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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룻기강해

하나님의 섭리: 보아스와 룻의 만남(룻 2:1-13)

하나님의 섭리: 보아스와 룻의 만남(룻 2:1-13)

노승수 목사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룻기 2:1-13, 개정)

1. 룻이 우연히 이른 보아스의 밭(2:1-3)

성경은 강력하게 우연은 없다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자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이러면 사람들은 곧잘 성경을 운명론으로 오해합니다. 신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기묘하게 만나는 지점을 흔히 섭리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룻은 발길을 우연스레 보아스의 밭으로 돌립니다. 그럼 룻은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갔을까요? 아닙니다. 천만에요. 철저히 자신의 의지를 따라 간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것은 이차적 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일차적 원인인 섭리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연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정이 우리의 노력을 반감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나는 하나님의 작정을 핑계로 나의 소명을 게을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작정은 오히려 우리에게 확신과 은혜를 줌에도 나는 그것을 핑계꺼리로 삼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만 그의 도우심의 손길에 감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2. 룻을 발견한 보아스(2:4-7)

룻은 참으로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그 성실성이며, 의와 명예가 무엇인지를 아는 여인인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다 그의 동서 오르바의 길을 갑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길로 보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안락함보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처음 본 사환들에 눈에도 룻은 성실하며 현숙한 여인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아부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명예로움과 영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은 보아스의 눈에도 띄였습니다. 나는 어떤가요? 

3. 룻과 보아스의 대면(2:5-13)

보아스는 룻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이방여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룻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성품에만 감복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왜 성경은 이런 기사를 기록했을까요? 성경의 주인공은 보아스나 룻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빛내어 줄 조연들입니다. 아시는대로 룻과 보아스는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방여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인으로서 그가 그리스도의 조상의 반열에 든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족보에 세명의 이방여인을 발췌해 기록한 대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드러내고자 했음이 분명합니다. 현숙한 여인과 신의를 아는 보아스의 만남이 아름답지만 그 이면의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를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겠습니다. 아무튼 룻은 보통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명예로운 일들을 했고, 그에 대해 이제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보상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