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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 11:11-19)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 11:11-19) 

노승수 목사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11-15)
오늘 본문은 어제도 잠시 설명을 드렸듯이 대표적인 구속사적 본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여전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서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치 모자이크의 결정적 퍼즐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구약 계시의 점진적 발전의 정점에 바로 세례요한이 있었습니다. 인물로 보고 기적으로 치자면 엘리야나 모세를 따라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삶의 성결로 치자면 에스겔이 언급했던 노아와 다니엘, 욥을 따라올 사람이 있겠습니까(겔 14:14).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란 이들 중에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가까운 계시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신앙의 실력이 어디 구약의 인물만합니까? 그렇지 못하지요?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신앙의 위인보다 큰 인물이겠습니까? 그렇지 못하지요. 이것은 구속 계시의 양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최종계시에 구약인물로서는 가장 근접하여서 이 계시를 목격하여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어제 살핀 대로 세례요한이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판을 행하시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이사야 61장의 희년 곧 해방의 해를 선포하시기만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구약의 선지자이니 이 예언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과 회복과 치유 그리고 해방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로 인해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간극은 십자가상에서만 메워집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에게 가리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누구보다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도 저보다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12절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들이 많지요. 12절의 자구를 가지고 해석을 하려면 늪에 빠지게 됩니다. 자구 속에서는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신학자들이 이런 저런 해석을 쏟아내지만 그것도 사실 정확한 의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분명치 않은 본문은 성경으로 해석하되 첫째, 문맥을 따라 해석하고, 둘째, 이를 증거하는 다른 본문을 통해서 해석을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12절의 부연설명이 13-14절이라는 점을 유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다 생략이 되어 있는데요. KJV, NASB의 경우, 13절의 머리에 이유를 나타내는 'For'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유를 나타내는 '가르'가 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2절의 이유가 13-14절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13절을 보시면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구약 예언의 최종점이 요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3장 21-22절을 보시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에게 증거를 받은 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게 무엇이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다시 정리를 합시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는 말은 요한 이후에 오신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요한까지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것이지요. 구약의 모든 예언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증거를 받은 의라는 것이지요. 어제도 설명 드렸다시피 이런 점에서 요한은 신약에 등장하지만 구약의 인물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신약과 구약이 책으로 구분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옛언약 즉,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언약과 새언약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언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언약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13절인데요. 13절도 등위접속사 '카이'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12절의 내용과 13절의 내용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3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다면, 그가 바로 엘리야라는 것이지요. 가정법을 사용했는데요. 이는 믿음 안에서의 시각과 믿음 밖에서의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엘리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구약 말라기에 의하면, 엘리야가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자로 다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의 날은 바로 저주로 그 땅을 치는 날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말에는 그냥 저주라 되어 있지만 이 저주는 '진멸'이란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난 정복 전쟁을 할 때, '진멸' 곧 헤렘의 전쟁을 펼친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군대가 이 백성들 진멸하러 오는 그날이 바로 그리스도의 도래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전에 뭘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돌이켜 회개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3장의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똑같지요. 세례요한은 바로 이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가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제자를 보내어 주님께 물었지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왜 물었을까요?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은 심판을 위해서 오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라기의 말씀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경우에 한해서 심판을 면하게 된다는 자비의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제사장들이 회개하거나 돌이키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백성들도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요한의 이 의문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근데 예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즐겨 받는다면 바로 이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당신이 스스로 심판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앞서 요한이 제자를 보내어 의문을 표시할 때는 이사야 61장의 해방과 치유의 희년의 말씀으로 답변을 주시더니 요한의 제자가 떠나자 곧바로 요한의 의문의 실체였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경우에 한해서 너희에게 엘리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심판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에 한해서 보이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은 바로 이것 때문에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곧바로 올 것 같은 심판이 감춰진 채로 비밀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해방과 치유의 희년은 만백성에게 공표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심판과 진멸의 진노는 오순절에 이르기까지도 비밀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내주'는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도 물론 삼손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는 것이라든지, 다윗이나 심지어 사울까지도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는 일이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승리가 있고서야 비로소 한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이 성령은 떠나시지 않으시는 분으로 우리 안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적 오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승리처럼 역사적이며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은 오늘날도 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 내주하시는 사역을 계속하시지만 오순절이 지금도 반복된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순절은 성경 내에서 심판과 진노의 선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앞서 설명 드린 여호와의 날이 비로소 오순절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와 당시 사람들의 대부분은 왜 그렇게 느끼지 못할까요? 