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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성령님과 교회 공동체(목회와 신학, 2000,11월호)

성령님과 교회 공동체(목회와 신학, 2000,11월호)
유해무

한국교회는 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국이 동양의 4대 용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 한국교회도 이런 성장으로 인하여 세계교회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세계를 순방하면서 개척교회가 서울에서만 하루에 하나 또는 두 개씩 세워진다고 간증을 할 때 세계교회는 열광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성장을 내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불과 30여년간의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이 땅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성장에서부터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비록 성장이 멈추었다 하더라도, 그간 한국교회가 축적한 저력은 대단히 크다. 우리는 이 저력을 앞으로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교회의 모습을 살피고 성경적이지 못한 면모들을 일신해야 할 것이다. 내어달리던 성장의 한고비를 지나서, 이를 반성할 시점이 주어졌다. 이런 반성은 개혁을 위하여 필요할 뿐 아니라, 성장에 걸맞게 세계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명을 인식하고 세계교회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신학적 기여를 위하여서도 절실히 요청되는 바이다. 한국교회는 성장과 이에 기초한 선교와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기독교회사에서 주류를 주도할 것인지, 아니면 아류로 남게 될 것인지를 결정짓는 기로에 서 있다.


1. 한국교회의 구원론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열심을 가지고 있다. 신앙 생활이나 전도, 교회 봉사에서 아주 헌신적이다. 교인들은 아주 순수하여서 교회의 구령사업에 전적으로 협력한다. 또 많은 헌금을 하여서 교회를 건축하며, 이웃을 도우며, 선교에 헌신한다. 시간과 물질, 그리고 몸까지 바쳐서 이렇게 헌신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열심과 헌신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에 대해서 다양하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에 붙잡혀서 이런 놀라운 신앙생활과 교회의 성장이 가능하였다. 한국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다. 성령을 받고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하여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최선을 다 한다. 한국교회만큼 집회를 많이 하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교회의 정규적인 집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각족 연합회나 초교파적인 집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런 열심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교회의 성령체험과 성령이해의 또 다른 면이 있다. 즉 한국교회의 성령이해는 구원론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성령님은 신자 개인의 마음에 오신다. 성령님은 타락한 죄인을 변화시키시며,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신다. 한국교회의 부흥회는 주로 이런 개인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한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신앙 생활도 개인주의적으로 나타난다. 한동안 관심의 중심에 있었던 성령세례나 성령의 은사론은 이런 개인주의적인 성령론의 한 양상이라 하겠다. 사실 전통적인 개인주의적 성령 체험과 오순절운동의 성령세례 등이 한국교회의 열심을 유도하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보다는 신앙 체험을 더 강조함이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성경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일상적인 삶에 적응하기 보다는 기도나 여타 신앙 훈련을 통하여 성령님을 직접 체험면서 소위 영적인 삶을 누리는 경향이 강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천국을 더 사모하는 피안적인 신앙생활은 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성령 체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체험 위주의 개인주의적인 성령 이해는 현세 지향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내새의 축복보다는 당장 체험이 가능한 현세의 축복이 신앙생활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양면성은 항상 상존하고 있다.


2. 한국교회의 교회론
이런 개인주의적인 성령론은 개인주의적인 교회론을 이끌어내었다. 이 말은 어불성설처럼 들리 수도 있다. 같은 성령 체험을 한 자들만이 모이는 교회가 늘기 시작하였다. 즉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역사하심을 따라서 교회는 모였다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체험을 가진 자들의 인간적인 모임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성도들의 자발성에 근거하여서 부흥하였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한국교회 일반이 성령 체험에서 개인주의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체험은 일정 단계를 지나면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특정 설교자나 체험을 가히 절대시 하면서, 그런 체험이 회원됨을 결정한다. 그런 부류의 성도들만이 모여서 자신들의 교회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대형교회의 출현이 가능하여졌다. 비록 교회로 조직되어 있지만, 종파적인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이런 배타성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는 수많은 문제점과 약점이 노출된다.
한국의 교회 성장은 이런 개인주의적인 성령론과 교회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특히 대형교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문화와 특화를 표방하고 있다. 교구제가 아닌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교파와 국적이 다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하였으나, 그들은 협력하여서 하나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조직하지 않았던가. 이제 교파는 분리되고, 같은 교파라도 시장 경제식의 현장에서 성장과 부흥을 위하여 끝없이 경쟁한다. 여기에서 특정 설교자의 카리스마가 크게 좌우한다. 비록 성장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이것이 장점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장이 정체되고, 성장을 주도하였던 목회자 세대가 은퇴할 시기가 되면, 후계자 문제로 진통을 겪게 된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때로는 교회를 이처럼 개인주의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개체교회가 상회 개념을 가진 노회나 총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 조치를 취하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중대형교회가 직면한 이런 과도기적인 현상이나 부조리를 우리는 한국교회의 성령론의 개인주의적 배경에서 살피면서, 새로운 안목을 얻으려고 한다.


