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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복음과 율법의 균형

복음과 율법의 균형
서창원 목사
이끄는 말
본 논고를<복음과 율법의 균형>이라는제목으로 정한 것은 복음과 율법이라는 주제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복음과 율법이라는제목은 어떤 측면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뉴앙스를 담고 있는 인상을 준다. 복음을 위하는 자들에게는율법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기 쉽고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무용성을 내세울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복음과 율법의 균형이라는 제목을가지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복음과 율법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하고자 한다.
복음과 율법의 문제는 교회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심각한 이슈이다. 사도행전에나타난 복음전파의 여정에서도 바울의 정거한 복음과 유대인들의 율법준수주의가 항상 부딪혔음을 볼 수 있고 급기야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어디까지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시켜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끝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늘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빌립보서등 바울서신의 상당부분이 복음과 율법의 균형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역시 약간은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수밖에없었던 것이다. 개혁자들의 가르침속에는 항상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교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안에서도 복음과 율법의 균형문제는 심도 있게 가르쳐져야할 필요성이 있다. 일부 보수주의 교회 성도들은 지나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여 마치 율법이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는우를 법하고 있고 동시에 지나치게 율법주의화 하는 무리들도 없지 않아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성경은둘 중의 하나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만일 은혜만이 전부라고 여긴다면 예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폐기시켰을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율법의 중요성을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율법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은혜아래 거하기 때문이다. 본 논고는 이 두 주제의 균형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고 한다. 먼저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그리고 성도의 삶속에서 율법의 필요성을 지적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선포와 그리스도인의 성장차원에서의 율법을 이야기하고 글을 맺으려고 한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복음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복음을받아드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신자들 중에 복음을 바르게 설명하는 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복음을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이 말속에 복음의핵심적인 가르침이 다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의롭다 하심이 무엇인가?라는 소요리문답 33번의 설명을 보자: “의롭다하심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의 행위로서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자기 앞에서 우리를 옳게여겨 받아주시는 것인데, 다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시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 의를 받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루터는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교리이며 그렇지 않으면 교회를 넘어지게하는 교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의 말처럼(갈 1:8) 하늘로부터 온 천사가 포기하라고 명령할지라도 감히 포기해서는 안되는 복음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의롭다하심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첫 번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다. 바울의 표현처럼 ‘모든인간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롬3:23). 즉, 인간이 기지고 있었던 의를 모두 상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의를 오히려 어기는 악을 저질렀다. 하나님이정해주신 의란 바로 십계명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의롭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설 수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누구든지그 이름을 믿는 자는 의롭다하심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중심적인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은 죄인들에게 의를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우리 대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충족시키신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소유한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죄인들에게 덧입혀진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 자들은 단지 죄 사함만 받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도 영원한 의를 선물로 받게 되고 결코 잃어버리지않는 구원의 갑주를 입게 되는 것이다. 죄인들이 이러한 축복을 누리게 된 모든 근거는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의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과 신조들의 가르침이다. 그런데요즈음은 교회들이 이것을 가르치지 아니한다. 상당수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하나님의 선언적인 칭의의 개념보다는공동체 관계로의 회복을 말하는 칭의로 정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회복개념이 아니라 오직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언적인 법적 칭의관이성경에서 말하는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의 뜻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이루어진은혜의 선언인 것이다. 법적인 선언으로서의 칭의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단순히 하나님과의 가족관계의 회복문제는 양자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지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어긴 죄인에 대한 심판석에 좌정해 계신 하나님의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를 다룰 때 반드시 인간의 죄악 됨과 하나님의심판 및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이 죄인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거나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에게 제공되는 복음이다. 그리스도는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셨다. 그의 죽음심과 그의 보혈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돌려놓으셨다. 이제 죄인들이 할 수 잇는 것이란 예수를 믿는 것이요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그 무엇도 첨가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무엇에 의한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율법이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의롭다함을 받게 된 우리들이라면 은혜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굳이 율법문제를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두 번째 사항이다.
