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LaCugna에 대한 반응
오상호
Excursus Two: The Immanent and the Economic Trinity: A Response to Lacugna(각주 1)
in Thomas G. Weinandy, O. F. M. Cap., The Father's Spirit of Sonship: Reconceiving the Trinity, Edinburgh: T&T Clark, 1995
이 논문에서 Weinandy는 LaCugna의 God for Us에 나타난 그녀의 입장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비판을 제공한다. LaCugna의 입장이 가지는 문제점들에 대한 아주 좋은 논문이다. 번역을 하면서 Person이라는 용어의 의미 전달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인격이나 위격으로 번역을 하였다. "위격"이라는 용어에서 "위"가 의미하는 것은 한 분, 두분 할때의 "분"이라는 의미로 "제위께서" 등에서 사용되는 의미이다. 그러나 Person이라는 용어가 독립되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의 존재함을 기본적으로 함축하기 때문에, 우리 말에 인격이나 위격이라는 것으로는 그 의미를 다 나타내지 못하고 심하게는 오히려 근대의 "개인"이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Person 이라는 용어에 적합한 한국어를 찾을 수 없어 인격 혹은 위격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였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녀의 주요 연구에서 Catherine Mowry Lacugna는 신학은 현대신학에서 이해된 것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구별을 포기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그러한 구별이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에서부터 '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분리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계없다고 언급하면서 그것들 사이에 틈을 고정시켰다 라고 믿는다. 반대로 그녀는 전체 삼위일체적 모험은 반드시 구원론적 문맥 내에서 실해되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그녀의 책 전체의 주제이다.(각주 2)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후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의 역사는 서방과 동방 양쪽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위격들 사이의 신내적인 관계성에 집중하였다. 특별히 이것은 라틴 삼위일체적 신학에 있어 진실인데,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substance의 개념에 그들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기초하였고 서로서로 둘러싼 위격들의 삼위일체(a trinity of persons who are enclosed upon one another)를 명료하게 표현했다.(각주 3) 신학이 더욱 정교해지고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가 발전할수록, 삼위일체 교리는 더욱 무의미하게 되었다. LaCugna는 자신의 길고 또한 통찰력있는 삼위일체교리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연구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교리와 신학의 역사는 삼위일체교리의 등장과 패배의 이야기를 말한다.'(각주 4)
나를 포함해서 라너와 많은 다른 이들이 한 것과 같이 심지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the immanent Trinity is the economic Trinity)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자신 안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a gulf is stil placed between God as he exists in himself and the God who exists for us) 사이의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각주 5) 그녀에 따르면, theologia, 즉 God qua God에 대한 지식과 사색과 oikonomia, 즉 우리를 위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색 사이에 분리가 남아있다. LaCugna에게 있어, 만약 theologia가 일관되고 전적으로 구원론적으로 존재에 관계된다면, theologia는 oikonomia의 theologia일 수만 있다; 즉 세계 내에서 하나님의 행함의 신학. 그래서 삼위일체의 theologia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경륜안에서 드러내시는 것과 같이 oikonomia 내에서 삼위일제체적 자기표현의 theologia이어야만 한다. 그녀의 지배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theologia is fully revealed and bestowed in oikonomia, and oikonomia truly expresses the ineffable mystery of theologia.'(각주 6)
경륜은 신내적인 관계들의 숨겨진 영역을 희미하게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다; 경륜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분명한 존재이다(해석?). 경륜은 창조물과 함께, 그리고 창조물을 위해서 사는 하나님의 삶의 '분배'이다. 경륜과 신학은 한 실체의 두 측면들이다: 하나님-인간 교제의 신비.(각주 7)
그래서 드러난 삼위일체는 경륜에서 분리되거나 떨어진 삼위일체가 아니라 경륜의 삼위일체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은 "God in se", 혹은 "God's essence as it is in itself"가 아니다. 구원역사에서 하나님의 자기전달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인 것에 대한 이론들은 unverifiable하고 궁극적으로 비신학적인 것으로 남는데, 왜냐하면 theologia는 oikonomia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각주 8)
그러므로 LaCugna는 주장한다:
