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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칼빈의 구원론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 기독교 강요를 중심하여

칼빈의 구원론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 기독교 강요를 중심하여 
유정우 
Ⅰ.들어가는 말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구원과 거룩한 삶에 관한 한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때 구원에 이른다. 우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타락하였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구원에 이르는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뿐이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소유할 수 있다.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우리는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곧 그를 통하여 화해의 은혜를 받는데 심판자이신 하나님 대신에 관대하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없고 순결한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 
이 두가지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다. 이 두 은혜인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하신다.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로 우리는 칭의를 얻는다.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리스도안에 있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이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는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실 때에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기초로 해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 (롬8:30) 
칼빈은 구원을 한 면만 취급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취급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의 제목인<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 가 ?>에서 “유익”이란 단어와 “효력”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때 “효력”은 우리가 그 효력을 느낄 수 있는 효력이다. 칼빈은 3가지로 소개한다. “회개”,“죄의 용서” 그리고 “삶의 실제적 성화 ”가 그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유익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이와같은 효력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면 여전히 모호하게 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주신 구원의 유익은 칭의, 중생 그리고 성화와 영생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부활이 이미 시작한 구원의 과정의 완성과 궁극적 목표이다. 구원의 전체 내용은 칼빈에게서 완전히 설명되었다. 칼빈의 구원에 대한 견해와 바울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롬8:30) 
이제 이글에서는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와 그 중요성을 취급하려고 한다. 
Ⅱ.칼빈의 구원론 
1. 구원론의 출발점 
칼빈의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학적 진리는 무엇인가 ? 물론 기독론을 떠나서 구원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해함이 없이 중보자의 사역을 이해할 수 없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구조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논하는 부분 (2권 12장-14장)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논하는 부분 (2권 15장-17장) 바로 앞에 있음을 보아서도 기독론이 구원론의 기초라는 것이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 있어서는 기독론이 대속의 신학적 출발점은 아니다. 그러면 칼빈의 죄론이 그 출발점인가 ? 원죄로 인하여 죄인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 죄인은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이 필요하다. 칼빈의 죄론은 「기독교 강요」 2권 1장-5장에 있으며, 2권 6장에서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칼빈의 경우 죄론이 대속의 교리에 앞서지만 여전히 죄론이 대속의 교리의 출발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그 원천이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칼빈의 대속의 교리의 출발점이다. 이 사랑이 칼빈 신학 전반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에 의하여 성부 하나님은 더 앞서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화목을 예기하신다. 
2.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죄인 
우리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은 인간의 의를 내 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논의가 인간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정의 공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 무결하며 아무 부패나 오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심판자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면 않된다.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어지며(욥3:9) 그의 순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불결하며(욥25:5), 그의 의는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으며(욥4:18),유죄한 자를 무죄하다고 아니하시며(욥9:20), 그의 복수에 한번 불이 붙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간다.(신32:22; 욥26:6)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가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모든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3:10;신27:26) 그러므로 인간은 심판자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기를 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 때문에 진노를 받을 자,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면치 못할 자, 구원을 얻을 희망이나 축복을 받을 길이 전혀 없는 자,사탄의 종, 죄의 멍에를 멘 포로, 결국 무서운 멸망을 당할 운명이며 이미 멸망 중에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불의가 우리에게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정죄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결합할 때에 한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또 굳게 결합할 수 있다.그리스도를 힘 입어야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아 오는 것을 면할 수 있다.죄가 돌아 오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하시려 하였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행한다. 
3.하나님의 사랑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인이 아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속죄의 원인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받아 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기초를 갖는다.(엡1:4-5)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언하셨다.(요3:16) 그 반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갖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였다.(롬5:10)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고 변함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화해를 얻은 후에 하나님이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우주 창조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와 함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미워하신 때에도 놀랍고 거룩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시지 않은 우리의 상태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셨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의 피조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우리가 만든 것을 미워하시는 동시에, 그가 만드신 것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 
4.그리스도의 대속 
우리의 구원은 전체적으로 또 그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안다.(행4:12)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고전1:30)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 하나님이 오직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을 얻어 주는 중보자로 임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연결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높은 원인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둘째 근인이 된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의 질료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형상인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이 말씀은 분명히 한 사실을 증명한다. 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는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를 임명하신 것이다.(요일 2:2; 골1:19-20; 고후5:19; 엡1:6, 2:15-16; 1:4-5)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롬3:24-25)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안전하게 설 수 있다. 바울은 우리를 “값으로 샀다” (고전6:20;딤전2:5-6)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피로 얻은 구속을 “죄의 용서”라 한다.(골1:14) 그의 피는 우리를 위한 배상이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골2:14; 갈2:21) 이 말씀으로 보면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을 때에 율법에서 얻는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해 살리라”(레18:5) 우리의 행위에 약속한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얻는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행13:39)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우리에게 주셨다.(갈 4:4-5) 그리스도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된다. 
