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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의 원의

그리스도의 원의는 참 지식, 의, 거룩함으로 증거구절은 엡 4:24과 골 3:10에 나온다.
토마스 빈센트는 소요리 문답에서 이를 해설하면서 각기 지성과 의지와 정서에 담긴다고 해설했다. 또 달리 설명하면 진선미라 할 수도 있다. 참 지식과 그것을 담는 인간의 이성은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변별하기 때문이다. 의와 이를 담는 의지는 선과 악을 변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기관이며 거룩함과 그것을 담는 정서는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미학을 논한 책의 제목을 판단력 비판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소크라테스는 진선미를 로고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따로 변별하지 않았다. 원의가 하나님의 형상의 좁은 의미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며 조나단 에즈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대체로 참된 믿음이 거룩한 정서 속에 있다는 말과도 궤를 같이 한다.
진리가 파편화되고 상대화된 세상에 사람들이 살다보니 오늘날 종교인조차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자본주의 세상에 함몰되어 돈에 매여 사니 우리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어 진리가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지유를 가져다 주고 돈 많은 것이 정의가 되며 돈이 아름다움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내적인 진선미로서 그리스도의 원의에 연합된 것을 흔히 칭의라고 한다. 칭의를 얻은 성도는 당연히 그 근원인 원의로부터 진선미를 은혜로 공급받고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이런 가치와 철학을 따르는 삶을 찾기 어려워졌다. 돈에 매인 삶을 살기 때문인 거 같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하부구조(돈)가 상부구조(생각)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런 구조를 유물론이라 한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점에서 맑스의 말을 사실로 만들고 있다. C.S. 루이스의 워딩을 패러디 하자면 "사실적 유물론자"일 수도 있다.
정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진리로 가치가 있는가 또 그의 말씀을 의로 여겨 이를 실천하고 있는가. 거룩한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겨 외모로 우리를 치장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를 옷입음으로 우리를 단정하 하는가
상대적 진리를 말하는 포스트모던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함정이자 수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설아가는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샤르트르의 말처럼 돈에 매인 삶이 자기 천명이자 천직인 것처럼 사는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나를 던져야 한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세상에 단져졌다. 돈에 매여 자유가 없는 것처럼 살지 마라. 기만일 뿐이다.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 너는 피투성이라고 살라신 말씀대로 나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거기서 흘러 나온는 진선미에 영혼의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 솔직하게 내 삶은 비자발적으로 이렇게 몰려가는 거 같다. 생각해보면 이도 큰 은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개역개정)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10, 개역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