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구속사역을 성도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사역
1.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 띠로서의 성령
우리는 이제 다음 문제를 검토하려 한다. 즉, 성부께서 그리스도 자신의 사적인 용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에게 주신 그 은총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고 계시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받으신 모든 고난과 행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무익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의 소유가 되시고 우리 속에 거하셔야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우리의 "머리"(엡 4:15)이며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8:29)이라고 불리웠다.
또 우리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롬 11:17), "그리스도로 옷입는다"(갈 3:27)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기까지 자라나지 않는 한,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것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제공된 것,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모든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더 높은 견지에서 고찰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성령의 영원한 신성(神聖)과 본질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을 우리가 잃지 않도록 성령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증거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이 점만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요일 5:6-7). 하늘에 성부, 말씀, 성령이라는 세 분의 증거자가 계신 것처럼, 땅에도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세 증거자가 있다(요일 5:7,8). "성령의 증거"란 말이 되풀이해서 언급되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우리 마음에 인(印)처럼 새겨진 것을 느끼는 증거이며, 그 결과 그것은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심과 희생을 인친다. 이러한 이유로, 베드로는 신자들을 가리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말한다(벧전 1:2). 이 말로써 베드로가 설명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신비한 물 뿌림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신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바울도 깨끗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얻게 된다고 말한다(고전 6:11). 요컨대,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주시는 띠(bond)이시다.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으심에 대해 우리가 제2권에서 가르친 것도 이와 관련된다.2
2.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어떻게 또 왜 받으셨는가?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으시게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그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키고 불러모아 영원한 기업을 소망하는 무리로 만드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령은 "성결의 영"이라 불리운다(참조, 살후 2:13; 벧전 1:2; 롬1:4). 이는 성령이 인간과 그밖의 생물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써 우리를 소생시키며 성장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생명의 뿌리와 씨앗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높이 치켜올려 성령을 보다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때라고 일컫는다. 요엘서에는 다음과 같이 특히 주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욜 2:28). 선지자는 성령의 은사들을 예언자적 직분에 제한시키는 듯하지만, 여기서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나타내실 때 과거에 하늘에 속한 교훈을 받지 못했던 자들을 제자로 삼으시리라는 사실이다.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을 생각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써 아들을 그의 너그러우심을 대행하는 봉사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성령이 때로는 "아버지의 영"으로, 때로는 "아들의 영"으로 불리운다.3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들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롬 8:11), 완전한 갱신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그러한 은사들로 인하여 찬송을 아버지께 돌리는 한편, 자기 백성에게 나눠주실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자신에게 쌓아 두셨던 그리스도께 동일한 권세를 돌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니다.
이러므로 그는 목마른 사람들을 모두 자기에게로 초대하여 마실 수 있게 하신다(요한 7:37).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각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동일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결합되실 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우신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러한 권세를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내려오신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고전 15:45)으로서 하늘로부터 보내진 "둘째 아담"이라 불리우신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그의 소유된 백성 속에4 불어넣으신 이 신비한 생명을 악인들도 공유하는 자연적 생명과 대조시킨다. 또한 그는 신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원하는 동시에, "성령의 교통하심"과 관련시키는데(고후 13:13),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이 또한 다른 구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한 내용과 같다(롬 5:5).
3.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칭호
우리가 구원의 시작과 완전한 갱신에 대해 논의하면서, 성경에서 어떠한 칭호들이 성령에게 적용되는지 주목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선,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포용하신 그 풍성하신 자비를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양자의 영"이라 불리우신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때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신다. 실제로, 성령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도록 그 단어들을 제시해 주신다(롬 8:15; 갈 4:6). 같은 이유로,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며 인(印)"이라 불리우신다(고후 1:22, 참조, 엡 1:14). 즉, 성령은 세상에서 순례하고 있는 죽은 자들과 같은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생명을 주셔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 안에서 안전하다는 확증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의로 말미암은 "생명"이라 불리우신다(참조, 롬 8:10).
성령은 은밀하게 물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열매맺는 땅으로 만들어 의의 싹을 내게 하시므로 자주 "물"이라 불리운다. 이사야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리라"(사 44:3)고 한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5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는 그리스도의 진술은 이 구절들과 일치한다. 하지만 때로 성령은 깨끗케 하시고 정화시키는 능력으로 인하여 그렇게 불리운다. 즉, 에스겔서에서 주님은 자기 백성의 "더러움을 씻으시기" 위해 "맑은 물"을 약속하시기 때문이다(겔 36:25).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시냇물을 부으시고 그들의 생기를 회복시키며 기르시기 때문에, '기름'과 '기름부음'이리는 이름을 얻으셨다(요일 2:20,27).
