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標的)이란 그 자체로서는 본질이 아니다. 표적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실체(實體)를 드러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방언 자체가 본질이 아니며 가리키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방언은 그 자체로서 존재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은사인 것이다. 또한 표적의 수명은 수동적이다. 표적은 실체가 나타나면 그 존재의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에 수명이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은 그 표적(標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실체(失體)가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와 관련한 방언에 대한 견해 중에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견해는 상당히 주목할만하다. 존 맥아더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glw'ssa(글로싸)를 기록 할 때, 단수형과 복수형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미를 구분하기 위하여 의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외국어들(foreign languages)을 언급 할 때는 복수형(glwssw'n, glwvssai", eJteroglwvssoi", glw'ssai)으로 표현을 했고, 반대로 외국어들이 아닌, 이해 불가한 특정 음절이나 어절이 반복 되는 소리의 허위(虛位)방언은 단수 형태(glwvssh/, glw'ssan)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유일한 예외가 고린도전서 14장 27절 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한 사람이 한 외국어를 말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방언 은사(외국어)이지만 단수형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이를 지지해 줄 추가적인 근거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그것을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는 사례를 주장했다. 존 맥아더가 설명한대로 흠정역 성경도 원어 성경의 표기 형태의 차이를 고려하여 번역하였는데, 복수형으로 기록된 glw'ssa(글로싸)는 "tongues(복수형)"으로 번역하였고, 단수형으로 기록된 glw'ssa(글로싸)는 “an [unknown] tongue(단수형)”으로 번역하였다. 흠정역 성경 번역자들이 glw'ssa(글로싸)의 단수형태에 대해서 꺽쇠를 사용하여 “unknown(알 수 없는, 미지의)”라는 번역을 추가한 것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로 하는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언 표기 형태의 구분에 따라 고린도전서 14장을 해석 할 때 존 맥아더의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고린도교회의 방언 오용(誤用)과 남용(濫用)
고린도 교회에 방언이 고린도전서에서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을 할당해야 할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것은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오늘날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 문제는 ‘남용(濫用)’이라고 보는 견해와 ‘허위 방언 오용(誤用)’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물론 남용(濫用)도 없다고 볼 수 없으나 단순히 남용(濫用)이 문제가 되어서 바울이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 이유는 설득력이 적다. 하지만 오용(誤用)의 문제는 남용(濫用)의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다. 만약에 오용(誤用)되던 그 방언 은사가 위장된 허위(虛位)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거나 혹은 이교적인 요소가 혼재된 혼합(混合)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그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첫 번째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책망하였던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문제와 버금가도록 많은 분량을 할애했던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는 “방언 남용(濫用)”이 아닌 “방언 오용(誤用)” 혹은 “허위 방언 남용”이다.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 안에는 허위(虛位)방언이 존재하였고, 방언 오용(誤用)이 큰 문제가 됐던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방언 오용의 문제가 그토록 심각한 문제였던 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용하던 문제의 방언이 허위적이고 혼합적인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 역시 고린도교회의 전체적인 문제와 맞물린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시(市)의 상황이 이교와 우상숭배가 가득했던 곳이고, 고린도교회 안에 그러한 이교적인 요소가 침투하여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으므로 고린도교회가 오용하던 그 방언에도 이교적인 요소들에 잠식(蠶食)된 혼합적인 방언이었고,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성경적인 참 방언이 아닌 허위(虛位)방언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의 확실성은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고린도전서 14장 중에서 방언 은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주요 구절을 아래와 같이 해석 한다.
