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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기독교 신앙의 뼈대로서 삼위일체론: 기독교 교의학에서 삼위일체의 의미를 위한 네가지 제안

기독교 신앙의 뼈대로서 삼위일체론: 기독교 교의학에서 삼위일체의 의미를 위한 네가지 제안
오상호
Schwöbel, Christoph., Trinitätslehre als Rahmentheorie des christlichen Glaubens: Vier Thesen zur Bedeutung der Trinität in der christlichen Dogmatik, Marburger Jahrbuch Theologie 10: Trinität, Elwert Verlag: Marburg, 1998 
이 글은 저의 선생인 슈보벨 교수의 삼위일체와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독일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번역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이 까다로운 일부분은 원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십년 간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하고 광범위하며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수년 전부터 일반적으로 그리고 부당하지 않은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망각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이제는 조직신학적 반성의 중심에 삼위일체 교리가 있게 되었다. 신학에서의 삼위일체 교리의 Marginalisierung은 칼 라너가 1967년의 한 유명한 논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정통적인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교적 존재실행에 있어서는 단지 단일신론자들이다. 또한 삼위일체 교리를 오류로 폐지해야만 할 때, 이런 절차와 관련하여 종교적 문서의 많은 부분들을 변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결행한다 라는 언급을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1) 라너는 기독교 신앙의 고백은 교회의 고백전통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정통으로 표현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적 삶의 실행은 다른 신이해를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경고했다. 유사하지만 반대되는 방향으로 Christof Gestrich는 1994년 칼 라너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문에서, "기독교적 신앙교리는 우리가 대부분의 찬송과 신앙고백들에서 찬양하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성령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곳과 그것에 이어서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다른 현실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그곳에서 실제적으로 말하려는 의무를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포기하였다 라는 것에 달려있는 der Skandal을 신학자들이 알기를 원한다 라는 것을 신학자들의 마음에 새겨넣었다 라고 경고하였다. Der Skandal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본질적인 기독교적 신개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의 경우에조차도 구약성경적인 신개념이나 혹은 철학적-형이상학적 신개념에 깊이 뿌리박고-또한 이것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2)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Denkenvollzug에서 송영적이고 찬미적으로 알려진 삼위일체 하나님은 중요시되지 않고 그와 함께 신앙교리에서 구분되는 기독교적인 것은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경고되었다. 삼위일체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고백과 찬미에서 확실히 고정되어 나타나지만 그러나 기도교적 삶에 대한 그들의 영향은 기독교적 사고에서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 십여년간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갑작스럽게 우리는 모두 삼위일체론자들이고 혹은 그렇게 보인다"라고 Colin Gunton은 1990년에 처음 출판된 자신의 책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의 두 번째 판(1997)의 서문에서 적고 있다.(3) 사실 이런 인상에 대하여 그 책은 많은 인용문을 제공한다. 중요한 신학적 구상에서 삼위일체교리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곳은 부분적으로는 "Standarddogmatik"에서의 삼위일체교리의 취급에 반하는 중요한 개정인 그들의 개념적 형성들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기독교적 가르침의 진술의 범위를 찾는데, 거기에는 혁신적인 경향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삼위일체 교리가 즉시 두드러진다. 이것은 삼위일체교리의 신학적 개념화가 지금까지 걸을 수 없는 소로를 방황하였다라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요소들이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수용되는데 그 요소들은 지금까지의 정경에서 고전적인 추천본문들을 더욱 적게 고려한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구별되는 흔적들에서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강해진 수용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서방교회의 신학의 발전의 준선을 계속해서 결정한 어거스틴적 전통들과의 프로그램적인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과 관계된다. 
삼위일체적 혁신은 주로 삼위일체교리의 역사적 문제존속을 Repristination과 연결한다. 계속해서 삼위일체교리의 부활은 매우 현저한 전교회적 현상인데, 더욱이 그것은 신학적 전통들의 더욱 강해진 전교회적 접촉들의 덕분이라는 것이 주목을 끈다. 여기에서 최근 몇 년간 삼위일체신학을 위한 중요한 기여들은 거의 모든 고백적이고 교단적인 신학전통으로부터 제기되었다라는 것이 지적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서방과 동방 전통들의 교회일치적 움직임이 삼위일체적 신학의 부활에 중요한 사실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카파도키아신학자들의 삼위일체개념들을 수용한 삼위일체교리의 기본개념은 지난 몇 년간 전세계적 교회들의 표준신학이 되었다.(4) 또한 그것을 통하여 삼위일체적 강조는 교회일치적 일치본문에서 더욱 강해진 입구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재방향설정을 위한 매우 다양한 근거들이 상당히 행해졌다. 거의 모든 새로운 삼위일체신학적 개념들은 삼위일체적 신학의 부활에 칼 바르트와 칼 라너의 신학적 제안들이 행한 역할을 지적한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가르침의 두 번째 장(하나님의 계시)의 첫 번째 단락(삼위일체 하나님)에 삼위일체교리의 자리를 할당한다. 삼위일체적 반성은 "Gott selbst in seiner Offenbarung"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하나님 자신은 파기될 수 없는 단일성 안에 있는데, 그러나 또한 계시와 계시자는 계시의 파기될 수 없는 구별성 안에 있다.(daß Gott selbst in unzerstörbarer Einheit, aber auch in unzerstörbarer Verschiedenheit der Offenbarer, die Offenbarung und das Offenbarsein ist)"라고 말하고 있다.(5) "삼위일체론의 문제"(6)는 "자신의 계시에서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는 무엇을 행하는가(Was tut er)?" 그리고 "그는 무엇을 행하는가(Was wirkt er)?"(7)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의 증거를 따라 제시되어야만 하는 응답들을 통하여 모여진다. 그것은 성경적 증거를 따라 하나님자신의 계시에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구별성(die Einheit und die Verschiedenheit Gottes in seiner Offenbarung)이 동시에 말해져야만 한다 라는 확증으로부터 제시된다: "Demselben Gott, der in unzerstörbarer Einheit der Offenbarer, die Offenbarung und das Offenbarsein ist, wird auch in unzerstörbarer Verschiedenheit in sich selber gerade dieses Dreifach von Sein zugeschrieben."(8) 바르트가 "하나님은 스스로를 주로서 계시한다"(9)라는 한 문장으로 동시에 성경적 계시의 형식과 내용들의 형식화로서 이해한 삼위일체론의 "의미"는 어떤 점에서는 스스로를 계시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어떤 점에서 그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있다라는 것이 말해질 수 있다라는 것에 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일 수 있는데, weil er in allen seinen Seinsweisen sich selbst gleich, ein und derselbe Herr ist. 계시가 문서의 증거에서 분명해질 수 있는 것처럼, 계시의 앎은 사건건의 모든 순간에 삼위일체론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 증거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리킨다: Erkenntnis des Herrn als dessen, der uns begegnet und der sich uns verbindet. 그리고 이런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일 수 있는데, 그는 우리를 만날 수 있고 스스로를 우리에게 연결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의 이런 세 존재방식(drei Seinsweisen)에서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그가 그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하는 창조, 화해, 구원, 전 존재, 말함과 행함이 자신의 유일한 본질에서, 자신의 하나님존재 그 자체에 기초 되어있고 본보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하나님은 sozusagen im voraus der unsrige."(10) 
바르트에게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의 기초의 공식화로서의 계시에서 하나님의 정체성, 하나님의 행함과 자신의 행함의 결과에 관한 단일성과 구별성의 요약이다. 삼위일체론은 교의학의 Prolegomena로 이동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에 대한 관계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의 Status와 Stellung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하여 급진적으로 이해된 개념으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Gottes Wort ist Gott in seiner Offenbarung)." 
