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마 12:1-14)
노승수 목사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 안식일 논쟁(1-8)
마태복음의 큰 주제 가운데 한 가지는 '율법과 성전'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안식일 논쟁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율법과 성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행전 7장에 가시면 스데반이 바로 이 율법과 성전을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기소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것은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 본문 마지막절이 보여주듯이 이 문제가 결국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깊은 갈등의 원인이라는 점과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길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시사하여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문제로 시비가 생기게 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안식일 준수의 문제는 단순히 안식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전체와 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제도 제가 잠깐 지나가면서 설명을 드렸다시피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행하는 것을 자기 의의 준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정신을 오해한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을 생각해보시면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40일을 견디지 못하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집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이 언약의 돌판을 던지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이 깨어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이들이 지키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조리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것을 주시다니요? 제가 이미 여러 차례 설명드린 대로 율법을 주신 것을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깨달은 이 백성이 어디로 나아옵니까? 성전이지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 드리는 송아지의 피가 이들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히 10:4). 그럼 왜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립니까? 그것은 이 제사는 상징이요 그림자이며, 그 계시의 본질이 바로 그리스도가 흘리실 십자가의 피이기 때문입니다(히 9:12). 그러므로 율법의 본질은 성전에 나오도록 함에 있고, 성전의 본질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있어야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어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술술 잘 읽히지요. 이해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구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본문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본문 1절에 '그 때에'라는 시간부사절은 마태복음에서는 거의 접속사처럼 사용됩니다.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11장 마지막이 심판과 구속이라는 계시의 본질적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오늘 본문이 모종의 신학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아무튼 문제의 요지는 제자들이 몹시도 시장한데서 출발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역에 아주 바쁘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끼니도 제대 먹지 못할만큼 영혼의 구령을 위해서 힘쓰셨습니다. 하필 날이 안식일이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병행 본문은 누가복음 6:1은 더 실감나게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일종의 추수 및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용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던 것이지요.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기를 희망했던 바리새인들은 응당 이것이 시비꺼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고합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사실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근데 이 문제를 풀어가시는 예수님의 답변은 사실 좀 기이합니다. 3--5절까지 구약에서 두 가지 사건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셨습니다. 근데 지금 바리새인들의 시비의 내용 곧 그들이 고소한 내용은 우리가 이미 살핀 대로 안식일을 어기었다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놉에 있던 성막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성전에 진설되었던 거룩한 떡을 먹은 사건(삼상 21:1-6)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이 안식일에도 성전에서 봉사의 직무를 할 때는 예외가 적용된다는 규정들, 예컨대, 진설병을 바꾸어 진설하는 일(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민 28:8-9) 등의 일을 해도 안식일 규례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논거로 들고 계십니다. 이 두 가지 구약의 사례가 지금 이 고소와 시비에 적절한 논변입니까? 안식일에 관한 문제에 예수님은 안식일로 문제의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두 번째 사안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안식을 범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안식일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첫 번째 다윗이 피난 중에 행한 일은 전혀 안식일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모두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문제 삼아 예수님께 이야기가 하는데 예수님은 성전을 들어서 답변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6-7절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이 바로 성전에 관계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번째 논거 역시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전 안에 진설하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곧 안식일에 진설하고 그 묵은 것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에 보면 이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레 24:5-9). 그런데 예수님의 논변을 보면 이 문제를 전혀 신경쓰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드린 대로 예수님이 이 사례를 인용하시는 목적은 그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용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이 이 사례를 드시는 근본적 취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 사례의 근본적 취지는 바로 성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서 혹 율법을 어긴 것이더라도 혹 제사장이 안식을 어긴 것이더라도 그것이 성전 안임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컨대, 성전은 신성한 보호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혹 허물이 있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규정이 나오는데요. 성전 입구에 번제단의 네 귀퉁이의 뿔에는 늘 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바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뿔을 잡으면 허물이 있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시대에 아도니야와 요압이 제단에 뿔을 잡고 허물을 면함 받은 전례가 있습니다(왕상 1:50-51, 2:28-29). 실제로 다윗이 성전에서 진설병을 먹은 사건에 대해서 성경은 그것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식물임에도 그에 대해 잘잘못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에 대한 논변이 아니라 성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서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이 생깁니다. 성전으로 논박하시는게 제대로 논박이 되는가? 