서이다. 도르트 신경은 하나님 주권에 의한 전적인 은혜의 구원이라는 종교개혁의 신학의 핵심을 예정론의 맥락 안에서 매우 탁월한 개혁파 신학의 통찰을 수렴하고 있다. 반면에 알미니안 항론파의 신학은 비록 중세 말기의 유명론적 세미-펠라기우스 견해와는 약간의 상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기본적인 신학의 체계에서는 그 틀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알미니안 항론파 신학은 잘못된 신학이며 성경에 합당한 신학으로 인정될 수가 없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개방신론과 같이 비성경적이며 그릇된 신학이 거침없이 개진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17세기 초엽에 있었던 도르트 신경의 신학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음성으로 널리 들려져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신학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범 기독교적 연합이라는 틀에서 볼 때, 알미니안 항론파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와 필요 이상의 신학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항론파의 주장에 대하여 개혁주의 견해를 확고히 하였던 도르트 총회의 노력의 결과로 이제 후대의 개혁파 교회는 알미니안 항론파의 신학에 대한 분별을 할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이제 그들과의 신학의 논쟁은 매듭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영국 성공회에서 칼빈주의을 대표하였던 찰즈 시므온(Charles Simeon, 1759-1836)이 칼빈주의 예정론을 부정하고 비판하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웨슬리 자신이 하나님께로 회심하지 못하였을 것을 믿는지, 또 그가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구원을 바라보는 지 등등을 물었을 때, 웨슬리가 그렇다고 충분하게 답을 하자, “그렇다면, 당신과 헤어지면서 나는 나의 칼을 칼집에 다시 넣어 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다 나의 칼빈주의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서로 생각이 같은 사항들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연합을 할 것입니다.”라고 답을 하였다고 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동의하고 있다면 18세기 칼빈주의자처럼 오늘의 칼빈주의자들도 알미니안주의자들을 향해 제한적이지만 연합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제 19차 세계 감리교 대회에서 감리교파는 루터교파와 천주교파의 대표자들과 함께 ‘칭의 교리에 대한 교리적 합의문’에 서명을 함께 하였다고 들었다. 루터파와 천주교파가 합의한 칭의교리에 대한 교리적 합의문은 미국의 미주리 총회와 같은 루터교단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매우 논란이 많은 합의문임을 생각할 때, 이번의 합의문도 같은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면, 개혁파가 이에 합의한 알미니안파와 상당한 신학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를 도르트 신경은 다시금 환기시켜 준다.
1) J. I. Packer, "Arminianisms," in Through Christ's Word: A Festschrift for P. E. Hughes, ed. W. Robert Godfrey and Jesse L. Boyd III (Phillipsburg, N.J.: P&R, 1985), p. 121.
2) Alan P. F. Sell, 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Eugene OR: Wipf&Stock Publishers, 1998; previously published by H. E. Walter Ltd., 1982), p. 5.
3) 팔라틴(Palatine) 영(領)의 선제후 프레데릭 4세가 헤이그에 보냈던 대사, 히볼리투스 아 콜리부스(Hippolytus ὰ Collibus)에게 자신에 대한 소문들을 해명한 이후에 그 내용을 글로 보낸 편지 가운데서 알미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가 단연코 말씀을 드리건데 저는 교회에서이건 대학에서이건 우리의 생각과 말의 유일한 규칙인 것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마땅한 신성한 성경에 위배되거나, ... 화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어긋나는 그 어떤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Arminius, A Letter addressed to Hippolytus a Collibus in The Works of Arminius II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1), p. 690; Carl Bang, Arminius: A Study in the Dutch Reformation (Eugene OR: Wipf&Stock Publishers, 1998; first edi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71), p. 295.
4) 칼 뱅스(Carl Bangs)는 알미니우스를 개혁파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볼 여러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결국 알미니우스가 역사적으로 개혁파 진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뱅스가 말하는 대로 알미니우스는 재침례파가 아니고 소시니안파도 아니며 펠라기우스파도 아니고 숨겨진 천주교파(crypto-Roman Catholic)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신학적으로 예수회의 몰리니우스 등의 천주교파의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혁파도 아닌 것이다. Carl Bangs, "Arminius as a Reformed Theologian," i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Heritage Hall Lecture, 1960-70, edited by John H. Brat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3), pp. 209-22.
5) Richard A. Muller, Post 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4 vo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7-2002)을 볼 것.
6) 그러나 이 말은 도르트 신경이 스콜라신학 방법론에 따라 기술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도르트 총회는 신경을 기술함에 있어서 대학과 학자들 사이에서 사용이 되었던 스콜라적(scholasticus) 방법을 따르기 보다는. 교회에서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대중적’(popularis)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즉 도르트 총회는 가급적 ‘주장과 반론’,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구별 및 사용’, ‘네 가지로 구별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의 이용’, ‘형식논리상의 삼단논법을 이용한 합리적 논증,’ 그리고 ‘분석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논증’ 등의 스콜라적 기술 방식을 피하고, 일반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상의 언어로 개념을 풀어 기술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날드 신네마(Donald Sinnema)가 잘 밝히고 있듯이, 도르트 총회에 참석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스콜라 신학 방법론에 익숙한 사람들이며, 도르트 총회가 금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스콜라적 방법론이었을 뿐, 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도의 스콜라적 방법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도르트 신경은 형식적으로는 대중적인 기술 방식을 따라서 기술되고 있으나 그것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의 내용은 스콜라적 방법론에 따른 사고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항론파가 이미 알미니우스를 좇아 스콜라적 방법론에 따른 신학적 결론을 전제로 하면서 개혁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까닭에 항론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양상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본문에서 도르트 신경을 강설하는 가운데 제시될 것이다. Donald Sinnema, "Reformed Scholasticism and the Synod of Dort (1618-19)," in John Calvin's Institutes: His Opus Magnum by Proceedings of the Second Soutn African Congress for Calvin Research, July 31-August 3, 1984 (Potchefstroom: Potchefstroom Univ.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1986), pp. 467-506을 참조할 것.
7)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17-18. 실제로 미국의 교인들이 믿는 바를 조사한 한 통계에 따르면, 응답자의 82퍼센트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으며, 응답자의 56퍼센트는 이 격언이 성경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아는 것으로 나타났다. Brian A. Gerrish, "Sovereign Grace: Is Reformed Theology Obsolete?," Interpretation 57(2003), p. 56. 게리쉬는 이 통계를 What Americans Believe (Glendale, CA: the Barna Research Group, 1991)에서 인용하였음.
8) 어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칼빈주의의 영향력의 회복의 증거는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인 남부침례교단(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 개혁주의 신학을 오늘날의 교회의 세속화의 대한 치료의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남부침례교단 총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침례교 지도자들은 오늘날의 인간 중심적인 교회의 영적 무력성과 도덕적 해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알미니안 신학에서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염려한다. 이들은 또 젊은 칼빈주의자인 몰러(Albert Mohler)가 미국 남부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 총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개혁주의 신학으로 재무장시킨 사례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 가운데 인기를 크게 끌고 있는 기독교 팝 밴드인 캐드몬즈 콜(Caedmon's Call)이 공개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확신을 표방하고 있음을 지목한다. 다른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칼빈주의의 회복이 세속화되어버린 교회의 치유책이라는 판단에 맞서서 침례교회가 칼빈주의를 완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사회에서 똥더미와 같은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풀러(Andrew Fuller)의 견해를 인용하여 칼빈주의로 신학적 경향이 계속되는 것을 경계한 에스텝(William R. Estep)의 주장을 대비시키고 있다. Jerry L. Walls and Joseph R. Dongell, Why I Am Not a Calvinis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13-17. 미국남부침례교단 총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하여서는 Ernest C. Reisinger and D. Matthew Allen, A Quiet Revolution: A Chronicle of Beginnings of Reformation in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Cape Coral, Fl.: Founders, 2000)을 볼 것. 풀러의 소리는 William R. Estep, "Doctrines Lead to 'Dunghill' Prof Warns,"<http://www.founders.org/FJ29/article1.html.>을 볼 것.
9) 개방신론자(open theism)들의 주장을 알기 위하여서는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fo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N: Review and Herald Pub. Association, 1980); idem., God's Forekonwledge and Man's Free Will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85); Gregory A. Boyd, God of the Possible: A Biblical Introduction to the Open Veiw of God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0) 등을 볼 것이며, 개방신론을 여러 관점에서 제시한 책으로, C. Pinnock, R. Rice, J. Sanders, W. Hasker and D. Basinger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5)을 살펴보거나;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학자들의 동일 주제에 대한 논문을 모아 놓은 책으로, Clark H. Pinnock, ed., The Grace of God and the Will of Man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89)와 James K. Beilby and Paul R. Eddy, Divine Foreknowledge: Four View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을 살피면 개방신론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개혁주의관점에서의 비평을 보기 원하면, Bruce A. Ware, God's Lesser Glory: The Diminished God of Open Theism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0)과 John M. Frame, No Other God: A Response to Open Theism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1)을 볼 것. 개방신론에 대한 약간의 소개를 받을 수 있는 한국어 논문을 위하여서는 송인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신학정론 23(2005/11): 77-113을 참조할 것.
10) 앞서 언급한 IVP에서 출판된 Why I Am Not a Calvinist와 Why I Am Not an Arminian의 두 책 이외에 Dave Hunt and James White가 각각 알미나안주의와 칼빈주의 관점에서 14개의 관련된 주제를 설명하고 비판을 한 Debating Calvinism: Five Points, Two Views (Sisters, OR: Multnomah Publishers, 2004)를 볼 것.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배타적인 선택의 신학들로 여기지 않고 두 신학들을 조화하여 제 3의 신학적 관점을 제안한 책들로 C. Gordon Olson, Beyond Calvinism and Arminianism (Cedar Knolls, NJ: Global Gospel Ministries, Inc., 2002); Norman Geisler, Chosen But Free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99, 2001)을 볼 것. 가이슬러에 대한 개혁주의의 비평을 위하여서는 James R. White, Potter's Freedom (Amityville, NY: Calvary Press Publishing, 2000)을 볼 것.
11) 개방신론이 그 사상의 역사적 뿌리를 소시니안주의에 두고 있음에 대해서는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lated by George Musgrave Giger, edited by James T. Dennison, Jr.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2), loc. 3, q. 12, p. 208. 튜레틴은 이 곳에서 소시니우스가 “하나님은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경의 어떤 근거나 구절들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지와 같은 지식은 결단코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음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12) 논문의 전개에 따라서 약간의 설명이 뒤따라 나오겠지만, ‘튤립’(TULIP)으로 표지되는 칼빈주의 5대 신앙강령이란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가리켜 말한다.
13) 실제로 도르트 신경의 이름을 살피면 ‘영국, 독일, 프랑스 개혁교회들의 많은 탁월한 신학자들의 참여와 함께 1618년과 1619년에 도르트에서 열렸던 화란 개혁교회의 국가 총회가 화란 교회들 안에서 논쟁이 되었던 다섯 가지 교리 사항에 대해 내린 결정’(Judicium Synodi Nationalis Reformatarum Ecclesiarum Belgicarum, Habitae Dordrechti Anno MDCXVIII et MDCXIX. Cui plurimi insignes Theologi Reformatarum Ecclesiarum Magnae Britanniae, Germaniae, Galliae, interfuerunt, de Quinque Doctrinae Capitibus in Ecclesiis Belgicis Controversis)으로 되어 있어, 도르트 신경의 5대 신앙 강령은 항론파의 5개 조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0), pp. 550-79에 도르트 신경의 라틴어 전문이 실려 있음을 참조할 것.
