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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예정,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0)

예정,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0)

우리의 현주소
‘예정’은 과거 70~80년대에 그랬던 것만큼 자주 거론되는 주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도의 책임과 관련하여, ‘예정’이 언급된 성경 구절의 해석이나 적용과 관련하여, 또 교파 간의 차이―특히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와 관련하여, 이 주제를 간과할 수가 없다. 특히 성경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살피는 이들, 교리 공부를 통해 궁금증을 갖게 된 이들, 그리고 인과론(因果論, causation/causality)이나 인간의 자유의지 등 철학적 주제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로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주제는―다른 모든 신학적 이슈가 그렇듯 ―궁극적으로 인간의 합리적 이해나 설명을 벗어나는 사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제와 관련해 자신(및 반대편)의 입장이 무엇인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자기 주장의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증거와 신학적 추론에 의해 어디까지 (혹은 무엇을) 진술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논리적 작업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말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역시 지금까지 다루었던 거의 모든 주제에서 그랬듯 이 글에도 한계가 있다. 세 가지 사항만 언급하도록 하자. 첫째, 지면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관련성이 있는 모든 성구를 자세히 검토할 수가 없다. 둘째, ‘예정’의 주제를 밝힘에 있어서 긴밀히 연관되는 다른 교리적․신학적 사안들―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 중생(regeneration)과 회심(conversion) 등―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셋째, 예정과 연관된 설명 과정 가운데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철학적 개념들―인과론, 결정론(determinism), 자유 의지(free will/freedom) 등―을 파헤칠 수가 없다.
필자는 이 글에서 ‘예정’(predestination/foreordination)을 구원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주-1). 또 구원으로의 예정만을 다루기 때문에 ‘예정’과 ‘선택’(election) 사이에 교호적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겠다(주-2).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일부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선택”(주-3)―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이다.
무조건적 선택론의 내용과 그 성경적 근거
우리의 구원이 창세 전 하나님의 예정/선택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구절로서 바울 서신의 내용이 있다.
엡 1:4-5, 11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11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창세 전에)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상의 내용에 의하면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 예정과 선택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정/선택에 관한 설명이 이로써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사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선택한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 신학 체계의 양대 갈래인 칼빈주의(Calvinism)(주-4)와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주-5)가 등장한다. 전자는 예정/선택의 근거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 자체에 있고 인간의 어떤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본 반면, 후자는 예정/선택의 근거가 복음에 대한 인간의 긍정적인 반응에 있다고 생각했다. 칼빈주의에서는 예정/선택이 그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고 인간에 관한 어떤 조건과는 무관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소위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을 주장하게 되었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인간이 복음을 들으면서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또 그런 미래의 사태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지하신 것)을 예정/선택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예지 예정(predestination/election based on God's foreknowledge of future human action)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입장을 다시 한 번 더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조건적 선택론은 하나님께서 인류 가운데 일부를 (그가 가진 어떤 자격 조건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작정된 대상이 복음을 들을 때 필히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그들에 한하여서만 불가항력적 은혜를 베푸신다는 입장이다. 반면 예지 예정론은 인간은 외부의 어떤 간섭도 없이 (심지어 하나님의 간섭조차 배제됨) 자신의 자유 의지만으로 복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어떤 인간이 복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할지를 창세 전부터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긍정적으로 반응할 이들을 창세 전에 예정/선택의 대상으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자들은 무슨 연고로 무조건적 선택론을 주장하는가? 역시 바울 서신에서 해답을 찾는다.