삼위일체적 신학의 부활에 대한 칼 라너의 영향은 아주 유사한 요점을 가진다. 라너에게 있어 서양에서의 신론의 발전은 삼위일체론의 배척하기를 통하여 특징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교리전통에서 정착되었다: "먼저 여기에는 신성과 세계사실성에서 기원없는 기원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세 위격들의 공통의 본질에 대하여 먼저 취급한다."(11) "De Deo uno"를 "De Deo trino" 앞에 놓음으로서 그것은 삼위일체론의 Marginalisierung이 된다: 
"삼위일체논문은 이런 방법에서 여전히 'splendid isolation'에 빠져들고 그것을 통하여 삼위일체논문은 종교적 실존에게는 흥미롭지 않은 것으로 느끼는 위험에 직면한다: ---"(12) 
라너에게 있어 이러한 신론의 해체는 성경적 증거에 일치하는 것도 아니요 헬라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신론을 하나님의 단일성의 관점아래에서 "매우 철학적-추상적이고 매우 구원역사적이지 않게 구상해야만 한다"라는 무거운 부담을 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필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자신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하여 가지는 구원역사적인 경험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13) 그래서 삼위일체론에 앞서 "비삼위일체적 논문 De Deo uno"는 또한 삼위일체론에서 "von den göttlichen Personen nur absolut Formales gesagt werden" kann, "und selbst dieses betreffe nur eine absolut in sich geschlossen und in ihrer Wirklichkeit nicht nach außen geöffnete Dreifaltigkeit(von der wir, die Ausgeschlossenen, nur in einem seltsamen Paradox etwas wüßten)."(14) 라너에게 이것은 불안정한 상황의 진단이다: "그렇게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삼위일체는 구원신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계시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왜 삼위일체가 이러한 것인지가 분명해져야만 한다. 그래서 또한 기독교의 이러한 원천신비를 다시 채택함 없이는 교의학의 모든 Traktaten에서 다루어진 Heilswirklichkeiten 자체가 이해될 수 없다라는 것이 분명해져야만 한다."(15) 계시에서 주어지고, 기독교의 "원천신비"로서의 삼위일체라는 것으로 정착된 신학적 공리는 모든 Heilswirklichkeiten와 전체 교의학을 이해하는 열쇠인데 라너는 "기본공리"를 통하여 수행하려고 시도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16) 라너에게 있어 이 테제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엄밀하게 생각된 개념에서 중점적으로 밝혀지는데, 그것은 창조된 은혜(der gratia creata)의 스콜라적 개념과는 구별되어야만 하고 그는 다음의 테제에서 그것을 공식화한다: "Die göttliche Selbstmitteilung geschieht in Einheit und Unterschiedenheit in Geschichte(der Wahrheit) und im Geiste(der Liebe).(신적인 자기전달은 역사(진리)와 영(사랑)에서 단일성과 구별성을 나타낸다.)"(17) 
우리를 위하여 바르트와 라너의 주장 사이의 일치가 이러한 입장에서 결정적이다. 라너에 의한 것처럼 바르트에 의해서도 계시에 의한 주장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의 입장이 밝혀지는데, 그것(계시)은 자기계시, 즉 자기전달로서 엄밀하게 생각되어야만 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전달은 실제적으로 자기전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계시 안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 자신이고, dann ist Gott so, wie er sich erschließt,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추론에 대한 이야기 방식이 in und für sich selbst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위하여 결정적이다. Gott ist in sich so, wie er für uns ist(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위하는 것과 같이 자신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와 함께 바르트와 라너는 또한 가능성을 얻는데, 그때마다 각자의 강조와 함께 삼위일체론에 대한 시초로서 성경적 증거 또는 구원역사를 주장하고 그들의 개념적인 표현형식의 사색적인 요구들로부터가 아니라 이런 시초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교리전통을 해석하는 그런 가능성이다. 양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전체 교의학의 핵심으로서 삼위일체론의 상황에 대한 주장은 계시이해와 삼위일체론의 결합으로부터 나타난다. 
사람들은 바르트와 라너-그들의 삼위일체론의 구별되는 각인은 제외하고-에 의하여 공동으로 발견된 견해를 20세기의 삼위일체신학의 역사에서 특징적인 전환점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의 요점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계시에 대한 이해의 전제아래에서 구원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삼위일체론이고 삼위일체론은 간접적으로 구원역사이다라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망각은 기독교신학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라는 것으로 나아간다. 삼위일체를 망각한 신학은 바르트와 라너의 전제들에 의하면 언제나 조직적으로 불완전한 신학이다. 