Ⅲ.구원에 있어서 각 요소의 상호 관계 
1.복음의 총화로서의 회개와 죄 용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3권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어떤 유익이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 가 ? ”이다. 칼빈은 여기서 기독론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논하고 있다. 그는 ‘유익’이란 말과 ‘효력’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때 효력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효력이다.그는 3가지로 이 효력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회개”,“죄의 용서” 그리고 “삶의 실제적 성화”이다. 이러한 효력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으면 구원의 유익은 여전히 모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이 믿음은 성령의 제일 중요한 역사이다. 우리가 기독교 강요를 읽을 때 그 순서가 의미하는 바를 간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 3권에서 ‘성령’을 ‘믿음’에 앞서 논의하고 믿음의 논의에서 회개로 그 논의를 옮겨 간다. 그런데 믿음의 논의가 반드시 포함시킬 두가지 논의는 회개와 죄 용서이다. 그 이유는 복음의 내용 전체가 바로 이 회개와 죄 용서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두가지 은혜,곧 회개와 죄 용서는 중생과 칭의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관계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신생과 화해이다. 
칼빈은 칭의보다 회개를 먼저 논의한다. 그 이유는 회개가 거룩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며 또한 회개가 믿음에 앞선다는 교리를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칭의교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칼빈은 다른 개혁자와 다르게 회개는 믿음의 결과로 본다. 믿음을 떠나서 회개가 일어 날 수 없다.또한 믿음과 회개는 구별할 수 있으나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회개와 죄 용서라는 두가지 은헤를 받는다.그런데 이 두 은혜는 분리되지 않는다. 
2.회개와 죄 용서 
(1) 회개의 정의 
그는 회개를 정의하기를,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며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 것이다.” 즉 회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일인데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전향이다. 그리고 회개를 구성하는 요소는 육의 죽임과 영의 살림이다.” 
칼빈은 더 구체적으로 회개의 정의를 3가지로 부연하고 있다.첫째,하나님께로 삶을 전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전향은 외면적 행위 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전향이다. 둘째, 회개는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데서 생긴다. 죄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것이다. 이 죽임과 살림이 회개의 구성 요소인데 옛 사람이 죽는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는 옛사람의 끊임 없는 죽음 (롬6:6)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참여는 하나님의 의를 쫓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회개를 한마디로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의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회개가 중생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본다면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토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의 회개론은 성화론에 일치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성화에 대해서 살펴 볼 때에 자세히 취급하겠다. 
(2) 회개와 죄 용서의 관계 
복음이 회개와 죄 용서라는 두 제목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 주께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 )은 ‘동시에’ (‘at the same time’) 그의 영에 의한 성화 (sanctification )를 통해 진정한 의로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될 때에 회개에 앞서 하나님의 자비의 보고가 열렸음이 선포된다. 이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회개가 요구된다.그러므로 복음 전체를 요약하면 “. . .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 회개가 . . .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다. (눅 24:26, 46, 47; 행 5:30-3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가 선포된다. 따라서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과 의와 구원과 거룩함이 되셨다”(고전 1:30)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고 무죄한 자로 인정을 받는다고 할 때 거기서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의미이다. 이 두가지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며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자비이고 이 자비에 의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므로 믿음과 회개는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실 때에 우리 편에서는 회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회개의 원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회개가 근거가 되어서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회개시키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신다. 만일 그들이 은혜를 받고자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 지를 알리신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다.회개를 믿음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3.칭의 교리 
(1) 칭의의 정의 
칼빈은 칭의교리를 철저하게 토의해야 한다고 했다. (‘Therefore we must now discuss these matters throughly’) 그 이유는 칭의교리가 ‘종교의 요점’ (‘the main hinge on religion’)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을 세울 토대가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칭의의 정의는 무엇인가 ?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이다.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은 의를 전가하신다.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로 우리는 칭의를 얻는다.우리 자신은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전달되면 칭의를 얻는다.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3장 38-39절에서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죄의 용서에 대한 해석으로 칭의는 죄의 사면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칭의는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된다. 칭의는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칭의는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 
우리는 죄의 용서와 칭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다.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다는 뜻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칭의는 의의 전가이며 죄의 용서에 포함된다.(롬4:6-7; 시32:1 )여기서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책의 반대 개념이다. 