14) 도르트 총회와 관련한 역사적, 신학적 상황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Thomas Scott, tr. The Articles of the Synod of Dort and Its Rejection of Errors with the History of Events Which Made Way for that Synod (Utica, NY: Press of William Williams, 1831); idem., with an Introductory Essay by Samuel Miller, The Articles of Synod of Dort (Philadelphia, PA: Presbyterian Board of Publsication, 185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0);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Grand Rapids, MI: Reformed Fellowship, Inc., 1968);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Grand Rapids, MI: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80) 등을 참조할 것.
15) 이 셋째 항목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과 동일한 것 같으나, 이 항목은 다음의 넷째 항목과 연결지어 이해하여야 한다. 실제로 항론파들은 1618년에 제출한 ‘항론파들의 견해들’(Sententia Remonstrantium)이라는 해명서에서 앞서 제출한 항론서의 셋째 항목과 넷째 항목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한다.
16) 이상의 항론파의 주장들을 자세히 알기 원하면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p. 545-549: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p. 111-22;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p. 10-14, 103-109;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pp. 207-09, 221-229를 참조할 것. 특별히 뒤의 두 책들은 1610년의 ‘항론서’에 더하여 1618년의 ‘항론파들의 견해들’의 해명서를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
17) "Deus aeterno et immutabili decreto in Christo Jesu Filio su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statuit ex genere humano in peccatum prolapso, eos in Christo, propter Christum, et per Christum salvare, qui per gratiam Spiritus Sancti in eundem Filium suum credituri, inque ea ipsa eandem gratiam, usque ad finem essent perseveraturi; contra vero contumacio et incredulos, sub peccato et ira relinquere et condemnare, tanquam a Christo alienos; juxta verbum Evangelii Joh. iii. 36: 'Qui credit in Filium, habet vitam aeternam, qui vero Filio non obtemperat, non videbit vitam, sed ira Dei manet super ipsum.' Cui alia quoque Scripturae dicta responde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이하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로 표기), pp. 544-45에서 인용함. 이하의 항론파의 주장들이나 도르트 신경의 영문 번역을 참조하기 위하여서는 주)15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들을 살필 것.
18) Richard A. Muller, s.v. "supra lapsum" in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 p. 292.
19) ‘항론서’ 1 항에 대해 ‘항론파의 해명서’는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해명을 하는데, 그 중 첫 번째 항목임. "Deus non decrevit quemquam ad vitam aeternam eligere, aut ab eadem reprobare ordine prius, quam eundem creare decreverit, citra ullius oboedientiae vel inoboedientiae antecedentis intuitum, pro beneplacito suo, ad demonstrandam gloriam misericordiae et iustitiae suae, vel potestatis et dominii absoluti." Acta Synodi Nationalis, in nomine Domini nostri Iesu Christi (Hanoviae: Impensis Egenolphi Emmelii, 1620), p. 159; J. 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Amsterdam, Netherland: Uitgegeven, 1940), p. 283. 영역을 위하여서는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p. 222을 참조할 것.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3는 화란어 본의 영역을 제공하고 있음.
20) 개혁파가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을 말하면서 예정의 대상이 ‘창조되고 타락하기 이전의’ 존재인가 아니면 ‘창조되었고 타락한 이후’의 존재인가의 토론을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이전’과 ‘이후’는 시간 역사 안에서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의 논리적 순서일 뿐이며 작정의 영원성을 전제하는 것임을 유의할 것.
21) "Cum decretum Dei de cuiusque hominis tum salute tum exitio, non sit decretum finis absolute intenti, sequitur neque eidem decreto subordinata esse media talia, per quae ad finem destinatum tum electi tum reprobi efficaciter atque inevitabiliter perducantur."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2;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3.
22) "... Christus Mediator non est solum executor Electionis, sed ipsius decreti Electionis fundamentum: quod alii efficaciter vocantur, iustificantur, in fide perseverant, glorificantur, causa non est, quod absolute ad vitam aeternam sint electi neque quod alii in lapsu deserantur, Christus iis non detur, prorsus non aut inefficaciter vocentur, indurentur, damnentur, causa non est, quod a salute aeterna absolute sint reprobati."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3)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 113.
24) "Deus non decrevit sine intervenientibus peccatis actualibus multo maximam partem hominum ab omnis spe salutis seclusam in lapsu relinquere."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5) "Deus ordinavit, ut Christus sit propitiatio pro totius mundi peccatis et vi istius decreti statuit credentes in ipsum iustificare et salvare hominibusque media ad fidem necessaria et sufficientia administrare ea ratione, quam novit suam sapientiam et iustitiam decere. Nequaquam autem destinavit ex vi decreti absoluti solis electis Christum Mediatorem dare eosdemque solos per vocationem efficacem fide donare, iustificare, in fide conservare ac glorificar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6) "Nec a vita aeterna nec a mediis ad eam sufficientibus ullus reiectus est absoluto aliquo antecedaneo decreto, sic ut meritum Christi, vocatio omniaque dona Spiritus prodesse ad salutem omnibus possint et re vera prosint, nisi ea ipsi in exitium sibi eorundem abusu vertant; ad incredulitatem autem, impietatem et peccata, tamquam media et causas damnationis, nemo destinatus est."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7) "Electio singularium personarum peremptoria est, ex consideratione fidei in Iesum Christum et perseverantiae; non autem citra considerationem fidei et perseverantiae in vera fide, tamquam conditionis in eligendo praerequisita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8) "Reprobatio a vita aeterna facta est secundum considerationem antecedaneae infidelitatis et perseverantiae in infidelitate; non autem citra considerationem antecedaneae infidelitatis et perseverantiae in infidelitat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p. 223-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29) "Omnes fidelium liberi sunt in Christo sanctificati; ita ut nullus eorum ante usum rationis ex hac vita decedens pereat. Nequaquam autem in reprobatorum numero censentur etiam nonnulli fidelium liberi, in infantia sua ante ullum actuale peccatum in propria persona commissum ex hac vita discedentes, adeo ut nec baptismi lavacrum sacrum, nec preces Ecclesiae ipsis ullo modo ad salutem prodesse possint."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30) "Nulli fidelium liberi baptizati in nomine Patris, Filli et Spiritus Sancti in infantiae suae statu viventes absoluto decreto reprobatis adscribuntur."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31) 호머 훅스마(Homer Hoeksema)는 항론파가 유아의 예정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일종의 개혁파를 향한 대인논증(argumentum ad hominem)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항론파가 논의의 초점을 유아기에 사망한 신자의 자녀에 대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있는지를 밝히고, 이에 따라서 개혁파의 예정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개혁파의 예정론은 유아기에 사망한 신자의 어떤 자녀를 멸망의 저주 아래에 놓고 있는데 그래도 그것을 받겠는가라는 식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p. 278-79.
32) James Arminius, 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 of Arminius, I.3.vi in The Works of Arminius vol. 1, translated by James Nichols and William Nicho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reprinted), p. 622.
33)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에 지 드 브레(Guy de Brès)가 플랑드르(Flanders)와 네덜란드(the Netherlands)의 교회를 위하여 불어로 작성한 것으로 1571년 엠덴(Emden) 개혁총회와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에서 채택이 되었다. 라틴어역은 판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불어판을 참고로 소개한다. "... mais s'est volontairement assujetti au péché, et par conséquent à mort et à malédiction, en prétant l'oreille à la parole du diable ..."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 398. 같은 쪽에 있는 영역을 함께 참조할 것.
34) "... Dieu s'est démontré ... miséricordieux, en retirant et sauvant de cette perdition ceux qu'en son conseil éternel et immuable il a élus et choisis par sa pure bonté en Jésus-Christ notre Seigneur, sans aucun égard de leurs oeuvres; juste, en laissant les autres en leur ruine et trébuchement où ils se sont précipités ..."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 491. 같은 쪽에 있는 영역을 함께 참조할 것.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알미니우스는 그의 글에서 위의 인용과 같이 이것을 풀어서 제시하고 있다: [영역] "Salvation through Christ is not given [restored] to all them who had perished in Adam, but to those only who are ingrafted into Christ by true faith and who embraces his benefits." James Arminius, 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 of Arminius I.3.vi in The Works of Arminius vol. 1, pp. 622-23. 이하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n Works, 1로 줄여씀.
36) 알미니우스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영역] "I believe that,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the world, the Son of God out of the entire race of mankind does by his word and Spirit gather or collect unto himself a company chosen unto eternal life and agreeing together in the true faith."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3.vi in Works, 1, p. 623.
37)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3.vi. in Works, 1, p. 623.
38) "The First absolute decree of God concerning the salvation of sinful man, is that by which he decreed to appoint his Son Jesus Christ for a Mediator, Redeemer, Saviour, Priest and King, who might destroy sin by his own death, might by his obedience obtain the salvation which had been lost, and might communicate it by his own virtue."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 in Works, 1, p. 653.
39)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in The Grace of God, the Bondage of the Will vol. 2, Thomas R. Schreiner and Bruce A. Ware, 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257.
40) "The second precise and absolute decree of God, is that in which he decreed to receive into favour those who repent and believe, and, in Christ, for His sake and through Him, to effect the salvation of such penitents and believers as preserved to the end; but to leave in sin and under wrath all impenitent persons and unbelievers, and to damn, them as aliens from Christ."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i in Works, 1, p. 653.
41)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58.
42) "The third divine decree is that by which God decreed to administer in a sufficient and efficacious manner the means which were necessary for repentance and faith; and to have such administration instituted (1) according to the Divine Wisdom, by which God knows what is proper and becoming both to his mercy and his severity, and (2) according to Divine Justice, by which He is prepared to adopt whatever his wisdom may prescribe and to put in execution."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ii in Works, 1, p. 653.
43)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XV.i-xv in Works, II, pp. 226-230; idem,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LI.i-ix in Works, II, pp. 394-395;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58.
44) "To these succeeds the Fourth decree, by which God decreed to save and damn certain particular persons. This decree has its foundation in the foreknowledge of God, by which he knew from all eternity those individuals who would, through his preventing grace, believe, and, through his subsequent grace would persevere, - according to the before-described administration of those means which are suitable and proper for conversion and faith; and, by which foreknowledge, he likewise knew those who would not believe and persevere."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v in Works, 1, pp. 653-54.
45)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xlii in Works, II, p. 123; idem,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VII.ix in Works, II, p. 342. 모든 가능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이라 불리는 까닭은 이 지식이 여러 가지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성되어 있지 않은 순일한(simple) 하나님의 지성에 의한 지식이기 때문이며, 또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태를 완전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알기 때문이며, 또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며, 끝으로 불확정의 지식(scientia indefinita)이라 일컬어지는 까닭은 아직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현실태로 확정이 되기 이전의 미확정 상태에 있는 가능태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p. 151.