삼위일체적 신학의 부흥은 분명히 바르트와 라너의 이런 공통적인 견해에 근거한다. 그것은 공식화와 함께 언제나 다시 논쟁으로 나아가는데, 논쟁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전달하였다. 물론 새로운 삼위일체 신학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관련에 대한 견해에서 더 발전된 많은 결과들이 바르트와 라너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18) 
아래의 고찰들에서 4개의 테제의 형식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위체론의 기능을 결정려는 것을 연구한다. 그와 함께 완전히 완성된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임무를 결정하고 그들의 해결을 위한 기준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삼위일체론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에 의하여 즉시 나타난다. 그것에 의하여 주로 순수하게 실용적인 목표제시에 방향지워진 기능화가 추정되는데 그것은 한 개념 혹은 한 가르침의 도구적인 실행능력을 배타적으로 찾는다. 삼위일체론의 각각의 도구화로부터 새로운 삼위일체적 신학은 언제나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직접적인 유비로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의 정확한 의미로부터 인간적 사회의 정확한 기초로 연결하는 곳에서 발생하도록 강요된다. 그와 함께 삼위일체론은 즉시 이데올로기라는 의혹에 맡겨지는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을 그들의 대표자의 특정한 사회적 선택들의 신분증명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삼위일체론은 역으로 투사의혹을 받는데, 그것을 통하여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에 희망된 인간적 사회적 관계의 투사로서 삼위일체론이 재차 인간적 사회적 삶의 기초의 근거와 규범으로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효과와 함께 해석된다. 
삼위일체론의 각각의 도구적 기능화는 삼위일체론의 기능이 그들의 내용에 밀접하게 다시 관계되고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기독교신앙의 내용과 구조에서 그 기초가 서술된다라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기독교신앙의 내용과 구조는 재차 스스로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자기추론의 덕분인데, 그것을 통하여 신앙은 자신의 대상을 얻는다. 삼위일체론의 기능에 대한 진술은 삼위일체론의 내용에 대한 진술에 다시 연결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재차 기독교신앙에서의 자신의 고정됨에서 분명하게 되어야만 하고 그것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추론에서 스스로 자신의 기초를 가진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도구화된 기능화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이제 삼위일체론의 기능에 대한 질문은 완전히 거절된다 라는 것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라너가 분명하게 행했던 것은 기독교신앙과 기독교 가르침을 위한 삼위일체론의 기능상실을 내용적인 본질상실로 교정한 것이다. 교의학의 개념에서 배척되고 그래서 기능을 상실한 삼위일체론은 그들의 내용의 완전한 형식화를 강요한다. 기독교적 신앙과 삶에서 그것의 의미가 불분명한 한도 내에서 삼위일체론의 기능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면서 그것은 나쁜 의미에서 쉽게 신앙의 신비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자기추론에서 스스로 기초되는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적 구조로부터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설명되고 삼위일체론에게로 돌아가는 그 기능들은 그 내용으로부터 유래한다라는 삼위일체론의 기능상실에 직면한다. 
These 1: 삼위일체론은 복음의 확약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앙고백에서 정체성이 형성되고 예배에서 예전의 구별되는 실행들을 부르는 것과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이런 방법으로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적 신앙의 하나님관계에 내포된 하나님이해를 설명한다. 
경외의 종교적 전통들의 정체성은 신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그것은 그것의 드러남을 그것의 기원에 의존한다(deren Hervortreten sie ihren Ursprung verdanken).(19) 먼저 구원을 창조하는 행함들의 주체로서 믿어지고 숭배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참고지시를 통하여 "구원"으로서 믿어지고 경험되고 열망되는 것의 특징이 정확하게 결정하려고 한다. 또한 모든 종교들이 구원종교들이다라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한 특정한 종교적 전통에서 경험되고 먼저 신성의 정체성에 대한 참고지시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는 구원의 특별한 특징을 결정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한 특정한 종교적 전통에서 "X가 구원을 창조한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X를 위한 한 특정한 신성의 이름이 지정될 때 먼저 특징이 나타난다.(20) 그 때문에 유신론적 종교들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정체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와 결정적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는 자신의 선언들의 원천에서 표현되고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한 종교적 전통의 단일성의 결정을 가능하게 한다.(21) 동시에 신성의 이름들의 계시는 그것이 신앙인들을 관계 안에서 자신의 이름들의 호출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두려고 하는 상황에 두는 범위에서 명확한 하나님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정체성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이름들의 계시는 하나님이해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한에서 신앙인들의 삶의 모양의 근거와 목표를 결정한다. 
기독교는 이런 관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정체성의 자기추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시를 통하여 결정된다. 물론 여기에서 특별한 특질이 제시된다.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Wer ist Jesus Christ für uns)"라는 질문은 예수가 아버지로 칭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없이, 그리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현재인 성령에 대한 관계없이 응답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은 기독교 신앙을 위하여 하나가 아니라 세 개다(eine dreifache und keine einfache). 정체성의 결정, 동일화된 고유명사 그리고 결정된 정체성의 이야기하기의 양자의 중요한 방법들은 그것에 의하여 처음부터 서로 결합된다.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해야만 하는 그 세 가지 정체성을 서술하는 역사들은 그것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신앙의 지속하는 결정요소에 속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역사, 그분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 이끌어내었고, 모든 족속들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증명한다. 
-예수의 역사,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의 현재적 오심에 대한 그분의 삶의 증거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통하여 실증되고 그의 운명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자기 결정의 피력과 세계와 인간의 결정적으로 결정한다라는 것을 통하여 실증된다. 
-성령의 역사, 그분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관계에 포함되고 그래서 그들의 피조된 Bestimmung의 성취로서의 종말론적 완성을 행한 길 위에 있게 된다 라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을 현재화한다. 