경륜적 삼위일체 혹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시간, 공간, 역사, 그리고 personality에서 theologia의 신비의 분명한 실현(realization)인 oikonomia만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정적이고 반역사적이고(ahistorical) 경륜초월적인 용어들로 계획된 내재적 삼위일체이상의 것들을 포함한다; 기독교신론의 주체문제는 하나님의 한 역동적인 운동, a Patre ad Patrem.... 그러한 신내적인 영역의 존재는 그것이 4세기후반이후 사변적 신학내에서 기능을 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경륜의 기초 위에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기본적 삼위일체적 뼈대의 이런 개정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언어를 고집할 필요를 제거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oikonomia와 theologia 사이의 틈에서 작용하는 뼈대에 풀 수 없이 기초되어 있다. 더욱 정확히 성경적이고 니케아 이전의 사고의 형태로 돌아가는 이 개정은 우리가 잘못 인도된 용어들인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oikonomia와 theologia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라는 것을 제시한다. oikonomia는 외화된(ad extra) 삼위가 아니라 창조에서 완성까지 뻗어 있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인데, 거기에서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은 사랑과 교제의 신비에서 함께 존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destine). 유사하게, theologia는 내적인(in se) 삼위일체가 아니라, 더욱 겸손하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신비이다.(각주 9)
그래서 구원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패턴으로 스스로를 나타낸다. 올라감과 내려옴의 포물선의 형식으로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스스로에게로 인도한다. '발현(emanation)과 돌아옴, exitus and reditus라는 이런 고전적 모델은 하나님의 외부를 향한 하나의 ecstatic 운동을 표현하는데 그것에 의하여 만물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만물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에게 돌아온다.'(각주 10)
LaCugna의 삼위일체적 신학의 핵심은 'to be' is 'to be relational' 라는 개념이다. 삼위일체적 사고의 전체 역사는 이 원리에 기초한다.(각주 11) 그러나 삼위일체는 서로에 대한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an intradivine set of persons 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한번 theologia와 oikonomia를 분리한다.(각주 12) 오히려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원래적으로 관계적인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관계하고 그래서 우리를 교제 안에서 그 자신에게 연합시킨다.(각주 13) For God to be is for God to be relational.(각주 14) 인간존재의 제한된 관계성과 달리, '하나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적 실재 모두에 무한한 관계성, 관계성을 위한 무한한 능력, 관계성의 무한한 현존의 영역이 속한다.'(각주 15)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실체의 기원을 인격성으로 언급하는 관계적 존재론은-만약 그것이 교리적 신학 전체를 통하여 진척된다면-theologia와 oikonomia 사이의 분리를 막을 것이다. 삼위일체적 oikonomia는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 표현이자 분명한 하나님의 실체(existence)이다. 이것에 적절한 존재론은 존재를 그 자체 안에 있는 존재(being-in-itself)가 아니라, 관계 안에 있는 존재(being-in-relation)로 이해한다. 경륜은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는 분(being-by-itself)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being-with-us)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의 영역은 창조와 구속의 경륜인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삶의 전체성(the totality of God's life)이 주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자체 안에 있는 혹은 홀로 있는 존재에 직접적 혹은 즉각적으로 접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oikonomia의 핵심으로서 theologia의 핵심은 관계성, 인격성, 사귐이다. 인간 인격성과 사귐의 신비들은 그들의 기원과 운명을 하나님의 인격적 실체에 가지고 있다. 신적 인격성과 인간적 인격성의 역사들은 성령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에게로(a Patre ad Patrem) 나아가는 경륜을 가로지른다.(각주 16)
그래서 LaCugna는 '오직 하나님 안에만 인격성과 존재 사이의, hypostasis와 ousia 사이의 완전한 조화가 있다. God for us is who God is as God.'(각주 17)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인격'이란 용어를 '단수나 복수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 자체를 넘어서 하나님의 설명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This is so because] 신학의 적절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성령의 활동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적 실체에 대한 분명한 확증이다. 우리가 God is one person in three modalities 혹은 one nature in three persons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런 두 주장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주장을 유지하고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의 적절한 주제문제는 구원 경륜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인간의 인격 사이의 만남이다 라는 것이다.(각주 18)
내가 LaCugna의 입장을 그녀 자신의 글을 사용하여 길게 제시하는 이유는 첫째, 그녀의 입장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나의 입장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로, 더욱 특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로서 LaCugna의 입장은 내가 믿기에 치명적으로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있어 LaCugna는 절대적으로 옳다. 다른 분은 없다. 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는 하나님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하나님이 있어야만 한다.