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와 바빙크, 수프라인가 인프라인가?
우병훈 목사
“바르트는 수프라이고, 바빙크는 인프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견해를 진술해 봅니다.
1. 먼저 간단히 설명하자면, 17세기의 수프라(supralapsarianism, 타락전 선택설)와 인프라(infralapsarianis,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논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신 “논리적” 지점이 타락하기 전의 인간(수프라의 견해)인가, 아니면 타락하신 이후의 인간(인프라의 견해)인가 하는 질문을 다룬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 시간과 관련한 질문이 아니라, “논리적 질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한 것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선후가 무의미하지요. 따라서 수프라/인프라의 문제 역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대해 시간 상에 일어난 사건으로 논의한 게 아니라, 다만 논리적인 상황에서 그 선택 지점이 어디일까를 따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론1] 리처드 마우가 말하듯이, “바르트는 수프라를 지지하기에 일반은총을 다룰 영역이 적다. 왜냐하면 수프라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혹은 은혜를 주로 구원과 관련해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바빙크는 인프라를 지지하기에 바르트보다 일반은총의 영역을 폭넓게 인정한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프라/인프라 모두 논리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에,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은총』, 제4장 “타락 전”인가, “타락 후”인가?-일반 은총에 대한 주요 논쟁.
2. 수프라(타락전 선택설)와 인프라(타락후 선택설) 모두 개혁파 진영에서 모두 용납되었던 견해입니다. 물론 알미니우스파는 대개 다 인프라였지만,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가 양분되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수프라도 5개 정도로, 인프라도 5개 정도로 다양한 학설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논의는 “수프라 vs. 인프라”가 아니라, “수프라 군(群) vs. 인프라군(群)”의 논의였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신학자들이 단지 하나의 수프라, 하나의 인프라만 주장했을 리는 없지요. 다양한 변종들이 있었습니다.
3. 17세기 이후 20세기까지도 지속된 이 수프라/인프라 논의에서 수프라와 인프라를 대변했던 사람들은 이러합니다.
수프라(타락전 선택설): Gommarus, Maccovius, Bucanus, Voetius, Twisse, Comrie, Abr. Heidanus, Fr. Burmann, Ph. Naudaeus, Abraham Kuyper, G. Hardy. Kersten, C. Steenblok, Hardy. Hoeksema.
인프라(타락후 선택설): A. Walaeus, Maresius, Marck, Heyns, Polanus, Wollebius, J. J. van der Schuit, W. D. Jonker
4. 바르트는 칼뱅, 츠빙글리, 루터 등은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지만 아마도 수프라에 속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추측합니다(『교회교의학』 II/2, 한역 p. 142).
그러나 다른 학자들(J. van Genderen, W. Hardy. Velema)은 칼뱅이 수프라적인 표현을 쓴 적이 있지만(『기독교강요』 3.21.5), 칼뱅 신학의 전체 경향은 인프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Concise Reformed Dogmatics, p. 229; Polman, De predestinatieleer van Augustinus, Thomas van Quino en Calvijn, 1936, 377).
바빙크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인프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Reformed Dogmatics, II, 영어판 p. 362).
참고로, 멀러 교수는 이 논쟁이 있기 이전의 사람들은 수프라/인프라의 구도 속에 넣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5. 바르트의 경우는 “정화된 수프라”(a purified supralapsarianism)의 견해를 자신의 견해처럼 제시하였습니다(『교회교의학』 II/2, 한역 p. 157). 그러나 그 견해가 기존의 수프라와 다르게수정된 버전이기 때문에 수프라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게다가 바르트는 인프라에 대해서도 아주 우호적으로 많이 얘기하고 있고, 인프라의 장점을 많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바르트의 경우, 수프라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르트의 견해는 --다른 많은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독자적(sui generis)입니다. ^^; 그의 견해는 『교회교의학』 II/2, 141-161쪽 전체를 봐야 알 수 있는데, 읽어보면 역시나 아주 왔다 갔다 합니다. 바르트 신학의 표현주의적 변증법(expressionistic dialectic)적 특징이 여기서도 빛을 발합니다. ^^;
[보론2] Meijering(마이어링)은 바르트의 견해를 “극단적인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die radikalere supralapsarische Position)이라고 부릅니다. E. P Meijering, Von den Kirchenvätern zu Karl Barth: das altkirchliche Dogma in der “Kirchlichen Dogmatik” (Amsterdam: Verlag J.C. Gieben, 1993), 424. 즉, 기존의 수프라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수프라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고, 동시에 인프라의 장점도 무시하지 않는 견해”라고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6. 바빙크는 물론 바르트처럼 주저리주저리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고, 자기 견해를 좀 더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의 결론은 “수프라와 인프라 모두 성경의 진술들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빙크를 수프라와 인프라 양쪽 중에 하나로 몰아붙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주제로 책을 쓴 W. D. Jonker(용커)는 바빙크가 그래도 인프라로 기울어져 있다고 결론내렸습니다(Uit vrye guns alleen [오직 그저주시는 은혜로서만], 1989, p. 69).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결론은, Jonker 자신이 인프라이기 때문에 나온 결론인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학자들은 자기가 수프라를 지지하면 역사상 유명한 신학자들을 다 수프라로 몰아가고, 자기가 인프라를 지지하면 그들을 인프라로 몰아간다는 사실입니다. ^^; 이런 것은 신학자들이 자유의지론을 다룰 때도 여전히 관찰할 수 있지요(자유론자와 양립론자 양측 모두에서).
