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작정
이성호 교수
하나님의 작정과 자유의지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보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작정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2. 모든 것에는 죄도 포함된다.
3.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이다.
사실, 풀기가 쉽지 않은 3단 논법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작정에는 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대단한 위험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구경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타락은 인간 역사의 운명을 짓는 큰 사건이다. 이런 큰 사건이 하나님의 작정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
따라서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작정하고서도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온 용어가 "허용적 작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실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작정이 실행됨에 있어서, 창조의 경우 하나님께서 어떤 제 2의 원인자도 사용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 하지만, 타락을 실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허용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허용은 하나님의 작정을 거스리거나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다는 것을 칼빈은 욥의 예를 들어 훌륭하게 설명한다.
1.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시기로 작정하셨다.
2.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3. 사단이 갈대아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4. 욥의 아들이 다 죽었다.
욥의 아들이 죽은 것은 누구 때문인가? 최종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아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한 의도로 욥을 시험하셨다. 따라서 욥의 아들의 죽음 그 자체 대해서는 하나님께도 일부 책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단과 갈대아 사람들이 벌인 악한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야 할까? 욥의 아들을 죽임에 있어서 일어난 악은 전적으로 사단과 갈대아 사람들이 져야 한다.
하나님은 선한 의도로 욥을 시험하였지만, 사단과 갈대아 사람들은 악한 의도로 욥의 아들을 죽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동일한 사건이 선과 악의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책임이지만 악은 사단과 악인들의 책임이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기로 작정하셨다. 살인은 누가 봐도 큰 악이고, 무죄한,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큰 악이다. 그렇다면, 이 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야 할까? 그렇지 않다. 예수를 죽이는 데 참여한 인간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즉,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필연적으로 그 작정이 실행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실행에 대한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두자.
마지막으로,
개혁신학을 어설프게 아는 이들 중에, 성도의 범죄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보자. 예수님은 분명히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베드로의 부인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부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바로 베드로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죄도 하나님의 작정을 벗어 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대부분의 오해는 자유와 필연이 상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필연적으로 그 작정한 일은 일어나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은 작정, 자유, 필연의 관계를 부정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생긴다.
거듭 말하지만, 자유의 반대말은 필연이 아니라 강요이고, 필연의 반대말은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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