롬 9:10-11, 15-16 10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 의도는 무엇을 원인으로 갖는가? 11절에는 두 가지 사항이 후보로 거론되어 있다. 하나는 “행위” 곧 “인간의 어떤 행위”이다. 이는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의도가 인간의 어떤 행위를 근거로 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라고 함으로써 이것을 부정한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는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라는 표현이 제시하는 바이다. 이것은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의도가 하나님 자신―좀 더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초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같은 설명은 15절에도 반복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그에 나타난 구원 의지는 인간의 바람(“원하는 자”)이나 노력(“달음박질하는 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하나님”)에 기초한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론의 성경적 근거로서 롬 9:11, 16보다 더 명료한 성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롬 9:11, 16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나면 다음의 구절들도 그 의미가 살아난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상기 구절들은 우리가 구원으로의 예정을 입은 것이 그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았음을 입을 모아 밝히고 있다.
이렇게 무조건적 선택이 역사 선상에서 실현되는 모습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그려 주고 있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비록 상기 구절에 “선택”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됨”이 곧 구원으로의 선택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지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와 그에 대한 검토
지금까지 필자는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관련하여 무조건적 선택론의 내용과 그 성경적 근거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로써 무조건적 선택론의 성경적 합당성이 충분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지 예정론의 주창자 역시 성경적 근거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합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예지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으로써 그 문제점―만약에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을 밝혀야 한다.
우선 예지 예정론에 대한 오해가 많기 때문에 이 입장의 정확한 주장을 다시 한 번 더 천명하고자 한다. 예지 예정론이란 인간은 외부의 어떤 간섭도 없이 (심지어 하나님의 간섭조차 배제됨) 자신의 자유 의지만으로 복음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어떤 인간이 복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할지를 창세 전부터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긍정적으로 반응할 이들을 창세 전에 예정/선택의 대상으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복잡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은, 결국 예지 예정론은 세 요소―(i)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 (ii) 하나님의 예지, (iii) 하나님의 예정/선택―의 질서 정연한 열거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 세 요소들 사이의 우위성(우선순위) 파악이 이 이론 이해의 관건이 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비록 (i)이 시간적으로는 (ii) (iii)보다 더 나중에 발생할 사태이지만, 논리적 우위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i) → (ii) → (iii)의 순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예지 예정론의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명제가 등장한다. 첫째, 하나님의 예정은 자신의 예지에 기초한다 ((ii)와 (iii) 사이의 논리적 관계). 둘째, 복음에 대한 반응 촉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조차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보여 준다 ((i)과 (iii) 사이의 논리적 관계). 이제 이 두 가지 명제들을 하나씩 검토함으로써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예지 예정론의 타당성 여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하나님의 예정은 자신의 예지에 기초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다음과 같은 성구 내용에서 찾는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롬 8:29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했고, 벧전 1:2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을 예지에 기초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처음 인상과 달리 예지 예정론을 지지해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롬 8:29의 “미리 앎”은 예지 예정론에서 주장하는 예지/미리 앎과 다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미래 행위에 대해 안다는 뜻[“명제적 앎”(propositional knowledge)]이 아니고 어떤 대상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뜻[“인격적 앎”(personal knowledge)]이다. 만일 전자의 의미에서 “미리 앎”을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미리 아는 것이므로 (왜냐하면 그는 전지한 분이니까)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해서만 “미리 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대상의 미래에 대해 미리부터 알고 있다는 식의 명제적 앎이 아니고 실상은 인격적 앎을 나타내는―그 대상에게만 구원을 베풀고 그와 사귀겠다는 의도가 담긴― 표현이다(주-6).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는 “하나님과 그가 구원을 베풀고자 하는 대상 사이의 예정된 교제, 또 그러한 교제가 실현되기 이전부터 그 교제를 시작하려는 하나님의 자기 결정(self-determination)을 가리킨다.”(주-7)
이것은 벧전 1:2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벧전 1:2가 “곧 너희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줄로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는 긴 어구의 생략적 표현이라면 모르지만 그 점이 입증되지 않는 한, 이 경우도 명제적 앎보다는 인격적 앎을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지 예정에서 요구되는 예지는 인격적 앎이 아니라 명제적 앎으로서, “어떤 이가 복음을 듣고서 긍정적으로 반응하리라는 것을 미리 아는 일”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채워질 수 없는 것은 롬 8:29와 벧전 1:2에서의 예지가 인격적 앎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롬 8:29나 벧전 1:2은 예지 예정론에서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명제적 앎을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내세워 예지 예정론의 성경적 기초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둘째, 복음에 대한 반응 촉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조차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선택의 자유(주-8)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런 명제가 복음 전도자의 권유 내용으로부터 추론되는 바라고 주장한다.