2. 율법의 필요성
복음과 율법은 따로 떼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항상연계되어 있다.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복음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충된다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무용지물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주께서 스스로 선언하신 것과 같이 율법을 페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신것이다(마 5:17). 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동일한 사상을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심이니라”(롬 10:4) 그 결과 율법은 영예를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요구는 완전히 충족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그의 보혈로 의롭게 하실때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롬 3:26) 된것이다.
여기에서 몇몇 복음주의 사람들은 율법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지금도 율법은 필요한가? 라는 문제를 다루려고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율법은 은혜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율법에는 보통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첫째는 의식법으로제사와 관련된 부분이요 둘째로 사법적인 것과 마지막 도덕법이 있다.<복음과 율법>문제를 말할 때 항상 연관된 주제는 마지막 3번째인 도덕법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가운데 이 도덕법이 필요한가? 율법의 요구사항들은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에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열매이며 따라서 도덕법에 대한 강조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복음 선포에 있어서 율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죄가 무엇인지를 율법이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규정은 율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율법이 없는 복음은 완전하지 못하다. 물론 그와 반대로 복음이 없는 율법 역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 효력이 없다. 사실 율법이 주어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율법도 하나님의은혜의 산물이지 은혜는 없고 정죄와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도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우리의 말씀 선포 사역에 있어서 복음이왜 복음인지를 확증시켜주는 일은 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규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위하여반드시 율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죄문제와 죽음 및 지옥과 심판 또는 회개와 같은 주제들은 율법이 없이는밝히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다. 더더욱 현실의 메시지들은 이와 같은 면들을 간과시키고 있는데 이에 대한치유는 율법에 대한 올바른 사용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딤전 1:8). 따라서 우리는 도덕법을 하나님의 전 경륜 속에 포함하여 선포해야 한다. 
도덕법을 선하게 사용하는 첩경은 죄문제를 바르게 규정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불법이기때문이다”(요일 3:4). 사도들의 설교가운데 이 부분은종종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죄에 대한 목록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것들 외엔 다른 무엇이 아닌 것이다(롬 1:28-32,13:8-10). 이 모든 것들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이며 죄가 죄 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는 비기독교인들 에게도 죄인 것처럼 신자들에게도 죄이다. 하나님이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요구에 응할 때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율법, 즉도덕법이다. 바로 이러한 자각 위에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것이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시켜 준다. 바로 복음에로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는 율법이 나쁜 소식이지만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죄인들은 자신의 문제의 실마리가 무엇인지를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바로 율법이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율법은 잠자는 양심들에게 하나님의 심판대를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즉 영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피난처를 삼고 그에게 피하려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하여 아주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함이라”(갈3:24). 
이처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인간이 도덕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질 수 없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강조한다. 그러나이 사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은총이 없는 한 스스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에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성경에 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도여기에서 실패한 자들이다. 그 실패는 지금도 모든 세대를 초월하여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것이다. 착한 행동을 하여 구원에 도달하려고 하는 가련한 인간들의 허우적거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믿음뿐이다. 그 믿음을 가지는 길은 무엇을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바 선물인것이다.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은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것이었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다. 율법이그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죄인이 알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시켜 주는 것이다. 
대요리문답 96번은 이렇게 질문하며 답하고 있다: 
Q. 도덕적 율법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어떻게 유용합니까? 
A. 도덕적 율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유용한 것은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게 하며,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인도하거나, 혹은 죄의 상태와 죄의 길에 머물러있는 경우에는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하여 그 저주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신자들에게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하기 위한 적법한 가르침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죄인임을 알게 하고 그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어질 소망이 없음을 자각케 하며 결국 복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알게 해준다. 이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한가? 라는점이다.