그것은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는 말씀대로 입니다. 믿지 아니함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당시 믿는 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이지 않았습니까? 이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37-40)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제가 이미 설명 드린 대로 오순절은 교회의 설립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는 마치 노아시대의 방주와 같아서 패역한 세대로부터 믿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으로부터 건져내는 방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오면 오늘 본문 12절의 내용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정복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복자가 그 안에 정복하러 들어가는 장면을 연상시키지요. 그럼 천국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라면 당연 땅을 정복하듯이 정복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천국은 아마도 우리 사후에나 진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천국은 무엇이며 어떻게 정복한다는 것이지요. 신약의 통상적인 천국개념은 하나님의 통치권 곧 지배권이 미치는 곳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강화에서 설명을 드리겠지만 적어도 이 본문에서는 그런 의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13장의<천국강화>를 설명드리면서 보다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설명 드린 13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한 것이 바로 요한까지 곧 그리스도 앞까지입니다. 그렇지요. 그럼 침노한다는 의미는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옛언약으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새언약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 심판이 비밀의 형태이고 믿음으로만 심판을 면한다고 했으니 이 그리스도의 언약의 복음 안으로의 진격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도 세례요한도 천국이 가까왔음으로 회개를 전파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오순절에 베드로가 마음에 찔려하는 형제를 권면했던 것처럼 돌이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고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교회라는 구원의 방주에 타게 되는 것이 바로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침노해 들어가는 Key는 바로 회개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믿음을 신약이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몇 차례 언급을 했지만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을 내 마음에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성경이 정의하는 믿음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6:4-7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를 흔히 '연합의 교리'라고 합니다. 칼빈이 가장 강조하였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실재로 신자 안에서 이 연합이 없다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회개란 바로 이 연합이 일어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에 대해 죽은 자라야 죄에 대해 종노릇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면서 본인을 신자라고 착각하는 불신자가 오늘날 교회 가운데 많다는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차례 강조하여 설명한 바대로 내가 참으로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여 믿음을 확증하셔야 합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을 흔드십시오. 내가 참되게 믿음 안에 거하는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그것이 지금 안심하고 나중에 슬피 울며 내어 쫓기는 것보다 더 낫지 아니합니까? 바울의 말씀대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고후 13;5)하십시오. 나는 참되게 믿음 안에 있습니까? 


2. 지혜 없는 패역한 세대(16-19)
앞부분이 이해가 되셨다면 이 뒷부분은 이해는 훨씬 용이합니다. 이 세대는 베드로가 말씀하신 바로 '패역한 세대'입니다. 이 패역한 세대 때문에 바로 세례요한이 의문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이 세대에 그리스도가 진노로 진멸하시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가 없고 도리어 해방과 치유의 희년이 선포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대에 대한 이 비유는 그 패역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핵심 요지는 이것입니다. 18절에 내용을 풀자면 이것입니다. 요한이 와서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면서 광야에 거하면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이 세대가 말하기를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으시는가? 물으신 장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금식은 바로 회개의 금식이었을 것입니다. 이 금식을 보면서 귀신들렸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이를 고쳐주실 때 바리새인들이 비아냥거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귓등으로 들은 것이지요. 
또 반대로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치유와 회복의 잔치였습니다. 심판을 선포해도, 회복을 선포해도 비아냥대기만 하는 이 세대야 말로 패역한 세대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아이들이 '혼인잔치 놀이'든 '장례식 놀이'든 함께 하며 놀자고 해도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게 되는 데 이들은 아무 것도 행하지도 어느 편에 서지도 않으면서 비난만 일삼고 있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학생 때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90년 CCC가 마닐라에서 대규모 선교대회를 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당시 CCC총순장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대학에 국제관계학을 전공하시는 크리스천 교수님을 순장들이 찾아가 후원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세계 선교 2 위국이지만 당시는 선교사 숫자가 300명 정도를 헤아리던 선교를 거의 않던 시절입니다. 지금 보니 그 교수님이 아주 진보적인 기독교 인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그렇게 유명하신 분이신 줄 잘 몰랐습니다. 거의 순장들을 혼 구멍을 내셨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일을 교수님이 모 신문에 칼럼으로 게제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이 말씀을 적어서 교수님께 편지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다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라도 합니다. 문제는 지혜는 그 행함으로 옳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이지요.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격입니다. 문제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심판을 강조하면 너무 심판을 강조한다. 탈, 회복을 강조하면 심판을 빼먹었다 탈, 이리저리 비난만 해댄다면 언제 복음을 전하고 언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순종할 것입니다. 
잠언 말씀에 '소가 없으면 구유가 깨끗하지만 소가 있음으로 얻는 유익이 많다'고 했습니다. 구유는 본래 존재의 목적이 소를 여물 먹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가 여물을 얌전히 먹지 않지요 시골에 가서 보십시오. 소들은 여물을 주면 이리저리 흩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인이 이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귀찮은 일을 덜고 여물통을 깨끗이 하려면 저 소를 없애야겠다. 여러분 이것이 지혜로운 행동이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그 때 그 교수님이 어리석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로 한국교회는 선교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여러 우려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있습니다.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선교를 해서 선교의 문을 막는 경우도 있지요. 그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이 비판으로 그쳐서는 곤란합니다. 그 비판은 바로 그 다음의 대안적 행동을 가져올 때 지혜로운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세대는 어떻게 합니까? 구약 계시의 정점에 서 있는 요한이 심판을 선포하자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해방과 치유의 잔치를 베푸시자 먹기를 탐하는 죄인들의 친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패역한 마음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행함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지요. 나는 지혜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이 패역한 바리새인들처럼 약점과 꼬투리 잡기만 급급하고 본인은 아무 일도 행치 않는 패역한 세대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