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의사소통 VS 불건강한 의사소통
노승수 목사
1. 불건강한 의사소통
①자신의 감정을 무시한다.
②자신의 감정을 계속 부정한다.
③반박할 자료에 마음을 집중한다.
④냉정을 되찾아 자신의 말이 앞뒤가 안 맞으면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린다.
⑤감정에 복받쳐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자신의 감정상태를 반성 하거나 통합시키려 하지 않는다.
2. 건강한 의사소통
①자신의 감정을 안다.
②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인다.
③자신의 감정을 조사한다.
④자신의 감정을 느낌으로 표현한다.
①자신의 감정을 안다.
②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인다.
③자신의 감정을 조사한다.
④자신의 감정을 느낌으로 표현한다.
- 존 포웰 -
우리는 자신이 매우 이성적이라고 착각한다. 특히 이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부적절한 말이다. 한국사람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모든 생각의 기초는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완전한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매우 연약한 상태로 지적으로 매우 미력한 상태로 태어난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아이가 엄마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의 돌보는 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고 이것은 아이가<정신적으로 출생하게 되는 가장 첫 단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 때 놓여지는 기초는 절대적으로 감정적인 것이다. 우리 생각의 가장 깊은 뿌리에도 이 감정이 놓여 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정서적 분리를 어려서 교육을 받기보다 지나친 의존과 밀착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감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의존과 밀착이라는 용어에 현혹되는 사람이 혹 있을까 하여 사족을 달자면, 의존과 밀착은 대단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서운해지고 화를 내고 상대가 자신의 의사나 의견을 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나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이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격발이 된다면, 장담컨대, 이는 의존과 밀착의 징후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성숙이며 성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 부모의 상당한 개입이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이 해낸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기보다 대체로 불만족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눈높이는 어려서부터 그 부모들에 의해서 높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 높은 시선은 감정 곳곳에 깃들어 있고, 이것은 의사를 교환하는 토론이나, 대화에서 곧잘 그 위력을 나타낸다. 우리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타협이나 상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제 뉴스를 보니 대기업이 900% 이상 매출 신장하는 동안 중소기업은 적자 출혈 납품을 해왔다고 한다. 이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우리 문화가 얼마나 상생적 사고가 힘든 문화인지를 보여준다. 세상에 900% 신장을 하는 동안 자신의 파트너의 형편이 안 살펴졌다는 말인가? 그렇게 많은 부를 거두어 들이면서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업의 동반자가 어떤 형편에 있을지 몰랐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는가? 그러면서 늘 사업하기 힘들다고 한다. 또 자신들이 무슨 대단하게 한국경제를 위해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애국자인양 한다.
내가 볼 때, 그들은<갑>의 지위를 남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당하게<을>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착취하여서 이윤을 창출한다. 그들은<경제적 흡혈귀>일지도 모른다. 너무 심한가? 우리 사회는 점차 양극화가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그 양극화는 언젠가? 한국 사회와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다. 예전에 광수생각이란 카툰에 이런 그림이 있었다. 앞 못보는 장님과 앉은뱅이가 구걸을 서로 협력해서 했다. 그러자 전보다 수입이 더 좋아졌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장님이 앞을 못본다는 이유로 이익을 정상적으로 나누지 않고 자기가 더 많이 먹었다. 그러니 장님은 점점 피골이 상접해가고 앉은뱅이는 피둥피둥 살이졌다. 늘 장님에 엎혀서 구걸을 해야 했던 앉은뱅이, 그에게 장님은 누구보다 절실한 파트너였음에도 이익에 눈이 멀어 불공정을 일삼은 것이다. 결국 장님은 영향실조인데, 게다가 전보다 더 피둥피둥 살진 돼지 앉은뱅이를 업어야 했다. 그러니 결국 장님은 못견디고 죽고 말았다. 결국 앉은뱅이의 수입도 줄어들고 장님과 같은 종말을 맞는다. 이 한 컷의 카툰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관계를 너무나 잘 풍자해준다. 경제만 그런가? 정치, 교육, 우리 문화 전반이 이런 형편이다.
