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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한국교회와 박윤선 박사의 복음이해

한국 교회와 박윤선 박사의 복음 이해 - 사복음서를 중심으로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서 론
요즈음 한국 교회에서는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윤리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 비판의 대상 가운데는 박윤선 박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박윤선 박사의 잘못된 복음 이해가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의 윤리 부재 내지는 약화 현상을 가져오게 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총신대의 정훈택 교수는 행위, 윤리, 사회 문제 등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가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삶에 대한 성경의 호소는 믿음으로의 값없는 구원이라는 대주제에 파묻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 행위, 윤리, 삶의 문제는 그의 성경관이 만들어 내는 신학체계에서는 설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경향을 칼빈주의적이라기보다는 루터주의적이라고 평가한다.
“성경과, 성경해석 방법론과 더불어 행위에 관한 그의 설명은 칼빈주의라기 보다는 루터주의식의 사고에 깊이 파져 있었다.” 
그래서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주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윤선 박사는 자기 나름대로 충분히 소화시킨 성경관을 가지고 주석작업에 임하지 못했다. 따라서 주석작업은 창조적으로 수행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균형을 잃고 있다. 균형이 파괴되는 것은 그가 받아들인 성경관, 성경해석원리들이 그의 창조적 주석작업에 신학적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박윤선 박사의 주석과 설교에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이며 또한 한국 교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더 이상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해석자의 해석과 그 해석의 배후에 있는 해석자의 신학사상을 의존하게 한 것, 이것이 박윤선 박사의 주석과 설교에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약점이며 동시에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면 정훈택 교수는 구체적으로 박윤선 박사의 어떤 견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비판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이다. 곧 구원에 있어서 항상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 것이 정훈택 교수가 볼 때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율법의 완성, (구약)계명들의 유효성 및 영원성, 윤리적 규범, 인간의 행위 등이 언급되거나 강조된 듯이 보이는 구절들을 주석할 때, 그는 거의 항상 이신칭의나 이신득의의 관점에서 조화시키려 하고, 행위구원, 율법주의, 도덕주의를 비판하곤 했다.”
그래서 정훈택 교수가 볼 때에, 산상설교에서도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쳤다고 본 박윤선 박사의 견해가 잘못이라고 본 것이다.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이신칭의 강조가 결국 한국 교회의 윤리 경시, 윤리 부재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책임을 박윤선 박사에게 돌리고 있다.
“성경을 바로 깨닫기 위하여 사용된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은 이런 상황에서는 종합적 성경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시당하거나 과소평가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가 한국교회가 윤리적 과제와 책임, 목표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의 고질병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충분히 깔려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박윤선 박사는 원리면에서는 칼빈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 성경해석에서는 루터주의를 사랑한 것이 문제의 화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정훈택 교수의 주장은 사실일까? 박윤선 박사는 과연 산상보훈을 그렇게 루터주의식으로 해석하고 왜곡한 것일까? 박윤선 박사는 행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박윤선 박사를 비판한 정훈택 교수는 과연 산상보훈을 바로 이해한 것일까? 그는 그가 주장하듯이 아무런 편견 없이, 성경에 신학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로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이 또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성경 본문의 원뜻을 왜곡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박윤선 박사는 과연 산상보훈을 바로 이해한 것일까? 혹 그의 이해에 부족한 점은 없을까? 
우리는 이런 관심을 가지고 산상보훈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관련된 모든 구절들을 다 다루지는 못하고, 논란이 되고 있는 산상보훈의 몇몇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과 또한 이신칭의 논의와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야고보서 2장도 함께 다룰 것이다. 
I.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마 5:20)
마태복음 5:20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당혹감을 준다. 산상보훈의 말씀 가운데서 제일 이해하기 어렵고 위협이 되는 말씀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내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협과 두려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가르쳤는데(롬 3:22,28, 4:3, 5:1, 10:9 등), 예수님은 다르게 가르치신 게 아닌가?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왜 같은 성경 안에서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는 말인가? 우리는 누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도의 신앙생활에 대해 매우 중요하고 결코 피할 수 없는 핵심이 된다. 
그러면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몇몇 해석들을 살펴보고 나서 올바른 견해를 찾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서 박윤선 박사의 견해에 대해 평가해 보도록 하자. 
1. ‘실제적 성화’를 강조한 말씀으로 보는 견해(웨슬리안들)
웨슬리안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와 구제도 많이 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그들보다 더 높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웨슬리안들은 그리스도인의 ‘높은 생활’(higher life), ‘성화’ (sanctification), ‘완전’(perfection)을 촉구한다. 존 웨슬리는 마태복음 5:17-20에 대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금식과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했다. 그런데 웨슬리는 이들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부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수는 신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의는 보편적(universal)이다. 곧 어떤 특정한 계명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다 지킨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문자(文字)뿐만 아니라 영(정신)을 지킴으로써 곧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인 순종에 의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 바리새인의 의는 외적인데 반해 그리스도인의 의는 내적이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그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1) 당신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못하지 않게 하라.
2)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하여 당신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못하지 않게 하라. 금식 기도와 성경 읽기를 힘쓰라.
3) 선행에 있어서 바리새인보다 못하지 않게 하라. 구제와 자선을 힘쓰라.
4) 나아가서 당신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게 하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있는 힘을 다해 지키라. 특히 순수성과 영성에 있어서 그들의 의를 능가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웨슬리의 설교는 다음 문장으로 끝맺는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상에서 우리는 존 웨슬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잘못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들의 의는 대단히 높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고‘서술적’으로 말하는 문장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리스도인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고 하는‘당위적’ 명령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웨슬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의 의를 능가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2. ‘칭의의 의’로 해석하는 견해 
이에 반해 여기서 말하는 ‘너희 의’는 그리스도인에게 전가(轉嫁)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곧 ‘칭의의 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이 의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며,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당연히 더 낫게 된다. 이 해석에 의하면, 바울의 이신칭의의 가르침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교리적으로 문제없는 해석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이병규 목사는 여기의 ‘너희 의’를 분명하게 칭의의 의로 보고 있다.