가. 고린도전서 14장 2절, 14절 해석 - 영으로 말하는 것, 영으로 기도하는 것
고린도전서 14장 2절과 14절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로 하는 기도는 비록 스스로 알아 듣지 못할지라도, 영은 기도하는 것이니 유익하다.”라는 식으로 오해(誤解)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그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절과 14절은 모두 부정문이다. 그리고 방언의 표기 형태가 단수형이다. 바울은 ‘영으로(만) 기도하는 것’을 긍정하고 있지 않으며, 지지하고 있지도 않으며, 권하고 있지도 않다. 긍정문이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영으로(만) 기도하는 것’을 부정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15절) 만약에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른 것이고, 옳은 것이며, 긍정적인 것이라면 바울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것이 대안을 필요로 할만큼의 오류가 있어서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으로만 기도하는 것’에 대한 바울이 제시하는 대안은 ‘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nou'"(누스)'는 지성(지각하고 이해하는 기능), 이성, 마음, 생각, 등의 사고와 판단을 하는 지성적 기능의 의미이다. 그래서 KJV(King James Version)성경은 이 단어를 “understanding”으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nou'"(누스)는 인간의 지성(知性)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바울이 말한 “영과 마음으로 기도하겠다(고전14:15).”는 것은 자신의 일부가 아닌 온전한 존재(몸과 영혼)로서 온전한 인격(지성, 감정, 의지)으로 기도하겠다는 표현이다. 기도는 전 존재가 인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감정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며, 의지만을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며, 지성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인격(신격)이신 하나님께 그 형상을 회복한 인간이 온전한 존재와 인격으로 간구(懇求)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 칼빈(John Calvin)은 제네바 교리문답 240문, 243문에서 기도를 할 때 반드시 영과 마음이 같이 요구되며, 영과 마음은 언제나 함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을 요구하시며, 마음의 동반 없이 하는 기도는 위선적인 것이기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저주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칼빈의 가르침은 형식적인 기도를 책망하는 것과 함께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동반되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가 잘못된 것임을 가르치는 내용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을 부정문(否定文)으로 해석하느냐 혹은 평서문(平敍文)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만약 평서문으로 해석한다면 “영으로 기도하지만 마음은 열매가 없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한 해석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부정문(否定文)으로 해석하면 의미는 분명해진다.
“영으로 기도하지만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전 인격적인 기도를 하지 못한 부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성(nou'")이 빠진 영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전 인격이 동원되지 못한 불완전한(잘못된) 기도이고, 당연히 지성(nou'")을 포함하는 인격(자신)이 열매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가정(假定)을 사용한 부정문(否定文)이다.
우리는 기도 할 때 영과 지성과 의지가 동원된 전 인격이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기도는 우리가 스스로 이해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하셨고, 자신을 본 받아 기도를 하도록 명령하셨다. 이것은 성경이 명령하고 제시한 기도의 형태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리를 알 수 없는 기도는 성경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도는 자신들이 스스로 알아듣고 이해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언어로 간구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거나 격려해 주셨던 은혜의 방편이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등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이 한 결 같이 주장한대로 ‘기도’는 은혜의 3대 방편(말씀, 성례)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기도를 통하여 무한한 은혜를 공급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면 기독교인은 정상적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14절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기도의 형태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기도의 기본 원리에 위배가 된다. 왜냐하면 ‘열매가 없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아 듣지 못하고, 열매가 없는 것은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열매 없는 것을 ‘저주’와 ‘죄’의 결과로 가르친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에 열매를 맺는 생명을 주셨지만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음과 사망의 상태에 처해졌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마21:19),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에 열매로 그 나무를 알아 볼 수 있다고 하셨다(마7:18-20). 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셨고(마3;8),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하셨다(벧후1:3,8).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7:19). 또한 성령이 임하시고 내주하시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갈5:22,23). 이것은 성령께서 유기적인 활동을 그 안에서 하시기 때문이며, 성령님은 생명이시며, 생명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同義語)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며, 성령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내주하시며, 하나님이 가꾸시는 나무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이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공급이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상태이고, 농부가 가꾸지 않는 상태이다. 이처럼 성경은 열매를 하나님, 선, 생명, 구원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열매 없는 것을 사단, 악, 죽음, 사망, 저주, 영벌과 동일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서는 열매 없는 것이 결코 선한 것이거나 좋은 것이 되지 못하며,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14절은 아주 강한 부정문인 것이다. 바울은 열매 없는 그것, 열매 없는 ‘방언 기도’를 부정하고 있다. 바울은 15절에서 열매 없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를 대체 할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바울이 제시하는 대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기독교 신앙 안에 언제나 유일했던 하나님 앞에 나의 영과 지성, 즉 전 인격이 드리는 정상적인 기도였다.
성경에 방언 기도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한 곳이 고린도전서 14장 14절 한 곳뿐인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방언은 기도를 하는 도구가 아니며, 방언 기도의 형태는 바울이 부정하였다.
