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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상처에 관하여...

성격이란 일정부분 타고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일정부분은 성장과정에서 형성됩니다. 또한 어린시절에는 성격형성에서 자신의 선택이 매우 적지만 나이가 들면서 선택의 요소가 많아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라면서 형성된 일종의 '반복강박' 혹은 '엄격한 무의식적 자동성'이 선택을 하기 전에 생기게 되고 이런 경우를 우리는 흔히 '신경증' 혹은 '성격장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과 선택은 많은 부분에서 열려 있어서 이와 같은 장애라 해도 도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기타 신체적 혹은 기질적 장애들은 도덕적 선택과 관계가 없는 반면, 성격장애나 신경증은 도덕적 선택을 결국 본인이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내 과거나 혹은 과거의 인물이나 환경에 책임

을 전가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인간은 '장애'와 '상처'를 뛰어넘는 탁월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상처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말은 더 확장하면 '생명의 기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상처를 기본적으로 안고 자라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명됨을 드러냅니다. 그 생명됨을 드러내는 모든 생명체들은 '숭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도 때론 역경에서의 승리를 그리는 여러 스토리들에서 우리는 이런 사례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숭고함'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때론 '사악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조건으로서 '상처'와 여러 장애들은 결코 자신의 도덕적 선택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가 가졌던 아픔이나 상처가, 그가 지금 재생산하고 있는 여러 가지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범죄'는 단순히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형법 상의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이와 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인간은 그래서 참으로 피기 힘든 꽃입니다. 불교에 우담바라(Udumbara)라는 꽃이 있습니다. 3000년만에 한 번 피는 꽃, 이 꽃은 여래나 전륜성왕의 탄생을 알리는 전설의 꽃이라 전해집니다. 이 전설이 상징하는 바는 인간이란 참으로 피기 힘든 꽃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그리스도의 탄생시에나 필만한 꽃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식의 표현을 들자면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는 이걸 ‘피투성(Geworfenheit)'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의 이 표현은 조금 수정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만들진 않았지만 자신이 선택을 통해 세상에 던져집니다. 조건들은 나의 선택이 아니지만, 인간은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그 선택의 결과로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에 대해 항상 무엇인가를 탓하기만 해서는 인간은 '사악함'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때, 인간은 비로소 '숭고함'과 '거룩함'을 꽃피우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