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불신앙의 세대와 믿음의 가족(마 12:38-50)

불신앙의 세대와 믿음의 가족(마 12:38-50) 
노승수 목사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1. 요나의 표적 외에는 (38-42)
오늘 본문도 귀신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벙어리되고 소경된 자의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일어나자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와 같이 한다고 비난했던 그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비난에 대해 예수께서 그럼 너희 제자들은 누구를 빙자해서 귀신을 쫓아내느냐?로 바리새인들이 더 할 말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을 힘입어 귀신이 나간 것이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임박하였음을 시사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인자를 훼방하는 것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나무의 열매임으로 말에 의한 악의적 훼방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사건 다음 본문이 오늘 본문입니다. 게다가 38절의 '그때에'는 시간부사절로 특히 마태복음에서 거의 접속사처럼 사용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의 몇 사람이 '말하되'라고 되어 있는데요. '말하되'라는 단어는 '대답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앞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언급 이후에 바리새인들의 대답형식의 질문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발 물러선 것이지요. 스스로 올무를 놓은 격이어서 비난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다는 비난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돌아왔고, 게다가 주님께서 성령 훼방죄까지 언급하신 마당에 더 이상 억지 주장을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질문이 이렇게 유연해진 것이 이들에게 믿음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질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합니까?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방금 벙어리되고 소경된 자의 귀신을 쫓아내고 한 사람을 성하게 한 놀라운 이적을 목격했습니다. 또 여러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는 웅성거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확실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 표적은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메시야는 자기 백성이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일으켜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 16:1, 23:3,30, 고전 1:22). 그런데 이들은 충분히 메시야의 표징이 될만한 이적을 보고도 악의적으로 표징을 구하고 이전에 있었던 벙어리되고 소경된 자의 귀신이 나가는 사역을 폄훼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한 일은 자신들도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메시야의 표징에 속하지 않는다 뭐 이런 식인 것이지요? 마치 모세가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는 표적을 보이자 애굽의 술사들도 이와 같이 행함으로 바로가 마음을 강퍅하게하고 악함을 버리지 않은 것과 유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예루살렘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기 위해서 보였던 10가지의 표적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그런 유의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이는 이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치유의 놀라운 이적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불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같은 불신앙에 대해 주님은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돌처럼 굳어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실제의 음행의 범죄라기 보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것들에 마음이 빼앗긴 것을 비유로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것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음란을 라틴어로 Luxuria라고 합니다 영어로 럭셔리라고 하지요. 어근인 Lux는 빛을 나타냅니다. 빛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한문으로는 '색욕'이라고 옮깁니다. '색'이란 역시 빛과 빛깔을 의미합니다. 색욕이란 음란을 이르는 말입니다. 동서양의 두 단어가 모두 빛과 관계에 있습니다. 빛나는 것들에 끌리는 것이지요. 백화점에 가면 화려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에 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세속적인 것들에 끌리는 것을 '음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흔히 사단을 일컬어 Luxiper라고 합니다. 루시퍼, 역시 어근이 빛을 뜻하는 Lux입니다. 그런 점에서 음란은 가장 마귀적인 일입니다.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3-14)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거짓 사도들은 진리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미혹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넘어가는 것은 자기 욕심으로 미혹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음란한 세대가 자기 마음 속의 욕심을 세상에 투영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메시야를 삼는 사건이 무엇이냐면 그게 바로 음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란은 단순히 육체를 좇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그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사도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그리고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 육신의 속한 죄요,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입니다. 이것은 죄의 삼종세트입니다. 
이 세대가 악하다는 것은 불신앙이 가득하다는 말이요. 음란하다는 말은 불신앙할 뿐 아니라 다른 것을 신앙하고 숭배하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악으로 연단이 되어 있으니 '다윗의 자손'이 와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여도 세상의 영광과 관련한 것들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하나는 좌편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세상에서의 영광을 구한 것처럼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야의 세상적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 하늘의 천군을 이끌고 오실 메시야의 영광을 구한 것이지요. 이것은 얼핏들으면 매우 신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화려함을 좇는 신앙입니다. 기적과 이적에 열광하는 신앙, 이것이 음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속으로 메시야를 바라고 있지요.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왜요? 그들이 바라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내 마음도 이런 음란에 연단된 마음이 아닌지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표적을 언급하십니까? '요나의 표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거대한 바다 괴물의 뱃속에 삼일을 머물다 다시 나온 사건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는 사건의 예언적 모형이 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세상 나라의 영광을 얻는 자로서 메시야에 대해 말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오히려 낮아지기를 죽기까지 낮아지심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것이 바로 '다윗의 자손'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40절의 '땅 속'은 직역하면 '땅의 심장에'로 요나서 2:2의 인용인 '큰 물고기의 뱃속'은 '음부의 심장'을 뜻합니다. 즉, 큰 물고기의 뱃속과 땅 속은 모두 죽음의 영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복종하신 주님의 길이야 말로 참된 표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즉, 죽음 가운데서 부활함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으로 그 표적을 나타내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표적을 인하여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 역사적 사건이 우리에게 표적이 되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의 주님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표적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그러면서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길 심판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의도적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리스도로서의 표적은 항상 심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미 수 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앞의 설교문들을 참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심판 때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지만 요나보다 더 큰 이 곧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을 전함에도 회개치 아니하였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땅 끝에서 왔지만 솔로몬보다 더 크고 지혜로운 이가 여기 있음에도 듣지 않으니 심판이 작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요나의 표적을 믿지 못하는 자는 다 심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좇고 있습니까? 나는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까? 최근에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 같은 책들이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뒤섞이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그걸 나무랄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저도 그리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근본적으로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자기 추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을 뭐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신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자기가 꿈꾸는 메시야를 예수님께 덮어씌우고는 아니라고 하고 믿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2. 나중 형편이 전보다 심하게 되느니라(43-45)