나. 고린도전서 14장 11절 해석 - 잘못된 방언의 폐해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11절)
개역개정판에서는 이 구절의 bavrbaro"(바르바로스)를 ‘외국인’이라고 번역을 했다. 그리고 각주로 ‘야만인’을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본 구절의 bavrbaro"(바르바로스)는 야만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
바울은 ‘외국인(이방인)’이라는 단어 e[qno"(에쓰노스)를 그의 서신(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에서 총 35회 사용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 11절에서는 e[qno"(에쓰노스)를 사용하지 않고, bavrbaro"(바르바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바울이 bavrbaro"(바르바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곳은 로마서 1장 14절, 고린도전서 14장 11절, 골로새서 3장 11절 이렇게 총 세 군데이다. 개역개정은 로마서와 골로새서를 야만인이라고 번역하였으나 고린도전서 14장 11절은 ‘외국인’이라고 번역을 했다. 동일한 단어인데 서로 다르게 번역을 한 것이다. 하지만 ‘바른 성경(한국성경공회)’외 흠정역(KJV)은 ‘야만인’이라고 번역을 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4절과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 바르바로스(bavrbaro")라는 단어는 ‘헬라인’과 ‘다른 민족들’ 혹은 ‘헬라어를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의미는 문명화된 헬라인들이 상대적으로 비문명화된 사람들을 가리키던 경멸적인 의미였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이 대적자들이었던 메대인과 페르시아인들을 경멸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하던 단어였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바르바로이(bavrbaroi)로 분류되는 것을 꺼렸다. 그리고 헬라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민족을 야만인으로 치부했다. 즉, 상대적으로 미개(未開)하여 문화적인 수준이 낮거나 혹은 정상적인 의사소통과 교류가 어려운 그런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bavrbaro"(바르바로스)는 외국인, 비헬라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외국인을 표현할 때 바울은 항상 e[qno"(에쓰노스)를 사용했다. 하지만 bavrbaro"(바르바로스)는 외국인이라는 의미보다 야만인이라는 의미가 훨씬 강한 단어이다. 그리고 외국어를 표현하려면 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e[qno"(에쓰노스)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 11절에서 야만인(bavrbaro")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야만인(bavrbaro")의 의미를 살려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외국인’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를 두고, 다른 단어를 꼭 이 구절에만 사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35회에 걸쳐서 사용한 단어, e[qno"(에쓰노스)를 두고 bavrbaro"(바르바로스)를 사용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야만인은 긍정적인 어휘이거나, 중립적인 어휘가 아니고,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 언어이다. 바울도 문화나 문명이 미개한 상태(상황)이거나 정상적인 언어 구사 혹은 의사 교환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킬 때 야만인(bavrbaro")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롬1:14, 골3:11) 그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고린도전서 14장 11절의 의미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11절은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구절이다. 이것은 곧 뜻을 알지 못하는 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야만인은 지향(志向)의 대상이 아니라 지양(止揚)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11절은 뜻을 알 수 없는 비언어적 형태의 소리로 사용되어지는 허위 방언을 부정하는 내용인 것이다. 알지 못하는 소리를 사용함으로써 야만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사용자나 청취자 모두를 야만인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무익하고 불필요하므로 잠잠할 것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구절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알지 못하는 소리로 기도를 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대안을 제시 했던 것이다. 당시의 방언기도는 뜻을 알지 못하는 소리(11절),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못하는 악기와 같은 소리(7절),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는 나팔(8절), 알아 듣기 어려워서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같은 소리(9절)이었고, 이것은 곧 14절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결국에 바울의 지적대로 열매가 없는(무익한) 폐해를 낳게 되는 것이 바로 방언기도인 것이다.
현대 방언 기도의 형태를 볼 때 체계와 규칙을 갖추지 않은 음절이나 어절의 단순 반복으로 불규칙적이고 복잡하여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방언기도는 그것을 사용하는 자나 듣는 자나 야만인(bavrbaro")이 된다. 그러므로 야만인(bavrbaro")이 될 수밖에 없는 ‘방언 기도’는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 고린도전서 14장 13절 해석 - 허위(虛位)방언의 분별 기준
13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라는 구절은 “방언 기도가 통역이 가능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13절의 통역이 가능한 것은 ‘방언 기도(proseuvcwmai glwvssh)’가 아니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lalw'n glwvssh)’이다.