바울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라 했다. 화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때문이다.(고후 5:18-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고후 5:21)은 화해의 수단이었다. 바울이 ‘화해 됨’이란 말과 ‘의로 인정됨’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은 틀림 없다. 
(2) 칭의와 죄 용서의 관계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 화해이다. 그리고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이다. 사람이 죄인인 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기까지는 하나님의 원수이다.(롬5:8-10) 하나님과 화해 (죄의 용서)가 일어난 사람을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그 이유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주께서 자신과 화해시킨 사람들이 만일 행위에 의해서 판단된다면,그들은 죄인으로 판명될 것이다.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납하는 사람은 죄의 용서로 오점이 씻기고 정결케 될때에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마디로 “죄의 용서”라 부를 수 있다. 
칭의와 죄 용서 사이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바울은 의와 화해를 구별하지 않는다.서로 한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 칼빈은 이점에 있어서 고린도 후서 5:19절과 5:21절을 인용하고 있다. 화해 곧 의를 얻는 길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케되는 것이다.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롬 4:6-8 ;시 32:1-2) 그리고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둘이 꼭 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으로 추론하면 칭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칭의는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 거저 용납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다. 죄의 용서에 있다. 죄를 용서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 
(3) 칭의와 중생의 관계 
앞에서 언급한대로 칭의와 중생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칭의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at the same time’ )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주지의 사실이다. 칭의와 생활의 변화 (롬6:4)는 매우 다르다. 죄의 용서로 말미암는 칭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둘째 단계인 중생(생활의 변화 )을 시작한 후에 평생을 점진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생은 성화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칭의는 의의 전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혀지기 대문에,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심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을 의미한다.칭의와 중생의 은혜는 그리스도와 연합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의 성화의 사역의 시작이 중생이다. 
중생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칭의가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 곧 화해가 일어나지 않은 곳에는 중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칭의와 중생의 이 두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칭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며 칭의 없이는 중생은 일어나지 않는다. 칭의로 중생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칭의는 성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중생 (새로운 자녀의 탄생, 또는 양자됨)은 단 한번의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중생은 칭의에서 양자됨과 관련된다. 중생(다른 말로 회개 )은 ‘육이 날마다 죽고 영이 날마다 새롭게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중생은 성화와 서로 바꾸어 사용되는 표현이 될 수 있다. 
Ⅳ.칼빈의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 
1.성화의 정의 
복음이 회개와 죄의 용서라는 두제목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주께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동시에’ 그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한 진정한 의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성화는 칭의와 동시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보고가 먼저 열려 죄의 용서 (칭의 또는 화해)가 전파된 다음에 회개를 요구한다. 죄의 용서로 말미암는 칭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둘째 단계인 중생(생활의 변화)을 시작한 후에 평생을 점진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생은 성화이다. 
칼빈은 칭의의 지속적인 발전을 성화라고 본다. 그런데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동시에 받는 은혜이다. 그런데 이 두 은혜는 구별된다. 그러나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실 때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 의를 기초로해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롬 8:30) 하나님은 의롭게 한자를 본성대로 버려 두시고 아무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도 하신다.”(고전 1:30)라고 대답한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의롭게 하는 영이나 거룩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실제를 칼빈은 말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시므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we are indeed sanctified )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킬 것을 무엇보다 먼저 원한다. 
우리가 성화의 정의를 이해하는데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의 경우 거룩의 원천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화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자연인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내주로 그 능력이 우리의 육을 날마다 죽일 때 성화는 가능한 것이다. 칼빈은 회개를 육의 죽임과 영의 살림의 두 요소로 보면서 회개를 중생으로 동일시 한다. 이 때 중생은 성화와 관계된다.그리고 중생과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런데 성화는 칭의에 기초한다. 성화는 칭의의 은혜에 더해지는 동일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갖는다. 성화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성화는 성도들의 선행이다.칭의에는 우리의 행위가 관계되지 않지만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도 자신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다. 성도들의 선행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며,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선행은 칭의에 의존하고 있다.칭의 없이는 선행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자랑하거나 선행에 대하여 교만할 수 없다. 