(각주 19) 우리를 위한 삼위일체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삼위일체가 있어야만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 존재론적 구별은 없는 반면-경륜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는 삼위일체는 반드시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삼위일체이어야만 한다- 하나님과 존재하는 다른 것들 사이에는 존재론적 구별이 있다. oikonomia는 하나님으로서 그의 전적 타자성에서 하나님이-존재론적으로 oikonomia와 구별되어-나타나고 활동하는 영역이고, 성육신에서 그의 완전한 신적 타자성의 충만으로, 인간으로 실제로 거하는 영역이다. LaCugna에게 있어 하나님으로서 그의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타자성에서, 하나님은 홀로 oikonomia 내에 실제로 나타나지도 못하고 활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oikonomia 그 자체로 축소되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에서 하나님과 살지 않지만, 그러나 오직 oikonomia 그 자체의 존재론적 수준으로 완전히 축소되고 존재하는 하나님을 경험한다.(각주 20)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갭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반면, LaCugna는 실제로는 연결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절벽을 만든다. 우리는 오직 oikonomia의 현상적 하나님만 경험하고 알게된다. 그리고 그의 전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타자성 안에 하나님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의 하나님은 경험하거나 알수 없다. 그래서 LaCugna는 경륜 안으로 삼위일체를 붕괴시켜 그 결과 경륜은 삼위일체가 활동하는 영역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oikonomia는 더 이상 삼위일체의 인격들이 그들 모두의 타자성에서 그들이 존재하는 대로 활동하고 그래서 구별되는 신적 주체들로서 그들 모두의 타자성에서 우리에게 관계되는 영역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안에 삼위일체의 '인격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삼위일체는 경륜으로부터 존재론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으로 경륜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시간 안에서 활동하고 그들 자신 안에 있는 대로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관계하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 서로간의 관계를 기초짓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비인격적 신학적 원리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위격들 혹은 주체들의 삼위일체가 아니다. 이제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단지 인간 인격들이 하나님에게 관계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 안에서 확증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삼위일체적 패턴 혹은 양식을 표현할 뿐이다.
유사하게 비록 나는 그녀가 이런 입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라고는 믿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LaCugna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간관계들을 발생시키고 인간관계들 내에 포함된 'the more'를 표현하는 궁극적으로 실체 내에 유전하는 철학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각주 22) 하나님은 경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경륜이다. LaCugna가 지속적으로 인격적이고 관계적 용어들을 말하고 그런 용어들에 자신의 삼위일체적 신학을 근거하기 원하는 반면, 그녀의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그녀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한다. 그 대신에 그녀는 하나님, 그리스도, 영을 말한다.(각주 23) 내가 믿기에 그녀는 서로 관계된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 그리스도, 영이라는 용어들은 삼위일체를 오직 경륜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그녀의 축소주의적 견해와 더욱 조화도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통하여 영 안에서 나타낸다(as relational, and not necessarily as Father). 둘째로 그녀가 '아버지'라는 용어를 피하는 것은 그녀가 하나님은 '어머니'로 불려질 수 있다라고 믿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라는 용어는 '아들'을 함축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각주 24) 그녀가 아들이라는 용어를 피하기 원하는 것은 그 용어가 직접적으로 한 주체를 전제하기 때문이고 경륜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한 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보통 그녀는 Spirit으로부터 'Holy'를 제외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적으로 한 주체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리스도', '영'을 말함으로 LaCugna는 신적 주체들을 말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관계성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영은 아버지와 homoousions인 신적 주체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에 관계하고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지를 나타낸다. 인간존재들은 LaCugna의 관계적 존재론에서 유일하게 실제적 인격들 혹은 주체들이다. 예수의 인간적 주체는 영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됨을 구체화한다. 영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우리 각자 안에서 행하는 방법을 구체화하고 그래서 영이라 불리운다.(각주 25)
그래서 LaCugna가 관계적 언어의 역동주의와 심지어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반면, 인격성의 개념, 적어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인격성과 주체성은 포기된다. 그들은 신적 주체들이 아니고 그러므로 LaCugna가 '그들'과의 우리의 연합과 사귐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공허하다.(각주 26)
이것은 LaCugna가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관계적 존재에 대하여 말해진 것 모두는 단지 은유이다 라고 말할 때 특별히 분명해진다. 조직신학자들은 "실체"든지 "관계"든지 모든 개념은 있는 것에 대한 문자적 설명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다 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각주 27) 그런 견해는 삼위일체적 언어의사용은 실체를 지배하고 강조하는 비인격적 신학적 혹은 철학적 원리를 표현할 뿐이다라는 앞서의 비판을 뒷받침한다.