실제로 초등 교사 중의 상당수는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선생님께 개진하면, 이것을 버릇 없는 것으로 여긴다. 대드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발표하는 것을 선생님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못견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창의적인 사람으로 자라겠는가? 중국은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한다. 어느 선교사의 자녀가 중국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꽃밭을 그리라고 했단다. 그런데 아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푸른 하늘을 그렸다. 하늘을 정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미술을 지도하는 선생은 그 아이의 그림을 찢어 버리고 다시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 교육 현실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월드컵 축구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적으로 축구를 잘하는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나라들이다. 축구에서 열등한 나라의 특징은 자신의 의사 개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거나 제한 받는데, 그것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이든지, 그 사회나 문화가 가진 집단 정신에 의해서이든지 이런 제약을 받는 나라들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우리나라 축구는 항상 두 가지 문제를 지적 받아 왔다. 골 결정력, 그리고 수비 불안정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수비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실수나 잘못은 감독으로부터 질책 정도가 아니라 온국민의 질타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창의적 플레이가 아니라 욕을 안 먹는 일이다. 골 결정력도 마찬가지이다. 왜 골대 앞에만 가면 얼어붙는가? 국민의 기대라는 중압감 때문이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용사처럼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군인처럼 그런 비장미가 넘쳐난다. 이런 압력들은 자유로운 의사 교환을 절대적으로 방해한다. 그리고 이런 압력은 내부에 정체된 채로 남아 있지 못한다. 그것은 필연 부정적인 표현들로 들어나는 것이다. 사실 국민을 탓할 것도 없다. 그들 역시 이런 사회적 압력의 희생자이고 자신이 받은 내적 압력을 해소할 공공의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쁠 뿐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의사소통에 결정적 장애물이다. 한국 사람의 의사소통에 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내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항상 생략되어 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말하면 될텐데, 늘 상대를 조정하고 조작하는 표현들을 쓴다. 그럼 그것에 발끈하게 되고 그래서 또 공격적 언사를 되풀이 한다.<내가 뭘 원하는 지를 말하고 그것이 나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상대의 선택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나는 곧잘 건강한 의사소통을 탁구에 비유한다. 탁구는 한 개의 공과 한 개의 테이블, 그리고 두 명의 선수가 진행하는 스포츠이다. 테이블은 일종의<룰>을 의미하고 공은 일종의<의제>를 상징한다. 탁구가 정상적으로 플레이가 되려면, 한 개의 공이 오고 가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의사 불통의 경우, 상대의 말을 잘 받지 않는다. 그 공은 뒤로 흘려버리고 내 공을 다시 날린다. 그러니 테이블 위에 공이 100개 이상 난무하게 되고 곧 시합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부부싸움>과<정치토론>이다. 남자가 두 세사람만 모이면 정치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대부분은 결론이 없이 끝이 난다. 부부가 마음이 상해서 다툼을 할 때도 대체로 결론이 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서로 마주 칠 수 없는 철길처럼 그렇게 평행선을 그린다. 서로 의견을 도대체가 접근할 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이 정작 무엇을 원하는 지 곧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의제>보다 사실 논의하는 방식이 서툴기 때문이다. 탁구공을 잘 넘기는 기술은 상대방의 태도에 대해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요구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요구는 사실 내편에서 변화가 없이 상대의 변화만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는 적어도 나 자신이 어떤지를 살펴보게 한다. 그 원함은 때로 상대의 욕구나 요구와 상충할 것이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탁구로 치자면 가장 기본적인 룰 곧 탁구라켓에 해당한다. 라켓을 쥐고 공을 넘겨야지 맨손으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늘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이성적이며 지성적이 되고 싶은가? 먼저 내 감정부터 제대로 검토해서 살펴야 한다. 내 감정에 대해서 보다 온건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어느 정도 탁구시합(?)을 할 수 있는 기본적 매너나 기본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때 놓여지는 기초는 절대적으로 감정적인 것이다. 우리 생각의 가장 깊은 뿌리에도 이 감정이 놓여 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정서적 분리를 어려서 교육을 받기보다 지나친 의존과 밀착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감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의존과 밀착이라는 용어에 현혹되는 사람이 혹 있을까 하여 사족을 달자면, 의존과 밀착은 대단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서운해지고 화를 내고 상대가 자신의 의사나 의견을 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나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이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격발이 된다면, 장담컨대, 이는 의존과 밀착의 징후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성숙이며 성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 부모의 상당한 개입이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이 해낸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기보다 대체로 불만족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눈높이는 어려서부터 그 부모들에 의해서 높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 높은 시선은 감정 곳곳에 깃들어 있고, 이것은 의사를 교환하는 토론이나, 대화에서 곧잘 그 위력을 나타낸다. 우리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타협이나 상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제 뉴스를 보니 대기업이 900% 이상 매출 신장하는 동안 중소기업은 적자 출혈 납품을 해왔다고 한다. 이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우리 문화가 얼마나 상생적 사고가 힘든 문화인지를 보여준다. 세상에 900% 신장을 하는 동안 자신의 파트너의 형편이 안 살펴졌다는 말인가? 그렇게 많은 부를 거두어 들이면서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업의 동반자가 어떤 형편에 있을지 몰랐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는가? 그러면서 늘 사업하기 힘들다고 한다. 또 자신들이 무슨 대단하게 한국경제를 위해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애국자인양 한다.
