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실망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이 실망에는 모종 기대가 숨겨져 있고 욕망을 신으로 삼는 인간의 습성이 남겨져 있다. 종교란 원래 두 종류다. 내 욕망으로 비롯된 종교와 계시로부터 비롯된 종교다. 둘은 매우 닮아 있으며 쉽게 변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별의 지점이 있는데 사랑에서 변별된다. 어거스틴도 카리타스(Caritas)와 쿠피디타스(Cupiditas)를 구분했다. 전자는 질서에 맞게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고, 후자는 사랑의 질서를 혼동하고 어지럽힘으로써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거스틴이 말한 사랑에 있어서 질서는 첫째가 하나님이며, 둘째가 자신, 셋째가 이웃, 넷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었다.
그는 고백론에서 이 사랑의 질서를 이런 기도로 표현했다. “주님,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정돈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랑이 올라오더라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가장 많이 사랑하게 하소서“
사실 종교란 우리 자신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 그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리는데 종교가 사용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자기 본질은 가리는 종교는 오늘도 횡행한다. 거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 삼는 일이다.
질서의 하나님께 질서로서 사랑하시는 삼위하나님께 질서를 따라 사랑하는 일 그것이 신자의 부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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