통역을 간구토록 명령한 것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 즉 허위 방언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통역이 병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뜻을 알 수 없는 소리(허위방언)’로 하는 방언이 반드시 모두 통역이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13절은 모든 방언이 통역 가능함을 말하는 의미가 아니다. 참 방언과 허위방언의 분별 기준이 ‘통역 가능’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의 그것과 같이 외국어여서 알아들을 수 있기에 통역이 가능한 방언이라면 그것은 참 방언이고, 고린도전서 14장 6-14절과 같이 통역이 불가능한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라면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할 허위 방언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통역이 가능한 방언 말함이라면 바울이 정해준대로 두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한 사람의 통역 가운데에 방언을 말 할 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작성하던 당시 고린도가 아닌 에베소에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고린도교회 내에서 유행하던 방언기도를 직접 분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방문하기 전에 서신을 통하여 방언 분별 기준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13절에서 명한 대로 ‘통역 가능 여부’인 것이다.
라. 고린도전서 14장 14절 해석 - 방언 기도에 대한 부정(否定)
방언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사도행전 2장이다. 누가는 사도행전 2장을 통하여 오순절에 성령께서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음을 분명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이외에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외국어’가 아닌 다른 형태의 방언이 제시된 부분이 없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오직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단 한 곳에만 ‘방언 기도’가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14절은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방언 기도(proseuvcomai)’라고 기록한 유일한 구절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단 한 절을 제외하고 모든 구절에서는 ‘방언으로 말하다(lalevw)’로 기록하였다. 바울이 14절에서만 방언 기도라는 표현을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도하다’와 ‘말하다’라는 단어는 서로 의미의 유사성이 있어서 혼용하여 사용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히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함에 만일(eja;n)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가정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방언 기도’가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닌 이례적이고 특수한 것임을 말한다. 그 이전에는 ‘방언 기도’라는 형식의 방언 사용이나 기도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eja;n)’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한 것이다. ‘방언 기도’는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언의 형태를 제시하는 구절인가, 아니면 방언의 오용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구절인가? 이것은 후자가 확실한데,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는 고린도전서가 “교정서신(矯情書信)”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고린도교회에는 분파주의, 교역자들을 무시하고 우위에 서는 교만, 근친상간이라는 극심한 성적 타락, 세상 법정에 형제를 고발하는 어리석음, 매춘 등의 음행, 우월한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 우상에 대한 무분별한 지식과 무절제한 태도, 여자들이 창조의 원리를 따르는 교회의 질서를 무시함,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성찬, 교회에서 술에 취함, 은사, 특히 방언 은사를 오용하고 왜곡함, 육체의 부활을 부정함과 같은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믿지 않는 자들 중에서도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타락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회개시키기 위하여 고린도전서를 보내게 된 것이고, 이것이 고린도전서를 교정서신(矯情書信)으로 보는 근거이다.
둘째는 바울은 ‘방언 기도’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방언기도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은 14절 이후 이어지는 15, 16절의 문맥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14절에서 바울은 만일 (허위)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기도할 뿐 지각(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허위)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은혜의 방편인 기도로서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결코 긍정문이 아니다. 고린도전서의 목적과 14절의 분위기와 내용을 고려할 때 바울은 허위 방언으로 방언 기도를 하는 방언 오용(誤用)을 지적하고, 방언 기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마. 고린도전서 14장 15절 해석 - 방언 기도의 대안(代案)
이어서 15절에서 14절에 대한 대안, 즉 스스로도 지각하지 못하는(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영으로만 하는 방언 기도에 대한 합당한 대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영으로 뿐만 아니라 지각으로도 기도 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영으로만 하여 지각 하지 못하여 유익이 없는 방언 기도는 하지 않을 것이며, 정상적인(스스로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하는) 기도를 할 것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에 대한 대안으로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기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방언 기도를 열매 없는 것, 유익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정상적인 기도를 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바. 고린도전서 14장 16절 해석 - 방언의 오용(誤用)
“영으로만 축복하면”이라는 내용으로 볼 때 당시 고린도교회는 공개적인 집회 시에 정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기도할 때 사용 하던 (허위)방언으로 회중을 축복했던 것으로 보인다.(16절) 그것은 축복의 내용 혹은 순서를 포함한 설교 혹은 성경 혹은 어떤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와 같은 영으로만 하는 축복, 즉 (허위)방언을 사용 할 때의 그 뜻 모를 소리로 축복하고 감사하면 다른 사람(회중)은 세움(덕, 유익)을 입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방언의 이타성, 교회 유익성, 수평성, 명확성에 위배 되는 것이다.