3. 구원론에 선행하는 교회론 
전통적으로 교회론은 구원론 다음에서 취급되면서, 때로는 성령론을 대신하기도 한다. 즉 성령론이 별도로 취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령님의 사역을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시키는 한계를 지닌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성령론과 교회론은 이런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론 다음에 교회론이 오게 되면, 중생받은 자들의 회집을 교회라 부르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교회는 인간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회집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서방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면, 교회론 이해에 좋은 단서를 얻게 된다. 사도신경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고백하며, 삼부로 구성되어 있다.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주를 이루며,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짧게 고백한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분명하면서도 비교적 길게 고백한다. 즉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을 언급하는데, 이 또한 삼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님을 당신께서 일하시는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가 있고, 죄사함과 부활 및 영생이 있다. 말하자면 교회와 구원과 종말이 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고백된다. 성령론의 일부는 교회론, 이부는 구원론, 그리고 삼부는 종말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신경은 구원에 앞서 교회에 관한 부분을 먼저 고백하는데, 이것은 교회론을 구원론보다 먼저 다룰 수 있는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그런데 왜 개신교회가 구원론을 먼저 다루게 되었는가? 중세 로마교회는 교회와 성령님을 밀접하게 연관을 시켰다. 교회는 성레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즉 이 성레전적이고 위계적인 교회의 창시자를 성령님으로 보았다. 개인은 오직 이 교회에 참여할 때 비로소 성령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성령 체험이다. 말하자면 성령님은 성례적이고 위계적인 교회라는 기관 안에 감금되어 있다 하겠다. 이것은 구교도들이 주님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이런 간접적이고 차가운 성령 체험을 개혁하였다. 즉 성령님은 직접 성도들의 마음에 오신다. 그러나 교회는 이것의 결과가 아니라 이 일을 위한 기초이다. 즉 성도는 교회로부터 태어난다. 로마교적인 교회론에 빠지지 않고도, 교회를 우선시키는 교회론의 확립은 올바른 성령론 안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이 성령론적 교회론은 개인주의적인 성령론과 교회론의 대안이 될 것이다.


4. 성령의 사역인 교회
성령님의 사역은 바람과 호흡에서 보듯이 소위 ‘영적’이지 않고 항상 경험할 수 있다. ‘영’의 대칭어는 몸이 아니고 육이다. 육은 육체성이 아니라, 연약과 무상으로 특징지워진 인간의 모습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체험적이며, 외적인 행위, 직분과 조직 등에서 성령님은 사역하신다. 성령님의 사역은 특히 신약 이후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계속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에서 성부의 영원한 뜻을 이루셨고, 이 뜻은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소유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의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이처럼 성례를 통한 성령님의 사역은 사실상 ‘몸’적이다. 성령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심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신다. 성령님은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사죄를 체험하게 하신다. 나아가 사죄받은 의인으로서 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다. ‘종말론적 은사’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사역을 완성시키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열한 제자에게 말씀을 전파하며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6-20). 그러면서 당신이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성령 강림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으며, 제자들은 설교하기 시작하였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직분이나 설교, 세례 등은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방편들이다. 비록 교회사에서 이런 것들에 대하여 이견이 있고 때로는 이 이견이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성령께서 이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그들을 사도와 목자로 임명하시고, 사죄의 사역을 맡기셨다(요 20:22). 저들은 오순절날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설교하였다(행 2:4; 4:8,31 등). 설교는 성령의 직분이다(고후 3:8; 살전 1:5 참고).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설교는 신앙을 일으키는 설교이다(갈 3:5). 설교를 듣고 믿음으로 받는 죄사함과 의를 인치는 세례는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한다(행 2:38; 고전 6:11).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신다(고전 12:13).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말할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도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이니, 세례는 성도의 교제의 기초가 된다. 나아가 한 몸으로서 한 성령님을 마신다는 것은 성찬을 지칭하는데, 성령님은 성찬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게 하실 뿐 아니라, 성찬상에서 성도의 교제를 체험하게 하신다.