더욱이 LaCugna가 그녀의 삼위일체적 신학을 전적으로 구원론적으로 만들기 원하는 반면, 그리스도로서 예수는 우리가 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관계되지 않고 오직 다른 정도에서만 관계된다.(각주 28)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예이고 구체화이고 그래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영 안에서 하나님에게 관계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영의 활동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을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도의 수준에서 도전하므로 이제 그 패턴(삼위일체적)이 확증되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하게 그것을 알게 된다.(각주 29)
LaCugna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녀의 이해가 성경적이고 니케아이전의 패턴을 따른다고 믿는다; 즉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이 경륜 안에서 활동하는 방법으로서 원래 이해되었다.(각주 30) 아들과 영은 구원 경륜-창조와 구원 내에서-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녀는 그런 개념이 theologia와 oikonomia는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라는 그녀의 전제를 뒷받침한다라고 믿는다.
이제 변증가들에게서 증거되는 니케아 이전 교부들은 삼위일체의 경륜적 표현을 강조하였다. 아들과 영은 창조와 구원에서만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구별되는 주체들이 되었다. 이 개념은 중기 플라톤적 사상에 대한 그들의 과도한 의지에 기인한다. 그러나 니케아 이전 발전의 전체 요점은 그것이 생기는 성경적 자료와 기독교 신앙의 빛에서 그런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이 발전을 이미 이레니우스에게서 보게되는데, 그는 삼위일체의 경륜적 표현을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 안으로 잘 밀어 넣었다. 더욱이, 서방의 터툴리안과 동방의 오리겐과 같은 신학자들에게서 증거되는 것과 같이, 핵심관심은 하나님의 하나이심(oneness)를 유지하면서도 그러나 아들과 성령이 그 하나이심(oneness) 내에서 영원한 주체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방법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는가 였다. 초기 교부들에게서 나타나는 종속주의와 유출주의는 아들과 성령의 영원한 신성에 대한 그들의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고, 또한 아들과 성령은 경륜 안에서만 '하나님'이고 경륜에서 벗어나서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믿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려는 개념적 싸움과 시도들이었다-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경륜 양자의 안에서 하나님이었다. 진행과정에서, 니케아 이전 교부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말하는 것을 실제로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더 나은 방법으로 그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다. 반대로 LaCugna는 그들이 말한 것을 말하기 원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이것이 그것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LaCugna가 말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니케아 이전의 개념은 전적으로 니케아 이전이 아니다. 변증가들을 포함하여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은 적어도 경륜 안에서 아들과 성령은 그 자체로 구별되는 신적 주체들이라고 이해하였다; 반대로 LaCugna는 심지어 경륜 안에서조차 아들과 성령으로부터 그들의 신적 주체성을 제거한다. 아들과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인간 인격들 안에서 인격화되는 하나님의 관계성에 대한 비인격적 표현들일뿐이다. 그래서 LaCugna의 삼위일체적 신학은 그 특징에 있어 전적으로 신플라톤적이고 유출주의이다.
LaCugna는 삼위일체적 신학은 니케아 회의에서 잘못된 방향을 잡았다 라고 믿는다. 니케아는 'oikonomia와 theologia 사이의 갭'을 창조하였다.(각주 31) 아들이 아버지와 homoousios라고 선언함으로서, 니케아는 신학을 '삼위일체'는 전적으로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자신에 대한 표현이다 라는 것을 붙잡기보다는 경륜과 분리된 신내적인 삼위일체의 위격들에 대한 사변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녀가 니케아는 그녀의 삼위일체적 사상에 대한 방해물이라고 인정하는 반면, LaCugna는 그것의 심각한 의미를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알게 되는 그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를 위하는 그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니케아이다.(각주 32) 니케아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깨어질 수 없는 존재론적 연결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the one who is wholly within the economy is the same one who is wholly other than the economy 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아버지와 homoousios이고 그래서 아버지가 그의 전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타자성에서 하나님인 것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인 아들은 인간이 되시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었고 무덤에 묻힌 이와 동일한 아들이다. LaCugna의 모험은 궁극적으로 homoousios라는 암초에 좌초된다.(각주 33)
1) This Excursus was first published in slightly different from as an article: 'The immanent and Economic Trinity', The Thomist 57/4(1993) 655-66.