유해무 교수님은 박사 논문에서 이 주제를 다루셨는데, 바빙크가 똑 같은 표현을 한번은 수프라를지지하기 위해, 한번은 인프라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개인적 대화에서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 교수님의 결론도 역시, 이 수프라/인프라 논의는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성경의 진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보론3] van Genderen(판 헨더런)과 Velema(펠레이마)의 입장은 인프라에 가깝다고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개혁파 신앙 고백서들도 인프라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수프라, 인프라 양측 모두 개혁파 신앙 고백서들에 서명한 것을 보면, 개혁파 신앙 고백서들은 이 문제에 있어 중립적이라고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7. 따라서 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르트 자신은 “정화된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말하였지만, 그 표현만으로 그를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쓴 표현 그대로, “정화된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하거나, “타락후 선택론의 장점을 무시하지 않는 고유한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2) 바빙크 자신은 타락전 선택론과 타락후 선택론 모두의 약점을 인식하고 있어, “타락전 선택론과타락후 선택론 사이에 성경적 균형을 찾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이러한 바르트와 바빙크의 수프라/인프라에 대한 견해 차이가 그들의 일반은총론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니오”(Nein)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수프라/인프라 양쪽 모두 하나님의 일반은총/특별은총에 대해 다양하게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1. J. van Genderen and W. H. Velema, Concise Reformed Dogmatics, trans. Gerrit Bilkes and Ed M. van der Maas (Phillipsburg N.J.: P&R, 2008), 228–31
2. 바르트, 『교회교의학』, II/2, 141-61.
3. Bavink, Reformed Dogmatics, II, 361-70.
4. 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은총』(권혁민 역, 새물결플러스, 2012), 제4장 “타락 전”인가, “타락 후”인가?: 일반 은총에 대한 주요 논쟁.
“바르트는 수프라이고, 바빙크는 인프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견해를 진술해 봅니다.
1. 먼저 간단히 설명하자면, 17세기의 수프라(supralapsarianism, 타락전 선택설)와 인프라(infralapsarianis,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논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신 “논리적” 지점이 타락하기 전의 인간(수프라의 견해)인가, 아니면 타락하신 이후의 인간(인프라의 견해)인가 하는 질문을 다룬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 시간과 관련한 질문이 아니라, “논리적 질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한 것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선후가 무의미하지요. 따라서 수프라/인프라의 문제 역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대해 시간 상에 일어난 사건으로 논의한 게 아니라, 다만 논리적인 상황에서 그 선택 지점이 어디일까를 따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론1] 리처드 마우가 말하듯이, “바르트는 수프라를 지지하기에 일반은총을 다룰 영역이 적다. 왜냐하면 수프라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혹은 은혜를 주로 구원과 관련해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바빙크는 인프라를 지지하기에 바르트보다 일반은총의 영역을 폭넓게 인정한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프라/인프라 모두 논리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에,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은총』, 제4장 “타락 전”인가, “타락 후”인가?-일반 은총에 대한 주요 논쟁.
2. 수프라(타락전 선택설)와 인프라(타락후 선택설) 모두 개혁파 진영에서 모두 용납되었던 견해입니다. 물론 알미니우스파는 대개 다 인프라였지만,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가 양분되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수프라도 5개 정도로, 인프라도 5개 정도로 다양한 학설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논의는 “수프라 vs. 인프라”가 아니라, “수프라 군(群) vs. 인프라군(群)”의 논의였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신학자들이 단지 하나의 수프라, 하나의 인프라만 주장했을 리는 없지요. 다양한 변종들이 있었습니다.
3. 17세기 이후 20세기까지도 지속된 이 수프라/인프라 논의에서 수프라와 인프라를 대변했던 사람들은 이러합니다.
수프라(타락전 선택설): Gommarus, Maccovius, Bucanus, Voetius, Twisse, Comrie, Abr. Heidanus, Fr. Burmann, Ph. Naudaeus, Abraham Kuyper, G. Hardy. Kersten, C. Steenblok, Hardy. Hoeksema.