“그들의 의는 자기가 참된 믿음이 없이 행한 의이고 신자의 의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의이니 곧 예수님이 행하신 의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의, 즉 하나님의 의를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이상근 박사도 칭의의 의로 이해하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이 구절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의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롬 3:28). 그들은 믿음으로 율법의 중심사상을 실현하며 성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지는 않다. 신자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지만(칭의), 그런 신자는 또한 믿음으로 의를 행한다(성화)는 의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도 이 구절의 의를 ‘이신칭의 교리’의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비판한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마태복음 5:20의 ‘너희 의’를 ‘신 중심의 의’로, ‘믿음의 의’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훈택 교수는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절대개념이어서 어떤 다른 것과의 비교를 불허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절대개념’이란 표현을 쓴 것을 보면, 정훈택 교수가 박윤선 박사의 견해를 ‘칭의의 의’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절의 ‘너희 의’를 과연 전가된 의 곧 칭의의 의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이“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을 때, 과연 ‘너희 의’를 전가된 의 곧 전가된 자기 자신의 의로 이해했을까 하는 것이 문제이다. 
3. 박윤선 박사의 견해
박윤선 박사는 먼저 이 구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구절은, 산상 보훈에 있어서 중요하니 우리의 심각(深刻)한 사색(思索)을 요하는 깊은 귀절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윗 귀절까지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구원관을 마음에 두시고 거기에 부합하는 율법론을 가르치시다가 갑자기 여기서는 행함으로야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설치하시려는 듯이 말씀하신 까닭이다.” 
그리고 나서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의 말씀은 분명히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것은, 외식이 그 특색이므로 인본 주의의 가장 하등품에 속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본 주의(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면서도 외식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인본 주의도 진리가 아니거니와 외식은 더욱 가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義)는 실질(實質)에 있어서 불의(不義)요, 죄악인 것이다. 그런즉 그들의 의보다 좋은 의는, 그들의 의와 같은 종류의 의의 연장이나 확대가 아니고 그것의 말살(抹殺)이고 온전히 새 종류의 의이다. 이 새로운 종류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난 자의 의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신 말씀과 같다. 중생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윤선 박사의 견해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높은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의이다. 3) 이 새로운 종류의 의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의이다. 
그러면 박윤선 박사는 여기서 이 새 종류의 의를 전가된 ‘칭의의 의’로 이해하였는가, 아니면 성도의 ‘실제적 의’로 이해하였는가? 위에 인용된 설명만으로는 분명치 않으나 ‘실제적 의’로 이해했다고 생각된다. 박윤선 박사는 여기서 ‘전가’라든가 ‘칭의’라든가, 또는 ‘그리스도의 의’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난 자의 의’라고 말했다. ‘거듭난 자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비되는데, 전체 문맥은 그들의 실제적 의를 두고 말하고 있다. 박 박사는 지금 여기서 ‘신앙’이나 ‘죄 사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고 ‘의(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과 ‘중생’을 혼동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5:22 주석에서 박윤선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을 보니 예수님의 율법 표준이 얼마나 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율법의 높은 표준을 알아 보는 자는 다만 중생한 사람 뿐이고, 이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킬 자도 중생한 사람 뿐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지능(知能)이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님의 감화와 힘으로만 되는 것이다.” 
곧 이 의는 중생한 사람이 행하는 의인데,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윤선 박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하는 ‘실제적 의’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4. 정훈택 교수의 견해 
정훈택 교수는 이러한 박윤선 박사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성경 자체의 의도를 왜곡했다고 본다. 정훈택 교수는 “해석이 점점 어려워지고 더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것은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다기보다는 애당초 박윤선 박사의 문제제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당시 표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보다 제자들의 의는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다.”고 본다. 
정훈택 교수는 당시 표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주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깨끗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보존하고, 해석하고, 지키며 가르치는 일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전력했으며, 그 세부적인 사항까지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이 사람들을 지명하시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너희는 적어도 그들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 백성이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교훈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이해는 웨슬리안들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존 웨슬리는 이 구절에 대해,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바리새인들의 의(義)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고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이보다 더 높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예수님의 평가와 정반대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하셨으며(마 6:2,5,16 등),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다(마 23:25,28). 칼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오직 외적 의무들에만 국한시킴으로써 그들은 자기 제자들을 원숭이들처럼 위선으로 교육시켰다. 나는 물론 그들이 악하게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이 가르친 것보다 더 악하게 살았다. 나는 여기서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 외에도 그들의 위선적 선을 거짓되게 보이는 것을 기꺼이 포함시킨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견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칼빈의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정훈택 교수의 견해는 웨슬리의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올바른 견해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천국 백성의 의(義)는 당연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외적인 것이요 가식적인 것이며(마 6:2,5,16, 23:2-7,13-24 등), 실상은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23:25,28,33).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천국 백성의 의는 그들의 의보다 월등히 나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여기서 ‘너희 의’(uJmw'n hJ dikaiosuvnh)는 전가된 의가 아니라 천국 백성의 실제적 의를 말한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대비되는 ‘천국 백성’의 의를 말한다. 그렇게 보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 의’(uJmw'n hJ dikaiosuvnh)라고 했지, ‘내 의’ 곧 ‘그리스도의 의’ 또는 ‘전가된 의’ 라고 하지 않았다. ‘너희 의’는 천국 백성의 의 곧 성도들의 의, 그리스도인들의 의를 가리킨다. 원문에서는 ‘너희’(uJmw'n)가 앞으로 나와서‘너희의’란 것이 강조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의가 아니라 바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② 바로 앞 절(19절)에서 “...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17절). 따라서 이 율법의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19 상). 이에 반해 율법의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19하). 곧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천국 백성들도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행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여기서 ‘너희 의’란 바로 앞에서 말한 천국 백성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칭의가 아니라 성도의 행함, 천국 백성의 실제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③ 마태복음 5:13-20의 전체 문맥이 천국 백성의 이 세상에서의 역할 또는 사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13-16절에서는 너희(천국 백성)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임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착한 행실’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 돌려야 함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성도들의 행함, 생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17-20절에서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함을 말한다. 21절 이하의 말씀들도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20절의‘너희 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이루는 실제적 의로 보아야 한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결코 높은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는 외적인 것이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개는 바리새인의 의를 높이 평가하나 사실은 높지 않다.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들의 외적 행위(예를 들면 그들의 기도와 금식과 십일조 등)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였다(마 23:5). 즉 사람들에게서 칭찬 받으려고 일부러 길거리에서 기도하고 금식한 표시를 내고 다녔으며, 구제한 후에 나팔을 불어 댔다(마 6:2,5,16). 그들은 “잔의 겉은 깨끗이 하나 그 속에는 온갖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였다.”(마 23:25).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불렀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였다(마 23:27).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보시며, 마음의 성결을 원하신다.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바리새인의 의는 결코 높은 것이 아니었으며 아주 낮고 악한 것이었다. 