2) See God for Us, pp. 15, 211.
3) 동방의 삼위일체 개념에 반대되는 것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서방의 개념을 언급하면서, LaCugna는 언급한다:
그러나 a Patre ad Patrem이라는 구원의 경륜은 위격들의 동질성(the consubstantiality of persons)이 신 내적 영역 안에 있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지속적으로 알수 없고 참여할 수 없는 신적 본질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ibid., p. 73).
어떻게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사상이 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 사이에 분열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는 pp. 80, 91, 97, 101-2, 104를 보라. 어거스틴에 대한 유사한 비판은 pp. 157, 167-8을 보라.
4) Ibid., p. 198. Cf., pp. 209-10, 392.
5) LaCugna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구별성과 관계성에 대한 Rahner의 입장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시한다(ibid., pp. 211-21). 그녀는 결론짓는다: '결국 적어도 라너에 따르면, 경륜 안에서의 구별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구별들에서 시작하고 기초된다. 이것이 우리가 라너와 분리되는 마지막 지점이다.'(p. 211).
6) Ibid., p. 221.
7) Ibid., p. 222.
8) Ibid., p. 231. See also pp. 224-8. LaCugna에게 신학은 하나님의 내적 삶을 표현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경륜의 기록에서보다는 독립된 형이상학에서 위격들의 동등(coequality)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는 것과 그리고 구원 경륜의 내재적 구조를 하나님의 "내적 삶"과 혼합하려는 것.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내적 삶"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정밀하게 지탱될 수 없다'(p. 229).
LaCugna는 Schoonenberg와 기본적으로 동의하는데 우리는 경륜에서 드러난 삼위일체로부터 그 자체 안에 존재할 것과 같이 삼위일체에 대한 사변으로 움직여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경륜에서의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표현과는 별도로 삼위일체로서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알수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경륜적 표현이다. '하나님이 구원 역사로부터 분리되어 삼위일체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완전히 사변적이고 게시의 기초에서 대답될 수 없다라는 것이 Schoonenberg의 지적의 중요성이다'(p.227; see also pp. 217-20, and p. 236, n. 21).
Schoonenberg 자신의 논문은 'Trinity-the Consummated Covenant. Theses on the Doctrine of the Trinitarian God', Studies in Religion 5(1975-6) 111-16을 보라.
마치 영원한 삼위일체가 역사 안에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먼저 존재하게 된 것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해체한다라는 Schoonenberg의 입장을 평가하면서 Kasp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위격들 사이의 영원에서의 구별들은 최선의 경우에도 modal이 되고, 역사 안에서 유일하게 실제가 된다'(The God of Jesus Christ, p. 276). Schoonenberg의 압장에 대한 다른 비판들은 Boff, Trinity and Society, p. 114와 von Balthasar, Theo-Drama, Vol. III, p. 508을 보라.
9) God for Us, p. 223.
10) Ibid.
11) See ibid., p. 288-92를 보라. Zizioulas를 따라서 LaCugna는 인격성이 실체를 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다 라는 카파도키아신학자들의 관점을 주장하기를 원한다(see ibid., pp. 244-50, 260-6).
12) LaCugna는 기록한다: '신학의 목적은 경륜에서 하나님의 확증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theologia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존재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ibid., p. 233; see also p. 334).
13) LaCugna는 perichoresis를 신내적인 위격들 사이의 내적-사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신 내적인 출발점과 반대로, 구원 경륜에서의 출발점은 perichoresis를 하나님의 내적 삶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모든 인격들의 한 사귐의 신비에 위치시킨다. 이 출발점으로부터 '신적 춤'은 실제로 사귐에서 인격들의 적절한 형상이다: 신 내적인 사귐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고 문자적으로 그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신적 삶(ibid., P. 274; see also pp. 270-8).
14) LaCugna에게, '이 관계적 존재론은 oikonomia와 theologia의 근본적인 연합으로부터 나온다; God's To-Be is To-Be-in relationship, and God's being-in-relationship-to-us is what God is'(ibid., p. 250).