내가 볼 때, 그들은<갑>의 지위를 남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당하게<을>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착취하여서 이윤을 창출한다. 그들은<경제적 흡혈귀>일지도 모른다. 너무 심한가? 우리 사회는 점차 양극화가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그 양극화는 언젠가? 한국 사회와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다. 예전에 광수생각이란 카툰에 이런 그림이 있었다. 앞 못보는 장님과 앉은뱅이가 구걸을 서로 협력해서 했다. 그러자 전보다 수입이 더 좋아졌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장님이 앞을 못본다는 이유로 이익을 정상적으로 나누지 않고 자기가 더 많이 먹었다. 그러니 장님은 점점 피골이 상접해가고 앉은뱅이는 피둥피둥 살이졌다. 늘 장님에 엎혀서 구걸을 해야 했던 앉은뱅이, 그에게 장님은 누구보다 절실한 파트너였음에도 이익에 눈이 멀어 불공정을 일삼은 것이다. 결국 장님은 영향실조인데, 게다가 전보다 더 피둥피둥 살진 돼지 앉은뱅이를 업어야 했다. 그러니 결국 장님은 못견디고 죽고 말았다. 결국 앉은뱅이의 수입도 줄어들고 장님과 같은 종말을 맞는다. 이 한 컷의 카툰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관계를 너무나 잘 풍자해준다. 경제만 그런가? 정치, 교육, 우리 문화 전반이 이런 형편이다.
실제로 초등 교사 중의 상당수는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선생님께 개진하면, 이것을 버릇 없는 것으로 여긴다. 대드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발표하는 것을 선생님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못견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창의적인 사람으로 자라겠는가? 중국은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한다. 어느 선교사의 자녀가 중국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꽃밭을 그리라고 했단다. 그런데 아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푸른 하늘을 그렸다. 하늘을 정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미술을 지도하는 선생은 그 아이의 그림을 찢어 버리고 다시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 교육 현실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월드컵 축구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적으로 축구를 잘하는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나라들이다. 축구에서 열등한 나라의 특징은 자신의 의사 개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거나 제한 받는데, 그것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이든지, 그 사회나 문화가 가진 집단 정신에 의해서이든지 이런 제약을 받는 나라들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우리나라 축구는 항상 두 가지 문제를 지적 받아 왔다. 골 결정력, 그리고 수비 불안정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수비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실수나 잘못은 감독으로부터 질책 정도가 아니라 온국민의 질타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창의적 플레이가 아니라 욕을 안 먹는 일이다. 골 결정력도 마찬가지이다. 왜 골대 앞에만 가면 얼어붙는가? 국민의 기대라는 중압감 때문이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용사처럼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군인처럼 그런 비장미가 넘쳐난다. 이런 압력들은 자유로운 의사 교환을 절대적으로 방해한다. 그리고 이런 압력은 내부에 정체된 채로 남아 있지 못한다. 그것은 필연 부정적인 표현들로 들어나는 것이다. 사실 국민을 탓할 것도 없다. 그들 역시 이런 사회적 압력의 희생자이고 자신이 받은 내적 압력을 해소할 공공의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쁠 뿐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의사소통에 결정적 장애물이다. 한국 사람의 의사소통에 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내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항상 생략되어 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말하면 될텐데, 늘 상대를 조정하고 조작하는 표현들을 쓴다. 그럼 그것에 발끈하게 되고 그래서 또 공격적 언사를 되풀이 한다.<내가 뭘 원하는 지를 말하고 그것이 나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상대의 선택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나는 곧잘 건강한 의사소통을 탁구에 비유한다. 탁구는 한 개의 공과 한 개의 테이블, 그리고 두 명의 선수가 진행하는 스포츠이다. 테이블은 일종의<룰>을 의미하고 공은 일종의<의제>를 상징한다. 탁구가 정상적으로 플레이가 되려면, 한 개의 공이 오고 가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의사 불통의 경우, 상대의 말을 잘 받지 않는다. 그 공은 뒤로 흘려버리고 내 공을 다시 날린다. 그러니 테이블 위에 공이 100개 이상 난무하게 되고 곧 시합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부부싸움>과<정치토론>이다. 남자가 두 세사람만 모이면 정치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대부분은 결론이 없이 끝이 난다. 부부가 마음이 상해서 다툼을 할 때도 대체로 결론이 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서로 마주 칠 수 없는 철길처럼 그렇게 평행선을 그린다. 서로 의견을 도대체가 접근할 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이 정작 무엇을 원하는 지 곧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의제>보다 사실 논의하는 방식이 서툴기 때문이다. 탁구공을 잘 넘기는 기술은 상대방의 태도에 대해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요구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요구는 사실 내편에서 변화가 없이 상대의 변화만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는 적어도 나 자신이 어떤지를 살펴보게 한다. 그 원함은 때로 상대의 욕구나 요구와 상충할 것이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탁구로 치자면 가장 기본적인 룰 곧 탁구라켓에 해당한다. 라켓을 쥐고 공을 넘겨야지 맨손으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늘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이성적이며 지성적이 되고 싶은가? 먼저 내 감정부터 제대로 검토해서 살펴야 한다. 내 감정에 대해서 보다 온건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어느 정도 탁구시합(?)을 할 수 있는 기본적 매너나 기본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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