46) Ibid.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발생하도록 정하신 것을 미리 보시는 지식이므로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지식이므로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임의로 정하신 것에 대한 지식이므로 임의의 지식(scientia voluntaria)이라 하며, 끝으로 하나님께서 의지하신 일은 일어나도록 확정이 된 것이므로 확정의 지식(scientia definita)이라고 불리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52; idem.,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64;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8 reprinted), p. 72-75.
47)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p. 155-57; idem.,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65.
48)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xliii in Works, II, pp. 123-24.
49) "The middle or intermediate [kind of] knowledge ought to intervene in things which depend on the liberty of created [arbitrii] choice or pleasure." Arminius,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VII.xii in Works, II, p. 342.
50)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56.
51)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며, 어떤 유한한 존재도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그 존재를 받아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Arminius,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IV.v in Works, II, p. 336.
52)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X.ix in Works, II, p. 183.
53)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p. 251-56.
54) "Some persons also distinguish the Will of God into that which is antecedent, and that which is consequent. This distinction has reference to one and the same volition or act of the rational creature, which if the act of the Divine Will precedes, it is called the 'antecedent Will of God' (1 Tim. ii, 4) but if it follows, it is called his 'consequent Will' (Acts i, 25; Mt. xxiii, 37, 38). but the antecedent will, it appears, ought to be called velleity, rather than will."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딤전 2:4) 하나님의 선행적 의지이며, 아무리 하나님께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고자 하여도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은(마 23:37) 하나님의 후행적 의지라고 알미니우스는 설명한다. 가롯 유다를 시도의 직무에 세우고자 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선행적 의지이지만, 유다가 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간 것의 상황은(행 1:25) 하나님의 후행적 의지라는 것이다. 결국 선행적 의지와 후행적 의지라는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구별이 됨으로, 하나님의 의지가 피조물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알미니우스 자신 또한 선행적 의지는 ‘결정의 의지’(voluntas)라기 보다는 ‘원하는 바람’(velleitas)이라고 함으로써 피조물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지가 조건화 되는 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lx in Works, II, p. 129;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88.
55)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 123; Robert E. Picirilli, Grace, Faith, Free Will (Nashville, TN: Randall House, 2002), pp. 15-16.
56) 항론파의 해명을 담은 견해서(Sententia Remonstrantium)의 5개 주제항목과 도르트 신경(Canones Synodi Dordrechtanae)의 5개 주제항목의 제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de Praedestinationis Decreto Articulum(SR) - de Divina Praedestinatione(CD); de Universalitate Meriti Mortis Christi(SR) - de Morte Christi, et Hominum per eam Redemptione(CD); de Gratia Dei et Conversione Hominis(SR) - de Hominis Corruptione, et Conversione ad Deum ejusque Modo(CD); de Perseverantia(SR) - de Perseverantia Sanctorum(CD).
57) "Cum omnes homines in Adamo peccaverint, et rei sint facti maledictionis et mortis aeternae, Deus nemini fecisset injuriam, si universum genus humanum in peccato et maledictione relinquere, ac propter peccatum damnare voluisset, juxta illa Apostoli, Totus mundus est obnoxius condemnatini Dei, Rom. iii.19, Omnes peccaverunt et destituuntur gloria Dei, Rom. iii.23, et, Stipendium peccati mors est, Rom. vi.23."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551-52. 도르트 신경 전문의 영역을 보기 위하여서는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Grand Rapids, MI: CRC Publications, 1988), pp. 122-45를 볼 것이며, 해설을 곁들인 전문의 영역을 보기 위하여서는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을 볼 것. 호머 훅스마는 이 책에서 740여 쪽에 걸쳐서 번역과 해설을 제공한다.
58) "Verum in hoc manifestata est charitas Dei, quod Filium suum unigenitum in mundum misit, ut omnis qui credit in eum, non pereat, sed habeat vitam aeternam. 1 Johan. iv.9; Johan iii.1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59) "Ut autem homines ad fidem adducantur, Deus clementer laetissimi hujus nuntii praecones mittit, ad quos vult, et quando vult, quorum ministerio homines ad resipiscentiam et fidem in Christum crucifixum vocantur. Quomodo enim credent in eum, de quo non audierint? quomodo autem audient absque praedicante? quomodo praedicabunt, nisi fuerint missi? Rom. x. 14, 15."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60) "Qui huic Evangelio non credunt, super eos manet ira Dei. Qui vero illud recipiunt, et Servatorem Jesum vera ac viva fide amplectuntur, illi per ipsum ab ira Dei et interitu liberantur, ac vita aeterna donantur."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61) "Incredulitatis istius, ut et omnium aliorum peccatorum, causa seu culpa neutiquam est in Deo, sed in homine. Fides autem in Jesum Christum et salus per ipsum, est gratuitum Dei donum, sicut scriptum est: Gratia salvati estis per fidem, et hoc non ex vobis, Dei donum est. Ephes. ii. 8. Item: Gratis datum est vobis in Christum credere. Phil. I. 29.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62) "Quod autem aliqui in tempore fide a D대 donantur, aliqui non donantur, id 뮤 aeterno ipsius decreto provenit; Omnia enim opera sua novit ab aeterno: Actor. xv. 18; Ephes. i. 11; secundum quod decretum electorum corda, quantumvis dura, gratiose emollit, et ad credendum inflectit, non electos autem justo judicio suae malitiae et duritiae relinquit. Atque hic potissimum sese nobis aperit profunda, misericors pariter et justa hominum aequaliter perditorum discretio; sive decretum illud electionis et reprobationis in verbo Dei revelatum. Quod ut perversi, impuri, et parum stabiles in suum detorquent exitium, ita sanctis et religiosis animabus ineffabile praestat solatium."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2-53.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3-24를 볼 것.
63) "Est autem electio immutabile Dei propositum, qu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ex universo genere humano, ex primaeva integritate in peccatum et exitium sua culpa prolapso, secundum liberrimum voluntatis suae beneplacitum, ex mera gratia, certam quorundam hominum multitudinem, aliis nec meliorum, nec digniorum, sed in communi miseria cum aliis jacentium, ad salutem elegit in Christo, quem etiam ab aeterno Mediatorem et omnium electorum caput, salutisque fundamentum constituit; atque ita eos ipsi salvandos dare, et ad ejus communionem per verbum et Spiritum suum efficaciter vocare ac trahere; seu vera et ipsum fide donare, justificare, sanctificare, et potenter in Filii sui communione custoditos tandem glorificare decrevit, ad demonstrationem suae misericordiae, et laudem divitiarum gloriosae suae gratiae, sicut scriptum est: Elegit nos Deus in Christ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ut essemus sancti et inculpati in conspectu ejus, cum charitate; qui praedestinavit nos quos adoptaret in filios, per Jesum Christum, in sese, pro beneplacito voluntatis suae, ad laudem gloriosae suae gratiae, qua nos gratis sibi acceptos fecit in illo dilecto. Ephes. I. 4,5,6. Et alibi: Quos praedestinavit, eos etiam vocavit; et quos vocavit, eos etiam justificavit; quos autem justificavit, eos etiam glorificavit." Rom. viii. 30.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3.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4를 볼 것.
64) "Haec electio non est multiplex, sed una et eadem omnium salvandorum in Vetere et Novo Testamento, quandoquidem Scriptura unicum praedicat beneplacitum, propositum, et consilium voluntatis Dei, quo nos ab aeterno elegit et ad gratiam et ad gloriam; et ad salutem et ad viam salutis, quam praeparavit ut in ea ambulemus."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3.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4를 볼 것.
65) "Eadem haec electio facta est non ex praevisa fide, fideique obedientia, sanctitate, aut alia aliqua bona qualitate et dispositione, tanquam caussa seu conditione in homine eligendo praerequisita, sed ad fidem, fideique obedientiam, sanctitatem, etc. Ac proinde electio est fons omnis salutaris boni: unde fides, sanctitas, et reliqua dona salvifica, ipsa denique vita aeterna, ut fructus et effectus ejus profluunt, secundum illud Apostoli: Elegit nos (nos quia eramus, sed) ut essemus sancti et inculpati in conspectu ejus in charitate. Ephes. i. 4."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3-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4-25를 볼 것.
66) "Caussa vero hujus gratuitae electionis, est solum Dei beneplacitum, non in eo consistens, quod certa qualitates seu actiones humanas, ex omnibus possibilibus, in salutis conditionem elegit; sed in eo, quod certas quasdam personas ex communi peccatorum multitudine sibi in peculium adscivit, sicut scriptum est: Nondum natis pueris, cum neque boni quippiam fecissent neque mali, etc., dictum est (nempe Rebeccae), Major serviet minori, sicut scriptum est, Jacob dilexi, Esau odio habui. Rom. ix. 11,12,13. Et, Crediderunt quotquot erant ordinati ad vitam aeternam. Act. xiii. 48."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67) "Atque ut Deus ipse est sapientissimus, immutabilis, omniscius, et omnipotens: ita electio ab ipso facta nec interrumpi, nec mutari, revocari, aut abrumpi, nec electi abjici, nec numerus eorum minui potes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68) "De hac aeterna et immutabili sui ad salutem electione, electi suo tempore, variis licet gradibus et dispari mensura, certiores redduntur, non quidem arcana et profunditates Dei curiose scrutando; sed fructus electionis infallibiles, in verbo Dei designatos, ut sunt vera in Christum fides, filialis Dei timor, dolor de peccatis secundum Deum, esuries et sitis justitiae, etc., in sese cum spirituali gaudio et sancta voluptate observando."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69) "Ex hujus electionis sensu et certitudine, filii Dei majorem indies sese coram Deo humiliandi, abyssum misericordiarum ejus adorandi, seipsos purificandi, et eum, qui ipsos prior tantopere dilexit, vicissim ardenter diligendi, materiam desumunt: tantum abest, ut hac electionis doctrina atque ejus meditatione in mandatorum divinorum observatione segniores, aut carnaliter securi reddantur. Quod iis justo Dei judicio solet accidere, qui de electionis gratia, vel temere praesumentes, vel otiose et proterve fabulantes, in viis electorum ambulare nolu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55.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70) "Ut autem haec de divina electione doctrina sapientissimo Dei consilio per prophetas, Christum ipsum, atque Apostolos, sub Veteri aeque atque sub Novo Testamento, est praedicata, et sacrarum deinde literarum monumentis commendata: ita et hodie in Ecclesia Dei, cui ea peculiariter est destinata, cum spiritu discretionis, religiose et sancte, suo loco et tempore, missa omni curiosa viarum altissimi scrutatione, est proponenda, idque ad sanctissimi nominis divini gloriam, et vividum populi ipsius solatium."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5.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71)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론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어야 함과 관련하여 도르트 신경과 같은 취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예정에 관한 논의는, 비록 그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매우 혼란스러우며 위험스럽게 된다. 인간의 호기심이 금지된 사잇길로 방황하거나 높은 고지로 밀고 올라가지 않도록 억제할 방도가 없다 ... 예정을 탐구할 때 하나님의 지혜의 신성한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무책임한 확신을 가지고 이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간다면, 그는 호기심을 충족하지 못할 것이며 출구가 없는 미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 안에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것들을 절제 없이 찾아 나서는 것이나, (우리로 하여금 경이감으로 충만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해하기 보다는 경외하도록 하신), 지극히 숭고한 지혜를 영원으로부터 풀어내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러한 해악을 치유하고자 예정에 관한 모든 언급을 묻어두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암초를 피하듯이 예정에 관한 어떤 질문도 삼갈 것을 교훈한다 ...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어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진전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 성경은 성령님의 학교인데, 여기서는 알아야 필요가 있으며 알아서 유익한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며, 알아서 유용한 것이 이외는 어느 것도 교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에 관하여 성경이 밝히고 있는 그 무엇이든지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악하게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속여서 빼앗은 자와 같을 것이며, 성령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억눌러야 좋을 것을 공개해버린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을 하며 비웃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Institutes III. 21. i, iii. ( )는 글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번역하여 인용하면서 붙인 것임.