이처럼 성령님은 직분과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거룩한 공교회를 모우신다. 성령님은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 임하셨다(행 8:17). 교회 안의 권위와 치리도 성령님의 사역이다(요 20:22). 직분자를 세우는 임직 역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행 6:3; 20:28; 딤후 1:14). 비록 이런 일들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하시는 일이며, 이 일들이 기초가 되어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여 진다. 혹자들은 제도나 직분은 성령 충만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어서 나온 고육지책이며,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을 훼방한다고 까지 주장하지만, 이처럼 성경은 이것들이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방편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비록 이런 제도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더러는 원형을 보이지 못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결코 인간이 고안한 제도나 의식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되, 단지 택한 개별자들을 불러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제 공동체를 창조하신다. 위에서 본대로 교제는 일차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성찬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5), 교회는 언약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당신과 연합시키는 고리가 성령님이시다(요일 3:24). 성령님은 교제를 창조하신다(고후 13:13). 교제라 하면 대개 식탁 교제나 잔치의 분위기를 연상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있는 사귐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성도들 간의 교제는 이차적이다. 복음 전파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와의 교제를 이루어 내며, 그들의 사귐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는 사귐이다(요일 1:2). 이 성도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거짓이 없고 빛 가운데 행하게 된다(요 1:6-7).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동시에 성도 서로 간의 참여가 있게 된다. 이것은 교제가 지닌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양 측면이라 하겠다. 성도들은 이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고 서로 함께 교제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참여를 통한 교제를 말한다. 교제는 늘 기쁜 것만을 연상시키고 추구하게 만들지만, 참여는 그 반대의 측면까지도 포함한다. 가령 고난에 함께 참예(고후 1:7; 빌 3:10)하거나, 재정이나 물질을 보조하여 참여(롬 15:26; 고후 8:4, 9:13)하거나, 복음에 함께 참여(빌 1:5)한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고 있는 ‘성도의 교제’는 교회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다. 이 말은 원래 성도들 간의 교제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한 것들에의 참여’, 곧 성례에의 참여를 뜻하였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메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이 ‘교제’와 ‘거룩’이 결합되어 사용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성찬에의 참여’였다. ‘성도’에 해당되는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 인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성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5세기부터 특히 어거스틴에게서 성례전에의 참여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교회를 지칭하는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성도들의 교제는 항상 거룩한 것들, 곧 성례를 매개로 하여서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성도의 교제는 단지 형제애만을 기초로 하는 헬라나 로마 세계의 협회나 계조직과는 달리, 은혜의 방편인 성례에의 참여 위에 기초하였다.
우리가 받는 성례 안에서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후천적인 차이는 사라지고, 하나의 공동체만이 존속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전 12:13). 이에 앞서서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고, 이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셨다(엡 2:14,18).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갈 3:27-28). 이제는 이방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2). 이렇게 지어져 가는 길에 필요한 것이 은사들이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은사는 가진 자를 교만하게 하고, 갖지 못한 자에게는 열등감을 자아내었다. 성령님은 하나 되게 하시지만, 은사가 하나되게 하는 연합이 아니라 분열의 소지가 될 때에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보이면서, 은사는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려 할 때가 그 본래의 의미를 지닌다고 가르친다(고전 12:31). 은사를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을 돌보며 섬겨야 한다(고전 12:22-25).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해야 한다(고전 14:40). 그러므로 교제는 은사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되게 한다. 성령에 참여하여 은사를 누리는 것과 상호 교제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상호 교제와 연합을 겨냥하지는 않으면서, 개인주의적으로만 성령에 참여하고 성령과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은사 공동체인 교회가 한 두 은사를 절대화하거나 배타적인 교인의 표지로 삶을 때, 교회 공동체는 분열의 아픔을 당하게 된다. 이런 일은 하나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사역을 거스리는 범죄행위이다. 이런 행위는 성령 은사와 체험을 개인주의화한 소치이다. 성령님은 교회 공동체를 배제한 은사나 체험을 결코 주시지 않는다. 나아가 이런 행위는 성령님을 제한하거나 성령의 사역을 인간적인 조작으로 소유하려는 율법주의의 오류를 동시에 범할 수 있다.