하는 점이지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지금 성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밀밭 사이를 지나서 회당으로 가시던 길목에 계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단순히 성전이라는 논변을 가지고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이 아니라 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로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자신을 구약의 성전이 상징하여 보여준 '참 성전'이라고 이야기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십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의 육체가 바로 참 성전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이들의 이 적은 허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심각한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 14절의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는' 것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사법권이 유대인들에게 있지 않고 로마에 있었습니다. 당시 안식을 규례를 어기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었겠습니까? 이미 유대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안식일 규례로 사람을 죽이려드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마다 죽일려고 바리새인들이 의논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려고 의논한 것은 단순히 안식일 조항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의 모두에 스데반이 바로 이 율법과 성전의 문제로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을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참 성전'이며 참 율법의 주인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겐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야 14절이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니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절은 호세아서 6:6절을 인용한 것인데요. 율법의 정신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 같습니다. 호세아 당시 하나님을 말씀을 어기면서, 우상숭배를 일삼으면서 동시에 제사하는 일을 어떻게 더 멋지게 할까? 궁리를 일삼던 사람들을 가리켜 이야기 하는 구절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참 유사합니다. 성경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배를 더 멋지게 드릴까? 궁리를 하는 무리들이 많지요. 그래서 예배에 온갖 것들이 도입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도 성경의 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불이 나와 이들을 삼킨 사건을 기억하십니까(레 10:1-2)? 이것은 단지 규례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말하는 기본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제사를 하고 피를 흘리는 길로 달려가는 세대를 향해 호세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전에 피를 드리는 일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참되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성전에 나오라고 합니까?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기본적으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용도가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를 구하며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님의 마음을 닮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정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죄를 깨닫도록 하며, 죄를 깨달은 자가 성전에 나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용서를 구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모른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 4 계명인 안식계명은 아주 독특한 위치를 점합니다. 십계명을 전체적으로 보시면 도덕적 계명들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기본적 윤리들에 대해서 5-10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윤리라고 하니 조금 거부감을 가지실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되지만 윤리란 언약의 다른 말입니다. 사회란 기본적으로 약속을 통해서 유지가 되지요. 교통 신호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사고가 나는 것처럼 윤리란 이런 상호간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해주는 기본적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4 계명은 이런 윤리적 차원 외에 의식법적 차원이 있습니다. 도덕적 언명 외에 안식일 자체가 성전의 여러 제사 의식과 같은 규례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런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 까지 규제하면서 안식의 기본적 뜻을 왜곡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신약 성경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라고 말합니다. 즉 이와 같은 의식법적 요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로서 안식일 계명은 유효합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기회를 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이 안식일이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래서 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인자'라는 표현을 쓰신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인자는 구속과 심판과 관계된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안식 자체에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안식은 이처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수단입니다. 동시에 안식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오락을 금하고 돈을 쓰는 일도 금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을 묵상하며, 그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 영혼의 생명의 양식으로 여겨 묵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식의 참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일 성수의 개념이 너무 흐려져 있습니다. 주일이 성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돈을 쓰는 일과 관계해서는 그게 바리새인들이 밀이삭 잘라 먹는 일가지고 뭐라 그러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선행을 위해서 돈을 쓰는 일 자체를 금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락을 위해서 돈을 쓰는 일을 금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 계명 자체가 나 자신만의 안식을 말하지 않고 문 안에 거하는 객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라고 하더라도 안식하라고 합니다. 돈을 쓰는 행위란 경제활동을 의미하고 그것은 누군가의 경제적 봉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돈을 씀으로 누군가 주일에 노동을 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내가 안 사먹고 안 쓴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육적인 사고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기본부터 다시 배우셔야 합니다. 우리가 뭐가 달라져서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까? 세상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 짝을 할 수 없는 사이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어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술술 잘 읽히지요. 이해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구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본문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본문 1절에 '그 때에'라는 시간부사절은 마태복음에서는 거의 접속사처럼 사용됩니다.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11장 마지막이 심판과 구속이라는 계시의 본질적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오늘 본문이 모종의 신학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아무튼 문제의 요지는 제자들이 몹시도 시장한데서 출발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역에 아주 바쁘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끼니도 제대 먹지 못할만큼 영혼의 구령을 위해서 힘쓰셨습니다. 하필 날이 안식일이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병행 본문은 누가복음 6:1은 더 실감나게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일종의 추수 및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용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던 것이지요.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기를 희망했던 바리새인들은 응당 이것이 시비꺼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고합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사실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근데 이 문제를 풀어가시는 예수님의 답변은 사실 좀 기이합니다. 