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된 사람은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므로, 비록 외적으로는 아직 덜 세련되고 미숙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낮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천국 백성이 된 사람은 최소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는 월등히 높은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의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룬 의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어진 실제적 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씻으시고(칭의), 성령을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성취해 가시는 의이다(실제적 의). 이 의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의인데, 아직 불완전하고 많이 미흡하지만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의이다. 이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게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감동 감화와 인도하심 가운데 점점 자라가는 실제적 의이다. 
6. 평가
위의 논의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박윤선 박사는 마태복음 5:20의 ‘너희 의’를 단순히 ‘칭의의 의’로 보고 만 것이 아니다. 정훈택 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박윤선 박사는 산상보훈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실제로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이 의는 질적으로 우수한 의이며, 거듭난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진 의이다. 
따라서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박윤선 박사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박윤선 박사가 주장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훈택 교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웨슬리의 입장에 서 있으며, 예수님과 칼빈의 평가에 반대되고 있다. 이에 반해 박윤선 박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낮게, 악한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예수님과 칼빈의 평가와 입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마 5:22)
마태복음 5:21-22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당혹감을 준다. 왜냐하면 옛 사람의 가르침인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 한 술 더 떠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된다.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욕 한 마디 했다고 해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면, 과연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1. 문자적 의미로 보는 견해
마태복음 5:22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제로 지옥에 들어간다고 보는 견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한 마디 욕만 해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겠기 때문이다. 단 한 번 욕했다고 해서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표현된 대로 이해한다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하나님께서 죄로 정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나오는 그의 설교를 다 읽어보아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 이상의 설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는 다만 믿음과 행위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믿음과 행위는 예수님을 향한 태도에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2. 박윤선 박사의 견해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말씀을 보니 예수님의 율법 표준이 얼마나 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율법의 높은 표준을 알아 보는 자는 다만 중생한 사람 뿐이고, 이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킬 자도 중생한 사람 뿐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지능(知能)으로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님의 감화와 힘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언제나 그것을 완전하게 깨달아 지킬 수는 없고 실수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실수에 대하여 해결의 방책을 주셨으니 곧, 회개하므로 하나님에게 죄사함을 받음인데 이것은 다음 귀절들이 밝히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박윤선 박사가 이 구절의 말씀에 대해 균형 잡힌 해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첫째로, 박 박사는 예수님의 율법 표준이 아주 엄한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박윤선 박사는 이러한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라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도 자기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와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지키지 못하고 실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의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박윤선 박사가 율법의 ‘규범적 기능’(usus normativus, 제3효용)과 ‘정죄적 기능’(usus elenchticus) 곧 ‘몽학 선생적 기능’(usus paedagogicus)을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올바른 견해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을 원어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원문(... e[noco" e[stai eij" th;n gevennan tou' purov")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 구절은 “...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가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하리라”가 된다. 어떤 사람은 여기의 ‘에노코스’(e[noco")를 ‘...할 위험성이 있는’(in danger of)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꼭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 정도로 약화된다. 그래서 교리적인 문제를 야기함이 없이 형제를 욕하는 죄의 위험성을 엄중히 경고한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뜻풀이는 이 구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해석으로 생각된다. ‘에노코스’는 그렇게 ‘위험성이 있다’로 풀이할 수 없다. 헬라어 단어 ‘에노코스’(e[noco")는 ‘해야만 하는’(subject to), ‘해야 할 책임이 있는’(liable), ‘책임져야 하는’(answerable), ‘죄 있는’(guilty)의 뜻이다. 이 단어는 21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곧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에 처하게 되리라”(o}" d! a]n foneuvsh/, e[noco" th'/ krivsei)고 하였다. 여기의 이 말씀을 “... 심판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 정도로 약화시킬 수는 없다. “... 심판을 받게 된다” 또는 “...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에 대하여 미운 마음을 가지고 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 곧 마음의 살인과 형제에 대하여 욕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그것만 해도 마땅히 지옥 불에 들어갈 죄가 된다는 의미이다. 박윤선 박사도 마태복음 5:30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으로 말하면 그것을 행하지 못한 자는 멸망을 받는 것이 그 원리이다. 그러므로 율법론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율법의 위반자가 지옥에 던지움을 받는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원칙적으로는’(in principle), ‘율법에 의하면’(according to the Law) 그러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형제를 대하여 화를 내거나 욕을 한 것은 형제를 미워한 것이기 때문에 제6계명을 범한 것이요(cf. 요일 3:15),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율법을 따라 판단하자면’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는 뜻이다(cf. 신 27:26, 갈 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더라면 지옥 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며, 또한 살기 위해서는 다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신 이가 예수님이시며,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예수님의 강조는 유대인들의 형식주의, 외식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참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있으며, 그것이 율법(제6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드러내시고, 또한 마음으로라도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경고하신 것이다. 