귀신에 관한 논쟁의 끝에 다시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불교의 수도가 높은 승려나 여타 종교에서도 축사의 사역을 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귀신이 나간 것이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더러운 귀신이 나가 물없는 곳을 두루 다니며 쉬기를 구하지만 얻지 못하고 이에 내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이 소제되고 수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주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악한 세대'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근데 이 일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 세대의 일이라고 하셨으니 이 역시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신 예언으로 보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멸망은 장차 올 그리스도 재림의 때의 멸망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신약 계시의 최고의 정점 곧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의 정점을 십자가와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과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악한 세대'라는 표현은 틀림없이 종말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고 합니다. 이렇게가 무엇입니까? 더 형편이 나빠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400년간의 선지자들의 침묵기를 지나면서 유대땅은 헬라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 의해 정복을 당하고 특히 알렉산더의 4명의 장군 중의 하나였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지고 성전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제의도 금지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우스에게 제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여러 투쟁을 통해서 그나마 로마의 치세동안에 종교적 자유를 확보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군사적 번영을 꿈꾸며 예수님께 메시야의 표적을 구했지만 이들의 나중 형편이 더 악해지리라는 것은 이들이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선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성전 자체가 없어지고 이스라엘이 공중분해되는 일이 발생할 것에 대해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대의 일이라 하셨으므로 여기서 귀신과 일곱 귀신은 이와같은 정치적 세력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곳곳에 예루살렘의 멸망은 계시의 완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최종 계시이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내용임으로 이 계시의 완성은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계가 없을 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주를 섬긴다고 하였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악하고 음란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순전히 자기 생각이었을 뿐이지 주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되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회복을 경험하는 것같은 때가 있지만 나중 형편이 더 나빠진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마귀의 지배 곧 흑암의 나라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야 하는데, 그 국적이 여전히 세상 나라를 음란히 섬길 뿐이기 때문이지요. 겉 포장지는 하나님 나라의 것을 썼지만 속은 여전히 세상 나라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신들이 들어와 사는데 훨씬 용이한 것이지요. 여기서 일곱귀신은 숫자적 일곱을 의미하기보다 완전한 장악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도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말씀하실 때, 일곱은 그저 산술적 일곱이 아니라 완전히 넘어진 것 같아도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는 뜻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떠난 것같고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한 것같아 보이는 어느 시점이 있지만 근본적 회심의 역사가 없는고로 이후의 형편이 더 나빠지고 안좋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온전히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나요? 아니면 한 발만 걸치고 있는 무늬만 회심한 신자인가요? 
누가복음을 보면 이 일곱귀신에 관한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런 일을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중간에 언급하고 있는 성령훼방죄나 나무와 열매과 같은 예들이 모두 생략되고 귀신들린자를 고쳐주신 사건 직후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한 주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보다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내용들로 본문을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차례 강조하여 설명을 드렸다시피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되 꼭 믿음을 보시고만 고쳐주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도 때로는 그가 택한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치유의 사건이 그들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이후의 결과가 더 나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본문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제되고 청소는 되었지만 거기에 함께 기거하실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간 후에 다시 들어가는 이 일에 대해서 그리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예컨대, 주님께 한 번 치유를 입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영생하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는 다시 질병이 찾아오고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가 본질적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그 영혼이 생명을 얻고 영생하는 자녀가 되지 않는 이상 귀신의 지배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을 정결케하고 소제하고 청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 거기에 누가 사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며 사는 사람입니까?
3. 하나님 나라의 가족(46-50)
이 에피소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혈통이 가족을 증명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 9:4-5) 그럴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그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정작 메시야가 왔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의를 의지함으로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에피소드는 혈통을 의지하는 유대인들이 넘어지게 되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혈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에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습니다. 밖에서 말하려고 섰다고 합니다. 아마도 운집한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 가까이 근접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고 그렇게 아뢰는 사람에게 되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항상 모든 현장에서 영적 의미들을 읽어내고 계시다는 점을 주목하셔 보셔야 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의논할 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그 교훈을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장면마다 거기에서 영적 의미들을 깨우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의도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일가가 와서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는 장면에서 오서 모셔오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누가 내 형제며 모친이냐고 다시 물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혈통이 천국의 혈통 곧 가족관계와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인간적이며 세속적인지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시길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하며 세상을 살고 계십니까? 그래도 믿을 것은 가족뿐입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그 보화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와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다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가 우리의 형제인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자매인 것이지요. 혈통과 비교할 수 없는 더 강력하고 견고한 유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라고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비해서 그리고 그들이 당하게 될 더 나쁜 나중 형편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족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가족입니까?


2010.02.02 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