기독교적 신앙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에 들어가는 출입문이고 여기와 지금에서 하나님의 현재의 결정인데, 그래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현재화로서 경험된다.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을 통한 하나님의 이런 세 가지 정체성을 묘사하는 역사들의 연결은 모든 세 가지 역사들이 하나님의 간과할 수 없는 정체성 묘사들을 표현하는데 그 역사들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이름들의 연결에서 그들(세 가지 역사)의 단일성이 표현된다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수에 의해 아버지로서 불려지고,(22) 그래서 예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해된다. 그 때문에 예수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으로서 이해되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를 전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그리스도사건의 전망으로부터 결정한다. 공동체에서 종말론적 완성을 향하는 길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현재로서 경험되는 성령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그는 예수의 육체적인 부재의 상황에서 신자들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연결한다. 이런 사건들은 그래서 예언자들에서 성령의 활동의 지속과 실현으로서 그리고 창조의 삶의 능력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세 고유명사들의 관계를 통하여 세 정체성을 설명하는 역사들의 연결은 한편으로 각각의 세 역사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의미 때문에 연속성을 유지하고 다른 한편 그것은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그것이 오직 그들의 관계 안에서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라는 것만큼 그렇게 서로 종속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언설의 이런 다차원적 삼위일체적 문법(23)은 이미 신약성경에서 다양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삼위일체적으로 다양화된 관계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범적으로 로마서 8장 11절을 지적할 수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신 이"라는 묘사와 동일시하고 예수에 대한 그의 활동은 신앙인들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을 통하여 신앙인들에게 약속되었다. 성령의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은 그래서 예수의 부활에 그들의 모범을 둔다. 그와 함께 이게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지속적인 관계가 말해지는데,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장 14-17)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아들 즉 아버지에 대한 아들로서의 예수의 관계에 포함하는 대신 "성령이 활동한다"라는 것이 수용되고 이런 성령 안에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Abba,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라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 
아버지, 아들 ,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정체성과 성령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향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계와의 이런 연결을 기초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정체성을 향한 관계에 신앙인들의 정체성이 연결된다라는 것은 일관된 것으로 나타난다. 다름아닌 이러한 것이야말로 세례명령의 삼위일체적 공식의 사용에서 드러난다(마태복음 28장19). 그 때문에 신앙인들의 정체성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적 정체성인데, 그것은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한 아버지에 대한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규정되고, 그것 자체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관계적 정체성에 연결된다.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규정된 관계로서 신앙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삼위일체적 신앙고백들의 기초이고 내용인데, 그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계는 신앙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신앙고백들의 삼위일체적 형식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정체성, 아버지 아들 성령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인데 그분을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적으로 존재를 결정하는-그리고 신앙인들을 위한 개인적이고 사회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의미에서 신뢰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는 분은 기독교 신앙에서 믿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전제이다. 신앙고백은 자신의 삼위일체적 형식에서 하나님은 누구인가(quis sit deus?)에 대한 응답을 "welcher Art" Gott sei(qualis sit deus?)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과 연결한다. 이런 고백의 가능성의 근거는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 안에서 이런 정체성이 하나님의 존재의 이해를 위한 열쇠가 된다라는 것처럼 그렇게 밝혀진다라는 것에 놓여있다.(24) 삼위일체론의 임무는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정체성과 본질의 이런 연결을 개념적으로 재공식화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그 관계적 구조에서 스스로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증언에 대한 신앙의 응답이다. 복음은 인간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약속되고 구원을 창조하는 관계인데 그 관계는 구원을 선물하고 신앙고백에서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계로 알려진다. 그 점에 있어서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은 루터가 대교리문답에서 신조의 설명을 분명하게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자기 수여에 놓여있는데 그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 때문에 복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삼위일체적 본질 안에 있는 하나님인데, 그분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에 들어가도록 스스로를 주신다.(25) 
복음에서 약속되고 신조에서 응답되고 알려진 인간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말걸기에 대한 수고를 필요로 하고 동시에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ausagieren-감정을 행동으로 나타냄으로서 발산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로서 그는 스스로를 복음에서 약속하고 그로서 그는 신앙고백에서 알려진 그분이기 때문에 그는 또한 기도와 찬미에서 그가 스스로를 약속하고 알려진 것과 같이 그렇게 불려진다.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자기약속,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과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부름 사이의 이런 관계의 개념적 형식화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정체성의 증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약속하고 그래서 신앙인들을 가능하게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그들에게 알리고 말하는 것을 통하여 창조한 관계에서 떨어질 수 없다. 삼위일체론이 무엇이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기초와 내용인지를 그것의 개념적인 복원으로서 계획한다면, 삼위일체론은 그래서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관계에 대한 추상화의 위험에 직면한다. 그 때문에 "복음의 요약"(26) 혹은 송영의 문맥에서의 삼위일체론의 위치확정으로서 삼위일체론의 발전인 신앙고백에 의한 삼위일체론의 발전의 시초는 삼위일체적 신학의 선택적 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관점에서 복음, 고백 그리고 송영에서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각각 특별한 관점에서 강조된 기초사건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런 한에서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적 신앙의 신이해에 포함된 신이해의 개념적 설명이다라는 것이 정당하다. 
These 2: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들의 단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그럼으로써 그것은 양자를 하나님의 한 본질에 기초된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한 관계적 단일성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의 자기확증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각각의 행함이 삼위일체적 행함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각각의 고유성이 삼위일체적 고유성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행함들의 단일성과 다양성이 그들의 관계에 결정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삼위일체론의 완성을 위한 두 번째 관점을 역사적이고 조직적으로 제시한다. 그 질문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 경험에 대하여 특별히 더 강조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된 구원은 창조의 실재에 대하여 어떤 관계에 있는가? 창조에 대한 불연속으로 구원이 이해된다면, 두 신들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창조신으로 사실상 세계의 상황에 대하여 책임이 있고 다른 하나는 구원신으로서 세계의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구원을 이룬다. 일종의 급진적인 이원론적 신 이해로 나아간 Gnosis에서 발전된 이런 시각은 유사한 인간상과 세계 이해를 내포한다. 
유사한 방법으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경험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된 구원은 정말로 종말론적 궁극성인가 혹은 그것은 성령의 새로운 경험들을 통하여 능가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성령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새롭게 계속 진행되고 널리 미치는 구원 경험을 위한 단지 하나의 Durchgangsstadium인가? 기독교 교리역사에서 Joachim von Fiore는 세시대론의 각각의 개념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중세시대에 유토피아적 사고의 결정적 움직임이고 새 시대에 확정되었다. 여기에서 -최소한의 경향인데- 다가오는 구원은 참된 인간존재와 참된 사회의 실현은 아직 되지 않았다 라는 것처럼 모든 현재적 구원경험의 능가로서 이해되었다. 
