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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바빙크의 개혁교의학_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전체에서 #그리스도_능동적_순종의_전가_교리가 개혁파의 핵심 교리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아래는 개혁교의학에 나오는 인용문들입니다. 물론 본문 캡쳐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첨부된 사진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명백한 것을 애매모호한 말로 흐리는 짓을 삼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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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음기간에 루터파신학자들사이에 제기되었던다양한논쟁들은 아 그리콜라의 율법에 대하여, 오시안더의 칭의에 대하여, 아이피누스의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대하여, #파르시모니우스의_능동적_순종에 대하여, 멜랑흐톤과 필립파의 아디아포라, 신인협력설, 그리고 크립토 칼빈주의에 대하여, 마요르의 선행 공로에 대하여, 플라키우스의 원죄에 대하여 논쟁했는데, #이_모든_것은_마침내_1580년의_일치신조_Formula_Concordiae에_이르러_해결되었다(개혁교의학 1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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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개혁교회의 신학의 발전은 그와 같았다. #프랑스_쏘뮈르_대학은_온갖_충격적인_주장의_중심지였다. 존 카메론은 헤르보른의 #피스카토르와_연계하여_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의_전가를_부정할_뿐만_아니라, 게다가 의지는 항상 지성을 따르기에 중생에서의 의지의 굴복은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가르쳤다(개혁교의학 1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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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리스도의_사역에_관한_교회의_가르침에_대한_반대는 단지 신비주의적인 진영만이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진영에서도 등장했다. #이_범주에_속하는_것으로_여겨질_수_있는_것들은 그리스도가 단지 그의 인간적인 본성에 따라 우리의 중보자이며 우리의 의로움이라는 스탄카루스의 가르침, 그리고 또한 카르크와 #피스카토르에_의한_능동적_순종에_대한_부인으로서, 피스카토르는 1604년의 한 편지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해설했다. (개혁교의학 3권,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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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능동적 순종과 관련하여,이것은 훨씬 더 가능성이 적다. (개혁교의학 3권, 424, 소시누스주의자들의 논변 중에서) ... 속죄 교리에 대한 파우스투스 소시누스의 비평은 매우 신랄하고 완벽해서 후기의 반대자들은 다만 그의 논증들을 반복할 뿐이었다. #항변파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여전히 견지하려고 노력했으나, 사실상 이것에 대해 제기되었던 모든 반대를 수용했다. #그들은, 로마교와 루터파처럼,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속죄했다고 가르쳤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죄에 대해 정해 놓았던 모든 형벌을 받았으며, 영원한 죽음을 당했고, #그의_능동적_순종은_대리적이었다는_것을_부인했다. (개혁교의학 3권 425, 소시누스주의자나 항론파, 곧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다는 말, 해시태그된 주어를 따라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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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 만장일치로 명백하게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개혁교의학 3권, 462)... 또한 개신교도들 가운데 신비주의자들, 재세례파들, 헤른후트파 등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는데, #이_견해들은_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을_정당하게_취급하지_못한다
(개혁교의학 3권 463-4, 신비주의자나 제세례파, 경험적 경건주의자들이 부정하는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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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혁파는 그와 같이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_참된_인간으로서_율법을_준수하며#무엇보다도_하나님을_사랑하고_이웃을_자신처럼 #사랑할_의무를_확실히_지녔기_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스카토르의 견해를 정당하게 거부했다. 왜냐하면, 첫째 성경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사역을 단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고, #그가_자신을_위해서_완수한_삶의_순종과_우리를_위해_성취한_죽음의_순종_사이를_결코_분리시키지_않기_때문이다. 성부가 그리스도에게 부과하고 그 자신의 죽음으로 완수한 것은 단일한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섬김은 자신의 영혼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줌으로써 성취되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력하게 강조했던 바울조차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체적인 순종이 아니라, #순종의_완성으로_여긴다. (개혁교의학 3권, 463, 개혁파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거나 빼는 게 결코 아니다, 십자가는 순종의 완성이다.).

#ㅈㅇㅊ은_그리스도가_자신을_위해_순종하심을_이단으로_삼은_바_있다_그의_주장을_따르면_바빙크도_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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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_구분되지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언제나 일치한다. #능동적_순종은_수동적_순종의_그_어떤_외적_부가물이_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개혁교의학 3권 486)

#ㅈㅇㅊ은_능동적_순종은_단지_부과물일_뿐이며_거기서_아무런_의도_발생하지_않는다고_주장함
#보시다시피_바빙크는_정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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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율법주의가 한편에서 종교개혁의 원리들을 부패시켰던 것처럼, 수시누스주의와 항변론의 영향 아래서 개신교회에 침투했던 율법주의는 다른 한편에서 그 원리들에 더 심한 손상을 입혔다. ... 율법주의의 합리주의 경향은 원리적으로 피스카토르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아니라 오로지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비록 프랑스 개혁파 교회의 갑 노회와 로슈엘 노회에서 거부되었을지라도... (개혁교의학 3권,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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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단지 수동적 순종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도 완수했다.... 은혜언약은 방법상 행위언약과 다르지만, 목적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행위언약에서 약속되고 은혜언약에서 주어지는 것은 동일한 자산이다. 은혜은 자연을 회복하고 자연의 최고의 정점까지 인도하지만, 자연에 다른 새로운 요소를 더하지 않는다(개혁교의학 3권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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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해될 때, 이것이 비록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더라도, 칭의의 요소들이 정확하게 대등하지 않고 또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사이를 너무 예리하게 구분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롭게 하다'라는 단어를 '의로 여기다'와 교체하는 것처럼, #칭의를_그리스도의_순종_전체의_전가로_정의하는_것이_더_낫다. 그리고 칭의의 두 부분을 죄사함과 영생에 대한 권리의 승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이_유익들은_그리스도의_순종_전체의_전가_위에_세워졌기_때문이다. (개혁교의학 4권,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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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에서_그리스도의_수동적_순종만이_아니라_능동적_순종도_인간에게_전가된다(개혁교의학 4권, 752)

ㅈㅇㅊ은 능동적 순종의 의는 전가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제 바빙크도 이단인가? 프롱크, 후크마, 벌코프, 이젠 바빙크까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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