3. 영적 성장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과연 율법은 필요한가?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본 논고의 소제목을<영적 성장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이라고 정한 것 자체가 이미 답을 제시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이 없는 기독교를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현실은 그와 같은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 필요 없다는 논리를 가리켜 우리는 Antinomianism,즉 도덕률 폐기론주의라고 부른다. 이 주장은그리스도인들은 도덕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옳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들은 생명의 은혜언약아래 있는 자들이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다(롬 6:14). 도덕법이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며 영생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필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치 초대교회의 한 이단 사상과 같은 구약의 필요성마저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유익하다’는 것은 어디에다 적용한단 말인가? 바울 당시에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로마서 15:4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명히율법은 필요한 것이다. 구원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법칙으로서 율법아래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전서 9:21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아래에있는 자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대요리문답은 이렇게 증거 한다: 
Q. 97 도덕적 율법이 중생한 자들에게 어떻게 유용한가? 
A. 중생 하여 그리스도를 믿어 행위의 언약인 도덕법에서 해방되었음으로 이로써 의롭다하심을 받거나 정죄를 받는 일은 없을지라도 모든사람에게 공통된 도덕법의 일반적 소용 외에 이 법을 친히 성취하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선을 위하여 도덕법의 저주를 참으신 그리스도와 그들이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감사케 하며 이 감사를 표시하려고 그들의 법칙으로서 도덕법을 더욱더 조심하여 따르게하는 특별한 소용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도덕법은 중생치 못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자들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심과 양심의 가책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생케 되어 오직 그리스도만이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에 대하여 우리는 죽은 자임을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법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이제 그 율법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에게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도덕법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게 된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엔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에게로 데리고 가셔서 이제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요 14:15) 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계명이 무엇인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우리의 이웃을우리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바울은 로마서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고 했다.한마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성도의의무인 것이다. 구원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주님의 경고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이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행동으로나 가르침으로나 도덕법의 어느 부분도 깨뜨려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장차 임할 세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나라에서 받게될 보상의 기준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고 지킴에 의하여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한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그를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게 하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삶의 규범인 율법에게로 인도한다. 그렇다고 해서우리들이 마치 우리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는 율법의 자랑을 내세우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가장 선한 일이란 사실 죄악덩어리 뿐이다. 이세상에 살면 살수록 추악한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죄인의 괴수의 모습 외엔 무엇을 보리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악이나와 함께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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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바울은 율법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율법을 다 마쳤다거나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회심한 이후일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것이다(롬 7:22-23).
바울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것이요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도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준 계명 특히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대요리문답 99번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도덕법의 요약이 바로 십계명인것이다. 필자는 성도들의 삶의 규범으로서 적어도 한 달에 한번씩은 십계명을 함께 공예배시간에 낭독하게한다. 우리의 삶의 거짓되고 죄악스러운 부분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며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만드는 유용함이 도덕법에 있는 것이다. 율법은 버려야할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선한 것이며 의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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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우리를 의롭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시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결코 해서는아니된다. 의롭다함을 입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율법을 지키도록 힘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위하여, 우리의 의로움과 경건생활을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표준이기 때문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바울의 고백이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
7:24).
바울은 자신의 실패를 변명한다든지 죄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좌절케 하고 있는 것은 그가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실수들을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것이다. 온전해지기를 원하였지만 온전함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오늘날 매우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죄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용하고 느슨한 우리들의 심령이 경건의 능력을상실케 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 그러나이 세상에서 그 유럽을 다 지키지 못함을 인하여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고백은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아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 것은 하나님을사랑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해서 원하는 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대하여 탄식하며 슬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다. 오히려복음적인 슬픔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슬픔은 구원문제까지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필요로 함을 깨우쳐 주는 것이여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롬 7:25에서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도덕률 폐기론주의자들의 심령과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심령은 아주 다르다. 전자는 우리의 양심을 풀어놓아 안주 안락하게 하며 자신의 결점과 죄악을 정당화시킨다.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을매우 즐거워한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양심의 자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된다. 복음적인 슬픔은겸손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 도덕법은 매우 유용한 것이다. 성화는 성도의 삶에있어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행해 감으로서 삶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그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율법의 높은 수준은 우리로 하여금 신선한힘을 위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게 한다. 율법은 우리 앞에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를제시한다. 율법은 모든 성도들이 수행해야할 하나님의 요구사항인 사랑을 규정한다. 도덕법은 이 세상에서 인간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온전한 법규이다. 행함이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명백한 진리를 기억하며 거룩함과 경건의 능력이 있는 영적인 힘을 우리의 삶속에서 증진시켜 나가는 복이 넘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