창조와 구원 그리고 구원과 완성에 대한 이런 관계결정에서 근본적으로 실재이해의 기초로서 하나님이해의 보편성에 대한 질문이 문제이다. 오직 각각의 하나님이해만이 광범위한 실재이해의 기초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든 실재의 기초, 의미 그리고 목표로서 이해한다. 신약성경에서 이미 우리는 조직적인 조사를 만나는데, 실재의 단일성은 하나님의 단일성에 기초되고 그렇게 함으로서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는 또한 창조의 중재자와 목표로서 제시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 15-18) 
그와 함께 그것은 창조,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 사이에 대립이나 모순은 있어서는 않된다 라는 것이 유지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은 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참여의 중재이다. 이러한 중재는 모든 다른 보편적인 국면들에서 "모든 것"의 전체형식이 전치사와 인칭대명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관련된다(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등)라는 것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는 단순히 창조주, 화해자, 그리고 완성자로서 간주된다 라는 방식에서 배척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단지 신적 활동의 도구적 원인으로서 표현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하나님은 화해를 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원천을 거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은 완전한 원천이 거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자신과 화해시키기로 결정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셔서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를 통하여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골1장19, 20)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화해, 창조, 완성 사이에 있는 그 관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Pleroma가 있도록 하셔서 그는 하늘에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한 신성와 화해시킬 수 있다 라는 것을 통하여 기초가 세워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하여, 위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의 다양한 단일성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Pleroma가 있도록 하셨다 라는 것으로 기초되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언설의 이러한 다차원적 삼위일체적 형식에서 우리는 이미 어떻게 구원경륜에 대한 이야기가 형식화들을 넘어서는 지를 보았는데, 그 형식화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지시한다.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구조적인 유비적 형식으로 구원과 완성의 관계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관계로서 이해되었다. 여기에서 열쇠는 성령과 예수, 그리고 예수와 아버지 사이에 있는 공통의 지시구조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16장 13-15절) 
예수는 성령을 가리키는데,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알리지 않고 예수에 대하여 알리고 그를 영화롭게 한다. 그러나 예수가 가진 것("das Meinige")은 배타적으로 그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구원경륜의 단일성은 성령을 통하여 신앙인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공동의 지시구조가 달성됨으로서 기초된다. 성령은 이런 방법으로 예수에 대한 관계와 예수를 통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규정한다. 성령의 행함은 그와 함께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Selbstvergegenwärtigung이 된다. 여기에서 또한 die Homoousie이 모범을 보인 것과 같이 고전적 삼위일체신학적 공식화가 나타난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성(Gemeinsamkeit)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동일성들을 하나의 동일성에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관계로서 그들의 관계를 결정하는데, 그 관계는 성령으로부터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관계로서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아들과 성령에 대한 관계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교부적인 삼위일체 신학은 그들의 구별되는 단계와 각인들에서 연구로서 해석될 수 있는데, 창조, 화해, 그리고 구원에서 하나님의 행함들의 단일성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의 단일성에서 볼수 있도록 기초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의 이런 단일성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동일성의 폐지로서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경험은 사실상(즉 존재론적) 하나님의 한 경험이고 성령 안에서 사실상(즉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은 현재하시는데, 그래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한 하나님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단일성은 "일방적인" 단일성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관계단일성(Beziehungseinheit)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삼위일체적으로 구별된 활동들로서 하나님의 활동들의 단일성과 삼위일체적으로 구별된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존재의 단일성은 서로 의존한다. 오직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활동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의 자기확증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의 관계단일성에 고정된 하나님의 행함들의 관계단일성은 하나님의 행함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직접적인 결과들을 가진다. 게다가 그것이 Apostolikum의 양태론적 오해를 통하여 어떤 것을 쉽게 생각나게 하고 그 결과 창조는 오직 아버지의 행함으로서 표현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행함들의 각각의 형식들은 오직 아버지의 행함, 아들을 행함, 그리고 성령의 행함으로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각각의 행함들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행함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적 전통의 규칙 "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에서 Wahrheitmoment인데, -삼위일체는 그들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말아야 하고 삼위일체는 아버지, 아들, 혹은 성령에게 분리되어 덧붙여 쓰여지지 말아야 한다 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일치된다. 
첫 번째 관점은 화해와 완성에 대한 창조의 내적인 관계성을 나타낸다. 처음부터 창조는 자신의 창조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데 그것은 죄의 모순에 직면하여 하나님이 실행한 화해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라는 것으로부터 창조는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런 방법으로 화해는 자신의 창조에 대한 신뢰의 표현으로서 그리고 창조의 원래적 목표제시에서 인간에 반대된 하나님의 새롭게 포함하기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세계의 완성은 묵시적인 열광주의자를 따라 급진적인 새 창조로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화해된 창조의 완성으로서 해석되어 되어야만 하는데 즉 원래적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행함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의 활동 각각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활동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신약성경의 관점인데-오직 씨틜痴嗤?아니라 또한 아들과 성령도 창조에 참여하였다. 삼위일체의 작품들은 또한 그것이 오직 아버지만의, 혹은 오직 아들만의 혹은 오직 성령만의 활동으로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의미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의 원칙에서 외화된 하나님의 행함들의 균일이 추론되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행함은 일면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각각의 행함은 삼위일체적 국면성을 가진다라는 것이 따라 온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행함들의 삼위일체적 단일성을 파기하는 것 없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들의 각각의 활동에 언제나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한 특별한 관점들이 덧붙여질 수 있다. 칼빈은 Basilius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하나님의 행함의 단일성에 삼위일체적 Differenziertheit를 묘사한다: ".....아버지에게 활동의 시작이 덧붙여지고 그는 모든 것의 원천이고 샘이고, 아들에게 die Weisheit, der Rat, die gesonderte Austeilung, 성령에게는 행동에서 힘과 실현성이 덧붙여진다."(27) 기독교적 교리전통에서 이런 관점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들의 단일성에 덧붙여진 측면들을 삼위일체 내적인 관계들과 관련시키도록 하는 묘사가 시도될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칼빈에 의한 Anfang, Quelle, 그리고 Brunnen으로서의 하나님의 활동들의 묘사는 아버지에게 삼위일체 내적으로 덧붙여진 무원천성를 비춘다. 다른 한편 아버지, 아들, 성령의 활동들의 각각의 측면들은 하나님의 활동들의 그 형식들에 관계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삼위일체적 활동들의 묘사에서 한 위격의 측면들에 주된 관점의 기능이 주어진다. 이런 방법으로 삼위일체적 활동은 각각의 주된 관점을 토대로 하여 아버지, 아들, 혹은 성령에게 적용된다. 이 적용은 opus divisum으로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오직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들의 한 측면을 중요한 서술역사로 만드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화해에서 아버지와 성령에게 그때마다의 특별한 측면들이 걸맞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 없이 화해는 아들에게 적용된다. 