72) "Caeterum aeternam et gratuitam hanc electionis nostri gratiam eo vel maxime illustrat, nobisque commendat Scriptura Sacra, quod porro testatur non omnes homines esse electos, sed quosdam non electos, sive in aeterna Dei electione praeteritos, quos scilicet Deus ex liberrimo, justissimo, irreprehensibili, et immutabili beneplacito decrevit in communi miseria, in quam se sua culpa praecipitarunt, relinquere, nec salvifica fide et conversinis gratia donare, sed in viis suis, et sub justo judicio relictos, tandem non tantum propter infidelitatem, sed etiam caetera omnia peccata, ad declaratinem justitiae suae damnare, et aeternum punire. Atque hoc est decretum reprobationis, quod Deum neutiquam peccati authoram (quod cogitatu blasphemum est) sed tremendum, irreprehensibilem, et justum judicem ac vindicem constitui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5.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5-26을 볼 것. 한글로 옮긴 본문의 글 가운데 [ ]는 이해를 위한 보충임.
73) "Qui vivam in Christum fidem, seu certam cordis fiduciam, pacem conscientiae, studium filialis obedientiae, gloriationem in Deo per Christum in se nondum efficaciter sentiunt, mediis tamen, per quae Deus ista se in nobis operaturum promisit, utuntur, ii ad reprobationis mentionem non consternari, nec se reprobis accensere, sed in usu mediorum diligenter pergere, ac horam uberioris gratiae ardenter desiderare et reverenter humiliterque expectare debent. Multo autem minus doctrina de reprobatione terreri debent ii, qui cum serio ad Deum converti, ei unice placere, et e corpore mortis eripi desiderant, in via tamen pietatis et fidei eo usque, quo volunt, pervenire nondum possunt, siquidem linum fumigans se non extincturum, et arundinem quassatam se non fracturum, promisit misericors Deus. Iis autem haec doctrina merito terrori est, qui Dei et Servatoris Jesu Christi obliti, mundi curis et carnis voluptatibus se totos manciparunt, quamdiu ad Deum serio non convertuntur."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5-56.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6을 볼 것.
74) "Quandoquidem de voluntate Dei ex verbo ipsius nobis est judicandum, quod testatur liberos fidelium esse sanctos, non quidem natura, sed beneficio foederia gratuiti, in quo illi cum parentibus comprehenduntur, pii parentes de electione et salute suorum liberorum, quos Deus in infantia ex hac vita evocat, dubitare non debe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6.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6을 볼 것.
75) "Adversus hanc gratuitae electionis gratiam, et justae reprobationis severitatem, obmurmuranti opponimus hoc apostolicum: O hom! tu quis es qui ex adverso responsas Deo? Rom. ix. 20. Et illud Servatoris nostri, An non licet mihi quod volo facere in meis? Matt. xx. 15. Nos vero haec mysteria religiose adorantes, cum Apostolo exclamamus : O profunditatem divitiarum tum sapientiae tum cognitionis Dei! Quam imperscrutabilia sunt Dei judicia, et ejus viae impervestigabiles! Quis enim cognovit mentem Domini? Aut quis fuit ei a consiliis? Aut quis prior dedit ei ut reddatur ei? Nam ex eo, et per eum, et in eum sunt omnia. Ipsi sit gloria in saecula. Amen. Rom. xi. 33-3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6.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6=27을 볼 것.
76) 이와 관련하여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uis)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In itself God's decree is unicum et simplicissimum, nor is any prius or posterius to be found in it. But as regards the things decreed the distinction is that God is said to have decreed their eventuation in the order in which they do eventuate." Johnannes Wollebuis, Christianae Theologiae Compendium (Basel, 1626), p. 19,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translated by G. T. Thomso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50 first published; 1978 reprinted), VII. 9, p. 140.
77)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lated by G. M. Giger (Phillipsburg, NJ: P&R Pub., 1992), loc. 4. q, 2. ix, p. 315.
78)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3. viii-ix, p. 317.
79) Johannes Braunius, Doctrina Foederum sive Systema Theologiae didacticae et elencticae (Amsterdam, 1688), I. ii. 9, 11,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VII. 6, p. 138.
80)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3. xiii, p. 318을 참조할 것.
81) 가정적 필연성이란, 어떤 사물이나 일이 본성 상 가변적이며 우유적이지만,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됨으로 나타나는 필연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가정(hypothesis)에 의하여 필연성이 수반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4. ii, p. 320을 참조할 것.
82)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4. vi, p. 321.
83)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영원한 불변의 작정을 제 2 원인들을 손상하지 않은 채 실행하는가와 관련한 하나님의 동주사역(concursus divinus)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6. q, 6. v-viii, pp. 512-14를 살필 것. 졸고, “개혁 신학의 구원과 성화,” 구원이후에서 성화의 은혜까지, 박영선과 브라이언 채플 외 (서울: 이레서원, 2005), pp. 117-63 가운데 한 부분에서 번역 및 설명을 볼 수 있음.
84)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4. viii, p. 321.
85) John Calvin, Institutes, I. 16. vii, ix.
86) John Calvin, Institutes, I. 16. viii.
87) John Calvin, 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 translated by J.K.S. Reid (London: James Clarke and Co., 1961), pp. 25-26; James Greenbury, "Calvin's Understanding of Predestina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Institutes,"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54(1995), p. 128을 참조할 것. 멀러(Richard A. Muller)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므로 죄의 조성자라는 알미니안 주장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여 준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므로 아담의 자유로운 죄의 선택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것이 결코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미리 결정이 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개혁주의 견해인 적이 없었다.” 존 프레임(John M . Frame)은 멀러를 비판하기를 멀러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작정하셨으며, 그러므로 또한 인간의 도덕적 결정을 작정하셨음을 가르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탈하였다고 쓰고 있다. 프레임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와 관련한 개혁주의 양립론(compatibilism)은 '도덕적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선결정'(divine predetermination of moral acts)를 배제하지 않는 반면에, 멀러는 인간의 도적적 행동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개혁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프레임의 이러한 비판은 멀러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멀러는 하나님의 작정이 철학적 결정론적 의미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미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즉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자유와 어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기는커녕 가능케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멀러는 이것이 시간적 차원의 존재 안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철학적 결정론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라이드(J.K.S. Reid)를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다. 곧 멀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 필연성을 갖지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미리 결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영역 안에서 그 작정을 실행하실 때에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여 도덕적 선택을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작정을 실행하실 때에 인간의 자유를 가능케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선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의 필연성이 인간의 자유의 선택과 양립될 수 있다는 개혁주의 양립론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강압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물리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곧 짐승들처럼 본능에 따라 선택이 제한이 되는 필연성으로부터 이성에 의한 선택을 하는 자유를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 자유의 두 가지 요소는 인간의 의지의 본질적인 것이므로 타락에 의하여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의지의 요소라고 개혁파는 생각한다. 따라서 개혁파는 어떤 선택의 대상을 취하거나 거부하는 자유의 선택(libertas contrarietatis; libertas specificationis)과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선택(libertas exercitii)를 인정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가 모든 필연성에 의하여 충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인간의 자유는 강압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원의 자유와 물리적, 본능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이성적 선택의 자유를 본질적인 요소로 갖지만, 그럼에도 다음의 네 가지 필연성들과는 충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즉 하나님의 의존해야하는 필연성, 이성적으로 하나의 최고의 최종적인 선택적 판단을 하였을 때에 다른 선택이 없으므로 나타나는 이성적 필연성, 어떤 유형의 행동으로 고정화 되어버릴 정도로 습성화 되어 노예적 상태로 빠져버린 도덕적 필연성, 그리고 어떤 일이 달리 일어날 수가 없이 일어남으로써 나타나는 사건적 필연성 등과는 충돌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과 같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필연성은 인간의 자유의 선택과 충돌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의 작정이나 이성의 최종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선택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리베르테리안적 중립의 자유(libertas indifferentiae)에 대해서 개혁주의는 반대를 하는 것이며, 이들에 대하여 자원의 자유(libertas spontaneitatis)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리베르테리안 중립의 자유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은 필연적이지 않다. 인간의 자유선택의 대상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을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필연적 작정에 따라 실행되는 가운데 있는 인간의 자유는 그 선택적 자유를 자유롭게 누린다는 양립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원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원의 자유는 선택과 자원성이라는 두 요소를 본질로 갖는다. 여기서 선택이란 요소는 짐승과 같이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고려에 의하여 기쁘게 여겨지는 것을 행하였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이며, 자발성이란 외적인 강압이 없이 행하였다는 의미에서의 자발성이다. 개혁파는 이 두요소를 합하여 이성적 자원성(rational willingness)이라 일컬으며, 이것은 자유의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요소는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는 인간의 자유인격에 속한 본질적인 것들이다. 개혁파는 이러한 인간의 도덕적 선택의 행동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에도 여전히 시간 안에서는 자유로운 것임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미리 결정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시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개혁파는 앞서 말한 설명에 근거하여 견해를 밝히고, 리베르테리안 자유를 주장하는 항론파 등의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미리 결정이 되었으나 여전히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므로 아담의 자유로운 죄의 선택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것이 결코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미리 결정이 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개혁주의 견해인 적이 없었다.”라는 멀러의 설명은 개혁파의 교훈에 완전히 일치하며, 프레임은 의문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것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개혁주의가 인간의 자유선택의 제한성을 말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의 영적 선택과 관련한 것이다. 타락 이후에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는 영적 선택과 관련하여 선을 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거스틴을 따라서 죄를 피할 수가 없는 상태, 곧 non posse non peccare의 상태가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적이며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의 선택마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이 이러한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그의 작정의 실행 안에서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즉 개혁파가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 자유의 선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 자유의 요소와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선한 - 도덕적이거나 일상 생활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 행동을 어떠한 영향에도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다. 자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타락 이후에 인간에게 자유가 있느냐고 할 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의 도덕적 필연성과 관련이 된다, 인간이 타락하여 부패한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영적 의미에서의 악한 습성이라는 필연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는 타락한 이후 중생하지 못한 인간이 영적 선에 대하여 중립의 자유(libertas indifferentiae)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렇지만 개혁주의는 이러한 전적 부패로 인한 영적 의미에서의 악한 습성으로 인한 필연성은 도덕적 필연성과 같은 종류의 것이므로 인간의 자유와 충돌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원의 자유에 따라서 죄를 자유로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타락 이후에 인간은 영적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전적 부패와 무능력에 갇혀 있는 도덕적 필연성 아래 놓여져 있지만 타락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개혁파의 설명이다.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70; John M. Frame, No Other God: A Response to Opne Theism, p. 123을 참조할 것.