사. 고린도전서 14장 18절 해석 - 바울의 방언 사용
방언 기도가 당시에 이례적인 것이며, 일반적이지 않고 보편적이지 않은 지적해야만 할 오류였다는 것은 바울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방언들을 말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18절) 바울의 고백과 같이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들을 말했다. 방언에 능통하며 자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4절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고 말했던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들을 말했을지라도 ‘방언 기도’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이러한 의미가 아니라면 14절과 18절은 서로 모순되는 구절이 되고 만다. 만약에 14절의 ‘방언 기도’가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며, 현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방언 기도’라면 18절의 바울은 고백은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18절의 바울의 고백은 진실이므로 ‘방언 기도’는 더 많은 방언들을 말할 수 있었던 바울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며 동시에 그가 지적해야 할 허위 방언이었다. 결론적으로 14절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 기도’는 18절에서 바울이 많이 말한다고 고백했던 ‘방언들로 말함’과는 다른 것이다. 즉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오용된 방언, 즉 방언으로 기도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내용이다.
만약에 방언 기도가 허위 방언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언 은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을 직접적인 관계로 하는 ‘수직적 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언의 특성인 수평성에 위배가 된다. 반대로 방언이 말하는 은사(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라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직접적인 관계로 하는 ‘수평적 은사’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방언기도는 참 방언이 아닌 허위(虛位) 은사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아. 고린도전서 14장 28절 해석 -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이 부분은 방언은사를 ‘개인기도화’ 시키는 근거로 오해되는 구절이다. 하지만 그런 구절이 아니다. 바울이 집에서 하라고 명령한 이 내용은 ‘금지 명령’을 순화하여 전달한 수사학적인 표현이다. 27, 28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방언이 무슨 형태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하는 것. 둘째, 통역이 가능한 것. 셋째, 교회에서 회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코 ‘개인기도’ 혹은 ‘방언기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구절이 개인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는 첫째, 개인 기도를 교회에서 회중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나 그럴 이유가 없고, 둘째, 개인 기도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하지 않으며, 셋째, 통역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8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은 “통역이 없으면 하지 말라“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통역이 없으면 하지 말라”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인 것이지, “집에서 하라”가 핵심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구절을 방언으로 하는 개인적인 기도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집에서 개인기도의 형식으로 방언 기도를 한다면 이것은 방언의 특성(이타성, 수평성, 공공성, 개방성, 인원 제한과 질서 유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에 위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방언 추천의 내용이 아니라 방언 금지를 명령하는 부정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방언 은사를 사도시대에 주셨던 목적은 첫째, 요엘서의 성취이며, 둘째로는 이방인 구원역사 시작의 공표(公表), 셋째로는 성령 시대의 도래(到來)와 회복의 선포(바벨탑 사건)이며, 넷째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다섯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난 방언 은사는 허위(虛位) 은사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그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방언의 목적은 아직 미완료된 것이 아니다. 방언의 목적은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은사는 요엘서 2장 28-32절의 성취 사건이다. 또한 요엘서의 예언 성취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나타내시는 표적이다. 또한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흩어진 인간들의 언어, 곧 영벌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신다는 표적이다. 또 1세기 당시 아직 정경화 과정이 완료 되지 않은 신약성경을 보조하여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당시로서는 태동한지 얼마 되지 않은 미약(微弱)하던 초대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역할과 사명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방언 은사의 목적 혹은 사명은 충분히 다하였고, 모두 다 이루어졌다. 그리고 방언이 표적으로 가리키던 선교 사역을 성령께서 주도해 가고 계신다.