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라는 기본 원리에 대한 이런 해석은 놀라운 요점을 가진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행함들에 대한 각 신학적 해석은 불완성으로 나타나는데, 그 해석은 자신의 삼위일체적 국면성을 묘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육신적 기독론" 혹은 "영감적 기독론"사이의 많은 논쟁들은 하나님의 행함들의 삼위일체적 국면성에 대한 불완전한 서술의 결과로서 분석된다.(28) 다른 한편 하나님의 각 행함들의 삼위일체적 국면성들에 대한 완전한 서술은 교의학의 범위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의 전체관계에서 그것의 배열이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적 신앙론의 요약으로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정된 행함들에 관계되는 교의학의 각 표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행함들의 그 삼위일체적 국면성의 제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활동들의 단일성에 관계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의 자기확증으로서 이것은 이해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결론들이 하나님의 특징들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의 자기확증이고, 그래서 창조에 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경륜적" 특징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내재적" 특징들의 자기확증으로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추상적" 특징들을 제시하지 않는 한, 그것은 구원경륜에서 그들의 "분명한" 확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신성의 특징의 속성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특징에 대한 언설의 범주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에서 분리할 수 있는 완성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분명한 실행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이다. 그와 함께 예를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내용적 결정은 모든 논리적 가능성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죄인들의 칭의에서, 그리고 자신의 화해된 창조와의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실행에서 하나님의 행함의 집약이다. 하나님의 특징에 대한 가르침의 각각의 삼위일체신학적 정확한 표현화를 위한 증거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으로서 결정되는데, 그렇다면 그와 함께 관계표현이 형성된다. 즉 비록 사랑의 관계가 일정한 정신적 태도들이나 생각들을 포함하는 반면에 사랑은 정신적 태도나 생각으로서 우선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에서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표현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는 또한 관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라는 것이 결과된다. 이제 사랑이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로서 이해된다면, 사랑의 각각의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는 또한 하나님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를 위하여 수용되어야만 한다. 이제 사랑은 상호인격적 관계로서, 타자들에 대한 관계로서 의미되어야 하고 자기관계로서 의미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에 사랑의 관계의 관계를 주어야만 하는데 즉 사랑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적 위격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로서 표현될 수 있어야만 한다라는 것이 결과된다.(folgt daraus, daß es im trinitarischen Sein Gottes auch Relate der Relation Liebe geben muß, Liebe also als personale Relation zwischen den trinitarischen Personen von Vater, Sohn und Geist ausgesagt werden können muß.) 그와 함께 그가 세계를 사랑할 때에 하나님이 관계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사랑으로서 관계 안에 있는 자기 존재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영원불변성을 붙잡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세계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자들에게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이것은 세계에 대한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낸 관계 안에 있는 영원불변하는 존재이다. 다른 한편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의 사랑스러움에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의 대상을 정하는 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의 이러한 설명은 또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창조적 특징을 기초할 수 있다(루터에 따라: non invenit, sed creat). 하나님이 관계 안에 있는 삼위일체적 존재로서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먼저 세상을 향한 관계에서 사랑으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향한 사랑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제시한다. 그런 한에서 사랑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유출적인 개념에 반하여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문장의 삼위일체적 설명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를 기초한다.(29) 
물론 이런 점에서 동시에 제한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을 해석하기 위하여 이런 주장들은 비록 이런 표현의 의미의 신학적 재구성을 제안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설립하지 않는다. 역으로 이러한 인식은 오직 아버지를 통한 아들의 보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 기초될 수 있고, 성령을 통하여 아들의 보냄에서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인식의 해석학적 문맥이다(요일 4: 7-21).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의 개념적인 재구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서 신앙의 인식을 따르는데, 그것은 사랑 안에서의 세계를 향한 사랑의 하나님의 자기 확증이다. 
These 3: 삼위일체론의 개념적인 문제성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적 동일성(die personale Identität)을 하나님의 단일성이 부인되지 않는 만큼 이해하려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단일성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적 동일성을 부인하지 않는 만큼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 놓여있다. 
첫 두 테제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동일성에 대한 설명과 경륜에서 하나님의 행함들의 삼위일체적으로 세분화된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일체론의 의미들 내재적 삼위일체의 자기확증으로 설명한다. Wie sind nun diese beide, je für sich in der Explikation des Glaubens an Gott, Vater, Sohn und Geist, notwendigen Akzente miteinander zu verbinden: die Behauptung der dreifachen Identität Gottes und die Behauptung der differenzierten Einheit des Handelns Gottes? 여기에서 이제 중요한 개념적 문제가 나타난다. 이교로서 비난받은 고대교회의 개념들은 경계선을 정의하는데, 그 경계선 안에서 적절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신성의 원천을 배당한 종속적인 주장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실제로(즉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라는 것을 부인했다. 사람들이 창조주와 창조 사이의 기본적인 구별을 사용할 때, 그들은(그리스도와 성령) 창조의 측면에 포함되었다. 그와 함께 아들과 성령에 대한 예배적인 숭배는 우상숭배가 되었다. 아버지,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게서 본질적으로 다양화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현현형식들만을 본다라는 양태론적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계를 의문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적 현현방법이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그의 현현방법일 뿐이라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구원역사적 관계는 letztgültig로서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일시적인 현현방식이 영원한 구원을 드러낼 수 있는가? 또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기도는 존재론적 정확한 의미없는 수식적인 이야기형식이거나 자기대화의 형식일 것이다. 다른 한편 아버지, 아들, 성령은 오직 외적인 관계에 세 연결된 신성들로서 해석되면, 하나님의 활동들의 단일성은 정확히 삼위일체적으로 기초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단일성) 언제나 삼신적으로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고전적 substanzmetaphysischen 존재론의 범위에서 반복되는데, 그것은(존재론)은 Substanz와 Attribute의 기본개념들을 통하여 각각의 Seienden의 완전한 결정을 주장한다. 또한 여기에서 개념적인 설명에 대한 연구는 아포리아(해결불가능)로 끝난다: Wird das eine göttliche Wesen als Substanz interpretiert, dann sind Vater, Sohn, und Geist allein als Attribute dieser einen Substanz zu verstehen(그러한 하나의 신적인 본질은 Substanz로 해석되고, 그래서 아버지 아들 성령은 ). 역으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독립된 Substanzen이고 그래서 das eine göttliche Wesen은 오직 그들에게 공동의 Attribut 일 수 있다. 이런 개념은 공동의 신적인 본질의 사실성과는 다른 것인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아버지 아들 성령의 동일성의 사실성을 부정한다(Die eine Vorstellung negiert die Wirklichkeit der ontologisch zu erfassenden Identität von Vater, Sohn und Geist, die andere die Wirklichkeit des gemeinsamen göttlichen Wesens). 
