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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다윗의 출생에 관하여.....

다윗의 출생에 관하여.....

 

노승수 목사

 

성경에 다윗의 출생내력을 보면, 특이한 점이 몇몇 발견이 됩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삼상 16:10에서는 이새의 8번째 아들로 나오는 반면, 대상 2:15에서는 7번째 아들로 나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역대기는 후대에 쓰인 것임으로 아마도 그 아들 중 하나가 죽어서 죽은 아들을 생략하고 7번째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런 주장에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것은 역대기는 히브리성경 구분상 역사서 이고 이들이 포로기에서 귀환한 후에 여전히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는 의문 가운데 그것에 답하기 위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성경 구분으로 선지서에 속하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등장하는 왕들을 적나라한 부패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 기록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둘째, 다윗 정권에서 실세였던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의 어미였던 스루야에 관한 것입니다. 다윗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 2:17에 의하면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다윗 7형제의 자매로 등장합니다. 물론 스루야의 세 아들 이름도 여기 나옵니다. 그런데 삼하 17:25에 가면,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저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동생이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길 보면, 다윗의 두 자매, 곧 아비가일과 스루야가 그 아비가 이새가 아니라 나하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두 자매의 아비가 나하스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일까요? 다윗의 누이들의 아비가 이새가 아니라 나하스라니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셋째, 삼상 16장에 다윗을 기름붓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 특이하게도 이새는 다윗을 거의 아들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장에 가면 다윗이 아비 이새의 심부름으로 맏형, 엘리압이 나가 있는 전장에 갔을 때, 그의 형은 그를 친형제처럼 맞지 않고 매우 격노하면서 그를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의 아비는 그를 아들처럼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의 맏형은 막내 동생을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서양이나 동양이나 막내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을텐데, 그는 왜 막내 아우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짐작하자면, 요셉의 경우처럼, 그들의 어미가 달랐기 때문이지 않을까합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아비가일과 스루야의 아비는 이새가 아니었습니다. 즉, 이들은 이새의 아들과는 피 한방울 안 섞인 남이었다가 부모의 결혼으로 형제자매가 된 것인 셈입니다. 다윗은 스루야 자매와 같은 어미, 그의 형들이랑 같은 아비에게서 난 아들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넷째, 다윗은 왜 시편 27:10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기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버렸으나'의 시제는 현재 완료시제입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지요. 마치 홍길동이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고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없는 형편에서 자랐음을 암시하여 줍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이 다윗이 서자라는 증거라고들 하십니다. 그러나 서자라는 관념은 매우 한국적인 관념입니다. 오히려 룻기에 나오는 것처럼 이는 기업 무름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왜냐하면, 나하스는 그의 아내로부터 두 딸 곧 아비가일과 스루야만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아마도 이새는 그의 가장 근족이었을 것이고 그에게 기업무를 의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새의 마음은 보아스 같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형이나 그가 다윗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합니다. 오히려 유다의 아들 오난이 다말에게 가졌던 태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윗은 아비가일과 스루야의 어미가 기업을 이을 아들이 없자 근족 이새로부터 기업무름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여러가지 사실이 이를 방증하여 주는데, 만약 그의 형들과 다윗이 동복의 형제였다면, 그들이 그렇게 관계가 소원한 이유를 설명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스루야와 아비가일과 동복이었다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전반적인 정황과 일치합니다. 나중에 스루야의 아들들이 다윗 정권에서 실세를 장악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 스루야 자매는 '이부동복매'(아비는 다르나, 엄마가 같은 형제)이고 스루야 자매와 다윗형들은 '이부이모형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다윗이 이새의 혈통일 뿐 아니라 성경 계시가 계속해서 드러내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이기도 함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족보에 계속해서 여인들이 그것도 이방여인들이 등장하는 마태복음의 기록자의 구속사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성경 계시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하나님의 계시적 섭리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출생에 여러 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짐작컨대, 다윗은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막을 길이 없었고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까지 얻으며, 이스라엘 언약의 대표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여러가지 상처들에 얽매여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핑계를 삼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누가 그 앞에서 상처가 많다고 자랑(?)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는 부모에게까지 버림받는 심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는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내면적 동기가 됩니다. 그것에 대한 미온적이고 표면적인 봉합은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뿐입니다. 우리의 진실하신 치료자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윗의 생애가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