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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신사도 운동의 직통계시의 심리학적 이유들

신사도 운동의 직통계시의 심리학적 이유들

노승수 목사

신사도 운동의 직통 계시에 대한 바램은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은밀한 욕망이다.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Harvey G Cox)는 50년 전 종교는 없어질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그러나 종교는 지난 반세기 더욱 증가했다. 독일의 여론 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에 의하면 1970년대 유성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22%였던데 반해 현재 40%가 넘는다고 한다. 콕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종교를 퇴보시킬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미신은 더 증가하고 신문 지면마다 점성술과 운세들로 넘쳐난다. 알렌스바흐를 인용하자면,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미신을 믿고 있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래라는 변수를 전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 타고난 연약함은 사람들을 종교로 이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데서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멈추지 않고 이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액을 막는 방액에 비술을 요구하는 것이다. 과학이 무한정 발전한다 해도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자양분의 종교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리고 이 종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자기 중심에 기원한 우상형 종교들이다. 

성경은 분명 이러한 조건이 인간이 가진 조건임을 명시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장래 일을 헤아려 아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우상형 종교는 이런 인간의 조건에 하나님을 개입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신적 존재를 요구하는 것은 단지 자기 방식의 삶을 구가하기 위함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사실 경건의 원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의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라는 형태로 성경을 주시고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제공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성경의 교훈들을 충실히 따르면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의 지식에 이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확신하는 자리에 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중심적 우상형 종교의 참된 관심사가 아니다. 한마디로 신사도운동이 직통계시에 열광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대한 불신과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자기 불안을 달래고 그 불안의 투영으로서 신적 존재를 달래는 행위를 통해서 일종의 자기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환경과 신적 존재를 제재하는 방식의 주술형 종교는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불안의 투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주술은 불안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마다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기능해야 함으로 성경과 같이 기록된 완성형의 계시 방식은 못마땅할 뿐 아니라 자신의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고, 늘 살아서 매순간 내 삶에 개입하는 방식으로서 신적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게 직통계시의 직접적 이유이다. 

불안 신경증 환자들은 대체로 주술에 의해 압도되는 경향이 있다. 최근 <기계교>라는 종교 망상에 빠져 그들이 보낸 문자대로 모텔에서 자신의 두 아이를 살해한 어머니에게서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다. 무당이 요구하는 거액의 굿 비용을 거절하지 못하고 십수억을 갖다 바친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으로 압도되는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면 이런 경향성에 대해서 의심해 봐야 한다. 신사도운동의 한 모습이랄 수 있는 김하중 장로의 <하나님의 대사>에서도 이런 경향의 변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는 기계화된 신이 되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부채도사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내재화된 불안은 성경이란 분명하고도 확실한 계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직통계시를 요구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적은 모두 우리의 구원을 계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만드신 세계와 그 계획은 완벽하며 특별한 방식이 아니고서라도 얼마든지 돌아간다. 날마다 땜질처럼 특별한 개입이 반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경영이 부실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율배반이기도 하다. 성경 계시가 오늘날에 반복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최후, 최종적 계시이다(요 5:39).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낮아지심(성육신, 수난, 죽으심)과 높아지심(부활, 승귀, 등등) 그리고 구원의 보증으로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까지 이 모든 것이 종말적 성취이다. 

그런데 다시 계시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거기에 무슨 하자가 있어 새로운 계시를 요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로 계시가 충분치 못하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일종의 자가당착인 셈이다. 이 특별한 행동에는 바로 계시의 목적이 담겨 있다. 거기서 교훈을 받으면 충분한데 자꾸 내게 그와 같은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불안증의 발현이다. 암에 걸리지 않도록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해서 평안히 사는 것을 두고 굳이 암에 억지로 걸린 다음 그걸 고쳐주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하나님께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직통계시의 열망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선 병든 내 마음부터 고쳐보려 애써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를 인용하자면, 종교는 얼마든지 인간의 병리적 퇴행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그것이 성경에서 연원한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에게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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