그렇다면 허위(虛位)방언이 아닌 참 방언은사가 현재 존재하는지 혹은 사라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바울은 ‘폐하리라(katargevw)’를 ‘미래 수동태 직설법 단수형’으로 썼다. 예언과 지식이 타력(他力)에 의하여 폐함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치고(pauvsontai)’는 자동사인데, ‘미래 중간태 직설법 복수형’으로 썼다. 헬라어 중간태 동사는 자동사적이며 재귀적인 의미의 동사이다. 즉, 스스로에게 무엇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서술하는 용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 방언 은사는 스스로 정지한다는 것이다. “예언과 지식은 완전히 폐함을 당하게 될 것이고, 방언들이 스스로 정지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예언과 지식은 타력에 의하여 폐하여짐을 당하고, 방언은 자력에 의하여 멈추게 된다는 것은 각기 소유한 의미가 다르다는 것과 폐하여짐(예언, 지식)과 중지됨(방언)의 시점(時點)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폐함’을 당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올 때이다(10절) 그리고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주님을 온전히 보고 완전히 알게 되는 종말의 때이다.(12절) 종말의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므로 이전의 모든 불완전한 것들은 완전히 폐함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폐함을 당하는 시점과 정지하는 시점은 다르며, 중지되는 시점은 폐하여지는 시점보다 이전이다. 종말의 때임에 중지된다는 것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중지했다는 것은 종말의 때 이전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시간적 순서로 보자면 방언이 스스로 정지 하는 것이 먼저이고, 예언과 지식이 폐하여짐을 당하는 것은 나중이다. 이 둘 시점의 시간차이는 얼마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폐하여짐을 당하는 종말의 때가 오기 이전 어느 시기에 방언이 중지되는 시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 중지되었던 방언도 분명히 종말의 때에는 다 폐하여지게 될 것이다. 새 창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이 스스로 정지하는 그 시점은 언제인가? 현재를 기점(基点)으로 할 때 이미 정지했는가? 아니면 미래에 정지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본 논문은 방언이 이미 스스로 정지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신약성경에서는 비교적 초기서신인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 이후에 더 이상 방언에 대한 가르침이나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셋째는 2천년 교회 역사 중에 방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저작 시기를 기준으로 나열해보자면 데살로니가 전·후서(A.D. 50-52년경) → 고린도전서(A.D. 55년경) →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A.D. 56년경) → 사도행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A.D. 61-62년경) → 빌레몬서, 야고보서(A.D. 62년경) → 디모데전·후서(A.D. 63년경) → 베드로전서(A.D. 65년경) → 디도서, 베드로후서(A.D. 66년경) → 히브리서(A.D. 65-69년경) → 유다서(A.D. 70-80년경) → 요한1·2·3서(A.D. 90년경) → 요한계시록(A.D. 81-96년경)의 순서이다.” 신약성경에는 A.D. 61-62년경에 작성된 사도행전을 끝으로 방언에 대한 언급이나 가르침이 없다. 그것은 방언은사가 어느 시점에선가 중지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교부 크리스소스톰(Chrysostom)과 어거스틴(Augustine)은 방언이 중지되었음을 말하였다. 크리스소스톰은 방언 시도나 추종을 애매모호한 관행이라고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그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애매모호함이 생겨나는 까닭은 성경에 언급된 사실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방언의 중단 때문이다. 즉 방언은 과거에는 발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방언은사가 초대교회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며, 사라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초의 교회 시대에는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배운 적이 없는 말이었다. ”성령이 그들에게 할 말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은사는 그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차 모든 언어를 통해 온 땅에 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언어로 성령의 전조가 나타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하나의 전조로 성취된 이후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그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기대하는가? 오늘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증거가 이런 기적들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증거는 무엇을 통해 주어지며 사람은 무엇을 통해 자신이 성령을 받았음을 알게 되는가? 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게 하라. 만일 그가 형제를 사랑하면 성령이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다.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의 증언
제네바 교리문답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 탁월함과 권위가 익히 알려져 있으며, 장로교단에서는 헌법에서 표준 신조로 채택을 할 정도로 공신력(公信力)이 있는 것이다.
제네바 교리문답 247문에서 칼빈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위선(僞善)적 행위임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문: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말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답: 방언은 하나님과의 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으로 위선(僞善)을 행해서는 안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에서는 기도를 할 때는 잘 알려진(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며, 방언으로 기도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금지하고 있다.
“감사와 함께 드리는 기도는 종교적 예배의 한 특별 부분이므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도는 성자의 이름으로 그의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그의 뜻에 따라서 이해와 존경과 겸손과 열심과 사랑과 견인으로 할 것이며, 소리 내어 할 때는 잘 알려진 언어로 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방언은 지극히 간헐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며,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던 무리들은 이단과 극단적 신비주의자들 뿐이었다. 존 맥아더에 의하면 “초대교회 이후 첫 5백년 동안 방언을 한다고 주장한 그룹은 이단이었던 몬타누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후 방언에 대한 종적이 없다가 기독교 내에서 방언 운동의 발생은 약 1천년이 지난 17세기에 있었다. ‘세베놀의 예언자’로 불려진 이들이었는데 환상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그들은 영적인 부분이 아닌 정치적, 군사적 활동으로 더 잘 알려졌다. 또한 그들이 했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고, 로마 카톨릭에 맞서서 사용하는 무력을 옹호했다. 그 이후 18세기에 얀센주의자들(Jansenists)이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며, 이신칭의 교리를 반대하는 이단이었다. 또 다른 무리는 18세기 중엽 미국에서 번성한 퀘이커교(Quaker)의 분파인 쉐이커교도들(Shakers)이었다. 이 쉐이커교파의 창시자인 마더 앤 리(Mother Ann Lee)는 자신을 여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녀는 72가지 언어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쉐이커교의 교리는 결혼한 사이일지라도 성관계는 죄악이라고 가르쳤으며,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방언을 했다. 이후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방언과 예언을 했다. 어빙파(Irvingite)들은 서로 상반되는 예언을 자주 했고 예언이 성취되지도 않았다. 그들의 집회는 극단적인 난폭행위가 특징이었다. 어빙파의 예언자들 가운데 일부가 가짜 예언을 했던 사실을 시인하고, 다른 일부는 악한 영에게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어빙파는 가톨릭 사도 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되어서 로마 카톨릭 교리들을 수용하고, 열두 사도 직분을 만들어 내며 많은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다.”