복음의 증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에 적절한 아버지 아들 성령의 동일성에 대한 개념적 설명, 그것은 동시에 개념적인 응집력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을 제시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이런 어려움은 그것-삼위일체론을 증명하려는 논쟁의 역사를 보여주는-은 그 뼈대 안에서 삼위일체론이 적절하게 설명된 당면한 사고형식 조차도 제시하지 않았다 라는 것을 통하여 중요해진다. 고대의 고전적 사고형식들은 현저한 수정없이는 삼위일체론의 설명을 위한 Rahmentheorie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들의 개념적 가능성들은 기독교 신앙이 복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설명하려고 사색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 점에서 "credo, quia absurdum"의 자포자기의 걸음이 필수적인가 혹은 모든 이성을 능가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신비의 엄숙한 소환만이 도움을 주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에서 최소한 기준들이 형성될 수 있는데, 그것은 삼위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적절한 개념적인 설명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1. 아버지, 아들, 성령은 특별한 Identitäten으로서 말해져야만 하고 나타나야만 하고, 그래서 예룰 들어 "아버지에게, 아들에게, 그리고 성령에게 영광이 있으라"라는 그들의 이름말하기는 한 이름들의 세 번의 반복도 아니고 drei nicht-identifizierenden Würdetiteln에 대한 열거도 아니다. 
2.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하여 그들은 그들의 관계에서 신적인 본질의 단일성을 표현한다 라고 말해질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두 가지 기준들에 상응하도록 카파도키아 신학은 그들의 구별되는 대표자들에 의하여 구별되는 강조점들과 함께 해결책 연구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방전을 위한 기초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장 새로운 논의들에서 삼위일체적 신학을 언제나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개념적인 혁신에 기초하는데, 그것은 "헬라 철학에서의 혁명"(30)으로서 아주 적절하게 설명되어졌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삼위일체론은 진리이해의 Rahmentheorie로서 이해될 수 있다 라는 유효한 개념적 가능성들을 확대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이해된 hypostasis의 개념은 존재론적으로 기초가 되는 개념만큼 논리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라는 ousia와 hypostsis의 개념적인 같음(Äquivalenz)의 폐지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부터 Eunomianismus와 같이 더 이상 ousia는 하나님의 본질로서 identifizierende 된 특징들을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Hypostsen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identifizierende 된 특징들은 그들 각각의 hypostatische Identiät을 구성된 내적인 관계들로서 해석된다: Gregor von Nazianz의 용어론에서 아버지에 대한 agennesia, 아들에 대한 gennesis, 그리고 성령에 대한 ekporeusis.(31) 이러한 제안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삼위 하나님의 관계적으로 구성된 Identitäten을 나타낸다라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Identität 아들과 성령에 대한 관계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Identität는 아버지와 성령에 대한 관계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Identität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관계없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처럼 서로서로 관계되어 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die hypostatischen Identitäten은 그래서 내적 관계성을 구성하지만, aber sie sind selbst keine Relationen, sondern die relational konstituierten Relate dieser Relationen. 그런 한에서 그것들은 올바르고 그들의 이름들을 통하여 오직 고유한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제안이 두 기준들 중 첫 번째를 충족시키는 반면에, 카파도키아의 개념들은 신적인 ousia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작은 암시들만을 제공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원칙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해를 따르면 세 신적인 Hypostasen에 공통적인 신성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그것은 여기에서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질문의 위치를 잘못 놓았다라는 것을 나타낸다. 삼위일체의 단일성은 세 Hypostasen에 공통적인 Wesen에서 보여지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Person에서 보여진다. 현재의 삼위일체적 논의에서 신-카파도키아 삼위일체론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인 John Zizioulas는 그것에 대하여 강조적으로 제시한다: 
"'한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어거스틴과 중세 스콜라주의가 말한 것처럼 the one substance가 아니다. 이것은 한 하나님의 자리에 아버지의 위격을 놓고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적 신학에 더욱 유사한 일종의 monotheism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monotheism에 대한 관계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personhood, 예를 들면 관계성으로부터 나온 단일성 혹은 개방성에 기초한 존재론을 수용해야만 하고 일종의 substance, 예를 들어 self-existent과 개인적 존재의 최종적 분석이 아닌. 삼위일체의 철학적 스켄달은 오직 존재론에서 substance가 기원적 원리 혹은 원천으로서 personhood에 길을 내어준다면 해결되거나 받아들여 질 수 있다."(32) 
여기에서 제시된 해결책은 삼위일체의 원천과 근원으로서 아버지가 그들의 단일성의 원리인 한, 삼위일체의 첫 번째 Person의 Monotheismus로서 전적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서방 전통의 Substanz의 형이상학은 이런 방법으로 동방전통의 위격(Person)의 형이상학을 통하여 대신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monarchia를 삼위일체의 단일성의 원리로 만드는 것이다. Wolfhart Pannenberg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관계들이 Ursprungsrelationen으로서 개념화된다면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필연적으로 분명해진다 라는 것에 주의를 촉구했다.(33) 그러나 예를 들어 요한문서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쉽게 생각되는 것처럼, 그 관계들은 상호적인 관계들로서 이해되고 그 결과로 삼위일체의 첫 번째 Person의 Monotheismus가 결코 제시되지 않는다. 더욱이 Zizioulas가 이미 카파도키아적 삼위일체론을 위하여 항의한 것은 또한 개념적으로 회복될 수 있지만,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Monotheismus를 통하여 또다시 방해된다: 삼위일체에서 단일성과 다양성의 동등한 원천성. 
이러한 방법에서 대체될 수 있도록 구성된 관계들로서 내적인 삼위일체적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신적 존재의 단일성이 결정된다. 그래서 단일성은 세 Hypostasen들을 대립하여 세우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내적인 삼위일체적 관계들을 통하여 구성된 존재론적 Gemeinsamkeit로서 이해되는데, die es möglich macht, vom Vater, vom Sohn, vom Geist als einem Gott zu sprechen. 그와 함께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런 양자의 공식화된 기준들이 완성되는 것과 같이 그것은 놀라운 결과처럼 보인다. 삼위일체 내적인 관계들은 아버지의, 아들의, 성령의 hypostatisch적 동일성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Wesenseinheit를 구성한다. 이런 방법에서 하나님의 한 Wesen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hypostatisch적 동일성들 뒤에 있는 네 번째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적 관계들을 통하여 구성된 하나님의 단일성이다. 그와 함께 단일성은 더 이상 모든 차이들을 폐기하는 Uniformität로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die Verbindung der drei trinitarichen Identitäten durch die sie als Identitäten konstituierenden Relationen zur Einheit. 그와 함께 단일성은 제외된 monolithisch적 단일성의 복수성도 아니고 또한 그것은 그것을 위하여 오직 강조되지만 그러나 본질적이지는 않은 의미를 가지는 외적인 관계들에 기초하기를 원하는 relationslos된 Wesenheit도 아니다. Von dem einen Gott zu reden, heißt darum, von Vater, Sohn und Geist zu sprechen, von Vater, Sohn und Geist zu sprechen, heißt von dem einen Gott zu reden.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만들어진 개념에 대한 이러한 지적에서 칼 라너의 요구는 "De Deo trino"와 "De Deo Uno"의 Traktate는 분리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These 4: 삼위일체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증언들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동일성과 삼위일체적 행함과 Wesen에 대한 관계에 두려고 시도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해의 발전을 위한 Rahmentheorie로서 작용한다. Ist die Trinitätslehre in der Selbstmanifestation der immanenten Trinität in der ökonomischen Trinität begründet, erweist sich dieser ihr Grund auch als ihre Greze. 