3--5절까지 구약에서 두 가지 사건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셨습니다. 근데 지금 바리새인들의 시비의 내용 곧 그들이 고소한 내용은 우리가 이미 살핀 대로 안식일을 어기었다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놉에 있던 성막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성전에 진설되었던 거룩한 떡을 먹은 사건(삼상 21:1-6)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이 안식일에도 성전에서 봉사의 직무를 할 때는 예외가 적용된다는 규정들, 예컨대, 진설병을 바꾸어 진설하는 일(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민 28:8-9) 등의 일을 해도 안식일 규례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논거로 들고 계십니다. 이 두 가지 구약의 사례가 지금 이 고소와 시비에 적절한 논변입니까? 안식일에 관한 문제에 예수님은 안식일로 문제의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두 번째 사안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안식을 범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안식일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첫 번째 다윗이 피난 중에 행한 일은 전혀 안식일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모두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문제 삼아 예수님께 이야기가 하는데 예수님은 성전을 들어서 답변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6-7절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이 바로 성전에 관계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번째 논거 역시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전 안에 진설하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곧 안식일에 진설하고 그 묵은 것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에 보면 이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레 24:5-9). 그런데 예수님의 논변을 보면 이 문제를 전혀 신경쓰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드린 대로 예수님이 이 사례를 인용하시는 목적은 그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용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이 이 사례를 드시는 근본적 취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 사례의 근본적 취지는 바로 성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서 혹 율법을 어긴 것이더라도 혹 제사장이 안식을 어긴 것이더라도 그것이 성전 안임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컨대, 성전은 신성한 보호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혹 허물이 있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규정이 나오는데요. 성전 입구에 번제단의 네 귀퉁이의 뿔에는 늘 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바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뿔을 잡으면 허물이 있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시대에 아도니야와 요압이 제단에 뿔을 잡고 허물을 면함 받은 전례가 있습니다(왕상 1:50-51, 2:28-29). 실제로 다윗이 성전에서 진설병을 먹은 사건에 대해서 성경은 그것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식물임에도 그에 대해 잘잘못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에 대한 논변이 아니라 성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서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이 생깁니다. 성전으로 논박하시는게 제대로 논박이 되는가? 하는 점이지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지금 성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밀밭 사이를 지나서 회당으로 가시던 길목에 계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단순히 성전이라는 논변을 가지고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이 아니라 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로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자신을 구약의 성전이 상징하여 보여준 '참 성전'이라고 이야기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십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의 육체가 바로 참 성전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이들의 이 적은 허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심각한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 14절의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는' 것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사법권이 유대인들에게 있지 않고 로마에 있었습니다. 당시 안식을 규례를 어기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었겠습니까? 이미 유대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안식일 규례로 사람을 죽이려드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마다 죽일려고 바리새인들이 의논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려고 의논한 것은 단순히 안식일 조항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의 모두에 스데반이 바로 이 율법과 성전의 문제로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을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참 성전'이며 참 율법의 주인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겐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야 14절이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니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절은 호세아서 6:6절을 인용한 것인데요. 율법의 정신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 같습니다. 호세아 당시 하나님을 말씀을 어기면서, 우상숭배를 일삼으면서 동시에 제사하는 일을 어떻게 더 멋지게 할까? 궁리를 일삼던 사람들을 가리켜 이야기 하는 구절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참 유사합니다. 성경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배를 더 멋지게 드릴까? 궁리를 하는 무리들이 많지요. 그래서 예배에 온갖 것들이 도입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도 성경의 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불이 나와 이들을 삼킨 사건을 기억하십니까(레 10:1-2)? 이것은 단지 규례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말하는 기본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제사를 하고 피를 흘리는 길로 달려가는 세대를 향해 호세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전에 피를 드리는 일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참되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성전에 나오라고 합니까?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기본적으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용도가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를 구하며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님의 마음을 닮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정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죄를 깨닫도록 하며, 죄를 깨달은 자가 성전에 나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용서를 구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모른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 4 계명인 안식계명은 아주 독특한 위치를 점합니다. 십계명을 전체적으로 보시면 도덕적 계명들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기본적 윤리들에 대해서 5-10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윤리라고 하니 조금 거부감을 가지실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되지만 윤리란 언약의 다른 말입니다. 사회란 기본적으로 약속을 통해서 유지가 되지요. 교통 신호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사고가 나는 것처럼 윤리란 이런 상호간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해주는 기본적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4 계명은 이런 윤리적 차원 외에 의식법적 차원이 있습니다. 