88)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3. q, 13. ii, p. 213.
89) Gisbertus Voetius, Selectarum Disputationum theologicarum Pars. I-V (Utrecht, 1648-1669), I, p. 257,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V. 17, p. 79.
90) Gisbertus Voetius, I, p. 336,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V. 17, p. 80.
91) 웨슬리와 그의 부흥 운동에 끼친 알미니안 예정론의 이해의 영향에 대해 알기 원하면, Emmanuel D Mbennah and J. M. Vorster, "The Influence of Arminian Conception of Predestination on the 18th-century Wesleyan Revival," Studia historiae ecclesiasticae 24 (1998), pp. 161-87을 볼 것.
92) Brian A. Gerrish, "Sovereign Grace: Is Reformed Theology Obsolete?," Interpretation 57(2003), p. 57.
1) J. I. Packer, "Arminianisms," in Through Christ's Word: A Festschrift for P. E. Hughes, ed. W. Robert Godfrey and Jesse L. Boyd III (Phillipsburg, N.J.: P&R, 1985), p. 121.
2) Alan P. F. Sell, 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Eugene OR: Wipf&Stock Publishers, 1998; previously published by H. E. Walter Ltd., 1982), p. 5.
3) 팔라틴(Palatine) 영(領)의 선제후 프레데릭 4세가 헤이그에 보냈던 대사, 히볼리투스 아 콜리부스(Hippolytus ὰ Collibus)에게 자신에 대한 소문들을 해명한 이후에 그 내용을 글로 보낸 편지 가운데서 알미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가 단연코 말씀을 드리건데 저는 교회에서이건 대학에서이건 우리의 생각과 말의 유일한 규칙인 것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마땅한 신성한 성경에 위배되거나, ... 화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어긋나는 그 어떤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Arminius, A Letter addressed to Hippolytus a Collibus in The Works of Arminius II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1), p. 690; Carl Bang, Arminius: A Study in the Dutch Reformation (Eugene OR: Wipf&Stock Publishers, 1998; first edi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71), p. 295.
4) 칼 뱅스(Carl Bangs)는 알미니우스를 개혁파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볼 여러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결국 알미니우스가 역사적으로 개혁파 진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뱅스가 말하는 대로 알미니우스는 재침례파가 아니고 소시니안파도 아니며 펠라기우스파도 아니고 숨겨진 천주교파(crypto-Roman Catholic)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신학적으로 예수회의 몰리니우스 등의 천주교파의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혁파도 아닌 것이다. Carl Bangs, "Arminius as a Reformed Theologian," i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Heritage Hall Lecture, 1960-70, edited by John H. Brat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3), pp. 209-22.
5) Richard A. Muller, Post 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4 vo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7-2002)을 볼 것.
6) 그러나 이 말은 도르트 신경이 스콜라신학 방법론에 따라 기술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도르트 총회는 신경을 기술함에 있어서 대학과 학자들 사이에서 사용이 되었던 스콜라적(scholasticus) 방법을 따르기 보다는. 교회에서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대중적’(popularis)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즉 도르트 총회는 가급적 ‘주장과 반론’,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구별 및 사용’, ‘네 가지로 구별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의 이용’, ‘형식논리상의 삼단논법을 이용한 합리적 논증,’ 그리고 ‘분석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논증’ 등의 스콜라적 기술 방식을 피하고, 일반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상의 언어로 개념을 풀어 기술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날드 신네마(Donald Sinnema)가 잘 밝히고 있듯이, 도르트 총회에 참석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스콜라 신학 방법론에 익숙한 사람들이며, 도르트 총회가 금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스콜라적 방법론이었을 뿐, 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도의 스콜라적 방법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도르트 신경은 형식적으로는 대중적인 기술 방식을 따라서 기술되고 있으나 그것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의 내용은 스콜라적 방법론에 따른 사고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항론파가 이미 알미니우스를 좇아 스콜라적 방법론에 따른 신학적 결론을 전제로 하면서 개혁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까닭에 항론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양상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본문에서 도르트 신경을 강설하는 가운데 제시될 것이다. Donald Sinnema, "Reformed Scholasticism and the Synod of Dort (1618-19)," in John Calvin's Institutes: His Opus Magnum by Proceedings of the Second Soutn African Congress for Calvin Research, July 31-August 3, 1984 (Potchefstroom: Potchefstroom Univ.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1986), pp. 467-506을 참조할 것.
7)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17-18. 실제로 미국의 교인들이 믿는 바를 조사한 한 통계에 따르면, 응답자의 82퍼센트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으며, 응답자의 56퍼센트는 이 격언이 성경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아는 것으로 나타났다. Brian A. Gerrish, "Sovereign Grace: Is Reformed Theology Obsolete?," Interpretation 57(2003), p. 56. 게리쉬는 이 통계를 What Americans Believe (Glendale, CA: the Barna Research Group, 1991)에서 인용하였음.
8) 어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칼빈주의의 영향력의 회복의 증거는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인 남부침례교단(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 개혁주의 신학을 오늘날의 교회의 세속화의 대한 치료의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남부침례교단 총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침례교 지도자들은 오늘날의 인간 중심적인 교회의 영적 무력성과 도덕적 해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알미니안 신학에서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염려한다. 이들은 또 젊은 칼빈주의자인 몰러(Albert Mohler)가 미국 남부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 총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개혁주의 신학으로 재무장시킨 사례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 가운데 인기를 크게 끌고 있는 기독교 팝 밴드인 캐드몬즈 콜(Caedmon's Call)이 공개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확신을 표방하고 있음을 지목한다. 다른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칼빈주의의 회복이 세속화되어버린 교회의 치유책이라는 판단에 맞서서 침례교회가 칼빈주의를 완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사회에서 똥더미와 같은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풀러(Andrew Fuller)의 견해를 인용하여 칼빈주의로 신학적 경향이 계속되는 것을 경계한 에스텝(William R. Estep)의 주장을 대비시키고 있다. Jerry L. Walls and Joseph R. Dongell, Why I Am Not a Calvinis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13-17. 미국남부침례교단 총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하여서는 Ernest C. Reisinger and D. Matthew Allen, A Quiet Revolution: A Chronicle of Beginnings of Reformation in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Cape Coral, Fl.: Founders, 2000)을 볼 것. 풀러의 소리는 William R. Estep, "Doctrines Lead to 'Dunghill' Prof Warns,"<http://www.founders.org/FJ29/article1.html.>을 볼 것.
9) 개방신론자(open theism)들의 주장을 알기 위하여서는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fo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N: Review and Herald Pub. Association, 1980); idem., God's Forekonwledge and Man's Free Will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85); Gregory A. Boyd, God of the Possible: A Biblical Introduction to the Open Veiw of God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0) 등을 볼 것이며, 개방신론을 여러 관점에서 제시한 책으로, C. Pinnock, R. Rice, J. Sanders, W. Hasker and D. Basinger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5)을 살펴보거나;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학자들의 동일 주제에 대한 논문을 모아 놓은 책으로, Clark H. Pinnock, ed., The Grace of God and the Will of Man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89)와 James K. Beilby and Paul R. Eddy, Divine Foreknowledge: Four View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을 살피면 개방신론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개혁주의관점에서의 비평을 보기 원하면, Bruce A. Ware, God's Lesser Glory: The Diminished God of Open Theism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0)과 John M. Frame, No Other God: A Response to Open Theism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1)을 볼 것. 개방신론에 대한 약간의 소개를 받을 수 있는 한국어 논문을 위하여서는 송인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신학정론 23(2005/11): 77-113을 참조할 것.
10) 앞서 언급한 IVP에서 출판된 Why I Am Not a Calvinist와 Why I Am Not an Arminian의 두 책 이외에 Dave Hunt and James White가 각각 알미나안주의와 칼빈주의 관점에서 14개의 관련된 주제를 설명하고 비판을 한 Debating Calvinism: Five Points, Two Views (Sisters, OR: Multnomah Publishers, 2004)를 볼 것.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배타적인 선택의 신학들로 여기지 않고 두 신학들을 조화하여 제 3의 신학적 관점을 제안한 책들로 C. Gordon Olson, Beyond Calvinism and Arminianism (Cedar Knolls, NJ: Global Gospel Ministries, Inc., 2002); Norman Geisler, Chosen But Free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99, 2001)을 볼 것. 가이슬러에 대한 개혁주의의 비평을 위하여서는 James R. White, Potter's Freedom (Amityville, NY: Calvary Press Publishing, 2000)을 볼 것.
11) 개방신론이 그 사상의 역사적 뿌리를 소시니안주의에 두고 있음에 대해서는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lated by George Musgrave Giger, edited by James T. Dennison, Jr.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2), loc. 3, q. 12, p. 208. 튜레틴은 이 곳에서 소시니우스가 “하나님은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경의 어떤 근거나 구절들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지와 같은 지식은 결단코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음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12) 논문의 전개에 따라서 약간의 설명이 뒤따라 나오겠지만, ‘튤립’(TULIP)으로 표지되는 칼빈주의 5대 신앙강령이란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가리켜 말한다.
13) 실제로 도르트 신경의 이름을 살피면 ‘영국, 독일, 프랑스 개혁교회들의 많은 탁월한 신학자들의 참여와 함께 1618년과 1619년에 도르트에서 열렸던 화란 개혁교회의 국가 총회가 화란 교회들 안에서 논쟁이 되었던 다섯 가지 교리 사항에 대해 내린 결정’(Judicium Synodi Nationalis Reformatarum Ecclesiarum Belgicarum, Habitae Dordrechti Anno MDCXVIII et MDCXIX. Cui plurimi insignes Theologi Reformatarum Ecclesiarum Magnae Britanniae, Germaniae, Galliae, interfuerunt, de Quinque Doctrinae Capitibus in Ecclesiis Belgicis Controversis)으로 되어 있어, 도르트 신경의 5대 신앙 강령은 항론파의 5개 조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0), pp. 550-79에 도르트 신경의 라틴어 전문이 실려 있음을 참조할 것.
14) 도르트 총회와 관련한 역사적, 신학적 상황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Thomas Scott, tr. The Articles of the Synod of Dort and Its Rejection of Errors with the History of Events Which Made Way for that Synod (Utica, NY: Press of William Williams, 1831); idem., with an Introductory Essay by Samuel Miller, The Articles of Synod of Dort (Philadelphia, PA: Presbyterian Board of Publsication, 185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0);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Grand Rapids, MI: Reformed Fellowship, Inc., 1968);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Grand Rapids, MI: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80) 등을 참조할 것.
15) 이 셋째 항목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과 동일한 것 같으나, 이 항목은 다음의 넷째 항목과 연결지어 이해하여야 한다. 실제로 항론파들은 1618년에 제출한 ‘항론파들의 견해들’(Sententia Remonstrantium)이라는 해명서에서 앞서 제출한 항론서의 셋째 항목과 넷째 항목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한다.