로머트 G. 그로마키에 의하면 “17세기에 영국에서 조직 폭스(George Fox)에 의하여 시작된 퀘이커파(Quakers)가 방언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보다 ‘내면의 빛’이라고 불리우는 사적 계시(직통 계시)를 더 귄위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조셉 스미스(Joseph Smith)에 의해 창설된 몰몬교도들(Mormons)도 방언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삼위일체와 성경의 권위, 지옥의 실재를 부인하는 이단이다. 그리고 19세기 스웨덴에서 성경 읽는 자들이라는 집단, 아일랜드의 부흥운동 기간, 초기 감리교인들 가운데 방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의 건전성과 방언의 진정성 또한 확인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일부에서의 주장이 교회 역사 중에 사라졌던 방언이 다시 부활했다고 주장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방언은 정통 교회 역사에 없었다. 지극히 간헐적으로 이단과 극단적 신비주의자들, 광신자들 중에만 있었을 뿐이다. 이를 토대로 볼 때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교회 역사 2천년 동안 방언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방언은 오순절 운동이 그 기원이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 1873-1929)이 설립한 벧엘 신유의 집(Bethel Healing Home, 1898년)과 벧엘 성경대학(Bethel Bible College, 1900년)의 학생 중에 애그니스 오즈맨(Agnes Ozman)이라는 사람이 1901년 1월 1일 방언을 하였다. 그리고 찰스 팔함이 1905년에 휴스턴에 설립한 성경학교(Houston Bible School)에 재학하던 학생 중 세이무어(W.J. Seymour)라는 성결교 설교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극단적인 성결을 강조하는 설교로 인하여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가정 집회를 열었는데, 1906년 4월 9일 그 집회에 참석 중이던 일곱 명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였다. 그 집회는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계속되어 아주사 스트리스 선교회(Azusa Street Mission)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오순절 운동은 세계 각처로 퍼져나가 영향을 끼치며 오늘날의 현대 기독교 방언 의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에서 시작된 방언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참 방언인지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다. 또 그들의 방언이 성경의 기준에 합당한지도 검증된 적이 없다. 다만 1900년 교회 역사 중에 정통 교회에서는 방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운동가들은 기독교 역사에 존재하지 않던 방언이 왜 그들에 의하여 부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합당한 근거로 증명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순절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현대 기독교 방언이 성경이 가르치는 그 방언은사라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우현의 책 「하늘의 언어」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갓피플 닷컴의 조한상 사장은 내가 하는 방언을 그냥 따라하는 순간, 방언을 받았다. 그때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 한 것이다. …… 예수원 출신의 한 형제는 ‘아버지’라는 말을 간절히 반복하며 구했는데 방언이 터졌다고 한다.” 이는 극히 일부분의 예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경우 방언 현상을 학습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다. 현대 기독교 방언 현상은 제 삼위(三位)이신 성령님의 주권을 배제한 인위적 작용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방언 현상은 이와 같은 학습된 현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로마키는 현대 방언 현상의 원천에 대한 유효한 선택 가능의 평가로서 사단의 권세가 간주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레이몬드 프레임(Raymond Frame)이라는 중국 선교사는 현대 방언의 유입이 사단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경험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악한 영들은 신자의 정서생활에 영향을 줄 기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신자가 모든 지성적 활동을 중지하고 그의 의지를 어떤 불가시적인 지성적인 존재(물론 그 그리스도인은 그를 성령 자신이라고 생각하도록 꾀임받고 있다.)에게 내어 맡기도록 설득되었을 때 그러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은사들 중 가장 작은 것인 방언에 몰두한 하나님의 자녀는 마귀의 억압이나 강박 관념이나 실제적인 사로잡힘의 관계에서 매우 상처 받기 쉬운 위치에 있다.”