성령님은 제도와 직분과 조직들을 이용하시지만, 이것들은 성도들의 교제를 위한 방편이다. 제도의 목적은 항상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함에 있다(엡 4:12). 만약 직분이나 제도를 절대화하면, 우리는 로마교의 오랜 과오를 범하게 된다. 성례 그 자체가 성령님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성례를 物化해서는 안 된다. 성례는 한 편으로는 성도와 삼위 하나님을, 다른 편으로는 성도 상호 간의 교제를 이루어 내기 위하여 주어진 은혜의 방편이다. 설교직도 역시 섬기는 봉사이지(diakoni,a; 고후 3:8), 목적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이 직분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많이 견뎌야 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후 6:3 이하). 이 점에서 한국교회 안에 있는 직분 간의 알력은 그리스도의 화평을 깨뜨릴 뿐 아니라, 직분의 근본적인 의도를 무시하는 중대한 범죄이다. 주님은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려고 오셨다. 이 주님의 명령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고 직분을 맡았다면, 직분을 통하여 성도들을 섬겨야 하며, 섬김을 통하여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교회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는 이 직분이 이제는 벼슬이 되어 버린 듯 하다. 특히 목사직은 목사 개인의 일신상의 지위를 확보시켜줄 뿐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모든 일을 다 주도함으로써 다른 직분자들을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목사의 종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은사와 직분은 다양성 가운데서 하나됨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권징을 포함한 올바른 치리를 거의 상실하였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사죄하고 정죄할 수 있다.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는 성령을 속이는 자들을 심판하였다(행 5:3,9). 이런 권징은 율법주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정하게 간수하도록, 성령께서 직접 사용하시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권징은 다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중세의 종교재판을 연상시키는 교리적인 문제에 관한 권징이 더러 시행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교회정치적인 싸움 와중에서 종종 이루어져서 그 공정성을 의심받을 때가 많다. 이리하여 성령님의 공평하심을 바로 들어내지 못하게 된다. 한국교회 안에는 성령 충만하였던 고린도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범죄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제 7계명을 여러 모양으로 범하는 성도들에게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성경을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십일조는 드리되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예수님의 질책을 받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성경의 모든 가르침, 특히 직분과 제도의 영적인 성격을 잘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깨닫고 설교하고 행하게 하는 이도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일차적으로 교회를 세우신다.


5. 성령의 사역인 중생
제도나 직분이 객관화되어서 성령님을 물화하는 위험은 교회사에서 항상 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반작용은 교회를 도외시하고 개인의 선택을 우선시키는 것이다. 특히 개신교회 안에는 “내가 어떻게 은혜의 하나님을 영접할까?”라는 루터의 신앙적 투쟁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비록 제도가 장애가 아니지만, 개신교 안에는 제도와 직분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상존하고 있다 하겠다. 시대마다 제도를 제치고 기독자 개인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중시하려는 청교도사상, 경건주의, 영적 각성 운동 등이 있어왔다. 게다가 서구 사상은 르네상스 이후 주체로서 개별자를 관심의 중심에 두었다. 결과적으로 철저하게 개별자를 중심에 좌정시킨 서양 개인주의는 지금 교제와 공동체성을 강하게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는 개별자로부터 출발하여 근대와 현대를 지내다 보니, 이제는 전체로부터 개별자를 접근하는 길이 거의 봉쇄되었다. 이 길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처럼 전체가 개인을 지배하려는 전체주의의 때문에 더욱 경계당하고 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개인과 교섭하신다. 비록 제도적인 제사장직을 파기하지 않으시면서도, 야웨는 어린 사무엘에게 당신을 계시하셨다. 성경은 결코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개별자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성령님의 제도적이고 집합적인 사역은 결국은 개별자의 가슴과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 제자들이 받은 사명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막 16:15). 중생은 복음 전파라는 부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로서 내적 회오와 외적 방향 전환을 포함한다(행 3:19, 26:18,20).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산 소망에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의 근거는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심’이다(벧전 1:3). 그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며, 없는 것을 불러 있게 하는 창조의 하나님이다(롬 4:17; 히 11:17 참고). 바울은 복음으로 교인들을 낳는 것을 제사장과 제물의 관계로도 표현한다(롬 15:16). 그 때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졌음을 늘 함께 말한다(롬 15:16, 18).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중생)과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딛 3:5). 여기에 중생의 씻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씻음은 세례를 의미한다(엡 5:26). 중생의 씻음은 성령의 사역이며, 그 씻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여진다. 성부께서 먼저 성자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으므로(요 3:34), 이제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주셨다(딛 3:6). 그리하여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신다(딛 3:7). 이처럼 중생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진다. 칭의는 새로운 시작이요, 성화는 이렇게 시작한 것을 삶으로 구현함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성령님의 교회론적 사역은 성령론적인 구원론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한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빌 2:12). 이 말씀은 성령론적 구원론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가 전적으로 피동적이어서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던 기독론과는 달리,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산 자들이요(롬 6:11; 고후 5:15; 벧전 2:24), 산 제물이다(롬 12:1). 우리는 새 피조물로서(고후 5:17),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은 바 되었다(엡 2:1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이다(갈 5:1). 우리가 비록 교회 안에서 부름을 받았으나, 성도들의 일터는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바같이다. 비록 교회는 제도로서 앞서지만, 성도들을 낳으며 양육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성도들은 원리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소유하신 권세가 “하늘과 땅”에서 실현되도록 부름받은 군사들이다. 교회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면, 성도 각자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롬 14:8).