4. 평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윤선 박사는 마태복음 5:22 해석에 있어서 단지 율법의 제2효용(정죄적 기능 또는 몽학선생적 기능)만 말하고 끝난 것은 아니다. 그와 아울러 또한, 아니 제일 먼저 율법의 제3효용(삶의 표준)을 말하였다. “이 말씀을 보니 예수님의 율법 표준이 얼마나 엄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 말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을 어느 정도라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중생한 자뿐임을 말하였다. 그것도 성령의 감화와 도움으로 가능함을 말하였다. 따라서 박윤선 박사가 예수님의 교훈이 지닌 ‘규범적 역할’을 간파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III. 천국에 들어가는 자(마 7:21-23) 
마태복음 7:21은 우리에게 커다란 당혹감과 혼란을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과연 이 구절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가? 특히 이 구절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와 정훈택 교수의 견해가 분명하게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박윤선 박사의 견해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역시 이 귀절들은, 구원의 이법(理法)을 말함이 아니고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정죄의 원리가 있고서 그 후에 사죄의 규례가 생긴 것이다. 이 귀절들이 말하는 심판의 원리는, 후일에 구원의 원리를 말씀하실 준비 계단인 것이다. 이 귀절들의 말씀을 가리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도리에 대한 전제(前提)라고 하는 것은 가하나, 은혜로 받는 구원의 제도를 부인한 것이라 함은 똑바른 신학적 관찰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윤선 박사는 “예수님은 속죄자로서 속죄의 교훈을 그 백성에게 주시기 전에 먼저 율법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속죄자이신 처지에서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립됨을 가르치신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은혜가 율법을 폐하지 않는 것도 가르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위 계약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21절의 말씀을 설명한다.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행위는 불가 분리의 것으로 교훈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교훈은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강조한 바울의 교훈과 다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은혜 계약은 행위 계약의 요구가 측림(側臨)한 장면에서만 그 의의를 명백히 함.
2) 행위 계약이 폐지되지 않은 것만큼 그것은 언제든지 어디서나 말하고 있다.
3) 우리는, 산상 보훈을 보고 그것이 예수님의 계시의 완료 형태인 줄로 생각하면 안된다. 산상 보훈 이외의 모든 다른 교훈들이 나타날 것을 대합(待合)하여 그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산상 보훈은, 유대인들의 오해한 율법관(律法觀)을 교정시키는 목적으로 나타난 교훈이요 계시의 전체가 아니다. 이 계단에서는 율법을 그대로 해명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율법을 모르면 죄를 모르고 죄를 모르면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를 알 수 없다.
4)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그 명령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박윤선 박사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산상보훈의 말씀을 우리를 정죄하는 말씀으로,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곧 율법의 정죄적 기능 또는 몽학선생적 기능으로 설명하는 견해이다.
2. 정훈택 교수의 견해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본문은 율법론이라기 보다는 분명히 구원론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율법을 행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이나 율법을 지킬 수 없음으로 인한 영원한 고뇌와 슬픔, 그리고 그 끝에 놓여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감’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것을 보면 정훈택 교수는 21절의 말씀을 구원론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서 박윤선 박사가 바울서신을 따라 복음서를 해석하고 조화를 꾀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한다. 
“박윤선 박사가 이렇게 바울서신을 따라 복음서를 해석하고 바울서신의 사상과 예수님의 말씀의 조화를 꾀하는 한 그는 현대 신학자들과 같은 전제를 인정하는 셈이다.” 
박윤선 박사는 바울과 예수님 사이에 사상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강변하고 있는데도,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그렇게 애써 조화시키려고 하는 것을 보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런 식의 비판은 박윤선 박사가 분명히‘아니’라고 한 것을‘그렇다’고 해석하는 주관적인 해석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정훈택 교수가 마태복음 7:21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주여 주여 하는 것”은 형식적인 고백, 위장된 믿음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긍정적 의미와 의도로‘주여!’하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물론 진정한 신앙 고백적 외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정훈택 교수는 여기서 “주여!”라고 부르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임을 강조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21절의 ‘주여 주여’는 모르는 사람에게 입을 열기 위해 사용하는 호칭이라기 보다는, 또 거짓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장된 호칭이라기 보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 신앙의 부르짖음이라고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 다음에‘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첨가되는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이에 덧붙여’ 행함이 천국 백성 여부를 따지는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외침의 진위여부를 따지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부르는 것을 일단 긍정적으로 인정하시며 이에 덧붙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천국의 백성 여부를 따지는 근거로 삼겠다고 선언하셨다.”그러면서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 그리고 예수님을 지킴은 전인격적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야”한다고 말한다. 
정훈택 교수는 다른 곳에서 이 부분을 조금 설명하고 있다.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따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소유한 사람이며(5:20)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다. ... 행함이란 산상설교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말해지고 있다.”
