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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룻기강해

기업 무를 자 보아스(룻 3:14-4:6)

기업 무를 자 보아스(룻 3:14-4:6)


노승수 목사


[14] 룻이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16]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그 사람의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고 [17]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말라 하더이다 [18]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4:1]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성읍 장로 십 인을 청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 
[5]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6]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1. 긍휼을 베푸는 보아스(14-18)


보아스는 긍휼과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룻에게 누가 될까하여 그녀가 타작마땅에 들어온 것을 타인들이 알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참 신사답습니다. 연약한 젊은 과부였던 룻을 배려하는 모습이 참 성경이 말하는 남성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의 이런 배려는 단순히 심리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 와중에서도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서 룻의 손에 들려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6-17) 보아스의 믿음은 실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기업 무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기업무름은 계시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와 의식법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이들은 의미도 모른 채 그것을 전통으로만 따라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구체적 실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나, 여인의 후손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저들에게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름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성에 들어가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나의 믿음과 사랑은 어떤지 보아스를 보면서 돌아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2. 절차를 차근히 따르는 보아스(1-4)


보아스는 바로 성문에 들어가서 앉습니다. 고대 세계의 성문은 재판이 행해지던 곳입니다. 성문에 그가 앉았다는 것은 그가 유력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행위가 사적인 거래가 아니라 공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합니다. 율법이 정한 절차를 따라서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하는 보아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때론 우리의 욕심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을 내 마음대로 고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이 무름을 우선순위에 있는 자가 나서게 되면 보아스와 룻의 약조는 물거품이 됩니다. 보아스도 룻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의 사심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여러 분쟁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나 자신이 위에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소원함이 있더라도 분명한 절차를 밟습니다. 자신에게 주워진 권위를 남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습니까? 나는 온전히 성경의 권위에 순복하며, 혹 내게 주어진 권위가 있다면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온전히 나타나는 신실한 일꾼입니까? 


3. 이익을 위해 기업 무름을 포기하는 아무개(5-6)


오늘 본문을 보니 약간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 지방으로 갈 때, 그 땅을 처분하고 간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십년이란 세월을 그냥 놀리지는 않았을텐데, 본문의 뉘앙스는 여전히 소유지 관할권이 나오미에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소유지 관할권은 넘어가더라도 그 소유권은 넘어가지 않는 것이 구약의 토지법임으로 관할권을 가져오는 것과 기업 무름을 함께 표현하느라 생략이 된게 아닌가? 합니다. 즉, 관할권을 되가져 오는 일과 그 기업을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무르는 일을 함께 설명한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응락했던 이 아무개가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 기업 무름을 포기하는 장면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승락했던 이유는 아마도 토지 관할권 즉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아스의 설명을 들으니 그 기업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 무름으로 죽은 자의 계대를 잇는 일임을 설명하자 손해라는 사실을 알고 곧 물러납니다. 이 일은 보아스에게도 손해가 나는 일입니다. 보아스는 의로운 사람이라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의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중국의 고전 맹자에 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나라 혜왕이 자신의 나라에 온 맹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이 나라에 옮으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라고 묻자 맹자가 어찌 이익에 대해 물으시는가? 의가 있지 아니한가?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룻의 선택도 유사합니다. 룻의 선택이 의를 향한 길이라면, 오르바의 선택은 이익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의를 따라 사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서 이익에 눈이 멀어 있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자연인으로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을 우리 가운데 부르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