막 16:15-16 15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행 16:30-31 30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위의 내용에 의하면 복음 전도자는 분명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믿으라!”는 명령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 명령이라는 것은 그 명령을 듣는 대상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이 주어져 있을 때에만 명령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된다. 만일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데 “~하라”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이는 매우 불합리하고 잔인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믿으라!”라고 명령을 베푸시는 것은, 어느 인간에게나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있는 것이고, 구원과 멸망 가운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는 셈이다. 만일 인간에게 이런 능력, 자유 선택의 자유가 제약을 받고 있든지 결여되어 있다면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조차 인간의 반응 능력과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에 부정적으로나 긍정적으로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막 16:16이나 행 16:31 같은 식의 반응 촉구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응수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한 택자(the elect)의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복음을 듣는 순간 (혹은 그 직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성령으로 역사하여 중생을 허락하시면 (cf. 행 16:14)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택자는 중생한 그 순간 복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할 능력과 자유를 부여 받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것(주-9)은 택자가 아닌 비신자의 경우이다. 칼빈주의 교리에 의하면 그들은 죄 가운데 죽어 있기 때문에 (엡 2:1) 복음에 반응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을 향해 “믿으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강력한 도전으로서 답변이 용의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응수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주-10). 아이언 머리(Iain H. Murray) 같은 이는 비록 이 두 가지 사항―전적 타락으로 인한 비신자 편에서의 반응 불가능 및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라는 초청/명령―이 우리의 인식 수준에 비추어 모순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합리적․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 들지 말고 그냥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주-11).
머리의 답변을 좀 더 발전시켜 보자. 예수께서는 아직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그 가운데에는 신적 선택의 대상이 아닌 이들도 들어 있을 터인데)을 앞에 놓고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i)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 곧 선택의 대상이 된 이들이 있다 (요 6:37; 10:29; 17:6; 9, 24).
(ii)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은 예수께 나아올 것이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iii)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가 아니면 예수께로 나아올 수 없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이상의 내용에 기초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이들은 예수께 나아올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들을 보고 예수께 나아오라고 권면이나 초대를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비택자를 포함한) 모든 비신자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으로 [“누구든지”] 자신에게 나아오라고 복음을 전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 11:28; 요 7:37), 믿지 않는 행위에 대한 경고까지도 불사하셨다(요 8:24). 또 비신자들이 자신에게 나아오지 않는 이유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비신자들 자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이 경우만큼은) 합리성을 운운하면서, (i)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조차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비신자에게 “믿으라!”고 권할 수 있다 라든가, 혹은 (ii) 인간에게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비신자에게는 “믿으라!”는 초청을 할 수가 없다 라든가 하는 식의 주장만을 할 필요가 없다. 비록 논리적으로 조화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편에서는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서 또 다른 입장을 취할 수―(iii) 인간에게는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신자에게도 얼마든지 “믿으라”는 명령을 발할 수―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머리의 이러한 제안을 해결책으로 인정한다면, 복음에 대한 반응 촉구가 인간에게 꼭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주-12).
필자는 지금까지 예지 예정론의 두 가지 명제―(i) 하나님의 예정은 자신의 예지에 기초한다. (ii) 복음에 대한 반응 촉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조차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보여 준다―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임을 설명했다.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예정/선택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노력이나 책임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작정해 놓으셨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터이니, 우리 편에서 무슨 수고를 한다든지 애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이 사안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합리적 수준을 뛰어넘는 신비(mystery)의 영역에 직면하게 마련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이성이 길잡이가 된다.