현금 한국 사회의 근원적인 구조악에 지도적인 성도들이 많이 개입되어 있고, 크고 작은 사회적인 부정과 부패 사건에 상당수의 교회 장로나 집사직을 가진 성도들이 연루되어 있는 것은 성령론의 개인주의화가 불러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경우 그들의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성령 사역이 지닌 넓은 전망을 교회에서 배우거나 훈련받지 못한 소치라 하겠다. 대체로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자유로우며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못하고, 사사건건 목회자의 지침을 기다리는 율법주의적 미성숙의 단계에 있다. 하나님이 마음에 보내신 아들의 영을 모시고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유인(갈 4:6; 5:1)을 한국교회는 훈련시키지 못했다. 그러기에 교회의 世上化와 명목적인 신자의 量産은 성장 이후 한국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영적인 大敵이다. 이방적인 관행과 세상적인 구습을 쉽게 용납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성장을 통한 저력을 교회 안에서 소진시키고 있다. 목회자들의 영적 나태와 타락, 교회 안의 수많은 분쟁, 성도들의 향방 없는 세상 속의 삶은 성장의 축복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하여 여러 원인들을 들먹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그런 자들이 모여서 이룩한 교회가 지닌 태생적인 한계가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본다. 
언약에 기초한 교제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된다. 서구 사상의 기조인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언약에 기초한 교제 공동체의 회복이다. 이것은 성령론적인 교회론과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확보함으로써 가능하다. 개인주의적인 성령론과 구원론은 성장한 한국교회의 저력을 결코 더 넓게 확장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성령론을 확립함으로써 세계 교회를 향한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6. 종말론적 은사이신 성령님
교회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도들을 낳기 위하여 있고,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성도들은 이 일을 교회 안에서 훈련을 받고, 세상에서 실천해야 한다. 즉 성도들의 일터는 훈련장인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로마교가 성령님을 교회와 제도 속에 가두어 두었다면, 개신교회는 성령님을 개인주의적으로 제한하는 실수를 종종 범한다. 우리는 개별 성도와 교회 뿐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인 이 세상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체험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교회론적이고 동시에 구원론적으로 강조된 신약의 성령님의 사역을 중시하되, 성령님의 우주적인 사역을 잘 들어내고 있는 구약의 성령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미 창조 시에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운행하셨다(창 1;2). 야웨는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셨고, 만상이 당신의 영으로 이루어졌다(시 33:6). 또 야웨는 당신의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셨다(욥 26:12 이하). 창조 후에는 영이 섭리와 통치의 주체로 나타난다(시 104:4). 신약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완성의 주체가 성령님이시다(롬 8:11; 갈 6:8; 마 19:28). 이 완성은 종말론적 은사인 성령님의 주요한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님이 되실 때에, 성령은 신부와 함께 “오라”하실 것이다. 초림의 메시야를 잉태시켰던 성령님은 재림의 메시야께서 당당한 심판주로 오실 때까지 세상을 붙잡고 계시며, 교회를 보호하시며, 택자들 모두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준비되고 있는 이 종말론적 순간을 성령님은 장악하고 계시면서,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신다. 이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자유와 수고의 공간이다. 
한국교회는 성경과 공교회적인 전통을 지속적으로 참고하여서 스스로가 ‘아류의 기독교는 아닌가’를 심각하게 반성하여야 한다. 면면히 흐르고 있는 세계교회사의 본류에 진입하지 않으면, 기적과 같은 성장이 앞으로 우리 자신과 세계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교회 속에는 여전히 많은 부조리가 있고, 우리는 늘 부족하지만, 교회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성령님께서는 아직도 이루어져야 할 종말에 대한 보증이시다(고후 1:22). 한국교회는 성령님을 개인주의화하지 말고, 성령님의 사역을 교회론적이고 우주론적으로 깨닫고 실현하면서, 종말론적인 대망 중에서, 지속적으로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교회를 위한 신학 형성에 겸손하게 기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