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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구원 얻는 밭(마 13:18-23)

구원 얻는 밭(마 13:18-23) 

노승수 목사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세 종류의 밭은 분명 구원을 얻지 못한 밭입니다. 첫째 길가밭은 사단이 듣자마자 빼앗는 자로 이런 사람을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니 이는 당연히 불신자라 하겠습니다. 사실 이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 확연히 불신자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결코 어떤 사람도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역이란 원래부터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이 복음으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는 이미 그 복음 안에 세상적으로 볼 때 부끄러울 만한 것이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처형하는 십자가와 그에 달려 죽은 이를 속죄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일이 당시 문화 관념상 쉽게 납득되는 일이었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결과가 무엇이냐면, 복음의 수치스런 부분을 감추고 누구나 쉽게 납득할만한 모습으로 복음을 대중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증거인 셈입니다. 이런 엉터리 복음이 전해지자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두번째와 세번째 밭의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길가밭은 대놓고 불신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민과 갈등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밭은 우리에게 심각한 갈등을 안겨줍니다. 이 둘째 돌밭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다고 합니다. 특징은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오면 그대로 넘어지는 자니 이는 구원얻는 자가 아닌 것이지요.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대중적으로 부끄럽지 않게 만듦으로 인해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은 자신들이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사실로 인해 이들 스스로 신자라고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경우들은 주로 교회가 핍박 가운데 있을 때,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즉,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될 때에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쁨은 하나님을 인한 기쁨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인한 기쁨입니다. 신앙과 영성의 추구의 목적이 자기 만족에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음으로 결실치 못하는 것이지요. 
셋째, 가시밭 역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는 것이 가시가 되어 기운을 막아서 결실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번영의 시기에 주로 등장하는 유형입니다. 염려는 신앙의 치명적 독입니다. 물질의 유혹 역시 신앙의 치명적 독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신앙이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임을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이런 자기 개발적 성격의 신앙 추구는 결국 자기 만족을 인해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사실 요즘 이런 신자를 가장한 불신자가 교회에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결코 자기추구를 통해서는 결실하는 신앙 곧 구원얻는 신앙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표준은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교회 안에 '신비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대체로 먹고 살기 괜찮아지면 사람들 마음에 공허함이 생기면서 그 공허를 메꾸기 위한 영적 추구들이 나타날 때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 영적 암흑기는 경제적 번성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자기 만족적 신앙이 주로 수도원 운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 운동의 전형적 특징이 신비주의이라는 것이지요. 신비주의는 다른게 아닙니다. 말씀에 표준을 두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나 내적체험들에 신앙의 표준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우리의 본성은 결코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심령의 독소들 곧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결국 중세의 개혁을 기치로 걸었던 수도원을 부패로 이끈 것입니다. 수도원의 은밀성은 이와같은 범죄를 더욱 부추기게끔 했습니다. 
이 네가지 밭 중에 결실하는 밭은 옥토 밭 하나입니다. 어떻게 결실합니까? 말씀 때문에 결실하지요. 결국 말씀이 없이는 결실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듣고 깨닫는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인내로 지키어 결실하는 자'(눅 8:15)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을 위한 은혜의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사용하면 곧 은혜의 수단이 됩니까? 기억하십시오. 앞의 두가지 밭 역시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일 곧 듣고 깨닫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성령께서만 하시는 일로, 이를 흔히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가장 중대한 사역 중에 하나이지요. 중생 역시 성령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 역시 성령의 사역입니다. 나는 참으로 결실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나중에 슬피울며 이를 갈며 내어 쫓길 자입니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