16) 이상의 항론파의 주장들을 자세히 알기 원하면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p. 545-549: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p. 111-22;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p. 10-14, 103-109;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pp. 207-09, 221-229를 참조할 것. 특별히 뒤의 두 책들은 1610년의 ‘항론서’에 더하여 1618년의 ‘항론파들의 견해들’의 해명서를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
17) "Deus aeterno et immutabili decreto in Christo Jesu Filio su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statuit ex genere humano in peccatum prolapso, eos in Christo, propter Christum, et per Christum salvare, qui per gratiam Spiritus Sancti in eundem Filium suum credituri, inque ea ipsa eandem gratiam, usque ad finem essent perseveraturi; contra vero contumacio et incredulos, sub peccato et ira relinquere et condemnare, tanquam a Christo alienos; juxta verbum Evangelii Joh. iii. 36: 'Qui credit in Filium, habet vitam aeternam, qui vero Filio non obtemperat, non videbit vitam, sed ira Dei manet super ipsum.' Cui alia quoque Scripturae dicta responde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이하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로 표기), pp. 544-45에서 인용함. 이하의 항론파의 주장들이나 도르트 신경의 영문 번역을 참조하기 위하여서는 주)15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들을 살필 것.
18) Richard A. Muller, s.v. "supra lapsum" in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 p. 292.
19) ‘항론서’ 1 항에 대해 ‘항론파의 해명서’는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해명을 하는데, 그 중 첫 번째 항목임. "Deus non decrevit quemquam ad vitam aeternam eligere, aut ab eadem reprobare ordine prius, quam eundem creare decreverit, citra ullius oboedientiae vel inoboedientiae antecedentis intuitum, pro beneplacito suo, ad demonstrandam gloriam misericordiae et iustitiae suae, vel potestatis et dominii absoluti." Acta Synodi Nationalis, in nomine Domini nostri Iesu Christi (Hanoviae: Impensis Egenolphi Emmelii, 1620), p. 159; J. 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Amsterdam, Netherland: Uitgegeven, 1940), p. 283. 영역을 위하여서는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p. 222을 참조할 것.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3는 화란어 본의 영역을 제공하고 있음.
20) 개혁파가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을 말하면서 예정의 대상이 ‘창조되고 타락하기 이전의’ 존재인가 아니면 ‘창조되었고 타락한 이후’의 존재인가의 토론을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이전’과 ‘이후’는 시간 역사 안에서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의 논리적 순서일 뿐이며 작정의 영원성을 전제하는 것임을 유의할 것.
21) "Cum decretum Dei de cuiusque hominis tum salute tum exitio, non sit decretum finis absolute intenti, sequitur neque eidem decreto subordinata esse media talia, per quae ad finem destinatum tum electi tum reprobi efficaciter atque inevitabiliter perducantur."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2;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3.
22) "... Christus Mediator non est solum executor Electionis, sed ipsius decreti Electionis fundamentum: quod alii efficaciter vocantur, iustificantur, in fide perseverant, glorificantur, causa non est, quod absolute ad vitam aeternam sint electi neque quod alii in lapsu deserantur, Christus iis non detur, prorsus non aut inefficaciter vocentur, indurentur, damnentur, causa non est, quod a salute aeterna absolute sint reprobati."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3)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 113.
24) "Deus non decrevit sine intervenientibus peccatis actualibus multo maximam partem hominum ab omnis spe salutis seclusam in lapsu relinquere."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5) "Deus ordinavit, ut Christus sit propitiatio pro totius mundi peccatis et vi istius decreti statuit credentes in ipsum iustificare et salvare hominibusque media ad fidem necessaria et sufficientia administrare ea ratione, quam novit suam sapientiam et iustitiam decere. Nequaquam autem destinavit ex vi decreti absoluti solis electis Christum Mediatorem dare eosdemque solos per vocationem efficacem fide donare, iustificare, in fide conservare ac glorificar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6) "Nec a vita aeterna nec a mediis ad eam sufficientibus ullus reiectus est absoluto aliquo antecedaneo decreto, sic ut meritum Christi, vocatio omniaque dona Spiritus prodesse ad salutem omnibus possint et re vera prosint, nisi ea ipsi in exitium sibi eorundem abusu vertant; ad incredulitatem autem, impietatem et peccata, tamquam media et causas damnationis, nemo destinatus est."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7) "Electio singularium personarum peremptoria est, ex consideratione fidei in Iesum Christum et perseverantiae; non autem citra considerationem fidei et perseverantiae in vera fide, tamquam conditionis in eligendo praerequisita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28) "Reprobatio a vita aeterna facta est secundum considerationem antecedaneae infidelitatis et perseverantiae in infidelitate; non autem citra considerationem antecedaneae infidelitatis et perseverantiae in infidelitat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p. 223-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29) "Omnes fidelium liberi sunt in Christo sanctificati; ita ut nullus eorum ante usum rationis ex hac vita decedens pereat. Nequaquam autem in reprobatorum numero censentur etiam nonnulli fidelium liberi, in infantia sua ante ullum actuale peccatum in propria persona commissum ex hac vita discedentes, adeo ut nec baptismi lavacrum sacrum, nec preces Ecclesiae ipsis ullo modo ad salutem prodesse possint."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30) "Nulli fidelium liberi baptizati in nomine Patris, Filli et Spiritus Sancti in infantiae suae statu viventes absoluto decreto reprobatis adscribuntur."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31) 호머 훅스마(Homer Hoeksema)는 항론파가 유아의 예정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일종의 개혁파를 향한 대인논증(argumentum ad hominem)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항론파가 논의의 초점을 유아기에 사망한 신자의 자녀에 대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있는지를 밝히고, 이에 따라서 개혁파의 예정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개혁파의 예정론은 유아기에 사망한 신자의 어떤 자녀를 멸망의 저주 아래에 놓고 있는데 그래도 그것을 받겠는가라는 식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p. 278-79.
32) James Arminius, 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 of Arminius, I.3.vi in The Works of Arminius vol. 1, translated by James Nichols and William Nicho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reprinted), p. 622.
33)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에 지 드 브레(Guy de Brès)가 플랑드르(Flanders)와 네덜란드(the Netherlands)의 교회를 위하여 불어로 작성한 것으로 1571년 엠덴(Emden) 개혁총회와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에서 채택이 되었다. 라틴어역은 판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불어판을 참고로 소개한다. "... mais s'est volontairement assujetti au péché, et par conséquent à mort et à malédiction, en prétant l'oreille à la parole du diable ..."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 398. 같은 쪽에 있는 영역을 함께 참조할 것.
34) "... Dieu s'est démontré ... miséricordieux, en retirant et sauvant de cette perdition ceux qu'en son conseil éternel et immuable il a élus et choisis par sa pure bonté en Jésus-Christ notre Seigneur, sans aucun égard de leurs oeuvres; juste, en laissant les autres en leur ruine et trébuchement où ils se sont précipités ..."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 491. 같은 쪽에 있는 영역을 함께 참조할 것.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알미니우스는 그의 글에서 위의 인용과 같이 이것을 풀어서 제시하고 있다: [영역] "Salvation through Christ is not given [restored] to all them who had perished in Adam, but to those only who are ingrafted into Christ by true faith and who embraces his benefits." James Arminius, 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 of Arminius I.3.vi in The Works of Arminius vol. 1, pp. 622-23. 이하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n Works, 1로 줄여씀.
36) 알미니우스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영역] "I believe that,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the world, the Son of God out of the entire race of mankind does by his word and Spirit gather or collect unto himself a company chosen unto eternal life and agreeing together in the true faith."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3.vi in Works, 1, p. 623.
37)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3.vi. in Works, 1, p. 623.
38) "The First absolute decree of God concerning the salvation of sinful man, is that by which he decreed to appoint his Son Jesus Christ for a Mediator, Redeemer, Saviour, Priest and King, who might destroy sin by his own death, might by his obedience obtain the salvation which had been lost, and might communicate it by his own virtue."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 in Works, 1, p. 653.
39)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in The Grace of God, the Bondage of the Will vol. 2, Thomas R. Schreiner and Bruce A. Ware, 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257.
40) "The second precise and absolute decree of God, is that in which he decreed to receive into favour those who repent and believe, and, in Christ, for His sake and through Him, to effect the salvation of such penitents and believers as preserved to the end; but to leave in sin and under wrath all impenitent persons and unbelievers, and to damn, them as aliens from Christ."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i in Works, 1, p. 653.
41)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58.
42) "The third divine decree is that by which God decreed to administer in a sufficient and efficacious manner the means which were necessary for repentance and faith; and to have such administration instituted (1) according to the Divine Wisdom, by which God knows what is proper and becoming both to his mercy and his severity, and (2) according to Divine Justice, by which He is prepared to adopt whatever his wisdom may prescribe and to put in execution."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ii in Works, 1, p. 653.
43)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XV.i-xv in Works, II, pp. 226-230; idem,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LI.i-ix in Works, II, pp. 394-395;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58.
44) "To these succeeds the Fourth decree, by which God decreed to save and damn certain particular persons. This decree has its foundation in the foreknowledge of God, by which he knew from all eternity those individuals who would, through his preventing grace, believe, and, through his subsequent grace would persevere, - according to the before-described administration of those means which are suitable and proper for conversion and faith; and, by which foreknowledge, he likewise knew those who would not believe and persevere."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v in Works, 1, pp. 653-54.
45)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xlii in Works, II, p. 123; idem,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VII.ix in Works, II, p. 342. 모든 가능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이라 불리는 까닭은 이 지식이 여러 가지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성되어 있지 않은 순일한(simple) 하나님의 지성에 의한 지식이기 때문이며, 또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태를 완전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알기 때문이며, 또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며, 끝으로 불확정의 지식(scientia indefinita)이라 일컬어지는 까닭은 아직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현실태로 확정이 되기 이전의 미확정 상태에 있는 가능태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p. 151.
46) Ibid.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발생하도록 정하신 것을 미리 보시는 지식이므로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지식이므로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임의로 정하신 것에 대한 지식이므로 임의의 지식(scientia voluntaria)이라 하며, 끝으로 하나님께서 의지하신 일은 일어나도록 확정이 된 것이므로 확정의 지식(scientia definita)이라고 불리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52; idem.,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64;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8 reprinted), p. 72-75.
47)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p. 155-57; idem.,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65.
48)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xliii in Works, II, pp. 123-24.
49) "The middle or intermediate [kind of] knowledge ought to intervene in things which depend on the liberty of created [arbitrii] choice or pleasure." Arminius,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VII.xii in Works, II, p. 342.
50)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56.
51)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며, 어떤 유한한 존재도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그 존재를 받아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Arminius,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IV.v in Works, II, p. 336.
52)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X.ix in Works, II, p. 183.
53)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p. 251-56.