2.성화와 칭의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중생을 칭의보다 먼저 논한다. 칼빈이 칭의보다 중생을 먼저 취급한 것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because it was more to the point to understand first how little devoid of good works is the faith, through which alone we obtain free righteousness by mercy of God.”)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문제가 관련된 성도의 선행의 문제 (성도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저주 아래서 인간이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 뿐이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에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없고 순결한 생활을 증진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둘째 은혜를 먼저 다룬 것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된다.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성도의 선행과 관계가 있다.이 선행이 중요함으로 칼빈은 중생을 먼저 다루었지만 그는 칭의교리를 철저히 토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칭의교리가 종교의 요점이며 이 문제에 관심을 갖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성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의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칭의를 모르면 우리는 성화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은 왜 그런가 ? 그것은 거룩의 근원이 거룩한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이다. 칭의에는 오직 믿음이지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 할 수 없다.(롬10:5)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그리스도는 이은혜들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은 그가 자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 뿐이므로 그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신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칭의는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 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 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 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성화와 칭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칼빈이 이 둘을 구별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한 가지 점은 순서의 문제이다.칭의된 자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한다. 우리의 노력으로 거룩해 질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닌 가르침으로 진리에서 이탈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면 그 거룩은 하나님에게서 온 거룩이 아니다. 
Ⅴ.성화의 중요성 
칼빈은 성화를 회개에서 취급한다. 회개는 육의 죽임과 영의 살림의 두 요소로 되어 있다. 이회개의 요소에 포함되는 것은 옛사람이 죽는 경험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는 옛사람의 끊임없는 죽임을 의미하며 (롬6:6) 그의 부활에 참여는 하나님의 의를 쫓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회개를 중생이라 한다. 그런데 이 회개는 일 평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루 아침에, 일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완전히 성화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성화되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 쌓여 있다. 
그러나 칼빈은 성화를 ‘칭의의 시작과 계속적 과정’ (The beginning of Justification and Its continual progress )으로 본다. 그렇다면 성화는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이다. 성화는 칭의와 동시에 이루어진다.칭의없이 성화는 불가능하다. 이 두가지 은혜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루어진다.칼빈이 회개를 중생이라고 말하면서 중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한다.(고후 3:18;엡 4:23-24; 골 3:10) 그런데 이것은 일생의 문제이다. 
한마디로 표현면 성화는 계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할 점은 회개가 평생의 문제라고 해서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칼빈은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와질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도록 하신다. 
우리는 이제 칼빈의 성화론에서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행위가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함과 또 행위가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므로 칭의나 성화에 행위가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성화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성화는 율법에 순종이다.이 순종은 성도의 선행이다. 그런데 이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성화는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하시기 때문에 (롬8: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을 때에는 행위에서 찾으라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 바라보게 하신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이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하는가? 그는 길을 열어 주었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그는 우리의 의와 거룩이 되신다.(고전 1:30)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단계적으로 완성한다.(롬 8:30) 그러므로 성화는 구원의 단계이다. 정하신 순서에 따라 성도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생명을 소유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들은 선행에 의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준비를 한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일평생 달음질을 계속해야 한다. 성화는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성결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롬 8:30) 
Ⅵ. 맺는 말 
칼빈의 구원론의 신학적 진리는 기독론이 대속의 신학적 출발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죄론도 대속의 출발점이 아니다. 물론 기독론이 구원론의 기초이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론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의 출발점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에 의하여 성부 하나님은 더 앞서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화목을 예기하신다. 
죄로 말미암아 죽고 멸망한 우리 죄인은 의와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와 연합한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이 중의 은혜를 그리스도에게서 받는다. 곧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음으로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게 된다. 의롭게하는 영은 동시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고전 1:30) 칭의와 성화는 구별된다. 그러나 분리될 수 없다. 칭의는 행위에 근거하지 않지만 칭의는 선행을 결하지 않는다. 
성화는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 과정이다. 칭의의 의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된다. 또한 거룩의 원천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 그렇다면 칭의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성화를 회개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우리의 일생의 문제이다. 성도의 선행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며 이 선행은 성화의 열매이다. 이 선행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에 이른다. 이 성화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하심이 아니요 거룩케하심이다.(살전 4:7) 하나님은 우리의 순결을 요구하신다. 성화는 우리의 구원의 단계이다.(롬 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