상기한 질문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의 예정/선택이라는 사실과 역사선상의 실현 사이에 구별을 짓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은―매우 상식적이지만―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전자는 창세 전 하나님의 마음에 담겨 있던 바이고 후자는 창조 (시간 포함) 이후 피조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둘째, 전자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후자는 피조물―특히 인간―이 경험하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선택이 이루어지는 데는 인간이 연루되게 마련이요, 인간이 자동 기계(automaton)나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 이상 그 실현 과정 가운데 이성적이고 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로서 참여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예정론과 절대적/극단적 결정론(determinism)이나 운명론(fatalism)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선택이 인간의 노력이나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의 자연스런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정/선택의 역사적 실현과 관련하여 인간의 노력이나 책임이 발휘되어야 할 분야는 두 가지―복음 전도 및 구원의 과정―이다.
(1)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복음 전파의 노력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지만 그것이 역사 선상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능동적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복음 전파의 책임에 관해서는 주님 자신이 먼저 강조하셨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눅 24:46-48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바울 사도는 무조건적 선택론의 근거로서 롬 9:11~16, 엡 1:5, 9 등의 내용을 제시한 “예정”의 원조였지만, 동시에 복음 전도와 관련해서도 엄청난 강조를 했다.
롬 10:14-15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않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말이여!”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특히 복음 전파가 사도로서 자신의 정체를 확립하는 핵심적 책임임을 누차에 걸쳐 밝혔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고백한다.
롬 11:13-14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
고전 9:19-23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선택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의 역사적 실현을 위해 결코 복음 전파의 책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구원 과정에의 참여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지만 그것이 역사 선상에서 실현되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과 관련하여 첫 출발부터 시작하여 필요한 경우마다 마땅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예정/선택이 등장할 때 구원의 서정(주-13)에 해당되는 사항들도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엡 1:4-5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 1:10-11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에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상에 언급된 구원의 단계/과정을 찾아 순서대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이―(i) 믿음(살후 2:13) → (ii) 하나님의 자녀가 됨(엡 1:5) → (iii) 거룩하게 됨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엡 1:4; 살후 2:13; 벧전 1:2) → (iv) 성도의 견인(벧후 1:11)―정리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선택을 역사 선상에서 실현하기 원한다면, 이런 구원의 단계/과정/양상과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주-14).
먼저, 우리는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믿음은 그 근본에 있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바이지만 동시에 우리 편에서 행사해야 하는 심령의 상태이기도 하다.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행 16:31, 34)부터 시작하여 구원의 완성에 이를 때(히 11:6; 고전 13:13)까지 필요한 사항이다.
롬 10:9-10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마도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영역은 성화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화란 칭의와 달리 우리가 실제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으로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평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화에는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반복적이고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끝으로 성도의 견인(堅忍)이란 그리스도인들이 분투함으로써 구원의 최종 상태에 이르게 되는 일을 말한다. 이 역시 하나님의 끝까지 보존하시는 역사 때문에 가능하지만, 동시에 우리 편에서의 노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 6:11-12 11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예정/선택을 역사적으로 실현하는 일과 관련하여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력과 책임―믿음에 있어서, 성화에 있어서,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예정/선택이라는 주제가 인간의 노력이나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설명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주제를 이렇게 이론적․논리적 측면에서만 풀어가는 것은 성경의 진정한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대한 확신의 차원에서(롬 8:28~39) 예정과 선택을 논했고(롬 8:29~30, 33),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송영을 목적으로 하여(엡 1:6)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이야기했다 (엡 1:4~5). 우리 역시 비록 예정의 문제를 이론적 측면에서 다루지 않을 수는 없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바울의 경우에서와 같이 예정이 언급되는 이러한 확신의 차원과 찬미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송인규 교수 (합동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