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여 이기기까지(마 12:15-21)
노승수 목사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노승수 목사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전체적으로 :
여태껏 저와 함께 마태복음을 꾸준히 묵상하신 분들은 본문의 내용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시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의 의미와 앞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이사야 61장의 이 해방이 곧 심판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장면 다음에 이어져 있습니다. 본문 15절의 '예수께서 아시고'란 바로 이 죽이려고 모의함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에 이어져 오늘 본문이 나온다는 점을 유념하셔서 묵상을 하셔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그 중심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모의를 모르겠습니까? 꽤심한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우리 주님은 겸손하셔서 오히려 그 자리를 뜨십니다. 그러자 수 많은 사람들이 좇았습니다. 좇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르시기를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장면이 곧 이사야 42:1-4의<여호와의 종의 노래>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구약 인용 중에서 가장 긴 인용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길게 인용했다는 것은 것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인용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부께서 그 마음에 기뻐하고 사랑하는 종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것으로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방식이 기이합니다. 심판을 행하면 떠들썩하지는 않더라도 위엄과 백성을 장악하는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예상하기 쉽지지만 이 심판은 다투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으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때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씩 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령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 성령을 일컬어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십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역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고 하여서 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성령이며 곧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미 여러 차례 설명드린 대로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사가 나타나는 장면이라기 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요엘서에 예언된 '여호와의 날'의 성취였습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할 때 보인 두 가지 상징 곧 급한 바람과 불 역시 심판의 상징입니다. 며칠 째 계속 설명드린 대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심판을 면할 것이요,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하는 자는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설명하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행 2:38-40).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이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이 어떻게 이 예언의 성취입니까? 우리가 본문을 통해 여러차례 살핀대로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적이 나타나자 이 세대는 둘로 갈리었습니다. 한 쪽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저런 일을 한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미 답하신대로 희년 곧 은혜의 해가 선포되고 갖힌 자가 놓임을 받는 이 해방의 선포가 곧 심판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오순절 전이라 이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지는 않지만(요 7:39), 이들 가운데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은(마 11:27) 믿음으로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약 백성으로서 천국에 침노해 들어가는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도 그것을 경계하여 들어내시기를 꺼려하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참으로 믿음 있는 자만 나아오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소문과 풍문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온 자들 말고 마음의 가난함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나아오는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해와 비를 주시는 아버지처럼 동일하게 어떤 자라하더라도 그 병을 고쳐주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조용한 치유의 사역은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이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심판의 사역을 자신에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갈라디아서 3:13-14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심은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여 얻으시고자 하심입니다. 그것이 20절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초대 교부였던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카슨의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롬이 본문의 의미를 더 정확히 읽어 내고 있다고 봅니다.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롬이 교부인만큼 아마도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전승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긍휼히 여기서 불쌍히 여겨 치유하시고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심으로 이 심판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표적이 나타남에도 믿지 아니함으로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믿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침노하여 들어간 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요 7:39)하였지만, 즉,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긴 했지만 이미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속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감으로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의 심판의 사역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곧 십자가의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어제 본문의 말미인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는' 장면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이 본문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유대인들이 돌아오게 되겠지만 유대인들이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고 유대인들이 시기나기까지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기 전부터 가지셨던 구원의 경륜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본문을 보게 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섬'이 아마도 이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이 된 것 같습니다. '교훈'의 원어는 '율법'이란 뜻입니다. 이를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을 따라 '이름'으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즉, '섬들이 교훈을 기다린다'를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요. 율법의 완성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했지만 이 완성된 율법은 곧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심판의 터 위에 서 있단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하면' 우리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심'을 결여한 이 세대, 교회에는 불신자들이 넘쳐나고 강단에는 거짓 선지자와 이리들이 득실거립니다. 기독교 서점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서점에서 출간되는 책이라고 다 믿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회개' 단순히 뉘우치거나 눈물 몇 방울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어도 천국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흑암의 나라에서 그 아들의 나라로 우리의 국적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내적 돌이킴이 없다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조용히 심판을 행하셨습니까? 그는 이방인을 향한 경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시 이 백성에게 기회를 주시는 자비입니다. 동시에 그 자비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저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을 나의 욕심의 기회로 삼는 자가 참으로 구원을 아는 자이겠습니까? 불신자 중에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믿으면 다 용서해줘요? 그럼 죽기 전에 믿을께요!' 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저 용서 받는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자신의 태도를 돌이키고자 하는 회개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뉘우쳤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죄의 욕심에 미혹되고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그래서 진정코 단 한번도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그는 아직까지 이 복음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심판은 완전합니다. 그의 긍휼과 자비를 기초로 해서 심판하여 이기기까지 하시니 그렇습니다. 나는 참으로 이 비밀스런 복음의 수혜자입니까? 나는 중생했습니까? 회개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입니까? 나는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까? 나에게는 자기 부인이 있으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복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있습니까?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입니까? 나는 날마다 주님과의 만남의 향기가 나는 사람입니까? 모세처럼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않을 사람입니까? 이 말씀이 모세의 육신의 눈을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우리 영혼의 안목과 영적 사고 방식이 흐리지 않는 자입니까? 아니면 욕심에 눈이 멀어 시작은 하나님의 용사로 말년은 접신하는 자로 전락한 사울같은 생입니까? 내 신앙과 삶을 주를 향해 일관되고 한결같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진정!!!!!
