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도 유익하다. 미숙한 사람은 반대를 못 견뎌한다. 그래서 주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다 물리친다. 성군 곁에서 충신이 나고 폭군 곁에서 간신이 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부정도 유익하다. 늘 긍정만 있으면 그걸 긍정 왜곡이라고 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뭐든지 삐둘게만 보고 사시 뜨고 보는 것도 문제다.
성숙과 성장이란 이처럼 두 가지가 조화를 이뤄 가는 것이다. 유아가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잘 견디지 못하는 까닭은 몸이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에 노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이란 100%의 무균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런 환경에 잘적응하는 것이 건강이듯이, 인간의 마음도 건강하려면, 반대를 잘 용납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토론이란게, 서로를 설득하고 상대의 생각을 더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치열해 질 수는 있지만 적절한 선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꼭 상대에게 승복을 받아내고, 내 방식으로 설득하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 사람들은 미숙한 사람들이다. 무슨 전체주의 국가도 아니고 아니 심지어 전체주의 국가에서 조차 사람은 서로 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게 현실인데, 그걸 인정 못하니 미숙이다.
자아가 아직 아동기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선생이다. 내가 잘 보지 못하는 면을 그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것도 미숙이다. 그러나 내가 보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인정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자아가 미숙할수록 이 유연성(flexibility)이 떨어지고 경직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는 분들 중에 상당히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믿는 일과 옛지계석을 옮기지 않는 일들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논어의 자로 편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말이 나온다. 해석을 하자면, 군자들의 사귐은 서로 진심으로 어울려 조화롭지만 의리를 굽혀서까지 모든 견해에 ‘같게 되기’를 구하지는 않는 데 반해, 소인배들의 사귐은 이해가 같다면 의리를 굽혀서까지 ‘같게 되기’를 구하지만 서로 진심으로 어울려 조화롭지는 못하다고 한 것이다.
얼마든지 화합하고 조화로우면서도 같아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천국이 전체주의 국가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이런 지리하고도 어려운 구원의 과정을 우리에게 허락했을리가 없다. 잘 못할 때마다 벼락치고 당신의 생각과 다를 때마다 윽박질러서 자기처럼 만들면 끝이다. 누가 그 전능과 위엄 앞에서 반항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인내하시고 기다리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길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러하길 바라시며 우리와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는 것이다.
나는 천국이 신학적 일치만 있고 다양성이 없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천국엔 신학적 일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모두가 하나님을 똑같이 같은 분량과 같은 방면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더 많이 알터이고 어떤이는 다른 방면으로 알터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서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
2012.04.14 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