도덕적 언명 외에 안식일 자체가 성전의 여러 제사 의식과 같은 규례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런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 까지 규제하면서 안식의 기본적 뜻을 왜곡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신약 성경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라고 말합니다. 즉 이와 같은 의식법적 요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로서 안식일 계명은 유효합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기회를 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이 안식일이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래서 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인자'라는 표현을 쓰신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인자는 구속과 심판과 관계된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안식 자체에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안식은 이처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수단입니다. 동시에 안식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오락을 금하고 돈을 쓰는 일도 금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을 묵상하며, 그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 영혼의 생명의 양식으로 여겨 묵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식의 참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일 성수의 개념이 너무 흐려져 있습니다. 주일이 성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돈을 쓰는 일과 관계해서는 그게 바리새인들이 밀이삭 잘라 먹는 일가지고 뭐라 그러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선행을 위해서 돈을 쓰는 일 자체를 금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락을 위해서 돈을 쓰는 일을 금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 계명 자체가 나 자신만의 안식을 말하지 않고 문 안에 거하는 객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라고 하더라도 안식하라고 합니다. 돈을 쓰는 행위란 경제활동을 의미하고 그것은 누군가의 경제적 봉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돈을 씀으로 누군가 주일에 노동을 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내가 안 사먹고 안 쓴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육적인 사고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기본부터 다시 배우셔야 합니다. 우리가 뭐가 달라져서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까? 세상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 짝을 할 수 없는 사이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9-14)
이 본문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병을 고치시려면 안식일을 택하시지 않고 그냥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행하심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백성으로 깨닫도록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앞에서 잠간 언급한 것처럼 안식은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 5장에서 안식일에 주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가라는 명을 듣고 가다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는 시비를 하게 되고 논쟁이 붙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논쟁 끝에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십니다. 무슨 일일까요? 아버지는 도대체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실까요? 창조 때는 분명 제 7 일에 쉬셨다고 하셨건만 도대체 어떤 일을 계속되고 있습니까? 5장을 계속하여 보시면, 좀 긴 본문이지만 이해를 위해서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19-29)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여태껏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하시는 일이 중생과 부활에 관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안식은 오로지 쉬고 일 안하고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 그 자체가 구속사적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여기서 안식일에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 봉사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양 한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안식일이라도 이런 일들은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에 이 손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을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이사야 61장의 희년 곧 해방의 해, 구원의 해를 선포하는 일로 이해하셨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 알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 사람을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일은 바로 이 중생과 부활의 심판과 관련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선행이 마르다의 분주한 섬김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눅 10:38-42). 오히려 주님의 발아래서 은혜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선행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 하셨으니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을 듣도록 하는 이 영적 선행들이 주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행이란 결국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 곧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묵상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안식은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일성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구원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복음 가운데 안식하며 복음 가운데 참된 영적 선행을 하고 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19-29)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여태껏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하시는 일이 중생과 부활에 관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안식은 오로지 쉬고 일 안하고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 그 자체가 구속사적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여기서 안식일에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 봉사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양 한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안식일이라도 이런 일들은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에 이 손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을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이사야 61장의 희년 곧 해방의 해, 구원의 해를 선포하는 일로 이해하셨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 알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 사람을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일은 바로 이 중생과 부활의 심판과 관련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선행이 마르다의 분주한 섬김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눅 10:38-42). 오히려 주님의 발아래서 은혜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선행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 하셨으니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을 듣도록 하는 이 영적 선행들이 주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행이란 결국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 곧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묵상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안식은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일성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구원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복음 가운데 안식하며 복음 가운데 참된 영적 선행을 하고 있습니까?
2010.01.2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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