54) "Some persons also distinguish the Will of God into that which is antecedent, and that which is consequent. This distinction has reference to one and the same volition or act of the rational creature, which if the act of the Divine Will precedes, it is called the 'antecedent Will of God' (1 Tim. ii, 4) but if it follows, it is called his 'consequent Will' (Acts i, 25; Mt. xxiii, 37, 38). but the antecedent will, it appears, ought to be called velleity, rather than will."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딤전 2:4) 하나님의 선행적 의지이며, 아무리 하나님께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고자 하여도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은(마 23:37) 하나님의 후행적 의지라고 알미니우스는 설명한다. 가롯 유다를 시도의 직무에 세우고자 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선행적 의지이지만, 유다가 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간 것의 상황은(행 1:25) 하나님의 후행적 의지라는 것이다. 결국 선행적 의지와 후행적 의지라는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구별이 됨으로, 하나님의 의지가 피조물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알미니우스 자신 또한 선행적 의지는 ‘결정의 의지’(voluntas)라기 보다는 ‘원하는 바람’(velleitas)이라고 함으로써 피조물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지가 조건화 되는 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lx in Works, II, p. 129;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88.
55)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 123; Robert E. Picirilli, Grace, Faith, Free Will (Nashville, TN: Randall House, 2002), pp. 15-16.
56) 항론파의 해명을 담은 견해서(Sententia Remonstrantium)의 5개 주제항목과 도르트 신경(Canones Synodi Dordrechtanae)의 5개 주제항목의 제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de Praedestinationis Decreto Articulum(SR) - de Divina Praedestinatione(CD); de Universalitate Meriti Mortis Christi(SR) - de Morte Christi, et Hominum per eam Redemptione(CD); de Gratia Dei et Conversione Hominis(SR) - de Hominis Corruptione, et Conversione ad Deum ejusque Modo(CD); de Perseverantia(SR) - de Perseverantia Sanctorum(CD).
57) "Cum omnes homines in Adamo peccaverint, et rei sint facti maledictionis et mortis aeternae, Deus nemini fecisset injuriam, si universum genus humanum in peccato et maledictione relinquere, ac propter peccatum damnare voluisset, juxta illa Apostoli, Totus mundus est obnoxius condemnatini Dei, Rom. iii.19, Omnes peccaverunt et destituuntur gloria Dei, Rom. iii.23, et, Stipendium peccati mors est, Rom. vi.23."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551-52. 도르트 신경 전문의 영역을 보기 위하여서는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Grand Rapids, MI: CRC Publications, 1988), pp. 122-45를 볼 것이며, 해설을 곁들인 전문의 영역을 보기 위하여서는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을 볼 것. 호머 훅스마는 이 책에서 740여 쪽에 걸쳐서 번역과 해설을 제공한다.
58) "Verum in hoc manifestata est charitas Dei, quod Filium suum unigenitum in mundum misit, ut omnis qui credit in eum, non pereat, sed habeat vitam aeternam. 1 Johan. iv.9; Johan iii.1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59) "Ut autem homines ad fidem adducantur, Deus clementer laetissimi hujus nuntii praecones mittit, ad quos vult, et quando vult, quorum ministerio homines ad resipiscentiam et fidem in Christum crucifixum vocantur. Quomodo enim credent in eum, de quo non audierint? quomodo autem audient absque praedicante? quomodo praedicabunt, nisi fuerint missi? Rom. x. 14, 15."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60) "Qui huic Evangelio non credunt, super eos manet ira Dei. Qui vero illud recipiunt, et Servatorem Jesum vera ac viva fide amplectuntur, illi per ipsum ab ira Dei et interitu liberantur, ac vita aeterna donantur."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61) "Incredulitatis istius, ut et omnium aliorum peccatorum, causa seu culpa neutiquam est in Deo, sed in homine. Fides autem in Jesum Christum et salus per ipsum, est gratuitum Dei donum, sicut scriptum est: Gratia salvati estis per fidem, et hoc non ex vobis, Dei donum est. Ephes. ii. 8. Item: Gratis datum est vobis in Christum credere. Phil. I. 29.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552.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3을 볼 것.
62) "Quod autem aliqui in tempore fide a D대 donantur, aliqui non donantur, id 뮤 aeterno ipsius decreto provenit; Omnia enim opera sua novit ab aeterno: Actor. xv. 18; Ephes. i. 11; secundum quod decretum electorum corda, quantumvis dura, gratiose emollit, et ad credendum inflectit, non electos autem justo judicio suae malitiae et duritiae relinquit. Atque hic potissimum sese nobis aperit profunda, misericors pariter et justa hominum aequaliter perditorum discretio; sive decretum illud electionis et reprobationis in verbo Dei revelatum. Quod ut perversi, impuri, et parum stabiles in suum detorquent exitium, ita sanctis et religiosis animabus ineffabile praestat solatium."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2-53.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3-24를 볼 것.
63) "Est autem electio immutabile Dei propositum, qu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ex universo genere humano, ex primaeva integritate in peccatum et exitium sua culpa prolapso, secundum liberrimum voluntatis suae beneplacitum, ex mera gratia, certam quorundam hominum multitudinem, aliis nec meliorum, nec digniorum, sed in communi miseria cum aliis jacentium, ad salutem elegit in Christo, quem etiam ab aeterno Mediatorem et omnium electorum caput, salutisque fundamentum constituit; atque ita eos ipsi salvandos dare, et ad ejus communionem per verbum et Spiritum suum efficaciter vocare ac trahere; seu vera et ipsum fide donare, justificare, sanctificare, et potenter in Filii sui communione custoditos tandem glorificare decrevit, ad demonstrationem suae misericordiae, et laudem divitiarum gloriosae suae gratiae, sicut scriptum est: Elegit nos Deus in Christ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ut essemus sancti et inculpati in conspectu ejus, cum charitate; qui praedestinavit nos quos adoptaret in filios, per Jesum Christum, in sese, pro beneplacito voluntatis suae, ad laudem gloriosae suae gratiae, qua nos gratis sibi acceptos fecit in illo dilecto. Ephes. I. 4,5,6. Et alibi: Quos praedestinavit, eos etiam vocavit; et quos vocavit, eos etiam justificavit; quos autem justificavit, eos etiam glorificavit." Rom. viii. 30.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3.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4를 볼 것.
64) "Haec electio non est multiplex, sed una et eadem omnium salvandorum in Vetere et Novo Testamento, quandoquidem Scriptura unicum praedicat beneplacitum, propositum, et consilium voluntatis Dei, quo nos ab aeterno elegit et ad gratiam et ad gloriam; et ad salutem et ad viam salutis, quam praeparavit ut in ea ambulemus."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3.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4를 볼 것.
65) "Eadem haec electio facta est non ex praevisa fide, fideique obedientia, sanctitate, aut alia aliqua bona qualitate et dispositione, tanquam caussa seu conditione in homine eligendo praerequisita, sed ad fidem, fideique obedientiam, sanctitatem, etc. Ac proinde electio est fons omnis salutaris boni: unde fides, sanctitas, et reliqua dona salvifica, ipsa denique vita aeterna, ut fructus et effectus ejus profluunt, secundum illud Apostoli: Elegit nos (nos quia eramus, sed) ut essemus sancti et inculpati in conspectu ejus in charitate. Ephes. i. 4."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3-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4-25를 볼 것.
66) "Caussa vero hujus gratuitae electionis, est solum Dei beneplacitum, non in eo consistens, quod certa qualitates seu actiones humanas, ex omnibus possibilibus, in salutis conditionem elegit; sed in eo, quod certas quasdam personas ex communi peccatorum multitudine sibi in peculium adscivit, sicut scriptum est: Nondum natis pueris, cum neque boni quippiam fecissent neque mali, etc., dictum est (nempe Rebeccae), Major serviet minori, sicut scriptum est, Jacob dilexi, Esau odio habui. Rom. ix. 11,12,13. Et, Crediderunt quotquot erant ordinati ad vitam aeternam. Act. xiii. 48."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67) "Atque ut Deus ipse est sapientissimus, immutabilis, omniscius, et omnipotens: ita electio ab ipso facta nec interrumpi, nec mutari, revocari, aut abrumpi, nec electi abjici, nec numerus eorum minui potes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68) "De hac aeterna et immutabili sui ad salutem electione, electi suo tempore, variis licet gradibus et dispari mensura, certiores redduntur, non quidem arcana et profunditates Dei curiose scrutando; sed fructus electionis infallibiles, in verbo Dei designatos, ut sunt vera in Christum fides, filialis Dei timor, dolor de peccatis secundum Deum, esuries et sitis justitiae, etc., in sese cum spirituali gaudio et sancta voluptate observando."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4.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69) "Ex hujus electionis sensu et certitudine, filii Dei majorem indies sese coram Deo humiliandi, abyssum misericordiarum ejus adorandi, seipsos purificandi, et eum, qui ipsos prior tantopere dilexit, vicissim ardenter diligendi, materiam desumunt: tantum abest, ut hac electionis doctrina atque ejus meditatione in mandatorum divinorum observatione segniores, aut carnaliter securi reddantur. Quod iis justo Dei judicio solet accidere, qui de electionis gratia, vel temere praesumentes, vel otiose et proterve fabulantes, in viis electorum ambulare nolu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55.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70) "Ut autem haec de divina electione doctrina sapientissimo Dei consilio per prophetas, Christum ipsum, atque Apostolos, sub Veteri aeque atque sub Novo Testamento, est praedicata, et sacrarum deinde literarum monumentis commendata: ita et hodie in Ecclesia Dei, cui ea peculiariter est destinata, cum spiritu discretionis, religiose et sancte, suo loco et tempore, missa omni curiosa viarum altissimi scrutatione, est proponenda, idque ad sanctissimi nominis divini gloriam, et vividum populi ipsius solatium."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5.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5를 볼 것.
71)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론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어야 함과 관련하여 도르트 신경과 같은 취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예정에 관한 논의는, 비록 그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매우 혼란스러우며 위험스럽게 된다. 인간의 호기심이 금지된 사잇길로 방황하거나 높은 고지로 밀고 올라가지 않도록 억제할 방도가 없다 ... 예정을 탐구할 때 하나님의 지혜의 신성한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무책임한 확신을 가지고 이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간다면, 그는 호기심을 충족하지 못할 것이며 출구가 없는 미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 안에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것들을 절제 없이 찾아 나서는 것이나, (우리로 하여금 경이감으로 충만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해하기 보다는 경외하도록 하신), 지극히 숭고한 지혜를 영원으로부터 풀어내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러한 해악을 치유하고자 예정에 관한 모든 언급을 묻어두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암초를 피하듯이 예정에 관한 어떤 질문도 삼갈 것을 교훈한다 ...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어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진전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 성경은 성령님의 학교인데, 여기서는 알아야 필요가 있으며 알아서 유익한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며, 알아서 유용한 것이 이외는 어느 것도 교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에 관하여 성경이 밝히고 있는 그 무엇이든지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악하게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속여서 빼앗은 자와 같을 것이며, 성령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억눌러야 좋을 것을 공개해버린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을 하며 비웃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Institutes III. 21. i, iii. ( )는 글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번역하여 인용하면서 붙인 것임.