반면, 성령은 우리의 사악하고 무절제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없애고 소멸시키시는 한편 우리 마음을 하나님 사랑과 열렬한 헌신으로 불타오르게 하신다.6 성령이 우리에게 이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역시 "불"이라 불리는데, 이는 정당하다(눅 3:16)
요컨대, 성령은 하늘에 속한 모든 부요가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에게 미치는 "샘"(요 4:14)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으로써 그의 힘을 행사하시는 "주의 손"(행 11:21)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성령은 힘있게 감화시킴으로써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이상 우리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향과 동기 부여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속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나 그의 은혜의 열매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가 받은 것은 다만 어두운 마음과 사악한 마음뿐이다(참조, 갈 5:19-21).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성령께 몰두하기까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냉담하게도 우리 밖에 계신 것으로, 우리에게서 먼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못하시게 된다.7 게다가,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머리" 되시고(엡 4:15), 그들에게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 되시며(롬 8:29),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옷입은"(갈 3:27) 사람들에게만 유익을 주신다는 것을 안다. 이런 연합에 의해서만 그분이 구세주의 이름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무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증된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가 되게 하고, 따라서 우리를 그와 하나가 되게 하는 저 거룩한 결합에 의해 동일한 사실이 보증된다(엡 5:30).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의해서만 자신을 우리와 결합시키신다. 동일한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이 점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역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기도 한다.
4. 성령의 역사로써의 믿음
믿음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 표현에 사용되는 용어는 주로 믿음과 관련된다. 믿음에 의해서만 성령은 우리를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데, 이는 요한이 가르친 바와 같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자녀란 혈과 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요한은 말한다(요 1:12,13). 요한은 혈과 육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남아 있을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초자연적 선물이라고 선포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와 유사하다(마 16:17). 이런 내용에 대해 다른 곳에서8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간략히 언급한다. 또 에베소인들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한 바울의 말도 이와 동일하다(엡 1:13). 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구원의 약속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도록 노력하는 내적 교사로 본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약속은 다만 허공을 치거나 우리의 귀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말한 구절에서(살후 2:13), 믿음은 오직 성령에게서 왔다고 간단히 일깨워준다. 요한은 이를 더 명백히 설명한다. 즉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진리의 영"(요 14:17)을 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의 고유한 직무로써 자신이 입으로 가르친 내용을 기억하게 하는 일을 성령께 맡기셨다. 분별의 영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면(욥 20:3), 빛이 눈먼 자에게 비쳐도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위해 천국의 보고를 여는 열쇠라 불리우고(참조, 계 3:17), 성령의 조명은 우리 통찰력의 예리함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 바울이 "성령의 사역"(고후 3:6)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만일 내적 교사이신9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성령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시지 못한다면(참조, 요 6:44; 12:32; 17:6), 교사들이 아무리 외쳐도 무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이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구원에 참예할 수 있도록 "그분은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셔서"(눅 3:16), 우리를 그의 복음을 믿는 믿음의 빛 가운데로 이끄시고, 우리를 중생케 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참조, 고후 5:17).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성별하셔서 우리에게서 세속적인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하나님께 거룩한 성전들이 되게 하신다(참조, 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21).
1.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시다.
