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본능에 속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본능에 속하기 때문에 때론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에 있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혼동하기 쉽습니다. 그럼 본능적인 사랑과 예수님이 명하신 하늘의 성품 곧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에서 드러납니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선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어떨까요? 다음 절에 나오지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명령이지요. 근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섭섭해서 대접하기 싫고, 미워서 대접하기 싫고, 은근히 따돌리고 싶고, 꽤심해서 싫고, 화가나서
싫고, 마음에서 제껴 버리고 싶은 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접을 남에게 못합니다.
사랑은 이런 걸 다 넘어서는 것이지요. 성령의 열매 중 '오래참음'은 이런 다양한 불편함과 감정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인격에 대해 참아 기다리는 것을 말하고 '자비'는 이런 뼈 아픈 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잃지 않는 것이고 '양선'은 설혹 상대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때라도 친절할 뿐 아니라 그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사랑입니다. 이런 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지요.
오늘 지하철타고 출근하는데 저보다 훨씬 거대한 ㅋㅋ 남성이 제 옆에 앉았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게다가 부채질을 하는데, 그 부채질에 땀냄새가 제게로 화악~~ 참 불편했습니다. 살다보면 교회에서 이런 종류의 불편이 많습니다. 그 때, 그 미숙함에 대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좀 한다 하시는 분들은 다 합니다. 근데 거기서 더 나가야 합니다. 여전히 그에게 '친절'하고 상대가 요청하는 필요를 돕고 뿐만 아니라 '요청'하지 않은 것까지 찾아서 돕는 '양선'이 있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런 걸 다 넘어서는 것이지요. 성령의 열매 중 '오래참음'은 이런 다양한 불편함과 감정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인격에 대해 참아 기다리는 것을 말하고 '자비'는 이런 뼈 아픈 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잃지 않는 것이고 '양선'은 설혹 상대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때라도 친절할 뿐 아니라 그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사랑입니다. 이런 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지요.
오늘 지하철타고 출근하는데 저보다 훨씬 거대한 ㅋㅋ 남성이 제 옆에 앉았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게다가 부채질을 하는데, 그 부채질에 땀냄새가 제게로 화악~~ 참 불편했습니다. 살다보면 교회에서 이런 종류의 불편이 많습니다. 그 때, 그 미숙함에 대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좀 한다 하시는 분들은 다 합니다. 근데 거기서 더 나가야 합니다. 여전히 그에게 '친절'하고 상대가 요청하는 필요를 돕고 뿐만 아니라 '요청'하지 않은 것까지 찾아서 돕는 '양선'이 있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