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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시골청년의 글_그리스도 능동적 순종의 전가

이제 기댈대라곤 칼빈밖에 없으니 거기 기대고 싶겠지만 어쩌나 칼빈은 품을 내주지 않는 것 같네 ㅎ

[바른 믿음]에 [시골청년]이란 아이디로 [독자마당]에 아래 글이 올라왔다. ㅈㅇㅊ은 양심이 있으면 지우지 말고 제대로 검토하길 바란다. 아마도 이 글을 지운다면 제대로 된 신학적 논의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음해나 협잡 그리고 명예훼손에나 관심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혹시나 삭제를 대비해 캡쳐도 함께 올린다.

내 페북 글을 가져다가 나를 [무시기 목사]라고 칭했다. 나를 차단 해뒀더니 글은 어디서 얻는지.. 그의 명예훼손은 여전하다.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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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_능동_수동_순종은_스코틀랜드_장로교회의_신학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376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참여하였다가 약 10년 후에 웨민고백서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신앙고백서 '사보이 선언문'을 작성한 회중파 청교도에 의해 본격적으로 능동적-수동적 순종 개념이 대두되었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는 정통 개혁교회 역사의 라인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23
<셋째,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최초의 어휘를 회중파 청교도의 신앙선언문 사보이 선언에서 찾았고, 대표적인 회중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에게서도 발견했다.>

정이철 목사와 고경태 목사는 능동, 수동 순종 개념이 회중파 신학에서 처음 나타나는 듯이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려면 먼저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자들이 그리스도 능동, 수동 순종을 가르쳤는지 안 가르쳤는지를 찾아봐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거기까지 찾아볼 시간이 없었나 보다. 그래서 대신 찾아보았다. 안타깝게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총대로 참여한 사무엘 러더포드도 능동, 수동 순종을 가르쳤고, 또 최초의 웨민 신앙고백 해설서 저자인 데이비드 딕슨도 너무나 분명하게 능동, 수동 순종을 가르쳤다. 그 뒤로 피셔든, 존 브라운이든, 토마스 보스턴이든, 호라티우스 보나든, 제임스 뷰캐년이든, 윌리엄 커닝햄이든, 로버트 맥체인이든, 자기네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조들의 신학을 따라 능동, 수종 순종을 가르쳤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Christ’s active obedience, how it is meritorious for us.
Now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fals under a twofold consideration. 1. As the Man Christ’s perfect conformity to the Law of God, so as man he was obliged to do and suffer all that he did and suffered, even to lay down his life for man......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and all that Christ did and suffered were performed by him in his state of humiliation."
(The Covenant of Life Opened, Samuel Rutherford, 1655, p. 225-226)

“Well then, do not some, otherwise orthodox, err, who deny Christ's active obedience to be a part of his satisfaction, performed in our place?
Yes.
By what reasons are they confuted?
1st, Because the active disobedience of the first Adam made us all sinners;
therefore we must be made righteous by the active obedience of the second Adam, Rom 5:19.......
5th, Because the passive obedience of Christ, was not in itself merely and purely passive, but his active obedience did challenge the chief and principal part in it, Psalm 40:7."
(Truth’s Victory over Error, David Dickson,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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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_하지_않은_말은_하지_않아야_예의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32

<1)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가 성립되려면 인류에게 처음부터 율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칼빈은 십계명과 율법이 모세 시대에 주어졌다고 보았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7.1.).>

정이철 목사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칼빈주의자들이 그리스도 능동, 수동 순종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자꾸 칼빈한테 기대려 하지만, 칼빈마저도 기댈 곳이 못 되는 것 같다. 칼빈한테 기대고 싶으면, 칼빈의 글을 더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칼빈의 창세기 2:16-17 주석 내용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당신께 합당한 권리를 지키시려고 #처음부터_사람에게_율법을_부과하셨다는_사실을_부인하지_않는다. ... 하나님은 사람(아담, 글쓴이 첨가)이 당신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사람(아담)에게 #법도를_주셨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 문제는 사소해서 가볍게 넘기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에게 율법을 부과하셨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해서 더 말하면 입이 아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칼빈은 이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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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_하지_않은_말은_하지_않아야_예의_2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40

<'칼빈주의'라는 말로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구원론에 관해서 칼빈과 달리 예수께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백성의 권리와 자격(의)를 전가하여 주었다는 성경에 없고 칼빈에게도 없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정이철 목사는 본인이 들어야 할 말을 본인 입으로 하고 있다. 나는 바울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칼빈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셨고, 그것이 믿는 우리에게 의가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말하고 있다. 칼빈의 에스겔 18:17 주석 내용이다.

"엄밀히 말하면, #율법을_지키는_것이_의다. 누군가 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_알맞은_정의는_율법_준수이다......바울은 로마서 2:13에서 자기 전 생애를 하나님의 율법 순종에 맞추는 사람이 의롭다고 말한다. 요한도 요한일서 3:7에서 의를 행하는 자가 의롭다고 말한다......의를 행하는 사람은 의롭다. 우리 중에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지만 #율법을_성취하신_그리스도께서_하나님_앞에_의롭다_여겨지신다......이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진다."

칼빈은 율법 준수가 의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기심 받았고,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말한다. 너무 똑똑히 말해 달리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