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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자연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

법륜을 하나씩 듣는데 재미있게 설명한다. 어제는 아들을 잘 키우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질문에 고통과 쾌락 사이의 제3길로 붓다가 행했고 그 행함이 쾌락을 얻기를 바라는 자신을 깨닫고 바라보는 자에 대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길게 설명했다. 그것이 윤회를 벗고 해탈의 길이라고 그러면서 윤회가 뭐 소로 태어나고 이런 거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고통과 쾌락의 순환이 윤회고 여기서 벗어나 가는 제3길이 해탈의 길이라고 한다.

윤회가 소로 태어나고 뭐 이런 거 아니라 하니 마치 기독교인이 창조가 설화라고 하는 것과 유사했다. 본인도 그 의식을 했던지 기독교 창조 이야기도 지나가면서 한다. 아마도 자유주의 계통의 신학 서적도 꽤 읽는 것이 아닌가 유추가 되었다. 법륜의 불교 해석은 비신화화 신학의 불교버전처럼 보였다.

그렇게 신화를 걷어낸 불교 교리는 깔끔한 심리학의 되어 있었다. 그런데 힌두교나 불교 철학을 수박겉핥기로 공부한 내가 뭐라 할 게재는 아닌 듯 하다만 경제학의 한계효용의 법칙과 같이 줄어드는 쾌락지수 때문에 중독에 이르는 길이 행복의 길일 수 없다는 데는 동의가 된다. 반대로 그 쾌락의 욕망을 참는 고행과 고통의 길도 행복의 길이 될 수 없다는 데도 동의가 된다만 제3길이라는 "보는 자" 혹은 "깨닫는 자"라는 길이 과연 우리 본성 깊은 데까지 오염된 쾌락과 억압의 윤회를 깨뜨릴 수 있을까 싶다.

나도 핵심감정 과정에서 핵심감정 보기를 가르치지만 보아도 불타오르는 게 정념이며 핵심감정이다. 보고도 멈출 수 없다. 그것이 멈추려면 다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다 타올랐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어느새 다시 정념으로 가득찬 자신을 만난다. 그렇게 사사기처럼 나선형의 하강곡선을 그리며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사람이다.

보는 자는 주체를 과대 평가한 것이다. 그것이 온전히 지워지려면 은혜의 지배가 필요하다. 정념의 지배가 은혜의 지배로 전환이 일어나야 지워진다. 애응지물기제(礙膺之物既除)는 글쎄 면벽 중엔 가능할지 모르겠다. 성철은 각성하고 누워서 자지 않았다던데 그게 정상적이거나 자연적인 삶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숭산도 "나는 오로지 모를 뿐이다"며 자신이 보는 바를 부정해야 비로소 보는자가 될 것이라고 봤다. 마치 모든 것을 회의하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처럼 극단적 회의론에 가까운 자기 부정은 삶에 무엇을 남기고 그들은 무엇을 얻을까?

구도의 길은 험난하다. 그 끝에 무엇을 얻을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은혜의 길은 확실하다. 은혜의 길도 고난이 있으나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형통했던 것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하신다. 가장 인생에서 어두웠던 순간에도 은혜의 지배가 있다. 주입된 은혜는 우리를 지복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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