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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마 12:22-30)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마 12:22-30) 

노승수 목사

[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전체적으로)
사실 어제와 오늘 본문은 9:27-34의 내용의 확대처럼 보입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패턴처럼 보이는데요. 게다가 마태복음의 첫 강화인 산상수훈(5-7장)이 끝나고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는 제일 끝 부분에 이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장에 두 번째 강화인<사도 파송 강화>가 있고 또 예수님의 사역들을 소개했고, 이제 그 사역 소개가 끝나는 장면입니다. 13장에 들어가면 세 번째 강화인<천국강화>가 등장하기 때문인데요. 앞 부분에서는 귀신의 왕을 빙자한다고(마 9:34) 했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바알세불의 이름을 언급한 점(마 12:24), 앞에서는 귀신들려 벙어린 된 자(9:32)였다면, 여기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12:22)를 고쳐주시는 사건이 빌미가 되어 시비가 붙습니다. 약간의 점증이 나타나는데요. 이는 영적 소경이고 벙어리이면서 백성의 인도자(마 23:16)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그와 같은 신앙을 표방하는 이들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이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마 23:13)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23장에서 직접적으로 이 바리새인들을 '소경된 바리새인들'(마 23:26)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들의 영적인 어두운 눈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꼭 자기 수준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아동들은 나 아닌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지도가 미숙합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샐리 앤 테스트>라는 것 있습니다. 샐리와 앤이 한 방에 있었습니다. 샐리가 인형을 유모차에 예쁘게 올려놓고 방을 나옵니다. 뒤에 남은 앤은 유모차에서 샐리의 인형을 자신의 상자에 숨깁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샐리는 방에 들어와서 어디를 가장 먼저 뒤져 볼까요? 정답은 유모차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 4 세 미만의 아이들은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앤에게 이 사실을 물으면 상자속을 뒤져 볼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자신과 타인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지금 바리새인들의 이 진단 역시 매우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귀신을 쫓아내어 벙어리되고 소경된 자를 고치는 사역을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쫓아내지 못한다고 진단을 했을까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을 하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예수님은 '저희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리새인들에게 반문을 하시지요? 27절인데요.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도 꽤 귀신을 많이 쫓아내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축출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진단을 하면 결국 자신들의 제자들의 축사 사역 역시 귀신의 역사라고 말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의 '이단 교서'(2권, 4:2)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사술(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는 습관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불의 도움에 의해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사역이 귀신의 역사라고 주장하자니 자신들의 사역도 귀신의 역사라 말해야 하고 귀신의 역사가 아니라고 하자니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사역을 귀신의 역사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보여준 꼴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23장에 가면 나오겠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듣는 이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사 사역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절에 수도가 높은 승려들도 축사를 합니다. 세계 유수 종교들 가운데 다 축사하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TV에 다큐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편인데요. 금요일 밤에 MBC에 '아마존의 눈물'이란 프로를 했습니다. 3부가 불타는 아마존이었는데, 도시로 나갔던 원주민 추장이 말기 암환자가 되어 부족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주술사였던 아버지가 주술 의식을 매일 행하고 나무 가지를 다려 먹고 말기 암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해와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냉엄한 판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또 한 가지 결정적 장면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 마다 이 논쟁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 장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표현 후에 바리새인들의 귀신의 왕을 빙자했다는 맹비난이 쏟아 졌습니다. 1 장 이후 9:27에 처음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자마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비난을 했고, 그 이후 두 번째로 10장의 사도 강화 이후 예수님의 사역 이후에 벙어리되고 소경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사건 이후에 무리가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하는 장면과 더불어 이 바리새인들의 '귀신의 왕' 시비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강화>와 예수님의<사역>을 번갈아 가면서 설명하는데, 그 마지막 장면에 지금 이 '다윗의 자손'이란 증언과 함께 갈라지는 백성들의 각기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이 사람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음을 보여줍니다. 매일성경의 난하주에는 '이는 다윗의 자손일 수 없어 그렇지?'로 부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원의에 가깝다고 직역을 해두었네요. 
아무튼 '다윗의 자손'은 마태복음의 강조점이라고 1장을 강해하면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과 언약, 그리고 그 조상됨에서 앞서 있지만 마태복음은 다윗을 앞세웁니다. 이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곧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변론을 하시는 장면에서 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성격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황폐하고 동네가 서지 못할 것이다.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고서 스스로 분쟁하면서 어떻게 나라가 서겠느냐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스스로 분쟁하는 목적이 무엇이라 말이냐? 그러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곧 성령의 나라가 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친다는 약속 역시 이 성령의 약속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 역사 속에 나타난 경륜이었습니다. 
어제도 잠깐 언급한 대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신고로' 즉, 십자가의 지시지 않으신고로 아직 성령이 저희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요 7:39). 그래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은사의 강림이 아니라 심판의 역사로서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단회적 사건이듯이 '오순절 성령 강림' 역시 이와 같은 문맥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약속하시고 선물로 주시는 그 이가 지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귀신들을 쫓아 내는 것이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들 중에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1차적 성취는 성령강림으로부터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현격하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귀신들이 쫓겨 나가게 되는 것이라면 이미 천국에 믿음으로 침노하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장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표적을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귀신의 왕'의 역사로 이해하는 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 곧 사단을 결박하지 않고서야 그 집의 세간살이를 늑탈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와 같은 사역의 이미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나라가 코 앞에 와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앞서 다윗의 자손이란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의 상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의 오심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말씀의 실체이시며 요체이심으로 곧 말씀에 의한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사역을 한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사역이 아닙니다. 신앙의 유일무이한 표준은 곧 성경인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기에 힘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본문 마지막 절은 이 사이 곧 '다윗의 자손'이라 여기는 이와 '귀신의 왕을 빙자하는 자'로 여기는 이, 사이에 중립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편에 속하지 않으면 다른 편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주를 따르는 자입니까?



2010.01.31 0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