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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나는 충분히 성경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충분히 성경을 따르고 있는가? 

노승수 목사

2007년 4월 3일 화요일로 기억이 된다. 반포대교 북단에 있는 두란노서원 맞은 편에 있는 서호교회에서 두란노 주최로 가정사역 강사 양성 스쿨이라는 강좌가 열린 적이 있다. 3월 20일 부터 4월 12일까지 총 8회의 강의 중에서 5회 강좌, "감정 이해"라는 강의를 맡아서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날이 4월 3일 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벌써 2년이 넘은 일을 새삼스럽게 기억해내고 이렇게 몇자 적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저녁 7시 부터 10시까지 총 3시간의 강좌였다. 난 이 감정이해라는 강좌를 전반부는 신학적 관점에서 후반부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감정이해를 나누어 설명했다. 
그런데 놀라운 경험은 전반부 신학적 감정 이해를 다루었을 때,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이 격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격렬함은 뜨거운 은혜를 체험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반발 그 자체 였다. 내가 놀라는 점은 이 부분 아니라 전반부와 후반부의 극명한 상반된 반응 때문이었다. 10분의 Break Time을 갖고 후반부 심리학적 인간이해를 강의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환호 그 자체 였다는 것이다. 
전반부에 신학적 감정이해의 강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는데, 하나님에게 사람과 같은 성정(Passion)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과 같은 성정을 가지시는 분이 아니다. 성정은 인간의 변덕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치 못하다. 흔히 불변성은 immutability라고도 쓰이지만 impassibility로 쓰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께는 사람과 같은 고통을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적으로도 성부수난설은 이단적인 사상으로 분류된다. 흔히 이 사상은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이단인 양태론과도 맞물려 있다. 두란노에서 나온 곡 중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라는 곡은 대표적 신학적 오류를 담은 복음송이다. 그 가사를 잠깐 살펴보면,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이라고 묘사한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은 우리가 흔히 아는데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설혹 신약의 개념을 적용해서 그리스도로 이해하더라도 영단번에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의 진술과도 상반된다.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몸을 입고 계신 그리스도가 고통 가운데 있다는 사상은 성경적이지 않다. 많이 양보해서 이 진술은 비유적으로 이해 신인동형적(anthropomorphism)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사실 이 부분을 신인동형적으로 이해하는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많이 양보해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다고 가정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많은 오해를 야기하는 이런 가사들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비성경적이며 비신학적인 노래들이 버젓이 교회 가운데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 강의의 내용을 듣고 거기 앉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반발한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그럴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지극히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 교회가 얼마나 신학적으로 무지한가?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역사적 교회의 교리들로부터 전혀 배우지 않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목격했다. 내가 더 참담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이후 진행된 심리학적 감정이해의 강의를 듣고 보인 참석자들의 반응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자료를 요청하는 사람, 따로 질문하는 사람, 명함을 요청하는 사람, 그들 모두에게 답을 해주는데, 강의 후에도 30여분을 더 할애해야 했다. 이 사실이 나를 더 참담하게 했다. 
결국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감동을 좇아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성경과 교회사가 증거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이 택한 그들만의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즈음에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적인가?" 또 "우리는 충분히 성경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사용한다해서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경계시에 천착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내부의 감정과 경험에 천착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객관적 계시와 구원으로부터 우리 내적 체험으로 경도되고 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은사주의와 10년만에 다시 화려한 부활을 하고 있는 천국,지옥체험, 입신체험들은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성경이 금하는 강신술이다. 
최근 상담을 하면서, 이런 생각은 더 강하게 든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듣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선택적 지각을 통해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을 발췌해낸다. 예컨대, 어린시절 제대로 된 인정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어떤 자매의 경우, 그의 하나님은 늘 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되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용서하신다는 메시지는 그에게 경험되지 않을 뿐더러 그저 문자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객관적 성경 계시의 권위를 인정하기 보다 우리 안에 습관처럼 자리잡은 내적 체계로서 나의 가치관의 목소리를 더 청종하고 그것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왜 칼빈이 인식론적 전제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을 함께 전제했는지를 생각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대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은 필연 나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인식론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사람의 하나님은 성경 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닐찌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너무도 많이 하나님께 투사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소요리를 보면, 십계명의 제 2 계명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오용이라고 해석한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면서, 자신들의 애굽의 문화를 투영해낸 송아지 신상을 만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하나님상들을 우리 신앙 생활 곳곳에 마구잡이로 투영해내고 있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 외엔 없다. 바른 신학을 배워야 한다. 역사적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을 잘 익혀 배워야 한다. 전도서의 교훈처럼 해아래 새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많은 고민들은 이미 우리 교회사 속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대부분 고민했던 일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지혜를 배워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속화에 있다. 신앙고백을 배우는 일에는 등한히 하고, 세속적인 것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데는 너무나 발이 빠르다. 이제 이 어리석은 일들을 그치고 역사적 교회와 성경으로부터 겸손히 배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