15) Ibid., p. 292.
16) Ibid., p. 246.
17) Ibid., p. 305.
18) Ibid., see pp. 300-4.
19) 'a' God을 말함으로서, 나는 하나님은 많은 존재들 중의 하나라고 의미하기 원하지 않고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해야만 한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God is not contained in any genus'. See S.T., I, 3, 6.
20) LaCugna는 하나님의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즉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상이다 를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런 apophati적 지식은 oikonomia의 apophasis이다-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신비하게 남아있는 그런 하나님의 측면들. 계시 역사의 하나님 뒤에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은 없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드러낸 것 외에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 안에 있다는 가능성은 없다...신적 내재성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적절하지 않고, 또한 신적 초월성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강조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우리에 대한 관계성 없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데 왜냐하면 역사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가까움은 하나님의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재성과 초월성 양자는 단지 theologia 뿐만 아니라 oikonomia로부터도 설명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신비는 정확히 구원경륜에서 초월적으로 이해된다. 역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적 자기 계시는 theologia rm 자체의 신비로 이해된다. 만약 우리가 경륜과 신학은 한 신비의 두 측면들로서 함께 속한다는 원리를 유지한다면, 그때 구원경륜은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theologia)만큼이나 설명 불가능하다.
LaCugna의 그런 견해에 대한 Von Balthasar의 언급: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해석으로서 나타나는 반면, 그것들은 동일시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를 기초하고 지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재적, 영원한 삼위일체는 경륜 안으로 해소될 위협을 받는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과정 안으로 삼켜진다.
21) 만약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oikonomia와 구별되지 않고 oikonomia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면, 무신론의 유한한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으로 끝이 나는데, 이 양자는 결국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22) 이 경우 하나님에 대한 LaCugna의 개념은 Hegel의 'Spirit' 혹은 Heidegger와 Tillich의 'Ground of Being', 혹은 과정신학의 'Di-polar'적 하나님에 유사하다.
23) See for example pp. 320, 356, 365, 378.
24) LaCugna의 하나님은 '어머니'로 불려질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는 ibid., pp. 267-70, 280, 303을 보라.
25) See ibid., pp. 296-8.
26) LaCugna의 9장 'Trinity, Theology and Doxology'는 영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이 더 이상 그 자체로 신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신학적 내용과 의미를 결여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구권과 놀라움을 영광스럽게 하기보다는 인격으로서 우리 자신의 찬양들을 부르면서 끝마친다.
27) Ibid., p. 359; see also p. 354. LaCugna는 독자들에게 그녀의 다른 논문들을 언급한다(p. 369, n.2): C. M. LaCugna and K. McDonnell, 'Returning from "the Far Country": Theses for a Contemporary Trinitarian Theology', The Scottisch Journal of Theology, 41(1988) 191-215, esp. 204-5, and also C. M. LaCugna, 'Re-Conceiving the Trinity as the Mystery of Salvation', The Scottisch Journal of Theology, 38(1985) 1-23.
28) LaCugna는 예수의 아들됨이 우리 자신의 아들됨과 종류에서 다르다는 것, 즉 아들로서 그는 영원한 신적 위격이다 라는 것을 부인한다. See ibid., pp. 309, n. 67 and 317, n. 143.
29) 어떻게 예수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성을 정도에서뿐만 아니라 종류에서도 도전하는지에 대하여는 Weinandy,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를 보라.
30) See God for Us, pp. 221-3.
31) Ibid, p. 35; see also pp. 209, 231.
32) LaCugna의 책의 제목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책이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God for Us라고 제목을 가졌다. 그 이유는 아버지, 아들, 성령은 신적 주체들로서 참으로 존재하지 않고-오직 하나님만 존재하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를 위하는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적 패턴으로 그 자신을 표현함으로 '우리를 위한' 다.
33) Kasper는 전적으로 올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어도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이런 동일성이 신앙의 분명한 진리인 한가지 경우가 있다: 로고스의 성육신, 혹은 위격적 연합...성육신의 경우에서 로고스의 세상으로의 시간적 보냄과 아버지로부터의 그의 영원한 나옴은 완전히 구별될 수 없다; 여기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a unity를 이룬다(The God of Jesus Christ, pp. 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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