72) "Caeterum aeternam et gratuitam hanc electionis nostri gratiam eo vel maxime illustrat, nobisque commendat Scriptura Sacra, quod porro testatur non omnes homines esse electos, sed quosdam non electos, sive in aeterna Dei electione praeteritos, quos scilicet Deus ex liberrimo, justissimo, irreprehensibili, et immutabili beneplacito decrevit in communi miseria, in quam se sua culpa praecipitarunt, relinquere, nec salvifica fide et conversinis gratia donare, sed in viis suis, et sub justo judicio relictos, tandem non tantum propter infidelitatem, sed etiam caetera omnia peccata, ad declaratinem justitiae suae damnare, et aeternum punire. Atque hoc est decretum reprobationis, quod Deum neutiquam peccati authoram (quod cogitatu blasphemum est) sed tremendum, irreprehensibilem, et justum judicem ac vindicem constitui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5.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5-26을 볼 것. 한글로 옮긴 본문의 글 가운데 [ ]는 이해를 위한 보충임.
73) "Qui vivam in Christum fidem, seu certam cordis fiduciam, pacem conscientiae, studium filialis obedientiae, gloriationem in Deo per Christum in se nondum efficaciter sentiunt, mediis tamen, per quae Deus ista se in nobis operaturum promisit, utuntur, ii ad reprobationis mentionem non consternari, nec se reprobis accensere, sed in usu mediorum diligenter pergere, ac horam uberioris gratiae ardenter desiderare et reverenter humiliterque expectare debent. Multo autem minus doctrina de reprobatione terreri debent ii, qui cum serio ad Deum converti, ei unice placere, et e corpore mortis eripi desiderant, in via tamen pietatis et fidei eo usque, quo volunt, pervenire nondum possunt, siquidem linum fumigans se non extincturum, et arundinem quassatam se non fracturum, promisit misericors Deus. Iis autem haec doctrina merito terrori est, qui Dei et Servatoris Jesu Christi obliti, mundi curis et carnis voluptatibus se totos manciparunt, quamdiu ad Deum serio non convertuntur."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p. 555-56.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6을 볼 것.
74) "Quandoquidem de voluntate Dei ex verbo ipsius nobis est judicandum, quod testatur liberos fidelium esse sanctos, non quidem natura, sed beneficio foederia gratuiti, in quo illi cum parentibus comprehenduntur, pii parentes de electione et salute suorum liberorum, quos Deus in infantia ex hac vita evocat, dubitare non debe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6.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 126을 볼 것.
75) "Adversus hanc gratuitae electionis gratiam, et justae reprobationis severitatem, obmurmuranti opponimus hoc apostolicum: O hom! tu quis es qui ex adverso responsas Deo? Rom. ix. 20. Et illud Servatoris nostri, An non licet mihi quod volo facere in meis? Matt. xx. 15. Nos vero haec mysteria religiose adorantes, cum Apostolo exclamamus : O profunditatem divitiarum tum sapientiae tum cognitionis Dei! Quam imperscrutabilia sunt Dei judicia, et ejus viae impervestigabiles! Quis enim cognovit mentem Domini? Aut quis fuit ei a consiliis? Aut quis prior dedit ei ut reddatur ei? Nam ex eo, et per eum, et in eum sunt omnia. Ipsi sit gloria in saecula. Amen. Rom. xi. 33-3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p. 556. 영역은 Ecumenical Creeds and Reformed Confessions, pp. 126=27을 볼 것.
76) 이와 관련하여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uis)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In itself God's decree is unicum et simplicissimum, nor is any prius or posterius to be found in it. But as regards the things decreed the distinction is that God is said to have decreed their eventuation in the order in which they do eventuate." Johnannes Wollebuis, Christianae Theologiae Compendium (Basel, 1626), p. 19,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translated by G. T. Thomso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50 first published; 1978 reprinted), VII. 9, p. 140.
77)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lated by G. M. Giger (Phillipsburg, NJ: P&R Pub., 1992), loc. 4. q, 2. ix, p. 315.
78)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3. viii-ix, p. 317.
79) Johannes Braunius, Doctrina Foederum sive Systema Theologiae didacticae et elencticae (Amsterdam, 1688), I. ii. 9, 11,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VII. 6, p. 138.
80)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3. xiii, p. 318을 참조할 것.
81) 가정적 필연성이란, 어떤 사물이나 일이 본성 상 가변적이며 우유적이지만,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됨으로 나타나는 필연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가정(hypothesis)에 의하여 필연성이 수반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4. ii, p. 320을 참조할 것.
82)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4. vi, p. 321.
83)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영원한 불변의 작정을 제 2 원인들을 손상하지 않은 채 실행하는가와 관련한 하나님의 동주사역(concursus divinus)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6. q, 6. v-viii, pp. 512-14를 살필 것. 졸고, “개혁 신학의 구원과 성화,” 구원이후에서 성화의 은혜까지, 박영선과 브라이언 채플 외 (서울: 이레서원, 2005), pp. 117-63 가운데 한 부분에서 번역 및 설명을 볼 수 있음.
84)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4. q, 4. viii, p. 321.
85) John Calvin, Institutes, I. 16. vii, ix.
86) John Calvin, Institutes, I. 16. viii.
87) John Calvin, 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 translated by J.K.S. Reid (London: James Clarke and Co., 1961), pp. 25-26; James Greenbury, "Calvin's Understanding of Predestina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Institutes,"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54(1995), p. 128을 참조할 것. 멀러(Richard A. Muller)는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므로 죄의 조성자라는 알미니안 주장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여 준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므로 아담의 자유로운 죄의 선택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것이 결코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미리 결정이 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개혁주의 견해인 적이 없었다.” 존 프레임(John M . Frame)은 멀러를 비판하기를 멀러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작정하셨으며, 그러므로 또한 인간의 도덕적 결정을 작정하셨음을 가르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탈하였다고 쓰고 있다. 프레임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와 관련한 개혁주의 양립론(compatibilism)은 '도덕적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선결정'(divine predetermination of moral acts)를 배제하지 않는 반면에, 멀러는 인간의 도적적 행동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개혁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프레임의 이러한 비판은 멀러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멀러는 하나님의 작정이 철학적 결정론적 의미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미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즉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자유와 어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기는커녕 가능케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멀러는 이것이 시간적 차원의 존재 안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철학적 결정론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라이드(J.K.S. Reid)를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다. 곧 멀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 필연성을 갖지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미리 결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영역 안에서 그 작정을 실행하실 때에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여 도덕적 선택을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작정을 실행하실 때에 인간의 자유를 가능케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선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의 필연성이 인간의 자유의 선택과 양립될 수 있다는 개혁주의 양립론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강압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물리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곧 짐승들처럼 본능에 따라 선택이 제한이 되는 필연성으로부터 이성에 의한 선택을 하는 자유를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 자유의 두 가지 요소는 인간의 의지의 본질적인 것이므로 타락에 의하여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의지의 요소라고 개혁파는 생각한다. 따라서 개혁파는 어떤 선택의 대상을 취하거나 거부하는 자유의 선택(libertas contrarietatis; libertas specificationis)과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선택(libertas exercitii)를 인정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가 모든 필연성에 의하여 충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인간의 자유는 강압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원의 자유와 물리적, 본능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이성적 선택의 자유를 본질적인 요소로 갖지만, 그럼에도 다음의 네 가지 필연성들과는 충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즉 하나님의 의존해야하는 필연성, 이성적으로 하나의 최고의 최종적인 선택적 판단을 하였을 때에 다른 선택이 없으므로 나타나는 이성적 필연성, 어떤 유형의 행동으로 고정화 되어버릴 정도로 습성화 되어 노예적 상태로 빠져버린 도덕적 필연성, 그리고 어떤 일이 달리 일어날 수가 없이 일어남으로써 나타나는 사건적 필연성 등과는 충돌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과 같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필연성은 인간의 자유의 선택과 충돌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의 작정이나 이성의 최종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선택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리베르테리안적 중립의 자유(libertas indifferentiae)에 대해서 개혁주의는 반대를 하는 것이며, 이들에 대하여 자원의 자유(libertas spontaneitatis)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리베르테리안 중립의 자유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은 필연적이지 않다. 인간의 자유선택의 대상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개혁파는 하나님의 작정을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필연적 작정에 따라 실행되는 가운데 있는 인간의 자유는 그 선택적 자유를 자유롭게 누린다는 양립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원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원의 자유는 선택과 자원성이라는 두 요소를 본질로 갖는다. 여기서 선택이란 요소는 짐승과 같이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고려에 의하여 기쁘게 여겨지는 것을 행하였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이며, 자발성이란 외적인 강압이 없이 행하였다는 의미에서의 자발성이다. 개혁파는 이 두요소를 합하여 이성적 자원성(rational willingness)이라 일컬으며, 이것은 자유의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요소는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는 인간의 자유인격에 속한 본질적인 것들이다. 개혁파는 이러한 인간의 도덕적 선택의 행동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에도 여전히 시간 안에서는 자유로운 것임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미리 결정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시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개혁파는 앞서 말한 설명에 근거하여 견해를 밝히고, 리베르테리안 자유를 주장하는 항론파 등의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미리 결정이 되었으나 여전히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므로 아담의 자유로운 죄의 선택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것이 결코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미리 결정이 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개혁주의 견해인 적이 없었다.”라는 멀러의 설명은 개혁파의 교훈에 완전히 일치하며, 프레임은 의문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것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개혁주의가 인간의 자유선택의 제한성을 말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의 영적 선택과 관련한 것이다. 타락 이후에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는 영적 선택과 관련하여 선을 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거스틴을 따라서 죄를 피할 수가 없는 상태, 곧 non posse non peccare의 상태가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적이며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의 선택마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이 이러한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그의 작정의 실행 안에서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즉 개혁파가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 자유의 선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 자유의 요소와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선한 - 도덕적이거나 일상 생활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 행동을 어떠한 영향에도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다. 자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타락 이후에 인간에게 자유가 있느냐고 할 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의 도덕적 필연성과 관련이 된다, 인간이 타락하여 부패한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영적 의미에서의 악한 습성이라는 필연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는 타락한 이후 중생하지 못한 인간이 영적 선에 대하여 중립의 자유(libertas indifferentiae)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렇지만 개혁주의는 이러한 전적 부패로 인한 영적 의미에서의 악한 습성으로 인한 필연성은 도덕적 필연성과 같은 종류의 것이므로 인간의 자유와 충돌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원의 자유에 따라서 죄를 자유로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타락 이후에 인간은 영적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전적 부패와 무능력에 갇혀 있는 도덕적 필연성 아래 놓여져 있지만 타락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개혁파의 설명이다.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70; John M. Frame, No Other God: A Response to Opne Theism, p. 123을 참조할 것.
88)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loc. 3. q, 13. ii, p. 213.
89) Gisbertus Voetius, Selectarum Disputationum theologicarum Pars. I-V (Utrecht, 1648-1669), I, p. 257,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V. 17, p. 79.
90) Gisbertus Voetius, I, p. 336, quoted from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V. 17, p. 80.
91) 웨슬리와 그의 부흥 운동에 끼친 알미니안 예정론의 이해의 영향에 대해 알기 원하면, Emmanuel D Mbennah and J. M. Vorster, "The Influence of Arminian Conception of Predestination on the 18th-century Wesleyan Revival," Studia historiae ecclesiasticae 24 (1998), pp. 161-87을 볼 것.
92) Brian A. Gerrish, "Sovereign Grace: Is Reformed Theology Obsolete?," Interpretation 57(2003),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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