여기서‘필수적인 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믿는 자에게 행함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권장하는 것은 우리가 꼭 해야 하고 날마다 힘써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러나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말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행함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인가? 예수를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란 말인가? 인간의 공로로 구원 얻는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정훈택 교수가‘하나님의 나라와 윤리’를 다룰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말하면서 천국의 양면성과 윤리 문제를 논한다. 여기서 그는, “천국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행위는 이미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결과, 열매, 증거, 표식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보는 반면,“미래의 천국과 관련하여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미래의 천국 곧 앞으로 들어갈 천국과 관련해서는 행위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전제조건’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는 또 다시 이렇게 말한다.“아직도 천국의 완성이 남아 있는 현시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보상, 영원한 축복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필요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음과 선행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의 구원사역,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인간편의 대답인 것이다. 다른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미래적 천국과 영원한 축복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정훈택 교수는 또 말한다. “역사의 종국에 천국과 천국에 얽힌 하나님의 축복은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윤리적 삶에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에게 덧붙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정훈택 교수에 의하면, 미래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믿음’이 아니라‘윤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또 다른 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한편으로는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결과요 열매며 증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필요조건을 마련하는 나그네의 삶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윤리가 하나님의 아들직,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종말론적 선물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신자의 삶 곧 윤리가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는 ‘필요조건’ 또는 ‘전제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현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과‘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구별해서 서로 다르다고 보고 있으며,‘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인간의 삶 곧 윤리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올바른 견해 
그러면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 우선, 물론 “주여”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야 하고 고백해야 한다(cf. 롬 10:9-10). 그런 의미에서 “주여 주여” 하는 것 자체가 꼭 부정적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원문의 표현(ouj pa'")도 ‘전체 부정’이 아니라 ‘부분 부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바로 이어서 나오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표현과 대비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주여”가 반복된 것이 그러한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것”은 형식적인 외적 행위를 말한다. 15-20절에서 말한 바의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칼빈은 여기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또한 목자의 탈을 쓰고 오는 ‘삯군’으로 본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는 모든 위선자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특히 자신을 높은 자리에 두는 거짓된 교사들을 예수님이 비판하고 계신다고 본다. 칼빈의 이 주석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본문의 22절도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21절의 말씀은 이들 거짓 선지자들처럼 참 믿음이 없이 형식적인 외적 행위만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서 죽은 것’(nekrav ejstin kaq! eJauthvn)이기 때문이다(약 2:17). 처음에 살아 있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표현은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 믿음’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이다.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참 믿음이 있는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게 된다. 이 행함은 참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이고 결과이며 참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행함은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공로가 아니다. 우리의 행함은 여전히 부족하며 허물과 죄가 많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근거) 구원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방법) 구원받는다. 행함은 그러한 믿음의 자연스런 열매이며 외적 결과이다. 그런 참 믿음이 있는 자를 예수님은 여기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 믿음이 없이 그저 입으로만 “주여 주여”라고 대비되는 문맥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의인’과 ‘악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4:15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예수님)을 믿는 자를 다른 관점에서 부르는 표현이다. 칭의적 의미와 상대적 의미에서 하나님 믿는 자들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시편과 잠언에 이런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 ‘의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여호와)을 경외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이런 사람을 구약은 다르게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정직한 자’, ‘의인’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에 반해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 없이 사는 자이다. 시편과 잠언은 이런 자를‘어리석은 자’, ‘패역한 자’, ‘사특한 자’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마태복음 7:21에서“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표현이 우리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 믿음이 있는 자(그런 사람은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분명히 밝혀진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고 하신다(22절).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신다(23절). 여기서“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란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원문(oujdevpote e[gnwn uJma'")에 의하면 ‘알다’(e[gnwn)라는 동사는 현재가 아니라 아오리스트(aorist)로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즉, 처음에 알았다가 나중에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 번도 안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처음에 믿음이 있었는데 행함이 첨가되지 아니함으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 번도 참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들이 “주여 주여”라고 한 것은 거짓된 형식적인 믿음이었으며, 또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것”은 참 믿음이 없이 형식적인 모양만 갖추거나 외적 권능만을 행한 것임을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한 번도 참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헬라어 동사가‘에그논’(e[gnwn)인데, 이것에 대해 정훈택 교수가 주목하지 않은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이 구절을 바로 해석하려고 고심했던 박윤선 박사도 이 단어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4. 평가
마태복음 7:21에 대해 박윤선 박사가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한 것이라고 본 것은 포인트를 벗어난 것이다. 물론 산상보훈에 그러한 기능이 있음을 우리가 부인하지 않지만, 본 구절은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 구절은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말한다. 곧 입으로만 “주여 주여”라고 하는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는 들어가지 못하며 참 믿음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본절에서는 ‘거짓 믿음’과 ‘참 믿음’이 대비되고 있는데, 박윤선 박사가 이 구절에 대해 믿음에 의한 구원의 도리를 말하기에 앞서 율법을 따른 정죄의 법칙을 말한다고 본 것은 포인트를 많이 벗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23절에서 “내가 너희를 한 번도 안 적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주석하지 못한 것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개역한글판에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로 되어 있는데, 박윤선 박사가 여기서 ‘에그논’(e[gnwn)이 아오리스트임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라 하겠다. 이상근 박사도 마태복음 7:21-23 주석에서 이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만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본 것은 큰 오해이며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적이 없다. 정훈택 교수는 애써<믿음>+<행함>--><천국>의 도식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기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을 긍정적인 신앙고백을 한 자들로 보지만, 본문의 문맥은 이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23절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한 번도 알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이들이 거짓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들이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으나 후에 행함이 따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고 말씀한다. 
정훈택 교수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천국의 양면성을 말하면서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행함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논리다. 만일 현재 천국과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원리가 다르다면, ‘믿음’으로 현재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행함’이 없어서 미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천국에는 들어왔지만 미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인가? 결국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정하고 예정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미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현재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잠시 이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진다면 그 사람이 어찌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은 결국 ‘미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은 ‘행함’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IV.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요 5:29)
요한복음 5:29에 보면,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선한 일을 행한 자’(oiJ ta; ajgaqa; poihvsante")와 ‘악한 일을 행한 자’(oiJ ta; fau'la pravxante")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 구절은 과연 우리가 행함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일까?
1. 박윤선 박사의 이해
박윤선 박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난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poihvsante")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앞부분 곧 ‘선한 일’에 대한 설명은 좋으나, 뒷부분 곧 ‘선한 일을 행한’에 대한 설명은 ‘포이에산테스’의 시상을 아오리스트로 보고 설명한 것인데, 아오리스트인 것은 맞지만 그 설명은 불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악한 일을 행한 자’(oiJ ta; fau'la pravxante")에 대한 그의 주석은 문제가 많다. 박윤선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푸락산테스’(pravxante")니, 상습적으로 행한 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이것은 헬라어 분사 ‘프락산테스(pravxante")’의 시상을 ‘현재’로 보고 설명한 것인데, ‘프락산테스’의 시상은 현재가 아니고 아오리스트(aorist)이다. 따라서 앞의‘포이에산테스’(poihvsante")나‘프락산테스(pravxante")’나 시상은 똑같이 아오리스트이다. 따라서 여기에 마치 시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설명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착오에 기인한 것이다. 