이러한 고려에서 제시된 것과 같이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한 공식화로서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의 단일성과 구별성의 제시로서 이해되는데, 그 양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Sein에서 단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관계적 동등한 원천성에 기초되고,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해의 Rahmentheorie로서 삼위일체론은 해석된다 라는 것이 스스로 분명해진다. 
다음으로 거기에서 삼위일체론은 다른 Rahmentheorie의 범위에서 해석될 수 없다 라고 부정적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역사에서 삼위일체론의 설명의 많은 어려움들을 분명히 한다. 삼위일체론의 범위 밖에서 얻어진 설명 범주들은 삼위일체론의 설명을 위하여 스스로 쓸모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것은 결코 삼위일체론의 하나의 완전히 특유의 범주화가 발전된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적 신앙의 삼위일체적 고백의 개념적 설명을 위하여 각각의 개념적 혁신들을 고려하는데, 예를 들어 그 혁신들은 존재하는 개념화의 변형에서 카파도키아의 삼위일체론에 설명될 수 있는 것과 같이. 
한편으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신앙의 진리이해들의 증언들의 기독교적 동일성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재고될 수 있다 라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해의 Rahmentheorie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한에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해의 증언의 구분기준으로서 작용한다. 다른 한편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해의 요약으로서 작용하는데,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이 그들의 관계에서 그것의 구별되는 증언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안내되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의 구별되는 단일성에서 하나님의 행함에 대한 구별되는 증언들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 놓기 때문인데, 그 관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Wesen에 스스로 기초된다. 세계의 창조주, 화해자, 그리고 완성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 그리고 창조로서, 화해로 부름받고 자신의 창조와의 하나님의 공동체성에서 완성되도록 결정하는 것으로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삼위일체에 관계된 증언들은 그들의 관계에서처럼 삼위일체의 범위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넓은 전통에서 삼위일체론의 실천적 기능상실이 주장되는 곳에서 놀라운 결과들을 가진다. 이러한 비판의 논리적이고 고전적인 것은 칸트의 "Streit der Fakultäten"에서 한 구절이다: 
"Aus der Trinitätslehre, nach dem Buchstaben genommen, läßt sich schlechterdings nichts fürs Praktische machen, wenn man sie gleich zu verstehen glaubete, noch weniger aber, wenn man inne wird, daß sie gar alle unsere Begriffe übersteigt."(34) 
그에 반대하여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윤리를 위하여 "실천을 위한" 뛰어난 의미를 가진다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 기독교 윤리의 역사는 도덕적인 행위들의 세 가지 기본태도 사이의 논쟁에 스며들어 있다. 첫 번째를 따르면 창조범주에서 기독교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적 도덕성이 이해되는데 예를 들어 자연권리사상에서 설명된다. 윤리의 두 번째 형태는 일종의 화해윤리인데, 그것은 은혜의 말을 결정적인 윤리적 동기로 만들고 거기에 일반적으로 자연권에 반대하여 공동체윤리로 기초한다. 세 번째 형태는 모든 인간적 행동들에 주어지는 가장 높은 선의 방향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모든 윤리적 행동들의 방향이다. 삼위일체론의 범위에서 각각의 이러한 윤리적 Orientierung의 세 형태들은 결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라는 것이 재빨리 보여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창조, 화해, 완성 사이의 관계가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함들의 세분화된 단일성은 그것의 윤리적 의미에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적 범위에서 순수한 창조윤리는 제시되지 않는데,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결국 자신의 피조성에 대한 인간의 반대에서와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의 화해필요성에서 하나의 윤리적 주제를 가질 수 없는데, 그것(윤리적 주제)은 인간의 피조성의 회복으로서와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으로부터 스스로 안내된 목표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행동들의 실행으로서 복음에서 말해진 화해를 가질 것이다. 최소한 이러한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은 그 결과들에서 윤리의 개념을 위해 결코 모든 우리들의 개념들을 극복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 때문에 기독교적 진리이해를 위한 그들의(삼위일체론의) 구분되고 보충되는 기능을 위하여 각각의 연구가 실행되었는데, 삼위일체론은 진리성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을 위한 보편성과 개별성의 중재의 일반적 원리로서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S. T. Coleridge는 삼위일체론을 "위대한 진리, 즉 그 안에 모든 가능한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진....the Idea 그 자체-즉 Idea Idearum, 모든 진리의 형식, 방법, 그리고 내용인 유일한 기초적 진리"로서 기본적으로 칭송하였다.(35) 헤겔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형이상학은 Coleridge로부터 선포된 이런 프로그램의 실행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삼위일체론의 이러한 원리화은 가장 최근 Oswald Bayer에 의해 다시 말해졌다: "하나님의 이런 전능을 삼위일체신학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은 새로운 철학역사와 신학역사의 압도적인 오류개념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오류개념은 은폐, 즉 삼위일체론으로부터만 생각되는 복음의 변형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Bayer에게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보편성은 종말론적 예언을 세밀하게 증명하는데,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할 때, 그때에 가장 처음으로 완성된다. "창조사역의 이러한 완성은, 그것이 무시간적인 인식과 존재원리로서 요구될 때, 그 특징에서 알게된다."(36) 
응답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고백과 부름의 분명한 실행으로부터 복음의 약속을 경질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론으로의 일종의 추상화하는 삼위일체론의 새해석인 삼위일체론의 원리화에 반대하는 Bayer의 주장은 제안된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들의 필수적인 명확화를 기독교적 신앙의 진리이해의 Rahmentheorie로서 요구한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수행들은 삼위일체론이 발전한 기초인데, 왜냐하면 복음의 형식과 내용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현재화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인식의 Rahmentheorie로서 거기에서 또한 그 경계를 가진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신관계에 포함된 신이해의 형식화의 연구이고, 거기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가 드러나는데, 그 관계는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앙의 Rahmentheorie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