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흄의 테제

내가 동양철학 전공했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좀 계셔서 서양철학 소개 포스팅을 좀 하고 있다. 물론 사서삼경을 읽기는 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바가바드 기타도 읽었다. 원래 학부 철학은 동서양 가리지 않는다. 졸업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으로 썼는데 그냥 짜깁기 수준이었다.
어제 칸트가 흄이 인과율의 필연이 마음의 습관이란 주장에 자신의 독단을 깨닫고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 선험적 종합 판단과 그 명제로서 기학 물리 수학이 참된 학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가 이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뿐만 아니라 영혼, 지유의지, 우주의 끝, 등도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결국 이성의 한계에 대한 선긋기인 셈이다.
우선 훔이 인과율의 필연이 경험되지 않고 마음의 습관이라 한 논리는 이렇다.예컨대, 불이 났다가 사건 1, 연기가 난다가 사건2라면 이 둘은 필연적인 듯 보이지만 우연한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건1과 2는 경험이 되지만 이 사이의 인과의 필연은 경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흄의 이 논변을 읽은 칸트는 자신의 독단을 깨치게 되고 소위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코페르니쿠스과 지동설로 바꾸어 놓은 것처럼 대전환을 이룬다. 인과적 필연이 경험적 지식이 아니라면 종합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흄의 논의를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객관적 물리세계로부터 우리 인식의 틀로 전환을 한다.
예컨대, 박쥐는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고 뱀은 열감지로 세상을 인식하며 문어는 음파로 세상을 파악하고 포유류는 시각 정보가 RGB중에서 레드가 없이 GB만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어떤 인식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는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공통 인식 조건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12범주를 사용해서 감각자료를 받아들이고 이를 구상력을 사용해 구성하고 지성을 통해 파악한다고 마음의 체계로 전환을 이룬다.
사물은 이제 신과 같이 알 수 없는 영역에 있고 그것은 우리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이 된다.대상은 역설적이게도 사물을 보는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자기를 알 수 없으나 이 대상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나를 탐구하는 게 가능헤진다. 그래서 이를 초월철학이라고도 한다. 이런 점에서 관념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식의 대상 경험은 사실이며 실제다. 그래서 실제론이라고도 한다. 대륙의 헙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통합을 이룬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진리를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선을, 판단력 비판을 통해 아름다움을 탐구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 할만큼 플라톤의 국가와 파이드로스에 있는 마차비유에 제시된 영혼이론과 그 구조가 닮아 있다. 플라톤은 영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했는데 이를 tripartite theory of soul라고 한다. 머리에 해당하는 이성(λογιστικόν)과 심장에 해당하는 기개(θυμοειδές), 요즘 밀로 하면 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장부에 해당하는 욕망(ἐπιθυμητικόν)이며 이를 중심으로 진선미를 구성했다. 칸트는 이렇개 사물자체와 의식에 표상하는 현상계를 구분했는데 이 또한 플라톤의 변주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 기독교 신앙의 기초  (1) 2024.04.18
흄의 테제 2  (1) 2024.04.18
근대는 인식론의 시대  (1) 2024.04.18
명제의 정의  (0) 2024.04.18
샤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2) 2024.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