2. 이상근 박사의 견해
이상근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해 주고 있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는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의 사상은 구원이 신앙의 요소를 떠나 행함에 있는 듯한 인상을 주나, 사실인즉 이 선악의 표준은 인간의 표준이 아니라, 주께서 보시는 바의 선악이었으므로, 결국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의 별칭이 된다.”
여기서“주께서 보시는 바의 선악이었으므로”란 설명은 말 자체는 맞지만,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자에 대한 설명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신자와 불신자의 별칭’이라는 설명은 올바른 방향의 좋은 것이기는 하나 더 이상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아쉽다. 
3. 칼빈의 견해
칼빈도 이 구절에 대해 좋은 주석을 해주고 있다. “그는, 다른 곳에서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마 7:16)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을 그들의 선행으로 분별하신다.” 칼빈은 중생 전의 지나간 삶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며, 신자들이 날마다 가지고 있는 죄들은 그들에게 끼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죄 사함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자들’(딛 2:14)이라고 부른 자들을 여기서는 ‘선한 일을 하는 자들’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배척받아야 마땅한 것을 값없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다고 한다. 
이러한 칼빈의 설명은 대체로 옳으며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칭의적 의미(죄 사함과 은혜)와 함께 또한 불신자들의 삶과 구별되는 상대적 의미의 선행(요일 3:6,9, 5:18)도 같이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사용된 아오리스트 시상의 의미를 밝히지 않은(못한) 것은 그의 주석의 한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4. 올바른 견해
그러면 여기에 사용된 두 아오리스트 분사 곧 ‘선한 일을 행한 자(poihvsante")’와 ‘악한 일을 행한 자(pravxante")’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마지막 종말 때의 부활과 관련지어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이 말씀은, 이 세상 역사가 끝나고 나서 마지막 심판의 시점에서 지나간 세상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선을 행한 자들’과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따라서 여기서 ‘선을 행했다’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 행한 한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행한 모든 선한 행동들을 ‘전체적으로’(globally) 말한 것이다. 악을 행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분사의 아오리스트는 ‘글로벌 아오리스트’(global aorist)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예수님(하나님)을 믿고 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중생 후) 사는 날 동안에 선을 행하였다(상대적 의미).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불신자들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선한 일을 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cf. 요일 3:6,9, 5:18). 그래서 그런 사람을 ‘선을 행한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고 할 때 ‘의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부르지 않았는가 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곧 행한 일들 전체를 두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계 20:12, 롬 2:6, 마 16:27 등). 
5. 평가
이처럼 성경은 어떤 관점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람을 (예수를) ‘믿는 자’, ‘영접하는 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의인’ 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고 말하기도 한다. 구약의 시편과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정직한 자’, ‘지혜로운 자’ 또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가난한 자’(아나윔)란 표현도 시편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세상 역사가 끝나고 나서 마지막 심판의 시점에서 지나간 세상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말할 때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 또는 ‘악한 일을 행한 자’ 라고 말하기도 한다(요 5:29). 
이처럼 동일한 사람에 대해 사용된 다양한 표현들을 생각할 때, 요한복음 5:29의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리키되,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행한 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한 자들’과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마지막 때의 심판은 각자 행한 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박윤선 박사의 주석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특히 ‘글로벌 아오리스트’에 대한 이해가 없다. 이것은 단지 박윤선 박사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주석가들에게도 그러한 것이다. 어쨌든 아오리스트 시상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믿는 자에 대한 여러 다양한 표현들은 성경에 ‘행하는 자’ 또는 ‘행한 자’란 표현이 나타난다고 해서 곧장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되고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다.
V. 야고보서에서의 믿음과 행함(약 2장) 
박윤선 박사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야고보서를 제외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서 박윤선 박사의 견해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훈택 교수의 주장이 이 부분에서 확연히 그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박윤선 박사와 정훈택 교수가 야고보서 2장의 믿음과 행위에 관련된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대조적으로 살펴보고 나서, 야고보가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마지막으로 박윤선 박사의 견해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하겠다.
1. 박윤선 박사의 견해
박윤선 박사는 야고보서 2: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에 대한 주석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에 대한 칭의 선언(稱義宣言)은 그가 독자(獨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 사건이 있기 전에 벌써 있었다(창 15:6). 그것을 보면, 칭의는 믿음에만 관계하고 행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칭의는 선한 행실(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일)을 그 증거로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는 그의 이와 같은 행실로 인하여 주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박윤선 박사는 선한 행실을 ‘칭의의 증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2절(“네가 보거니와 믿음의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귀절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칭의가 그의 행실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믿음이 그의 행실로 완성되었다는 것뿐이다. 칭의는 미완성의 단계가 없다. 그것은 단번에 완성되며 진정한 믿음만을 근거하고 선언된다. 그러나 선한 행실을 씨앗과 같이 내포한 그 믿음은 그 선한 행실이 실현될 때에 완성된다.”
이어서 23절(“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귀절의 뜻은, 창 15:6에 일찌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선언하신 칭의가 그가 독자를 드린 후에 공적(公的)으로 인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인정되심(롬 1:4)과 같은 원리이다.”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의는 일면 행함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신앙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야고보의 사상을 오해하지 않아야 된다. 야고보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공로가 된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代贖)뿐이다. 신자의 선한 행실은 믿음 있는 증거이며, 그 믿음의 생명이니만큼 그 선행은 중요하다. 그 의미에서 칭의는 일면 행함으로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야고보의 의미한 바이다.” 