33.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마음이 눈멀고 사악하지 않다면, 하나님 말씀의 이 외적 증거만으로도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허무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결코 굳게 잡지 못하고 너무 우둔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항상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照明)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힘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해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들은 지식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믿음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48 그러나 두 가지 면을 다 갖춘 점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선물이다. 즉,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과, 마음은 그 진리 안에서 굳세어 진다는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생기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인도될 때까지 믿음이 점점 자라게 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바울이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을(갈 3:2)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만일 성령의 은사가 하나뿐이라면, 바울이 성령을 "믿음의 결과"라고 한 것은 불합리한 말일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로 교회를 단장하시고 끊임없이 믿음을 증가시킴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은사들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들에 바울이 믿음이라 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진실로, 믿는 것이 누구에게 허락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요 6:65) 하는 것은 대단히 역설적인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얼마나 신비하고 고상한가를 생각하지 않거나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을 지각하는 데 있어 얼마나 둔한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확고 부동한 마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34.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고전 2:11) 아무도 사람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사물에서도 하나님의 진실성을 잘 믿지 못하면서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약속하실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참되심을 확고 부동하게 믿을 수 있을까?(참조. 고전 2:9) 그러나 여기서 사람의 분별력은 완전히 압도되어 무력하게 되므로, 주님의 학교에서 진보하는 첫 단계는 자기의 분별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베일같이 우리를 덮고 우리로 하여금 "어린이들에게만 나타내시는"(마 11:25; 눅 10:21) 하나님의 비밀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마 16:1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교훈이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후원이 필요하며,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권능만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그러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고전 2:16).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제외하고는 일찌기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요 1:18과 5:37 결합).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는 것같이, 이끌림을 받을 때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오성을 초월한다. 그 때에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말하자면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이전에 눈이 부셔 볼 수 없었던 그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오성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아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는데, 이전에는 심히 미련하고 둔하여 그것들을 맛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눅 24:27),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기까지는(눅 24:45), 아무런 진보가 없었다. 비록 사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입을 통해 직접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귀로 들은 그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쏟아붓기 위해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셔야만 했다(요 16: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는 비치지만,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멀었다. 따라서 성령이 내적 교사가 되셔서 조명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스며 들어올 수 없다.
35. 성령이 없이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우리가 자연의 부패에 대해 논할 때에, 우리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기에 얼마나 합당치 못한지 충분히 밝혔다.49 따라서 나는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여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바울의 주장으로 충분할 것이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 곧 우리에게는 원래 없었던 믿음을 "믿음의 마음"이라고 부른다(고후 4:13). 그러므로 그는 데살로니가인들 속에 "하나님이…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해주시길 기도한다(살후 1:11). 여기서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르며, 그것을 어떤 형용사로써 구별하는 대신에 "선을 기뻐함"50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 이와 같이 그는 사람 자신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부인하며,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결과라고 첨언한다. 고린도서에서 그는 믿음이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토대로 삼는다고 말한다(고전 2:4-5). 그는 실로 외적인 기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눈이 어두워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곳에서 말한 내적 인치심에 대해서도 포함시킨다(엡 1:13; 4: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광스러운 선물로 그의 풍성하심을 더 완전히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주시지 않고 자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특권으로서 주신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들을 우리는 위에서 인용하였다. 이런 증거들을 신실하게 설명했던 어거스틴은 감탄하여 "우리 구주께서는 믿음이 공로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서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요 6:65),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 말씀을 듣지만, 한 사람은 멸시하고 한 사람은 그 위에 굳게 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멸시하는 사람은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고, 굳게 서는 사람은 자기가 한 것처럼 자랑하게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이유로 한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가?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의 깊은 곳에서…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흘러나온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나는 무슨 근거에서 그것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 정도는 안다. 곧 그것이…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은 아닌가? 이것은 나에게 대단히 의미가 깊다. 그것은 심연이며, 십자가의 비밀이다. 나는 감탄할 수는 있으나 논의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다."51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조명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실 때, 동시에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셔서 우리로 모든 좋은 것에 참여하게 하신다.
36. 믿음은 마음의 문제이다
이제 남은 일은, 지성이 이해한 것을 마음속에 부어넣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말씀이 두뇌의 표층부에서 배회해서는 안되고,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할 때 그것은 시험의 모든 전략을 막아내고 물리칠 수 있는 난공 불락의 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조명에 의해 지성이 참된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마음에 확신을 가져다 주는 것이 성령의 능력임은 더욱 더 분명하다. 마음의 불신앙은 지성의 우둔함52보다 더 심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사상을 얻는 것보다 마음이 확신을 얻는 것이 더욱 어렵다. 따라서 성령께서 보증인이 되셔서, 이전에 우리의 지성에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던 바로 그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에 인치시며, 그 약속들을 확증하며 세우기 위하여 보증인의 역할을 하신다. "너희도…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신다"(엡 1:13-14, 주석). 사도는 이렇게 선포한다. 바울은 말하자면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에 인을 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보는가? 또한 이러한 이유로, 즉 우리 속에서 복음을 확고하게 하는 이유 때문에 바울은 성령을 "약속의 성령"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보는가? 마찬가지로 고린도서에서 그는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KJV 참조)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소망의 확신과 담대함에 대해서 말할 때 성령의 보증이 그 확신의 기초라고 한다(고후 5:5).
- 기독교강요 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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