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해석의 현대적 적용
노승수 목사
칼빈은 중세 사중해석을 전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리처드 멀러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어거스틴의 이 해석을 일정 부분 계승하는 측면이 강했다.
초대 교부들은 특별히 기독론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했고 그런 이유로 알레고리가 과다하게 등장하는 폐해를 빚었다. 칼빈은 이런 부분을 교정하면서도 실제로 이 사중해석을 받아들였다. 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본문의 자연스런 의미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성경 전체가 관조하는 메시지를 길어내는 해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무분별한 알레고리는 걷어내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성경의 원래적 의미를 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중세의 사중해석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 사중해석은 어거스틴의 유산이다. 신망애 편람을 통해서 믿음, 소망, 사랑을 중심한 해석을 펼쳤고 루터는 어거스틴의 이런 전통을 받아들여 그의 소요리문답을 이 구조를 따라 만들었다. 교리문답의 구조라는 것이 성경 해석의 틀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해이기도 하다. 어거스틴은 본문이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바, 우리가 믿어야 할 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바, 우리가 소망해야 할 바에 따라 본문을 사중적으로 해석했다.
문자적 의미는 문법적이며 역사적 의미를 뜻했고 믿어야 할 것은 기독론적 의미로 알레고리적 요소를 지녔고 소망해야 할 것은 종말론적 의미로 삶을 당면한 성도의 기도와 자세를 보여주었으며 사랑해야 할 것은 교회론적 의미로 성도의 윤리적 당위를 보여주었다. 이런 구조를 따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믿음을 사도신경으로 소망을 주기도문으로 사랑을 십계명으로 풀기도 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구조는 루터의 소요리 문답의 구조이기도 하다. 성경은 복음을 진술하는 책이며 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 소망 사랑의 구조를 따라 전체 성경을 얼개로 얽어낸 것이다.
이는 현대적으로는 여러 분야로 확장해서 해석적 적용이 가능하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믿어야 할 바는 로고스, 소망해야 할 바는 파토스, 사랑해야 할 바는 에토스와 연관 지을 수 있으며, 근대로 오면 칸트의 truth, good, beauty가 개화기 일본풍의 번역을 통해서 진선미로 번역되었다. 칸트에게서 truth는 순수 이성에 의한 진리,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에 해당하고 good은 실천 이성에 의한 윤리 곧, 에토스에, beauty는 파토스에 해당한다. 칸트에 의하면, 진리는 이성에, 사랑은 윤리에, 아름다움은 감정에 기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선미를 따라서 믿어야 할 바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소망해야 할 바는 신앙의 자태로서 종말론적 삶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야 할 바는 신자의 윤리로서 선행과 착함으로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더 확장해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소망은 성령에 관한 것으로 사랑은 성부에 관한 것으로 연관 지을 수 있다. 강복선언으로 사용되는 고린도후서 13;13은 이런 국면을 잘 보여준다. 신약은 100여 곳이 넘는 곳에서 성부는 사랑과 연관을 짓고 그리스도는 은혜, 곧 선물로 주어진 믿음과 연관을 짓는다. 성령은 이렇게 얻은 구원의 장래적 보증, 곧 소망과 연관을 짓는다. 중세적 사중해석은 오늘날 설교를 풍성하게 해줄 많은 요소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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