2. 정훈택 교수의 비판
그러나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는 법정적 칭의 개념을 완벽하게 전개하지도 못하고, 본문을 제대로 살려주지도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야고보서의 논지는 아주 분명하다. 칭의와 순종의 행위를 결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작동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야고보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것은 야고보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의 눈에는 이 구절들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피하고 싶어하던 ‘행위’와 ‘칭의’의 결합이 의도적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또 이렇게 말한다. “성경 본문에서 야고보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행함과 칭의를 연결한다. 하지만 박윤선 박사는 행함을 칭의와 격리시키고 믿음과만 연결시킨다.”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견해는 야고보가 말한 의미를 주석한다기보다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취하면서 칭의와 행위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정훈택 교수에 의하면, 야고보는 정훈택 교수의 견해를 지지해 주는 절대적인 지지자이다. 이러한 것이 일견 매우 성경적이고 문자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저자가 말하는 의도를 무시한 해석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되고 만다.
구체적으로 정훈택 교수는 야고보서 2:22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견해를 비판한다.
“... 그의 설명을 통해 칭의는 어쩔 수 없이 발전적 성질을 부여받는다. 칭의를 결과하는 믿음은 완성품이 아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칭의는 믿음만을 대상으로 하고 선언되지만 이 믿음은 선한 행실을 맺을 수 있을 때, 혹은 선행으로 자신을 표출할 때 완성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믿음을 대상으로 선언되는 칭의는 이 믿음이 완성되는 여부에 영향을 받으며 선한 행실의 유무와 완성 미완성 여부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완전히 초점을 벗어난 것이며, 박윤선 박사가 주장하지 않은 것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분명히 “... 칭의가 그의 행실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믿음이 그의 행실로 완성되었다는 것뿐이다.”고 밝혔다. 또한 “칭의는 미완성의 단계가 없다. 그것은 단번에 완성되며 진정한 믿음만을 근거하고 선언된다.”고 했다. 그런데 정훈택 교수가 박윤선 박사의 견해에 의하면 “칭의는 어쩔 수 없이 발전적 성질을 부여받는다”고 한 것은 박윤선 박사의 견해를 곡해한 것이고 뒤집은 것이다. 박윤선 박사가 말한 것은 ‘칭의’가 완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야고보도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했지 ‘칭의’가 온전케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3. 올바른 견해
그러면 야고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견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야고보서 2장의 주제
우선 야고보서 2장이 말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은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과 분리된, ‘믿음’과 상관없는 ‘행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남아공의 L. 플로어 교수처럼, 1-13절은 ‘...이 없는 믿음’(geloof zonder ...)에 대해 말하고, 14-26절은 ‘...이 있는 믿음’(geloof met ...)에 대해 말한다고 본 것은 좋은 견해이다. 
우리는 이것을 1절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도 거의 같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런 번역들은 다 야고보가 이제부터는 ‘행함’에 대해 말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원문에 의하면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주제는 여전히 ‘믿음’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로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Afelfoiv mou, mh; ejn proswpolhmyiva" e[cete th;n pivstin tou' kurivou hJmw'n !Ihsou' Cristou' th'" dovxh".) 곧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음’을 바로 가져야 한다는 것, 곧 위선적으로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행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올바른 활용, 올바른 나타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14절 이하에서도 마찬가지다. 14절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믿음’과 ‘행함’이 대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대비가 아니라 ‘믿음이 있노라’고 ‘말함’(levgh/)과 ‘행함이 없음’(mh; e[ch/) 사이의 대비이다. 즉,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행함’이 없는 것의 문제이다. ‘말’은 속일 수 있고 거짓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믿음은‘그 자체가 죽은 것’(nekrav ejstin kaq! eJauthvn)이다(17절). 처음에 믿음이 있다가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소용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속 죽은 상태에(nekrav)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ajrghv ejstin)이라고 말한다(20절). 중간에 헛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속해서 헛된 상태로, 효력 없는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2) 야고보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
다음으로 우리는 야고보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동일한 ‘단어’가 나타나면 그 뜻이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예를 들어 ‘마마’라는 단어가 나타난다고 해서 다 똑같은 뜻은 아니다. 어린 아기가 자기 엄마를 향해 ‘마마’라고 부를 때에는 ‘어머니’(mother)라는 뜻이지만, 옛날 궁중에서 왕이나 왕비, 왕자 또는 높은 관리들을 대하여 ‘마마’라고 말할 때에는 다른 의미이다. 따라서 동일한 단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문맥에 따라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에는 큰 혼란과 오류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야고보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와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첫째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dikaiovomai)는 단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이 사실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야고보서와 로마서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그 개념의 차이란 무엇인가? 먼저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이다. 곧 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가 이제 하나님과 화목되고 사랑받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다’는 의미로, 곧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 때 비로소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바울적 의미)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믿음이 그의 이 행동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행위’ 또는 ‘행함’(e[rga)의 개념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의 ‘행위’ 또는 ‘행함’은 하나님 앞에서 처음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노력으로서의 행위를 가리킨다.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행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며, 이것이 있어야만 참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보건대,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담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3) 바울과 충돌(?)
야고보는 24절에서 앞에서 논한 것들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당돌한 야고보의 선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껴 왔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3:28을 번역하면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allein durch den Glauben)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야고보의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과 표면상으로는 정면충돌하고 있다. 그래서 루터와 그 후의 독일 신학자들은 바울 편에 서서 야고보서를 좋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늘 있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도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주장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바울과 야고보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용어와 ‘행함’이라는 용어를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여기서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할 때의 ‘믿음’이란,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의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이며 그 자체로서 ‘죽은 믿음’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헛된 믿음’인 것이다.
4. 평가
우리는 야고보서 2장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비록 정밀하게 논증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대체로 올바른 방향에서 주석했다고 생각한다. 박윤선 박사는 사도 바울의 ‘칭의’ 개념을 가지고 야고보가 말하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표현을 설명했다. 곧 칭의는 ‘선한 행실을 그 증거로 나타낸다’ 또는 ‘공적(公的)으로 인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풀이하는데, 이것은 올바른 설명이다. 물론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행위’와 ‘의롭다 함 받다’는 용어들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설명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박윤선 박사의 위 설명 자체는 옳은 것이다. 