인프라(타락후 선택설): A. Walaeus, Maresius, Marck, Heyns, Polanus, Wollebius, J. J. van der Schuit, W. D. Jonker
4. 바르트는 칼뱅, 츠빙글리, 루터 등은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지만 아마도 수프라에 속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추측합니다(『교회교의학』 II/2, 한역 p. 142).
그러나 다른 학자들(J. van Genderen, W. Hardy. Velema)은 칼뱅이 수프라적인 표현을 쓴 적이 있지만(『기독교강요』 3.21.5), 칼뱅 신학의 전체 경향은 인프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Concise Reformed Dogmatics, p. 229; Polman, De predestinatieleer van Augustinus, Thomas van Quino en Calvijn, 1936, 377).
바빙크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인프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Reformed Dogmatics, II, 영어판 p. 362).
참고로, 멀러 교수는 이 논쟁이 있기 이전의 사람들은 수프라/인프라의 구도 속에 넣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5. 바르트의 경우는 “정화된 수프라”(a purified supralapsarianism)의 견해를 자신의 견해처럼 제시하였습니다(『교회교의학』 II/2, 한역 p. 157). 그러나 그 견해가 기존의 수프라와 다르게수정된 버전이기 때문에 수프라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게다가 바르트는 인프라에 대해서도 아주 우호적으로 많이 얘기하고 있고, 인프라의 장점을 많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바르트의 경우, 수프라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르트의 견해는 --다른 많은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독자적(sui generis)입니다. ^^; 그의 견해는 『교회교의학』 II/2, 141-161쪽 전체를 봐야 알 수 있는데, 읽어보면 역시나 아주 왔다 갔다 합니다. 바르트 신학의 표현주의적 변증법(expressionistic dialectic)적 특징이 여기서도 빛을 발합니다. ^^;
[보론2] Meijering(마이어링)은 바르트의 견해를 “극단적인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die radikalere supralapsarische Position)이라고 부릅니다. E. P Meijering, Von den Kirchenvätern zu Karl Barth: das altkirchliche Dogma in der “Kirchlichen Dogmatik” (Amsterdam: Verlag J.C. Gieben, 1993), 424. 즉, 기존의 수프라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수프라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고, 동시에 인프라의 장점도 무시하지 않는 견해”라고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6. 바빙크는 물론 바르트처럼 주저리주저리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고, 자기 견해를 좀 더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의 결론은 “수프라와 인프라 모두 성경의 진술들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빙크를 수프라와 인프라 양쪽 중에 하나로 몰아붙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주제로 책을 쓴 W. D. Jonker(용커)는 바빙크가 그래도 인프라로 기울어져 있다고 결론내렸습니다(Uit vrye guns alleen [오직 그저주시는 은혜로서만], 1989, p. 69).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결론은, Jonker 자신이 인프라이기 때문에 나온 결론인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학자들은 자기가 수프라를 지지하면 역사상 유명한 신학자들을 다 수프라로 몰아가고, 자기가 인프라를 지지하면 그들을 인프라로 몰아간다는 사실입니다. ^^; 이런 것은 신학자들이 자유의지론을 다룰 때도 여전히 관찰할 수 있지요(자유론자와 양립론자 양측 모두에서).
유해무 교수님은 박사 논문에서 이 주제를 다루셨는데, 바빙크가 똑 같은 표현을 한번은 수프라를지지하기 위해, 한번은 인프라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개인적 대화에서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 교수님의 결론도 역시, 이 수프라/인프라 논의는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성경의 진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보론3] van Genderen(판 헨더런)과 Velema(펠레이마)의 입장은 인프라에 가깝다고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개혁파 신앙 고백서들도 인프라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수프라, 인프라 양측 모두 개혁파 신앙 고백서들에 서명한 것을 보면, 개혁파 신앙 고백서들은 이 문제에 있어 중립적이라고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7. 따라서 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르트 자신은 “정화된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말하였지만, 그 표현만으로 그를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쓴 표현 그대로, “정화된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하거나, “타락후 선택론의 장점을 무시하지 않는 고유한 타락전 선택론자”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2) 바빙크 자신은 타락전 선택론과 타락후 선택론 모두의 약점을 인식하고 있어, “타락전 선택론과타락후 선택론 사이에 성경적 균형을 찾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이러한 바르트와 바빙크의 수프라/인프라에 대한 견해 차이가 그들의 일반은총론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니오”(Nein)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수프라/인프라 양쪽 모두 하나님의 일반은총/특별은총에 대해 다양하게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1. J. van Genderen and W. H. Velema, Concise Reformed Dogmatics, trans. Gerrit Bilkes and Ed M. van der Maas (Phillipsburg N.J.: P&R, 2008), 228–31
2. 바르트, 『교회교의학』, II/2, 141-61.
3. Bavink, Reformed Dogmatics, II, 361-70.
4. 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은총』(권혁민 역, 새물결플러스, 2012), 제4장 “타락 전”인가, “타락 후”인가?: 일반 은총에 대한 주요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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