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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겸손은 어디서

그럼 무엇이 우리를 겸손하게 할까? 아래 표현은 내 경험 상으로도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 개혁주의의 장점으로 이성적 당위를 따라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겸허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가장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며 이웃과 지체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뭐가 문제일까? 내 생각에는 칼뱅이 정초한 인식론적 기초가 균형을 잃는 데서 발생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의 균형 말이다. 개혁주의자라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론적인 사고를 하며 그 까닭에 사람의 삶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지은 죄가 하찮을지 몰라도 그리스도가 피값주고 사신 사람이 하찮지는 않다. 자기 하찮음 때문에 상승의 추동이 작용해서 그 하찮음의 보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기 무기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반응한 결과라고 본다. 인식에서는 똑같은 인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분상승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주권과의 동일시 때문에 타인을 하찮게 보게 된다. 인간의 조건은 무기력의 하강을 깊이 경험하는데서 겸손을 낳는다. 대부분의 안하무인은 이론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뿐 혹은 자기 정당화로서 받아들일 뿐 진정한 의미의 하강을 경험하여 견디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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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앞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무력하고,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선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사람이 저절로 겸허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내 경우 초창기에는 안하무인의 날들이 겸허의 날들보다 훨씬 많았다.

_ 조 리그니(손현선 옮김), 땅의 것들,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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