이에 비해 정훈택 교수는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개념상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믿음과 행함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것은 야고보가 사용하는 ‘행함’이나 ‘의롭다 함 받다’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주장에 대한 지지 구절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해석법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는 말씀은 왜 문자적으로 취하지 않는가?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는 찍어 내버리라.”(마 5:30)는 말씀은 왜 문자적으로 취하지 않는가? 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는 말씀은 왜 문자적으로 취하지 않는가? 또 예수님의 말씀 중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는 말씀(마 10:34)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요 14:27)은 어떻게 되는가? 문자 그대로 취하면 정면으로 충돌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각각의 경우에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그대로 취하면 안 되고 그 의미를 살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행함/행위’와 ‘의롭다 함 받다’는 단어에 대해 바울과 야고보의 개념이 다르다면, 그 개념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의 첫걸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훈택 교수는 야고보서 2장이, 그가 생각하듯이 ‘행함’을 강조하는 장이 아니라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장이라는 것을(1절) 고려하지 않았다. 즉, 올바른 믿음은 ‘외모로 취함이 없는 믿음’이어야 하며(1-13절), 또한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14-26절) 고려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대비가 아니라, ‘말뿐인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 곧 ‘거짓 믿음’(헛된 믿음, 그 자체로서 죽은 믿음)과 ‘참 믿음’ 사이의 대비임을 보지 못하였다.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며, 행함을 통해 그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는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박윤선 박사의 복음 이해에 대해 좀 살펴보았다. 많은 구절들을 살펴보지는 못하였지만 박윤선 박사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은 대체로 올바른 방향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산상보훈 해석은 천국 백성의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지나치게 ‘정죄적 기능’ 또는 ‘몽학선생적 기능’에 치우쳤으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루터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요소가 있다는 점은 인정된다. 특히 마태복음 7:21 주석에서는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한다고 봄으로써 그 구절의 원래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 또한 23절의 동사 ‘에그논’의 시상(時相, 아오리스트)에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21절을 푸는 핵심 실마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박윤선 박사만의 한계는 아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성경이 다 ‘에그논’을 현재로 잘못 번역하였다. ‘에그논’에 대해서는 이상근 박사도, 정훈택 교수도, 칼빈도 주목하지 못하였다. 또한 과거 한국 교회 전반에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정죄적 기능으로, 곧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율법의 제2효용)으로 보는 경향이 많았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전심전력하였던 선교 1세기 동안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전반적인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항상 율법의 제2 효용 차원에서만 해석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5:20의 해석에서는, 정훈택 교수가 생각한 것처럼, 칭의의 의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좀 불분명하긴 하지만 실제적 의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마태복음 5:22에서는 율법의 엄한 표준을 말하였고, 중생한 자만이 지킬 수 있음을 말하였다. 24절 해석에서도 우리가 형제 앞에서 해결해야 할 것은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40절 해석에서도 “이것은 기독 신자의 처세 원리(處世原理)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신 예(例)이다.”고 하여 율법의 제3 효용(삶의 표준이 되는 기능)을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산상보훈의 숱한 구절들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위한 표준으로서, 우리의 윤리에 대한 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박윤선 박사가 산상보훈을 정죄적 기능으로만 이해하고 루터주의적 해석에 빠졌다고 보는 것은 온당한 결론이 아니다. 물론 박윤선 박사에게 그러한 경향이 있고 또 그렇게 해석한 부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는 율법의 제2 효용과 제3 효용을 골고루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훈택 교수는 복음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는 마태복음 5:20 해석에 있어서 칼빈보다는 웨슬리의 입장에 서 있으며, 7:21 해석에서는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이라고 함으로써 복음적 진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그는 “주여 주여 하는 자”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 대해 잘못된 주석을 하고 있다. 또한 23절의 ‘우데포테 에그논’(한 번도 안 적이 없다)에 대해 주목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야고보서 2장 해석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야고보의 진술(21절, 24절)을 무턱대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구절로 보면서, 야고보가 말한 ‘행함’과 ‘의롭다 함 받는다’는 표현의 의미를 따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체적으로 올바른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자기의 잘못된 견해로 비판하고 있다. 
물론 박윤선 박사도 야고보서 2장 해석에 있어서 ‘행함’과 ‘의롭다 함 받다’라는 단어들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개념상의 차이를 보지 못한 것은 큰 약점이며,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믿음’과 ‘행함’의 대비라기보다도 ‘단순히 말함’과 ‘행함’ 사이의 대비, 곧 ‘거짓된 헛된 믿음’과 ‘참 믿음’ 사이의 대비임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 것도 큰 약점이라고 하겠다. 이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박사의 주석은 건전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정훈택 교수의 견해는 믿음과 행위를 결합으로써 구원론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며,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의 행위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불완전하고 심히 악하기 때문이다(전 7:20, 롬 3:20, 갈 3:10 등).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롬 3:22-28, 4:5-8, 갈 3:5-9 등). 현재 천국이든 미래 천국이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행한다.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을 값없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함으로 선한 일을 행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이 행하는 선행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또는 ‘필수조건’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행하게 된다(롬 8:12, 12:1, 마 18:21-35). 이것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감사의 규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선한 행동과 윤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함으로 행하는 규칙들이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은 ‘두려움’으로 행하게 된다. 과연 이 정도의 선행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그래서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래서 구원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 선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행하게 된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구원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선한 일들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윤리를 약화시켰다는 주장은 큰 오해이다. 이신칭의는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하며,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한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의 참된 동기를 부여하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된 선행을 행하게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신칭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성경의 전체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그러면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은혜가 더하게 된다. 그러면 감사함으로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되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그리할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지켜 행하는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사회는 좀 더 깨끗하고 밝게 빛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