크리스천 정신병 학자인 베르그스마(Bergsma)는 현대 방언의 현상을 기억의 저장과 회상을 다루는 인공두뇌학(Cybernetics)과 관련시켜 심리적인 현상의 원인으로 방언 발생을 설명하였다.
본 연구자의 지인(知人)에 의하면 2011년 11월 김우현(「하늘의 언어」저자)씨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여 하였는데, 그 집회 말미에는 방언 하기를 원하는 지원자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방언을 일부러 따라하도록 시켰다고 했다. 김우현 씨는 지인에게 “당신은 방언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는 격려를 하면서 자신의 방언을 따라하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위적인 시도들이 있다.
마스터스 신학교(The Master's Seminary)의 전 학장이었던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는 그의 저서에서 현대 방언 현상이 ‘운동 근육 자동증’, ‘무아지경’, ‘최면’, ‘정신적인 카타르시스’, ‘집단적 심리 구조’, ‘기억 자극’ 등을 통하여 생겨 날 수 있다고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15. 현대 기독교 방언과 유사한 이교(異敎)의 방언
“오순절 운동에서 시작된 현대 기독교 방언은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의 이방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현상과 유사하다. 회교도들, 에스키모인들, 티벳트와 중국의 이교도들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 이방 종교에서도 방언이 시행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렇다면 현대 기독교의 방언은 그것이 이방 종교의 그것과의 차이를 무엇으로 입증 할 수 있을까? 이방 종교에도 현대 기독교의 방언과 유사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방 종교에도 현대 기독교의 것과 유사한 방언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방종교의 우상문화와 세상의 가치관이 그대로 유입(流入)되어 방언 오용 문제로 홍역(紅疫)을 치르던 고린도교회의 모습과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방언 오용의 문제가 동일한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가 교정서신이라는 점,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는 장이라는 점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도출된 방언 은사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 고린도전서 14장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의 참 방언과 허위 방언의 구별을 방언 표기 형태(단수와 복수)를 통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고린도전서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방언은 기도하는 은사가 아닌 말하는 은사임을 확인하였다. 그것과 함께 방언 은사 목적이 모두 성취 되어 완료되었다는 논증과 교부들과 교회사의 증거는 고린도전서 13장 8절의 방언 은사가 그치는 시점이 미래가 아닌 과거의 어느 시점이었음을 충분히 확인 할 수 있다.
반면에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장되며 사용되는 방언 은사, 방언 기도(체계와 규칙을 갖춘 언어가 아닌 음절이나 어절의 단순 반복 혹은 불규칙적이고 복잡한 소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해 할 수 없고, 통역을 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소리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그 방언과 동일(同一)한 동종(同種) 은사라는 증명이나 논증도 이루어진 일도 없다.
반면에 본 논문의 소고(小考)를 통하여 볼 때 오늘날 기독교 일각(一角)에서 행해지는 방언 기도는 그 사용이 중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현대 기독교 방언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동일(同一)한 동종(同種) 은사임을 확실히 증명한 후에 그것을 사용함이 오직 성경을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기독교인의 신앙에 합당할 것이다.
혹자는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며 현대 기독교에 이미 널리 퍼진 방언 기도를 참 방언으로 주장하지만 고린도교회 안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보편적으로 퍼져있었다. 그러므로 보편성이 진리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현대에는 이토록 보편적인 방언 기도는 불과 수십년 전의 장로교회(혹은 보수적인 교회)에는 없었으며, 110여년 전에는 기독교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극히 지엽적인 극단적 신비주의자들과 이단들에게만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기독교 안에는 없던, 그리고 장로교 안에는 없던 방언이 이제는 매우 널리 퍼져있으며 인정되는 과정에서 어떤 근거를 통하여 방언이 확산되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방언 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등장한다는 것과 방언 기도가 단지 교회 안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방언 기도를 수용해 왔던 것은 아닌가 냉정하게 스스로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방언 은사는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서의 가르침대로 그쳤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 기독교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고린도교회의 허위(虛位)방언 문제와 동일한 문제라는 것이 본 논문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방언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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