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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룻기강해

기업 무를 자됨이니이다(룻 3:1-13)

기업 무를 자됨이니이다(룻 3:1-13)


노승수 목사


[1]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5]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1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1. 시모의 말에 청종하는 룻(1-9)


룻은 시어머니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타향에 와서 불편하고 풍습도 다르고 해서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일 수도 있는데, 룻은 가만히 순종합니다. 생면부지의 남자, 그것도 어제 처음 본 남자인 보아스의 침실에 들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게 유대 풍습에 익숙한 유대 여인도 아니고 이방 여인이었던 룻에게 얼마나 큰 문화 충격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신뢰합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롬 13:1-7) 심지어는 교통 신호등 까지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그것이 내 마음에 들어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순종은 그것이 내 욕구와 다를 때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악한 권세자가 나타나는 또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으로 거기에 겸허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서,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룻과 같은 태도가 있습니까? 


2. 절차를 따라 행하는 보아스(10-13)


룻은 보기에 젊은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아스가 빈부를 물론하고 젊은자를 좇지 않고 보아스에게 온 것에 대한 칭찬을 하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보아스는 유력한 지위에 있는 나이가 꽤 든 남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을 대해 내 딸이라고 칭하는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의로운 사람이라 기업 무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특별한 득이 되지 않는 일임에도 그 일에 대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업 무름은 엄밀히 말해 남자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홀로 남은 여인들의 대를 잇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죽은 남편의 대를 잇는 것이지만, 이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도 보아스가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라면서 다른 계보에 없는 여성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만약 구약의 기업 무름에 대한 정확한 원칙을 따르자면, 오벳은 보아스의 자녀가 아니라 말론의 자녀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기 자체도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값을 치르게 될 엘리멜렉의 땅은 말 그대로 보아스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룻으로 말미암아 얻게될 자녀들에게 돌아갈 땅입니다. 그러니 이익을 계산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업무름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기업무름을 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시합니다. 그러나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분명한 절차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기업무름이란 가장 가까운 친족부터 차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다의 장자로부터 차자와 셋째에게로 차례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절차에 따라 행할 것을 권합니다. 흔히 민주국가를 다른 말로 법치 국가라 합니다. 법치라 함은 절차적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응당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리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명분이 참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성경의 원리를 따라 그 절차를 지켜야 합니다. 보아스는 이런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성경이 정한 질서와 이 사회의 규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그 절차와 질서를 함부로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룻이 가지게 될 두려움에 대해서도 잘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외간 남자의 침실에 들었으니 룻으로서도 참 두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것을 잘 배려하고 있습니다. 절차를 지키는 일이 법대로 하라는 식의 막무가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보통 시비가 붙게되면 사람들이 흔히 "법대로 하자"라고 합니다. 절차를 지키는 일이 이런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정해두신 까닭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룻은 이 정신을 정확히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절차는 지키면서, 의와 인과 신을 버리는 것과 같이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써 의를 얻은 사람이라면 응당 말씀에 청종하여서 절차에 따르는 사람이요, 동시에 율법의 참된 정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