그리고 마태는 이 장면이 곧 이사야 42:1-4의<여호와의 종의 노래>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구약 인용 중에서 가장 긴 인용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길게 인용했다는 것은 것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인용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부께서 그 마음에 기뻐하고 사랑하는 종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것으로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방식이 기이합니다. 심판을 행하면 떠들썩하지는 않더라도 위엄과 백성을 장악하는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예상하기 쉽지지만 이 심판은 다투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으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때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씩 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령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 성령을 일컬어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십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역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고 하여서 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성령이며 곧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미 여러 차례 설명드린 대로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사가 나타나는 장면이라기 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요엘서에 예언된 '여호와의 날'의 성취였습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할 때 보인 두 가지 상징 곧 급한 바람과 불 역시 심판의 상징입니다. 며칠 째 계속 설명드린 대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심판을 면할 것이요,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하는 자는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설명하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행 2:38-40).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이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이 어떻게 이 예언의 성취입니까? 우리가 본문을 통해 여러차례 살핀대로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적이 나타나자 이 세대는 둘로 갈리었습니다. 한 쪽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저런 일을 한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미 답하신대로 희년 곧 은혜의 해가 선포되고 갖힌 자가 놓임을 받는 이 해방의 선포가 곧 심판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오순절 전이라 이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지는 않지만(요 7:39), 이들 가운데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은(마 11:27) 믿음으로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약 백성으로서 천국에 침노해 들어가는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도 그것을 경계하여 들어내시기를 꺼려하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참으로 믿음 있는 자만 나아오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소문과 풍문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온 자들 말고 마음의 가난함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나아오는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해와 비를 주시는 아버지처럼 동일하게 어떤 자라하더라도 그 병을 고쳐주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조용한 치유의 사역은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이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심판의 사역을 자신에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갈라디아서 3:13-14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심은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여 얻으시고자 하심입니다. 그것이 20절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초대 교부였던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카슨의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롬이 본문의 의미를 더 정확히 읽어 내고 있다고 봅니다.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롬이 교부인만큼 아마도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전승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긍휼히 여기서 불쌍히 여겨 치유하시고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심으로 이 심판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표적이 나타남에도 믿지 아니함으로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믿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침노하여 들어간 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요 7:39)하였지만, 즉,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긴 했지만 이미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속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감으로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의 심판의 사역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곧 십자가의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어제 본문의 말미인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는' 장면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이 본문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유대인들이 돌아오게 되겠지만 유대인들이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고 유대인들이 시기나기까지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기 전부터 가지셨던 구원의 경륜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본문을 보게 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섬'이 아마도 이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이 된 것 같습니다. '교훈'의 원어는 '율법'이란 뜻입니다. 이를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을 따라 '이름'으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즉, '섬들이 교훈을 기다린다'를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요. 율법의 완성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했지만 이 완성된 율법은 곧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심판의 터 위에 서 있단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하면' 우리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심'을 결여한 이 세대, 교회에는 불신자들이 넘쳐나고 강단에는 거짓 선지자와 이리들이 득실거립니다. 기독교 서점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서점에서 출간되는 책이라고 다 믿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회개' 단순히 뉘우치거나 눈물 몇 방울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어도 천국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흑암의 나라에서 그 아들의 나라로 우리의 국적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내적 돌이킴이 없다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조용히 심판을 행하셨습니까? 그는 이방인을 향한 경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시 이 백성에게 기회를 주시는 자비입니다. 동시에 그 자비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저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을 나의 욕심의 기회로 삼는 자가 참으로 구원을 아는 자이겠습니까? 불신자 중에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믿으면 다 용서해줘요? 그럼 죽기 전에 믿을께요!' 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저 용서 받는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자신의 태도를 돌이키고자 하는 회개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뉘우쳤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죄의 욕심에 미혹되고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그래서 진정코 단 한번도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그는 아직까지 이 복음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심판은 완전합니다. 그의 긍휼과 자비를 기초로 해서 심판하여 이기기까지 하시니 그렇습니다. 나는 참으로 이 비밀스런 복음의 수혜자입니까? 나는 중생했습니까? 회개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입니까? 나는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까? 나에게는 자기 부인이 있으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복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있습니까?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입니까? 나는 날마다 주님과의 만남의 향기가 나는 사람입니까? 모세처럼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않을 사람입니까? 이 말씀이 모세의 육신의 눈을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우리 영혼의 안목과 영적 사고 방식이 흐리지 않는 자입니까? 아니면 욕심에 눈이 멀어 시작은 하나님의 용사로 말년은 접신하는 자로 전락한 사울같은 생입니까? 내 신앙과 삶을 주를 향해 일관되고 한결같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진정!!!!!
2010.01.3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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